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 출발
(112/145)
112.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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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출발
2022.04.27.
“우리는 또 자는 시간이 바뀌겠어요.”
왕의 집무실에서 시작된 키스는 침실로 이어졌다.
때는 아직 노을이 지기 전이었다. 잠이 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다.
“방법이 있습니다.”
블랙이 목덜미의 연한 살을 입술로 물다 잠깐 답을 했다.
“뭔데요?”
“지금부터 평소에 잠이 드는 시간까지 애정을 나누는 겁니다. 그럼 잘 시간이 바뀔 일은 없어요.”
기가 차다는 듯 리에네가 블랙의 귀를 잡아당겼다.
“무슨…… 대체 몇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자는 거예요.”
“그래야 할 것 같은데. 샤르카에 다녀오는 게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일 아닙니까.”
“그런데요?”
“그리울 겁니다. 둘만 있는 시간이.”
잠깐 떨어졌던 입술이 부지런히도 다시 붙었다.
“그래서 할 수 있을 때 많이 해두자고요?”
“공주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올 줄 몰랐습니다. 낯설고, 야한데.”
블랙이 미묘하게 눈매를 찡그리며 입술을 달싹이는 바람에 리에네도 괜히 야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뭐. 야한 짓을 하는 중이긴 하지만.
“그 말이 왜 야해요?”
“많이 하자는 말이 야하지 않을 리가.”
블랙이 피식 웃으며 리에네의 팔을 위로 들어 올렸다.
겉 드레스가 한 번에 벗겨지고, 그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졌다.
리에네는 몰랐지만 그는 이 모습을 몹시 좋아했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사이로 자신을 쳐다보며 두 볼이 발개진 채 배시시 웃고 있는 리에네를.
그가 아는 한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광경이었다.
“당신은 내 머리가 헝클어진 걸 좋아하나 봐요.”
모르는 게 아니었다. 알고 있었다.
블랙은 지금에서야 느릿하게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해 주며 물었다.
“어떻게 알았습니까?”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잖아요. 방금 전까지 바쁘게 굴었으면서.”
……내가 그랬던가.
“너무 예뻐서 넋을 잃은 모양입니다.”
“와, 어쩜 그런 말을.”
리에네가 킥킥 웃으며 블랙의 어깨를 밀었다.
그가 먼저 침대로 쓰러지고 리에네가 엉금엉금 가슴으로 올라왔다.
블랙의 몸을 침대처럼 누르며 리에네가 그의 머리를 헝클였다.
“나도 좋은지 봐야지.”
“내 머리는 짧아서 많이 헝클어지지도 않을 텐데요.”
“그러게요. 아쉽네요.”
“기르면 좋겠습니까?”
“아뇨. 당신 이마가 안 보이는 건 싫어요. 이렇게 예쁜데.”
리에네가 몸을 쭉 늘려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여기에 나만 아는 상처도 있고.”
입술이 눈썹을 훑었다.
“그리고 당신은 광대뼈가 아주 멋있단 말이에요.”
양쪽 광대뼈에 전부 키스가 내려앉았다. 간질대는 감각을 음미하고 있으려니 리에네가 콧등에 입을 맞췄다.
“코도 너무 잘생겼어.”
……이 여자는 나를 어디까지 끌고 가려는 걸까.
블랙은 숨을 죽이고 다음 키스를 기다렸다.
“아, 몰랐는데 인중도 좀 그런 것 같아요.”
코와 입술 사이에 리에네의 입술이 닿는 감촉이 아주 묘했다. 팔다리가 저릿해지는 감각에 그가 리에네의 허리를 붙들었다.
“입술은 마음에 안 듭니까?”
“설마요.”
“그럼 키스해 줘요.”
여기저기 잘도 키스하던 리에네는 그 순간 약간 수줍어진 얼굴을 했다.
“갑자기 왜 그러는데?”
“그냥, 처음 키스했을 때가 생각나서요. 그때도 당신이 침대에 누워 있었잖아요.”
화살을 맞고 누워 있던 때였다.
“내가 누워 있으면 늘 그때가 생각납니까?”
“늘은 아니고 가끔.”
리에네가 달콤하게 한숨을 흘리며 블랙의 셔츠 매듭을 풀었다.
“멀쩡하게 나았으니 하는 말인데, 당신이 그때 화살을 맞은 건 참 잘한 일이에요.”
그 말에 참지 못하고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공주님이 그런 말도 할 줄 압니까?”
그가 비슷한 말을 하면 리에네는 당장 정색을 하며 사람이 다쳤는데 잘했다는 말을 어떻게 하냐며 혼을 낼 것 같았다.
“음……. 평소라면 못 하죠. 지금은 내가 당신 셔츠를 벗기는 중이니까.”
야한 말을 잘도 해댄 리에네가 매듭이 전부 풀린 셔츠를 양옆으로 벌렸다.
