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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 애원해 봐 (115/145)

115. 애원해 봐 2022.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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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고 블랙은 리에네보다 잠이 늦었다. 리에네가 없는 곳에서 할 일이 있었다.  

16550965079945.jpg “…….”

16550965079949.jpg “…….”

침묵에는 이유가 있었다. 자다가 랜달에게 뺨을 맞고 깨어난 라피트 클라인펠터나, 그를 깨우도록 한 블랙이나 대화가 어울리는 사이는 아니었다.

16550965079949.jpg “……뭐야. 깨웠으면 용건을 말해.”

서로를 마주하는 긴장감을 더는 견뎌내지 못한 것은 라피트였다.

16550965079949.jpg “왜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어! 왜!”

16550965079945.jpg “조용히.”

블랙이 낮고, 작게 말했다.

16550965079945.jpg “떨어진 곳이긴 하지만 리에네가 자고 있으니.”

16550965079949.jpg “제길…….”

라피트가 이를 갈았다. 며칠 사이에 그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야위고 거칠어진 얼굴은 누구도 그가 클라인펠터 가의 장자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모를 정도였다. 클라인펠터 가의 몰락이 그대로 그의 표정이 되었다.

16550965079949.jpg “그런 말을 하려고 이 시간에 자는 사람을 깨웠나? 리에네와 한 침대를 쓰는 건 너라는 걸 자랑이라도 하게? 빌어먹을, 그래 봤자 너는 내 다음이야. 그게 무슨 자, 읍…….”

블랙이 나설 것도 없이, 랜달이 라피트의 입을 틀어막았다.

16550965079945.jpg “말조심해라.”

16550965079949.jpg “으읍…….”

그걸로는 모자랐던지 랜달은 라피트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치기까지 했다.

16550965079945.jpg “쯧쯧…… 그 집구석 종자들은 원래 이런가. 죽을 자리에 들어섰어도 거기가 어딘지 영 감을 못 잡는 게.”

16550965079949.jpg “……!”

라피트가 부서질 것 같은 몸으로 미욱한 저항을 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라피트 클라인펠터는 포기가 빨랐다. 무언가를 처절하게 붙들고 있기에 그는 너무 평온한 인생을 살았다. 그는 이제껏 한 번도 결핍을 몰랐다. 모든 게 주어졌다.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당연한 것처럼 제게 주어졌다. 라피트가 몰랐던 것은, 제 손에 쥐어진 게 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얌전해진 라피트 앞으로 블랙이 다가갔다.

16550965079945.jpg “네게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

16550965079949.jpg “……?”

라피트가 축 늘어트리고 있던 고개를 사선으로 들어 올렸다.

16550965079945.jpg “여길 떠나든가, 아니면 머물든가.”

랜달이 재빨리 입을 가린 손을 치웠다.

16550965079949.jpg “무슨…… 그게 무슨 말이야?”

16550965079945.jpg “내일 딜레라스 왕비 앞에서 사실을 말하면 네 신병은 내가 넘겨받겠다. 입을 다물고 있겠다면 왕비에게 넘기고.”

16550965079949.jpg “무슨…… 사실을 말하라는 거야?”

16550965079945.jpg “뭐든 네가 대공녀와 한 짓. 바셰드 왕자를 죽였건 대공녀에게 아이를 갖게 했건. 사실을 말하면 딜레라스 왕비가 손을 못 대게 해놓겠다.”

16550965079949.jpg “무슨……. 미친……. 나를 살려주겠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16550965079945.jpg “지금에 와서 내가 네 목을 딸 이유는 없어. 리에네가 별로 내켜 하지도 않을 테고.”

거짓이 아니었다. 가진 걸 전부 잃은 라피트는 예전처럼 반드시 치워 버려야 할 존재가 아니었다. 죽이려는 수고를 하자니 그저 하찮았다.

16550965079949.jpg “말을 하지 않겠다면?”

16550965079945.jpg “딜레라스 왕비가 알아서 네 입을 열겠지. 그 집안이라면 좋은 고문 기술자를 많이 알고 있을 테니.”

16550965079949.jpg “읏…….”

고문이라는 말에 라피트가 인상을 썼다.

16550965079945.jpg “나로서는 그편이 더 좋고. 네가 겁도 없이 나우크에 다시 발을 들인 대가는 있어야지.”

16550965079949.jpg “대가?”

라피트가 기가 막히다는 듯 헛숨을 흘렸다.

16550965079949.jpg “내가 이 꼴이 된 게 그 대가 아냐? 그 무덤 같은 굴 속에서 생으로 굶는 게 어땠는지 네가 알……!”

16550965079945.jpg “다행이야.”

블랙이 짧게 웃었다. 그 바람에 라피트의 말이 끊겼다.

16550965079945.jpg “네가 고작 며칠 굶는 것도 괴로워하는 인간이라. 제대로 된 고문을 받으면 효과가 좋겠어.”

블랙이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16550965079945.jpg “그럼 두 번째를 골랐다고 생각하겠다. 다시 재워.”

1655096512276.jpg “네, 주군.”

