111. 알리함 궁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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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알리함 궁전의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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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 알리함 궁전의 전설
2022.04.24.
훗날 전쟁으로 인해 아바스 왕가가 사라지고 알리함 궁이 무너지는 일이 없었다면 신의 사자에 관해 제대로 된 기록이 남아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바스 왕가의 모든 것은 잿더미가 되어 버렸다.
남은 것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다였다.
“물을 아래에서 위로 끌어오는 기술이 당시 존재했다면, 산 하나를 넘어 이만큼이나 되는 거리를 끌어오는 것도 가능했으리라 봅니다. 위에서 아래로 끌어오는 것이니 더 많은 양이 가능했을 겁니다. 고작 궁전 하나가 아니라 왕국 전체를 건사할 정도로.”
아직도 많은 사람이 신의 권능이라 믿는 인간의 힘에 의해서 나우크 왕국이 탄생했다.
“그럼…… 그렇다면 그 물이 왜 모두 말라 버렸단 말입니까!”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던지 웨로즈가 입을 열었다.
곧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늦었다. 주체할 수 없이 심장이 떨리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가이너스 왕실이 사라지면서 장치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이 사라졌으니까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페르모스가 빈정거렸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던 겁니다. 그 엄청난 장치를 그저 신의 권능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던 머저리들이.”
“그…….”
웨로즈가 혀를 씹었다.
그 역시 가이너스 왕실에 저주가 내렸다고 믿었으니 할 말이 없었다.
“결국 이 가뭄은 나우크에게 내려진 형벌이 맞았네요. 가이너스 왕실을 없애고자 했던 모두가 치러야 할 대가였어요.”
아무도 리에네가 한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영영 장치를 움직이지 못하게 되더라도 달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입 안 가득 쓴맛을 남기는 그 말에 블랙은 리에네를 끌어안았다.
“하지만 그런 결과를 바라지는 않을 거잖습니까.”
“맞아요. 그런데…… 내가 물을 바라도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건 너무 염치없는 짓 같아서…….”
“공주님은 자격이 충분합니다.”
리에네가 블랙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나우크의 가뭄은 영원히 이어졌을 것이다.
“전부 공주님 덕분입니다. 마음 아픈 소리는 할 필요 없어요.”
“…….”
리에네는 아주 깊게 숨을 내쉬고 블랙을 마주 안았다.
가이너스 왕가와 말라 버린 폭포에 대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도 모두가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렇다면 물을…… 물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전하께서는 정말로 나우크에 물을 되돌려주실 겁니까?”
마나우가 어린애처럼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물었다.
“아니. 아직은 방법을 모른다.”
펨브로윈 왕은 아들에게 비밀을 전달할 새도 없이 죽었다.
“하지만 알게 되겠지.”
반지를 찾아와야 했다.
열쇠라는 이름이 붙은 반지가 단서를 줄 것이다.
페르모스가 씩 웃었다. 블랙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것을 눈치챘다는 웃음이었다.
“샤르카 왕국에 다녀오시겠군요. 준비를 해야겠습니다.”
* * *
“안 됩니다.”
“안 돼요?”
“네, 안 됩니다. 아니, 무슨 그런 살벌한 말씀을 하십니까.”
신전에서 돌아온 뒤 남은 일은 하나였다.
샤르카 왕국으로 가서 블리니 왕자비에게 반지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페르모스의 짐작대로 블랙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반지를 돌려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그가 직접 나서는 것이었다.
성으로 돌아온 세 사람은 샤르카 왕국으로 떠날 일정을 조율했다. 함께 갈 인원도 추려야 했고, 가서 벌어질 수 있는 일에도 대비책을 세워야 했다.
그 와중에 리에네는 두 사람의 원성을 살 법한 말을 했다.
“나도 갔으면 하는데.”
“안 된다고 했습니다.”
“네, 안 됩니다.”
둘 다 단호했다.
샤르카 왕국이 어떻게 나올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왕실에 개싸움이 났는데 거기에 타국이 끼어들었다는 사실만으로 상황은 얼마든지 험악해질 수 있었다.
“그렇게 위험할까요?”
“위험을 떠나서 내가 원치 않습니다.”
“왜요?”
