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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4. 바다가 있다면 (114/145)


114. 바다가 있다면
2022.05.04.


블랙은 리에네를 의자에 앉힌 뒤 마른 수건을 가져왔다. 젖어 있는 머리칼을 언젠가처럼 수건으로 닦아 말려 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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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크에 바다가 있으면 어땠을까요.”

리에네가 테라스 너머 파도소리가 들려오는 바다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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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주 다른 나라였겠죠? 음식도, 생활습관도, 타국을 대하는 시선도 아주 달랐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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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갖고 싶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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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 말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사람이 바다를 가질 수는 없잖아요. 그런데 좀 부럽긴 해요. 호수나 강과는 완전히 달라서. 물이 굉장히 역동적으로 움직이는 느낌이에요.”

블랙의 귀에 가장 크게 들린 말은 부럽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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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경을 옮기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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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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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가 있는 곳까지. 반년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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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리에네는 지금 무슨 말을 들었나 싶어서 눈을 깜박대다가, 그가 정복 전쟁을 말한다는 것을 알고 펄쩍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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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무슨 소리예요! 샤르카 왕국을 침략하자고요? 이렇게 큰 왕국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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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자 한다면 지금이 적기입니다. 이번 일로 왕실이 갈라설 테니까. 왕에 반발하는 세력과 손을 잡으면 티와칸 외에 따로 군대를 들일 필요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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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리에네가 의자에서 몸을 홱 돌려 블랙의 얼굴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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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전쟁을 그렇게 쉽게 얘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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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정도는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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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진짜.”

리에네는 잠시 입을 벌린 채 할 말을 골랐다.

무슨 말부터 하면 좋을지 몰라서였다.

이 남자 앞에서는 뭐가 부럽다는 말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교훈이 생겨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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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이제 신혼인데, 반년이나 떨어져 있자고요? 됐어요. 그런 바다는 필요 없어요.”

블랙이 별안간 웃음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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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거절하는 이유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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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유가 더 필요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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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블랙이 수건을 치우고 아직 머리가 젖어 있는 리에네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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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내 제안을 거절하는 이유 중에서 가장 좋은 이유 같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좀 해 봐요. 지금 같은 기회가 매번 있는 건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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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크에는 빈 땅이 많아요. 그만큼 사람이 줄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 남의 걸 탐내는 것보다 가진 걸 잘 지키는 게 우선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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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는 말입니다. 바다는 좀 아깝지만.”

리에네가 고개를 떼어내 블랙의 표정을 살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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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다가 욕심나는 건 당신인 거 아니에요?”

바다는 좋아하지 않았다. 짠 냄새도 별로였고, 해상전은 특히나 질색이었다.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변수가 너무 많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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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하지만 그런 사소한 일을 리에네가 알 필요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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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다시 돌려줘요. 머리를 다 말리고 바닷가를 산책하는 게 어떻습니까?”

수건이 다시 머리칼을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리에네가 손가락의 움직임을 따라 눈매를 느슨하게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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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건 좋아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그런데 보이는 것보다 멀 것 같아서요.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는 건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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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뒤편에서 바닷가로 이어지는 통로가 있다고 했습니다. 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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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아요.”

꼼꼼히 머리칼에서 물기를 닦아 낸 뒤, 두 사람은 가벼운 망토를 걸치고 바닷가로 향했다.

리에네는 반짝대는 하얀 모래가 너무 곱고 예쁘다며 한참 즐거워했고, 블랙은 그런 리에네를 지켜보며 시간 감각을 잊었다.

아무래도 국경을 옮기는 건 진지하게 고려해 봐야 할 문제 같았다.

지금은 말고, 신혼이 끝나고 난 뒤에.

해가 저물기 시작하자 바다가 온통 붉어졌다.

리에네는 정면으로 바라보아도 눈이 아프지 않은 붉은 해가 수평선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지켜보았다.

원하면 바다를 가져와 주겠다는 말을 하는 남자와 함께한 이 순간이 제 마음속에서는 영원히 이어지리라 생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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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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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하.”

샤르카의 딜레라스 왕비는 조심스레 자신을 부르는 시녀의 작은 목소리에 핏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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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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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하.”

왕비가 미간을 구긴 채 답이 없자 시녀는 발이라도 동동 구르고 싶다는 얼굴로 다시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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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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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다잖아!”

퍽!

어김없이 무언가가 날아왔다.

시녀는 가엾게도 왕비가 던진 대리석 화병에 무릎을 맞았다.

아파서 눈물이 핑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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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가 멀었느냐! 다 필요 없다고 몇 번이고 말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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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답신을 하셔야 한다고…… 비서관께서…….”