랜달이 라피트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뒤통수의 급소를 잘 골라 때리면 사람은 푹 잠이 들게 되어 있었다.

16550965079949.jpg “자, 잠깐……! 나는 아무것도 고르지 않았어!”

뒤통수를 얻어맞기 전 라피트가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16550965079949.jpg “내 신병을 넘겨받으면, 그럼 뭘 어떻게 할 건지 말해.”

16550965079945.jpg “나우크도 샤르카도 아닌 곳으로 가게 해 주겠다. 이번에는 여비도 쥐여 주지. 나는 아주 좋은 사람이 됐으니까.”

블랙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덧붙인 뒷말 때문에 랜달과 라피트가 비슷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저런 말이 어디서 나왔나 싶은 모양이었다.

16550965079949.jpg “그게…… 확실해? 약속할 수 있나?”

주저하며 묻는 라피트에게 이제 자존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른 누구도 아닌 블랙에게 제 목숨을 약속받으려는 지금이 사내로서 수치스럽다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16550965079945.jpg “네가 약속한다면.”

16550965079949.jpg “그럼…… 그럼 좋아. 사실을 말하겠어.”

16550965079945.jpg “그러든지.”

라피트가 이렇게 나올 줄 짐작했던 블랙은 별 감흥 없이 몸을 돌렸다.

16550965079945.jpg “이제 재우도록. 시끄러울 일이 없게.”

1655096512276.jpg “네, 주군.”

  발소리를 죽여 침실로 돌아오니 리에네는 달게 잠들어 있었다. 바닷가의 달은 유난히 큰지 속눈썹이 만들어내는 가느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블랙이 조심스럽게 침대에 오르자 리에네가 꾸물대며 품 안을 파고들었다. 순간 깨어 있었나 싶어서 놀랐지만 그건 아니었다. 뺨이 눌리는 것도 모르고 얼굴을 붙이는 걸 보면 그새 생겨난 잠버릇이었다. 블랙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숙여 리에네의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바닷가에 둘만 있을 수 있는 성을 하나 짓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 * * 나우크의 공주와 그 남편이 신혼여행 중이고, 마침 그걸 알게 된 딜레라스 왕비가 아침부터 그들을 초대해 저녁 무렵까지 함께 시간을 보냈다는 얘기가 샤르카 왕실에 돌았다. 시기에 걸맞지 않은 이상한 얘기였다. 제1왕자의 장례를 치른 지 얼마 되지도 않는 나라에 여행을 온 손님도 그렇고, 그런 손님을 왕비가 달갑게 맞이했다는 것도 그랬다. 지금 왕비는 걸핏하면 울음을 터트리고 물건을 집어 던질 만큼 상태가 엉망이라고 했는데. 타국의 공주가 왕비의 초대에 응한 것도 참 쓸데없는 짓이었다. 왕비는 이제 모든 힘을 잃었다. 왕에게 쫓겨났고, 제1왕자는 죽었다. 왕비에게 권력이 되어 줄 만한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제 궁내 실권은 장차 제1왕자를 생산할 블리니 왕자비에게로 넘어가고 있었다. 왕은 블리니 왕자비를 못마땅해하는 왕제들도 부지런히 쫓아내고 있었다. 하여간 그래서 별궁에 벌어진 난데없는 손님 초대는 의아한 일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상한 일은,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뒤 딜레라스 왕비가 왕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었다.  

1655096512276.jpg “아아, 됐다. 귀찮아.”

왕은 편지를 읽어 드리겠다는 비서관을 손짓으로 물렸다. 비서관이 당황해하며 뒤로 물러섰다.

1655096512276.jpg “또 같은 얘기겠지. 왕자의 무덤이 어쩌고, 추모식이 어쩌고. 이미 다 치른 장례를 왜 자꾸 다시 하자는 게야.”

60세가 넘은 왕은 쓸데없이 혈기왕성했다. 그는 죽음 같은 우중충한 얘기가 제 기분을 망치는 게 싫었다. 왕은 숨이 붙어 있는 한 한순간이라도 더 즐겁고 쾌락적으로 보내는 일에 관심이 온통 쏠려 있었다. 이를테면 시원찮은 아들이 죽고 홀로 남은 며느리의 젊고 싱싱한 얼굴을 감상하는 일 같은.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랬을 것이다. 알리토 공국의 대공녀가 제 아들의 신부로 왕국에 발을 디뎠던 처음부터 왕은 혈기왕성해졌다. 저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끝도 없이 젊어지는 기분이었다. 저 얼굴 탓에 아들이 죽은 슬픔은 발을 붙일 곳이 없었다.

1655096512276.jpg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짐의 말이 옳지 않느냐?”

왕비가 떠난 궁에서 왕의 옆자리를 지키는 것은 왕자비의 몫이 되었다.

16550965138477.png “…….”

블리니는 대꾸 대신 눈을 마주치며 짧게 웃었다. 왕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블리니가 유독 보기 좋은 것은 불필요하게 입을 여는 일이 없기 때문이었다. 블리니는 자신과 비슷했다.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한 일에 집중할 줄 알았다.

1655096512276.jpg “오늘은 새 옷을 입을 줄 알았는데.”