블랙이 리에네를 안아 자세를 고정시키며 말했다.
“아직 내게 키스해 주지 않았습니다.”
“좀 봐줘요. 지금 하면 너무 야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조금 참았다가 할게요.”
“참을 이유가 있습니까?”
없었다.
참을 수도 없었다.
블랙이 리에네의 목을 끌어당겨 먼저 입술을 겹쳤다. 리에네가 양팔을 벌려 그를 마주 안았다.
밤이 되려면 아직도 멀었다.
달이 뜨기 전까지는 일 분 일 초가 온전히 지금을 위한 시간이었다.
* * *
“어, 어딜 가신다고요?”
다음 날 옷 시중을 들기 위해 침실을 찾아온 두 부인은 그때야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 샤르카 왕국이라니요. 거기가 저기 신전 옆에 있는 곳도 아니고…….”
특히나 플램바드 부인은 걱정으로 안절부절못했다.
“공주님. 공주님은 태어나서 나우크를 벗어나 보신 적이 없지 않습니까. 마차도 덜컹거릴 테고, 잠자리도 불편할 테고, 자칫하다간 물갈이를 하게 되실지도 모르는데…… 꼭 가셔야겠습니까?”
“네. 꼭 가야 해요.”
리에네가 안심하라는 듯 플램바드 부인의 손등을 토닥였다.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제가 왕관을 쓴 뒤로 가장 중요한 일일 거예요.”
“아니, 그런 일이 또 있습니까? 공주님께서는 이미 혼인식을 치르셨는데요.”
“음……. 내 혼인보다 몇 배는 더 중요한 일이에요. 아,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말한 건 로드 티와칸께는 비밀로 해 주세요.”
“아이고, 그러믄요. 그런데 대체 그렇게 중요한 일이 뭐랍니까?”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다녀와서 알려드릴게요.”
지금은 아직 비밀을 유지하기로 했다. 만일 열쇠가 틀렸다면 실망을 회복할 수 없을 테니까.
“저한테도 말씀 못 하실 일입니까? 그런 게 어디 있답니까.”
플램바드 부인은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미안해요, 부인. 빨리 다녀올게요.”
“……공주님이 안 계시면, 이 넓은 성이 텅 빈 것 같겠습니다.”
“잠깐일 건데요. 그리고 제가 없는 동안 부인들도 쉴 수 있을 거예요.”
“몸 잠깐 편한 게 뭐라고요. 그게 어디 공주님이 계신 것만 하겠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은 기어코 눈물을 글썽였다.
“서둘러 오셔야 합니다. 공주님이 계시지 않은 나우크는 아무리 잠깐이라도 나우크 같지 않을 겝니다.”
“설…….”
설마요.
그렇게 웃으며 말하려던 리에네는 말을 멈췄다.
부인이 지금 말하는 게 내가 나우크를 떠나 알고 싶은 일이 아닐까.
……그래. 그걸 보고 오자.
“네. 애쓸게요.”
그렇게 생각하니 한시라도 빨리 다녀오고 싶어졌다.
“헨…… 아니, 렌펠 부인은 좀 더 허전하실지도 모르겠어요. 렌펠 경도 동행하기로 했거든요.”
헨튼 부인은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웬걸요. 허전하다기보다는 기쁩니다. 그 애가 이제야 사람 구실을 하는 것 같아 말이지요. 그게 다 공주님 덕입니다.”
“렌펠 경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됐어요. 그건 부인 덕이죠.”
“그리 말씀해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합니다.”
이제는 떠날 준비를 해야 했다.
“짐 꾸리는 걸 도와줘요. 좋은 옷도 있어야 하지만 말 위에서 편하게 입을 옷도 필요할 것 같아요. 남자 옷을 입어야 하나 싶어요.”
“네에? 공주님께서 남자 옷이라니요?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말이 안 되지요. 모르긴 해도 샤르카 왕국이라면 다들 어마어마하게 치장을 하고 다닐 텐데, 우리 공주님께서 남정네 옷가지 같은 걸 걸치고 계시면 어쩐답니까?”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두 부인들과 실랑이가 있긴 했다.
* * *
“어…….”
출발할 시간이 되었다.
길을 떠나기 위해 발목이 드러나는 가벼운 드레스와 망토를 입은 리에네는 마사 앞에 도착했을 때 잠시 당황했다.
“이건 너무…….”
커다란 마차가 문을 열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퀴까지 온통 검은 마차는 요새처럼 단단해 보였다. 마차를 끄는 여덟 마리의 말도 모두 검은색이었다.
유일하게 눈이 부신 것은 마차의 옆과 뒤를 금박으로 장식한 아르사크의 문장이었다.
마부석 양 옆으로 두 개의 깃발이 걸렸다. 하나는 아르사크 가문의 깃발이었고, 다른 하나는 아무런 무늬가 없는 검은색 깃발이었다.