시녀는 울먹이며 간신히 말을 마쳤다.

별궁으로 옮긴 뒤, 아니 쫓겨난 뒤 왕비의 신경질은 아랫사람들이 손을 쓸 수가 없을 정도였다.

왕비가 먹지 않으니 시녀들도 식사할 시간을 내지 못했고, 왕비가 잠을 자지 않으니 시녀들도 감히 잔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지금 말을 전하는 시녀도 눈 밑이 까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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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면 비 전하의 체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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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면, 체면! 내가 더 이상 체면이 어디 있겠느냐! 남편은 나를 버리고 죽은 아들의 여자가 내 자리를 대신한 이 마당에! 그깟 체면? 이제 와 그런 걸 지킨다고 무슨 일이 일어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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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하……. 고정하시지요. 이리하시면 몸이 다 상하시고……. …….”

시녀는 울먹임을 참느라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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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덩어리진 한숨을 내뱉는 왕비가 소파에 기댄 몸을 축 늘어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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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필요 없다……. 아직 젊은 이 몸은 이대로 죽을 것이다. 죽어서 내 남편을 저주하고…… 또 그 더러운…… 욱!”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역겨웠던지 딜레라스 왕비는 몸을 구부려 헛구역질했다.

설마 설마 했다.

그러나 아무리 봐도 남편의 반응은 며느리가 아니라 애첩을 대하는 그것이었다.

임신을 했다 하니 등신처럼 입을 쭉 벌리고 웃어댔다.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게 제1왕자의 자리를 약속하겠다며 미친 소리를 해댔다.

아이를 가진 몸이 얼마나 고되겠냐며 뺨을 쓸고 손등을 도닥이고 가슴께를 슬슬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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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자리에서 구토라도 했어야 했는데…….”

왕이 계절마다 애첩을 갈아치우던 건 비밀도 아니었지만, 설마 제 며느리에게까지 손을 댈 줄은 몰랐다.

아들의 시체가 무덤 속에서 눈을 부릅뜨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며느리와 간통하는 미친 남편이었지만, 그는 왕이었다.

며칠 새 말라붙은 줄 알았던 눈물이 다시 쏟아졌다. 왕비가 흐느끼기 시작하자 시녀가 재빨리 손수건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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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전하. 선물을 보시면 기분이 좀 나아지실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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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두……. 아아, 잠깐. 선물이라 했느냐?”

시녀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낮부터 나우크에서 선물이 들어왔다고 말을 올렸는데 왕비는 귓등으로 듣는 둥 마는 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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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비 전하. 나우크의 왕실에서 보낸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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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우크?”

딜레라스 왕비가 어렴풋한 기억을 쥐어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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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긴……. 오, 그래. 얼마 전 누군가를 추방해 보냈다는 거기가 아닌가? 그 일로 누가…… 무어라 왕께 불평을 했다 하였는데.”

아마 죽은 제3왕제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별로 대단치 않은 인물이라 왕실에서는 불평을 듣고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그는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외숙부였고, 나우크 왕실의 추방령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떠들어대다 오히려 왕의 눈 밖에 났다.

왕은 오래전 타국과 혼인해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조카의 자식 문제 따위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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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그런 일은 모르겠습니다. 비서관께서 선물이 왔으니 답을 보내시는 게 맞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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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가뜩이나 지친 이 몸을 웬 자그마한 나라까지 못살게 구는 것인지……. 선물이나 가져와 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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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비 전하.”

오후부터 내내 비서관에게 시달리던 시녀는 이제 살았다는 표정으로 재빨리 물러나 타국의 선물을 가져왔다.

선물 자체는 너무 과하지도, 구색이 안 맞지도 않았다.

딜레라스 왕비는 나우크에서 재배한다는 찻잎을 담은 진주함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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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걸 왜 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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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가 있습니다, 비 전하.”

시녀가 재빠르게 편지를 건넸다.

원래 편지를 읽어주는 건 비서관이 할 일이었지만, 왕실 비서관은 얼마 전 왕비가 던진 접시에 맞아 머리가 찢어지는 일을 겪었다.

머리가 찢어진 것도 억울한데 별궁 출입금지령도 함께 내렸다.

덕분에 애꿎은 시녀들만 고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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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읽어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비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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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나 해라. 내가 이 기운 없는 손으로 편지마저 들어야겠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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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 말씀하신다면.”

정작 그 기운 없는 손이 방금 전까지는 진주함을 들어 이리저리 살피기도 했다.

시녀는 잠자코 나우크 왕국의 왕실 비서관이 달필로 쓴 고풍스러운 글귀를 읽기 시작했다.

나우크의 공주는 최근 혼인을 해 근방으로 여행을 왔다 했다.

