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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 신혼여행처럼 (113/145)


113. 신혼여행처럼
2022.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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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카 왕국은 새가 많았다.

풀이 많고, 나무가 많았다. 사람도 많았다.

리에네는 숨을 쉴 때마다 콧속에 남는 습기를 느꼈다. 바다를 접하고 있는 샤르카 왕국은 공기에도 습기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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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에서 재미있는 냄새가 나요.”

눈앞에 색다른 풍경이 나타난 뒤로 리에네는 창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못이 박힌 것처럼 창문에 손을 대고 앉아 흐르는 풍경들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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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닷가라서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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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바닷물에서는 육지의 물과 다른 냄새가 난다더니 그래서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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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해서 살갗이 끈적대거나 기분이 나쁠 수도 있을 텐데. 괜찮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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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잘 모르겠어요. 너무 신기해요. 고작 3일을 왔을 뿐인데 이렇게 다른 곳이 있다는 게.”

이제 마차는 번화가로 들어섰다.

규모로 보면 샤르카 왕국은 나우크보다 서너 배는 더 큰 대국이었다.

번화가를 오가는 사람들만 구경해도 하루가 거뜬히 지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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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신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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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뭡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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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길이 번잡하지 않다는 게요. 나우크에서는 몇 번씩 마차를 멈췄을 거예요.”

그 말에 블랙이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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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다들 길을 양보해 줘서 그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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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보요? ……아.”

양보가 아니라 알아서 비키게 되어 있다는 말이었다.

요새처럼 보이는 커다란 팔두마차와 스물다섯이라는 숫자의 티와칸은 꿈에서라도 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은 존재감을 지녔다.

거리가 먼 탓에 리에네는 몰랐지만, 샤르카 왕국의 사람들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낯선 이국의 방문객을 훔쳐보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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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다 온 것 같습니다.”

잠깐 블랙을 향해 돌아섰던 고개가 그 말에 다시 홱 창밖을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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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런데 여긴 아직 번화가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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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을 빌렸습니다. 저택은 마땅한 게 없어서요. 거기서 잠시 쉬다 샤르카 왕비에게 기별을 넣고, 우리를 초대해 주길 기다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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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게 맞겠네요.”

다각다각…… 탁.

얼마 가지 않아 마차가 멎었다.

블랙이 빌렸다는 여관은 번화가가 끝나는 거리에 있었다.

그 덕에 여관은 다른 곳보다 월등히 규모가 큰 데다 뒤쪽으로는 근사한 전망도 가지고 있었다. 오른쪽으로는 북쪽 요새 역할을 하는 높은 성벽이, 왼쪽으로는 끝도 없이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탁탁.

여관 마당에 들어선 마차 안에 잠시 앉아 있자 랜달이 다가와 문을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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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리셔도 됩니다.”

블랙이 먼저 내려서 리에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마차 발판에 한 걸음 내딛고 나자 여관이 아니라 성에 돌아온 것 같은 광경이 펼쳐졌다.

여관의 일꾼들이 전부 나와 공손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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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할까 봐 얘기하는데, 여관에는 우리 일행밖에 없습니다.”

블랙은 여관 전체를 통째로 빌렸다.

여관 주인이 일꾼들을 닦달해 전부 마중을 나와 있을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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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이국에서 오신 귀한 분들을 온 마음으로 환영합니다.”

일꾼들이 참 많기도 했다. 여관 건물이 크고 으리으리했으니 그래야 할 것이다.

……돈을 얼마나 썼을까.

괜히 따라오겠다고 했나.

리에네가 쓰게 웃으며 옷자락을 살짝 들어 올려 작게 턱을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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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영에 감사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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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쪽입니다. 방으로 모시겠습니다.”

나우크의 어지간한 귀족들보다 훨씬 더 화려한 차림새를 한 여관 주인이 공손히 손짓을 했다.

그를 따라 들어선 방은 3층 꼭대기 방이었는데, 아주 크고 천장이 높은 데다가 널찍한 테라스가 있어서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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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방이네요.”

리에네가 말하자 여관 주인은 얼굴이 빨개져서 허리를 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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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 여관은 남단에서 가장 크고 시설이 좋은 곳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그만큼 여길 찾으시는 손님들도 어마어마하신 분들이라 일전에는 르케스 왕국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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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나가도 좋다. 필요한 게 있으면 수하들이 찾아갈 것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려는 여관 주인의 말을 블랙이 툭 잘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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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그럼. 부디 편히 쉬십시오.”