“위험하진 않아도 위태로울 수 있으니까.”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있던 리에네가 몸을 일으켜 블랙이 서 있는 책상에 걸터앉았다.
“샤르카의 왕비를 만나러 간다고 했잖아요. 내가 왕비라면 티와칸의 방문을 이상하게 여길 거예요. 샤르카 왕국에 귀가 있는 이상 티와칸과 알리토 공국의 관계 정도는 알고 있겠죠. 블리니 왕자비의 편을 들기 위해 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걸요?”
“…….”
틀린 얘기가 아니라 블랙과 페르모스가 잠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나는 다르죠. 나는 이웃 왕국의 통치권자고, 여자니까. 신혼여행을 왔다고 해도 된다고요. 간 김에 왕비를 만나겠다고 해도 의심할 게 없어요. 그런 방문은 거절할 수 없으니까.”
블랙이 페르모스를 힐긋 쳐다보았고, 페르모스가 억지로 입을 열었다.
“음……. 공주님께서 가신다면 모양새가 더 나으리라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런데 블리니 왕자비 측에서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습니까. 변수가 너무 많습니다, 공주님.”
“정보통이 있잖아요. 미리 알아보고 가는 것도 안 될까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한계가…….”
마침 그때 소식이 도착했다.
탕탕.
“부관. 여기 계십니까? 샤르카에서 전서가 왔습니다.”
“……눈치하고는.”
페르모스가 투덜대며 문을 열었다.
티와칸이 씩 웃으며 돌돌 말린 작은 종잇조각을 내밀었다.
“기다리고 계셨던 것 아닙니까?”
“맞긴 한데 하필……. 아, 몰라. 일단 거기서 대기해.”
“네.”
페르모스가 돌아서자 리에네가 훌쩍 다가갔다.
“뭐라고 해요?”
“열어 볼 시간은 주십시오. 그리고 너무 가깝습니다, 공주님.”
페르모스가 눈치껏 먼저 거리를 벌렸다. 사실 그렇게 가까운 거리도 아니었는데, 지금 블랙은 심기가 불편할 게 뻔하니 몸을 사려야 했다.
“너무 가깝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지만 전서 내용이 궁금하니 참겠어요.”
“참 감사한 일입니다. 음, 일단 딱히 눈에 띄는 일은 없고, 왕제 둘이 제5왕제의 편을 들고 나섰답니다. 블리니 왕자비가 그간 적을 좀 만들어 둔 모양입니다. 이때다 싶었는지 왕비도 거드는 편이고요. 음, 그리고 왕이…… 아, 이런.”
“나쁜 소식이에요?”
“블리니 왕자비가 임신을 발표했습니다. 왕이 그 아이가 태어나면 제1왕자 호칭을 내리겠다고 했답니다. 발표 직후 왕비는 거처를 떠나 별궁으로 옮겼답니다. 엉망진창이로군요.”
샤르카 왕과 블리니 왕자비의 결합이 단단해졌다는 건 나쁜 소식이 맞았다.
“왕이 이렇게 나오면 왕제들도 결국은 왕 쪽으로 돌아서게 될 겁니다. 그나저나 왕이 체면도 안 차리고 이럴 줄은 몰랐군요.”
“그러니까 왕비는 더 경계심이 심해지고, 같은 편이 그리울 거예요. 내가 가는 게 맞아요.”
“으아, 공주님…….”
페르모스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왜 가고 싶은지 솔직히 말해 봐요.”
블랙이 리에네의 몸을 돌려세웠다.
그가 책상에 걸터앉자 얼추 눈높이가 비슷해졌다. 리에네는 이런 자세도 좋다고 생각하며 그를 마주 보았다.
“방금 말했잖아요.”
“그게 다가 아닐 것 같아서. 공주님이 이유도 없이 나우크를 비울 사람은 아니잖습니까.”
통치권자 두 명이 모두 타국으로 외유를 나간다는 건 드문 일이긴 했다.
리에네가 말한 이유가 타당하긴 했지만 불가피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음……. 말하자니 좀 복잡하긴 해요.”
“그래도 해 줘요.”
“좀 철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도.”
“당신이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죠?”
“일단 얘기부터 해요. 실망할 것 같으면 미리 말할 테니.”