거기까지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남의 얘기였다.

하지만 얘기가 조금 거슬러 올라가자 갑자기 딜레라스 왕비의 표정이 홱 돌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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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 했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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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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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통치권이 어쩌고 하지 않았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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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시녀는 편지를 실수 없이 읽는 데 집중하느라 자신이 무엇을 읽는지 잘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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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리 내놔!”

기운 없다는 몸을 벌떡 일으킨 딜레라스 왕비가 시녀의 손에서 편지를 낚아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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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지는 짧고 우아하게 티와칸의 수장과 혼인하게 된 과정이 적혀 있었다.

누가 본다면 안면을 트기 위한 사교적인 편지라 했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누구의 핏줄이든 상관없이 아르사크의 피를 잇는 아이를 다음 대 통치권자로 인정하겠다는 조항을 혼인 서약서에 집어넣은 티와칸의 수장을 배알도 없는 사내라 했을 것이다.

하지만 딜레라스 왕비에게는 달랐다.

나우크의 공주가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려는 게 아니라면 다음 대 통치권이 어쩌고 하는 말을 할 리가 없었다.

그것도 혹시 얼굴을 맞댈 수 있게 된다면 마음에 드실 선물을 하나 더 준비하겠다는 사근한 말까지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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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서관을 불러와.”

거기까지 읽은 딜레라스 왕비가 다급한 손짓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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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늘 안으로 답신을 보내야겠다고 전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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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네, 비 전하.”

시녀도 괜히 마음이 급해져 왕실 비서관을 찾았다.

나우크의 리에네 공주를 두터운 우의로 환대하고 싶다는 뜻을 담은 딜레라스 왕비의 초대장이 달빛을 타고 달려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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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아침이라도 좋대요. 별궁의 문은 언제든 열어 놓겠대요. 이 정도면 눈치를 챈 것 같죠?”

왕실에서 보낸 초대장을 읽은 리에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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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딜레라스 왕비는 왕보다 더 영리한 인물이라고 합니다.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해도 머리가 나빠지진 않았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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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너무 안 좋겠죠. 아들이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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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겁니다. 조만간 죽을 아들이었다고 해도.”

그사이 정보상은 바셰드 왕자가 생전에 매독을 앓고 있었다는 말을 전해 왔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살인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작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원래도 허약했는데 매독이라는 치명적인 병까지 앓았으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다고 여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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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걱정은 클라인펠터예요. 그렇게 쉽게 자기 죄를 자백할 것 같지 않아요. 왕실을 모욕하고 기만한 일이잖아요. 아무리 왕실에 외가의 사람이 있다고 해도 빠져나갈 수 없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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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인펠터의 입을 열 방법은 샤르카의 왕비가 알고 있을 겁니다. 그리고 클라인펠터를 감쌀 세력은 더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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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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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면 벌써 나타났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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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음……. 그건 모르는 일이죠. 우리가 클라인펠터를 데려온 걸 누가 안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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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려온 것까진 몰라도 클라인펠터의 생사를 궁금해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적어도 확인은 하려 들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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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겠네요. 그럼 샤르카의 왕비가 일을 잘 처리해주길 바라야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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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왕비는 물건을 집어 던질 정도로 독이 잔뜩 올랐으니 기회를 물면 놓치지 않을 것이다. 적극적인 초대장을 보면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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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내일 언제 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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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자요. 느긋하게 일어나서 준비가 되는 대로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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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르카의 왕비가 기다릴 텐데. 아침도 괜찮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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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공주님의 아침잠이 부족해질 이유는 되지 않습니다.”

리에네가 웃으며 블랙의 귀를 약하게 잡아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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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땐 나쁜 사람 같아. 사실은 아주 좋은 사람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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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좋은 사람이라는 말은 나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대신 공주님에게만 좋은 사람이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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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어쩌죠? 그쪽이 더 좋은 말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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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맞을 겁니다.”

블랙이 리에네를 가볍게 들어 침대로 데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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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일찍 일어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았으니 푹 자도록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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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거짓말이잖아요.”

리에네가 블랙의 귓불을 살살 간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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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재울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을 거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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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듯이…….”

침대 위에서 무릎으로 앉은 블랙이 셔츠의 매듭을 느슨하게 끌어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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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주님에게 좋은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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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지금은 뭐가 좋은 일이라는 건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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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

블랙이 낮은 소리로 웃으며 리에네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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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님이 말해 봐요.”

입술이 아슬아슬하게 닿은 채 리에네가 무슨 말을 속삭였다.

리에네가 말했던 대로, 벌써 자라는 말은 거짓이었다.

리에네는 느지막한 새벽 무렵에서야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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