남들보다 눈치가 몇 배나 빨라야 하는 여관 주인이 제꺽 입을 다물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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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해질 뻔했습니다. 이리 와요.”

블랙이 방을 둘러보고 있던 리에네에게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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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불쾌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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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지 않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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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요?”

블랙은 리에네의 망토 끈을 풀어 제 팔에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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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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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관 주인 말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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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쳐다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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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랬어요? 잘 모르겠던데. 다들 얘기할 때는 그러잖아요.”

블랙이 잠깐 얼굴을 구겼다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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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쾌하지 않았다니 다행입니다.”

리에네는 아무래도 사람들이 자신을 얼마나, 어떻게 쳐다보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짐승의 왕국이나 다를 바 없는 샤르카 왕실에서 가능한 한 리에네가 눈에 띄는 일이 없기를 바라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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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하고 싶진 않습니까? 여정이 길었으니 그럴 만도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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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애매해서요. 그래도 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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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딱 좋은 시간입니다. 샤르카 왕비의 초대를 기다리는 것밖에 할 일이 없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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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아요.”

 

여관 일꾼들이 욕조에 물을 채워 따듯하게 데웠다.

블랙은 모든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는 이상한 말로 리에네의 목욕 시중을 자처했다.

그사이 페르모스가 고용한 정보상이 아주 바쁘게 움직이며 소식을 물어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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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놈들은 다 뭘 잘못 먹은 것 같지 말입니다.”

정보상을 만나고 온 랜달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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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습하고 더운 곳에서 무슨 고생을 그렇게 시키는지……. 길도 잘 모를 게 뻔한데 저 혼자 아는 곳으로 오라면 어쩝니까. 밑에 부리는 인간도 많을 텐데.”

랜달은 평소 엄살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이 축축하고 끈적한 바닷가 공기가 너무 싫은 것뿐이었다.

블랙은 엄살을 들어주는 대신 손에 쥐고 있던 물잔을 넘겨주었다.

방금 여관 주인이 가져다준 물잔은 뭔지 모를 과일과 향초가 들어 있어 새콤하고 시원했다.

괜히 뭘 준비했다, 뭘 드리겠다, 하면서 자꾸만 방문을 두드리는 여관 주인이 거슬리는 것과는 별개로 목이 개운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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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아……. 이게 뭡니까? 술도 아닌 주제에 엄청나게 맛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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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가서 더 달라고 해. 전할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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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만간 왕이 연회를 열지 않을까 싶답니다. 왕자비가 아이를 가졌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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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하는 짓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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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요. 아이가 뱃속에서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데 다짜고짜 연회부터 여는 멍청한 왕족이 어딨습니까? 왕자비가 우겼다는 말이 나돌기도 한답니다. 그 김에 알리토 대공도 초대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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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목적이겠군. 우리가 디에렌을 두고 대공과 협상할 것을 염두에 두고. 고립되는 걸 피하겠다는 건데……. 생각보다 자리가 위태로운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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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붙들고 있을 게 왕밖에 없으니까요. 연회 소식을 들은 왕비가 밥을 먹다가 소식을 전해 온 시종에게 접시를 집어 던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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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성격이로군. 미리 주의를 해야겠는데.”

설마 샤르카 왕비가 타국의 왕족 앞에서 성깔을 드러내진 않겠지만, 알아둬서 나쁠 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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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의 반발을 알면서도 왕이 대공녀를 감싸는 이유는? 아직 밝혀진 게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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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확한 건 없답니다. 왕과 왕비는 원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아, 그런데 이상하긴 하답니다. 왕이 그래도 예전엔 왕비의 눈치를 보기도 했는데 지금은 그마저도 없다는 식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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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대공녀의 아이를 제 자식이라 믿는다는 말은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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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무리 막장인 집구석이라 해도 너무하잖습니까. 그게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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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녀라면. 지금 이것저것 가릴 처지가 아닐 것이다. 내가 여기 왔다는 걸 알게 되면 더할 테지.”

아무리 리에네를 호위할 필요가 있다고 해도 이렇게나 눈에 띄는 모습으로 나타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블리니 왕자비도 지금쯤이면 티와칸이 샤르카에 도착했단 얘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인질과 반지를 교환하자는 요구를 대꾸도 없이 뭉갠 상태에서 당사자가 직접 나타났으면 겁을 먹어야 했다. 더군다나 당사자가 티와칸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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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모를 리가 없겠지요. 직접 접촉하면 물건을 돌려주지 않겠습니까? 그쪽에 연락을 넣으라고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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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필요 없는 짓이야. 돌려줄 마음이 있으면 알아서 나타날 것이다. 아마도 그럴 마음이 없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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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럼 계획대로 초대를 기다려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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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카의 왕비에게 선물은 잘 전달됐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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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낸 놈들이 아직 안 돌아왔습니다. 곧 돌아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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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면 곧장 올려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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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주군.”