검은 천일 뿐인 깃발이라고 해서 의미까지 단순하진 않았다. 그것은 10년 간 대륙에 각인된 티와칸의 깃발이었다.
마차의 앞뒤로 열둘과 열셋, 총 스물다섯의 티와칸이 말에 올라 대기했다.
티와칸의 검은 갑옷을 전부 갖춰 입은 자들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아주 멀리서 전투를 지켜봤을 때조차 이런 식으로 성장을 한 티와칸은 보지 못했다.
“너무 과하지 않을까…….”
마사 앞이 꽉 찼다.
공간이 좁아서가 아니라, 위압감 때문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잘 갈린 창들 사이로 걸어가는 기분이었다.
새삼 대륙에서 티와칸이 어떤 존재인지 실감했다.
“공주님 짐은 이게 단가?”
페르모스는 나우크에 남기로 했다. 그는 샤르카 왕국에서보다 이곳에서 할 일이 더 많았다.
페르모스를 대신해 이번 출타에 부관 역할을 맡은 것은 랜달이었다.
“어, 네. 그렇습니다. 제가 마차로 옮기겠습니다.”
침실에서부터 리에네와 함께 온 클리마가 말했다.
“아니. 손 떼. 지금부터 네 역할은 공주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거야. 쓸데없는 일에는 움직일 생각을 마라.”
벌써부터 느껴지는 숨 막히는 위압감에는 이유가 있었다. 블랙을 비롯해 티와칸은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어, 네. 네, 그러겠습니다.”
덩달아 클리마도 기합이 바짝 들었다. 그가 벌써부터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살폈다.
……과해.
“로드 티와칸은요?”
“잠시 부관을 뵙고 나오실 거라 했습니다. ……아, 저기 오시는군요.”
리에네를 발견한 블랙이 걷는 속도를 빨리해 다가왔다.
블랙은 갑옷을 입지 않았다. 그러나 색을 맞춘 옷은 신기하게도 그가 다른 티와칸들과 하나인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오늘도 눈이 부실 만큼 잘생겼다.
블랙이 팔을 내밀자 리에네가 자연스럽게 팔짱을 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무 과한 거 아니에요? 일행이 생각보다 많은데.”
“나 혼자 가는 게 아니니까. 그래도 많이 줄였습니다.”
“나 때문에 번잡해진 거예요?”
“공주님 때문에 가벼워진 겁니다.”
“……?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두고 갈 생각을 했을 땐 갈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웠는데.”
마차 앞에 이른 블랙이 리에네의 허리를 가볍게 들어 마차에 타게 했다.
별다른 장식이 없어서 더 근사해 보였던 마차의 내부는 겉모습과는 달리 사치스러웠다.
리에네는 신발을 벗고 발을 올려놓을 수 있게 푹신한 발판까지 마련된 마차는 처음이었다.
“마차가 좀 이상한데요. 이렇게 큰데 정작 몇 사람 탈 수가 없게 되어 있잖아요.”
블랙은 옆자리에 앉아 리에네의 구두를 벗겼다.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태울 일은 없을 것 같아서.”
태울 일이 없는 게 아니라 태우지 않을 거라는 말이었다.
“길이 머니 편하게 있어요.”
블랙이 느슨하게 자세를 고쳐 주며 말했다.
“이러다 잠도 자겠어요.”
“그래도 될 겁니다. 공을 많이 들이게 했으니.”
“일부러 마차를 새로 만든 거예요? 혼인식 때도 새 마차를 탄 것 같은데.”
“만드는 김에 같이 만들어 두었습니다. 혼인식 마차는 장식을 바꿔 가까운 데 갈 때 써요.”
“아, 사치스러워.”
리에네가 웃으며 블랙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마차가 너무 편해서 긴장감이 사라졌어요. 어디 놀러 가는 것 같아.”
“그런 일이 되면 좋겠습니다.”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랜달이 마차 옆으로 다가왔다.
“준비가 끝났습니다. 출발할까요?”
“그래.”
다각다각.
앞선 티와칸들이 말을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박자를 맞춰 제 심장도 두근대기 시작했다.
리에네가 블랙의 손을 깍지를 끼웠다.
“꼭 반지와 함께 돌아와요.”
“그렇게 될 겁니다.”
잠시 후 리에네가 탄 마차가 움직였다.
리에네는 마사 입구에서 마차를 향해 손을 흔드는 동시에 눈물을 닦느라 바쁜 플램바드 부인과 다른 일꾼들에게 꼬리처럼 긴 미소를 남겼다.
어떻게 알았는지 이른 시간임에도 국경까지 이동하는 길에 사람들이 몰려나와 잘 다녀오시라는 인사를 했다.
그 모든 게 리에네가 나우크에 있어야 할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