“당신이 협상에 재능이 있다더니 정말이네요.”
리에네가 고개를 옆으로 돌려 어색하게 헛기침을 한 다음 말을 했다.
“우리는 반지를 찾으러 가는 거잖아요. 그 반지는 나우크에 물을 가져올 열쇠고.”
“우리가 가는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지만, 네.”
“하여간 그런 엄청난 일인데, 당신에게만 짐을 지우는 것 같아 내키지 않아요. 비교가 안 되는 일이겠지만, 21년 전과 달라진 게 없지 않아요? 나는 또 누군가가 가져다주는 왕관이나 받아쓰게 되는 거잖아요.”
“그건 비교가 안 되는 일이 맞습니다. 그리고 반지가 정말 열쇠인지는 아직 모르는 일입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꼭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나는 잠시 나우크를 떠나 있고 싶어요. 지금은 딱 시간이 맞아떨어지는 것 같아요.”
“나우크를 왜 떠나고 싶습니까?”
블랙이 눈썹을 구기는 것 같아 리에네가 황급히 그의 손을 끌어와 쥐었다.
“여기 있기 싫다는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쓴 왕관이 어떤 건지 떨어져서 보고 싶다는 말이에요. 나는 이 왕관을 당연히 써야 하는 건 줄 알았어요. 그런데…….”
사실은 블랙의 몫이었다.
오히려 더 당연하게 왕관을 썼어야 할 사람이 자신과는 생각이 달라 보였다.
블랙이 뛰어난 지도자라는 사실은 누구나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새삼 왕관의 무게가 느껴졌다. 이제껏 내내 무겁다고 생각했던 왕관이었는데, 실제로는 그 무게의 절반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내가 정말로 이 왕관을 쓰길 원하는지, 준비가 되긴 했는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나우크 밖에서 보고 싶어요.”
선왕이 그토록 빨리 죽지 않았다면 같은 고민을 할 시간을 충분히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열여덟 살에 왕관을 물려받은 리에네에게는 당장 급하게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났다.
왕관에 대한 고민은 사치였다. 당장 물이 부족했고, 전염병이 돌았고, 사람들은 굶주렸다. 클라인펠터는 보란 듯 발톱을 갈고 그것을 눈앞에서 흔들어댔다.
“지금이 아니면 그럴 수 있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요.”
“……맞는 말입니다.”
블랙이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웃음에 섞었다.
때를 놓친 고민마저 리에네가 이상적인 군주상이라는 반증이었다.
그 역시 왕관을 써야 했다면 같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금밖에 없다는 것도 맞았다. 반지를 찾아오면, 그때부터 나우크의 통치자는 새로운 시대를 맞아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질 테니까.
“그럼 같이 가요.”
리에네가 활짝 웃으며 발을 굴렀다.
“정말이죠? 고마워요!”
블랙이 넘어지지 말라는 의미로 리에네의 팔을 잡으며 페르모스와 용병에게 빠르게 눈짓을 했다.
어서 나가라는 뜻이었다.
용병은 왜 그래야 하는지 알지 못해 머뭇대다 페르모스에게 억지로 머리칼이 잡혀 끌려나갔다.
문이 닫힌 것을 확인한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에 팔을 두르며 몸을 잡아끌었다.
“고맙다면 인사를 해 줬으면 합니다.”
“음……. 그야 고맙긴 한데, 사실 나는 당신을 위험하지 않게 하려고 가겠다는 거잖아요. 당신도 고마워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럼 내가 인사를 할 테니 받아요.”
말을 마친 블랙이 덥석 입술을 삼켰다.
입술을 누르는 따듯한 무게감을 느끼며 리에네가 사르륵 눈을 감았다.
이 남자는 자기가 얼마나 키스를 잘하는지 알고 있을까.
알겠지. 모를 리가.
그건 좀 억울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나도 잘했으면 좋겠는데. 그래서 이 남자가 어이없는 말을 할 때마다 키스로 입을 다물게 하고 싶은데.
……뭐, 언젠간 되겠지. 이렇게 키스를 하다 보면 나도 배울 테니까.
그때까지 가능한 한 열심히 키스를 해야겠다고, 리에네가 달콤한 습기를 삼키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