그때 목욕을 마친 리에네가 욕실에서 나왔다.

따듯한 물에서 갓 나온 깨끗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물씬 풍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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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랜달 경이었네요. 새로운 소식이 왔던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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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아, 아……. 어…….”

랜달이 이상하게도 답을 하지 못하고 버벅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리에네가 보기 드문 미인이라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청혼 당시에도 먼발치에서 본 것만으로도 헛소문은 아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맹세코 요새 리에네는 달라졌다.

시도 때도 없이 눈은 촉촉하고 입술은 붉은 게, 막연한 먼 나라 공주님이 아니라 너무 가깝고 생생한 미인이라 종종 당혹스러웠다.

막 욕실에서 나온 공주님은 샤르카식 목욕 가운을 입으셨는데, 처음 보는 옷이 아닌데도 난생처음 보는 것처럼 당혹스러웠다.

눈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블랙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리에네의 앞에 두 팔을 벌리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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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을 마치면 부르라고 했잖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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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려고 했는데 얘기 소리가 들려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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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누가 있다는 걸 알면서 나왔다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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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기 있는 게 비밀이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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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아니라…….”

블랙이 차마 내뱉을 수 없었던 한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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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

그래서 화살을 맞는 건 랜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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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아, 네. 네!”

랜달이 리에네에게 인사를 갖추지도 못한 채 부리나케 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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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얘기는 다 끝났어요?”

리에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물었다.

블랙이 나우크에 있을 때와는 다른 차림을 한 리에네를 말없이 응시했다.

내가 왜 이 가운을 입으라고 했을까. 단추도 없는 가운을.

그도 요새 매일 느끼고 있었다.

리에네는 신들이 빚어 마신다는 복숭아술이라도 마신 것 같았다. 원래도 제 눈에는 세상에서 가장 예쁜 얼굴이었는데, 요새는 미모가 피어오르다 못해 터질 지경이었다.

대체 무슨 영문이지.

사람 얼굴이 갑자기 달라졌을 리는 없고, 표정이나 안색 같은 작은 것들이 변했을 것이다.

맹세코 말하지만 리에네는 더 예뻐질 필요가 조금도 없었다. 지금도 곤란할 정도였다.

랜달 같은 녀석들조차 눈을 마주치면 대번에 얼굴색이 변하는데, 다른 인간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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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는지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블랙은 더 여밀 것도 없는 가운 자락을 괜히 끌어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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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요? 아……. 이 가운은 혹시 옷 대신 입으면 안 되는 건가요? 단추가 없어서 입고 벗기 편하다는 걸 빼면 나우크에서 저녁에 입는 옷과 비슷한데.”

블랙의 입장에서는 달랐다. 매우 달랐다.

일단 입고 벗기 편하다는 점에서 하늘과 땅만큼 다른 옷이었다.

두껍고 무거운 나우크식 옷감에 비해 샤르카식은 얇고 가벼운 데다 색감이 화려하다는 차이점은 둘째 문제였다.

거기에 목욕을 갓 마치고 촉촉해진 표정으로 나오면 애꿎은 수하를 쫓아내는 속 좁은 사내가 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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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는 목욕을 마치면 나를 불러요.”

누가 있다고 그냥 나오지도 말고. 적어도 공주님이 보지 않는 데서 쫓아내고 싶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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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거롭게 만들고 싶지 않아요. 나우크에서도 매번 부인들한테 목욕 시중을 받던 것도 아닌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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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고 싶습니다. 아주 간절히.”

다행히 리에네는 그 말을 믿었다.

뭐, 거짓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간절히 이 모습을 다른 놈들한테 보이고 싶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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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바란다면요.”

리에네는 살짝 쑥스러운 얼굴로 웃으며 그의 가슴을 툭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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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그러니까 나우크의 앞날이 걸린 아주 중요한 일을 하러 온 게 아니라 신혼여행을 온 것 같아요. 다정한 건 좋지만 그래도 긴장은 하고 있게 해 줘요. 나름 굳은 각오를 하고 왔다고요.”

긴장이라.

이 순간에 딱 필요한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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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생각입니다. 계속 긴장을 늦추지 말아요.”

나 말고, 다른 놈들한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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