아직도 상복을 입는 며느리가 딱해 왕은 새 옷을 보냈다. 그 옷을 입고 제 눈을 즐겁게 해 주리라 기대했는데 오늘도 비슷한 상복이었다.

16550965138477.png “그건 아직 일러요.”

블리니가 상복 아래서 다리 방향을 바꾸었다. 왕은 괜히 좋은 냄새가 풍겨 오는 것 같아서 코끝을 벌름거렸다. 왕비가 죽거나 제 발로 떠난다면, 블리니와 재혼할 수도 있지 않을까. 왕은 그런 기대를 했다. 지금이야 손밖에 잡지 못한다지만 장차 태어날 아이를 왕자로 부르면 블리니가 왕비로 불리는 것도 크게 이상하진 않을 것이다. 블리니도 제 마음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제 옆에서 저렇게 재주껏 다가오라는 눈짓으로 자신을 바라보지는 않을 테니까.

1655096512276.jpg “이르지 않다. 장례는 벌써 끝났어.”

16550965138477.png “명색이 남편인데 기억은 하고 있어야죠.”

블리니가 그쯤 하라는 듯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틀다 작게 중얼거렸다.

16550965138477.png “옷이 무겁긴 하네……. 갈아입을까.”

왕이 힘주어 턱을 끄덕였다.

1655096512276.jpg “정 그렇다면 지금만이라도 다른 옷을 입거라. 이제 드나들 인간도 없고.”

16550965138477.png “……. 어지간히도 보고 싶은 모양이네요.”

블리니가 미소라기엔 조금 날카로운 표정을 짓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16550965138477.png “그럼 가서 한번 입어 볼게요.”

1655096512276.jpg “짐이 동행하겠다.”

왕이 주책없이 블리니를 따라 일어섰다. 그걸 블리니가 말렸다.

16550965138477.png “그냥 앉아 있어요. 누가 보면 어쩌려고.”

1655096512276.jpg “신경이 쓰이긴 하느냐?”

그런 게 왕을 기대하게 했다. 왕은 슬슬 웃으며 블리니의 손등을 토닥였다.

1655096512276.jpg “다녀오거라.”

16550965138477.png “…….”

블리니는 이렇다 할 인사도 없이 홱 몸을 돌려 왕의 사실을 떠났다. 왕은 멀어지는 등을 보며 갈증이 나는 것처럼 입맛을 다셨다. * * *

16550965138477.png “더러워. 목욕을 해야겠어. 뭐가 들러붙은 것 같아.”

왕자궁으로 돌아온 블리니는 갑갑하던 상복을 끌어 내렸다. 시녀들이 후다닥 달려들어 혼자 벗기 어려운 옷을 벗도록 바지런히 도왔다. 문제는 블리니가 혼자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왕의 비서관이 손에 편지를 든 채 침실 한구석에 얌전히 서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을 깨끗하게 벗어 버린 블리니가 맨발로 욕실을 향해 걸었다. 태연한 손짓이 등 뒤로 향했다.

16550965138477.png “들어와. 편지를 읽게.”

1655096512276.jpg “……네, 왕자비 전하.”

왕의 비서관은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블리니를 뒤쫓았다. 시녀들도 뒤따라와 부랴부랴 욕조에 물을 채워 넣었다. 물이 아직 좀 차가운 듯했지만 블리니는 아랑곳없이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물 밖으로 나온 손에는 흰 손에도, 목욕에도 어울리지 않는 굵은 반지가 자리해 시선을 빼앗았다. 반지를 낀 엄지가 부자유스럽게 들린 이유는, 손가락 안쪽으로 큰 장식을 돌려서 숨기고 있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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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550965138477.png “뭐해? 어서 읽지 않고.”

1655096512276.jpg “네. 왕자비 전하.”

비서관이 왕비의 편지를 펼쳐 들고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 보낸 몇 통의 편지가 구구절절한 후회와 애걸로 시작했다면 오늘은 달랐다. 오늘 편지는 초대였다. 별궁에 누가 있으니 와서 보시라는 얘기였다.

16550965138477.png “누가 있다는 거야?”

마음이 급해진 블리니가 중간에 끼어들어 물었다. 비서관이 잠시 주춤하더니 곧 눈으로 빠르게 다음 글귀를 훑었다.

1655096512276.jpg “앞으로 태어날 왕자궁의 아이에 대해 할 말이 있는 자라 합니다.”

16550965138477.png “……. 그게 누군데?”

1655096512276.jpg “이름은 밝히지 않으셨습니다.”

16550965138477.png “…….”

블리니가 입술을 씹었다. 블랙이 딜레라스 왕비를 만났다. 딜레라스 왕비가 갑자기 제 아이에 대해 아는 게 생겼다. 블리니는 엄지를 입으로 가져가 반지를 잘근 씹었다.

16550965138477.png “……가지고 싶으면 애원을 해야 되지 않아?”

블랙은 나타나 애원을 하는 대신 제 숨통을 조이기로 했다.

16550965138477.png “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거지?”

내가 그 남자를 부르기 위해 무슨 짓을 벌였는데. 그걸 다 알면서. 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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