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6. 색채와 묘사 (116/145)


116. 색채와 묘사
2022.05.11.



16550965292521.jpg

“네, 전하?”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알고 비서관이 되물었으나 블리니의 시선은 아주 멀리 있었다.

16550965292525.png

“그건 못 하겠다는 거야?”

16550965292521.jpg

“전하…….”

16550965292525.png

“아니면, 하기 싫다는 건가?”

16550965292521.jpg

“…….”

비서관이 곤란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16550965292525.png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지? 당신에게는 그런 적이 없는데.”

16550965292521.jpg

“…….”

혼자만 아는 말을 중얼대던 블리니가 몸을 내려 물 속에 완전히 잠겼다.

16550965292521.jpg

“전…….”

비서관이 깜짝 놀라 몸을 움직이려다 시녀 하나가 고개를 젓는 것을 보고 동작을 멈췄다.

블리니는 지금 어딘가에 잠겨야 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블리니는 숨이 막히기 직전 몸을 일으켰다.

촤르륵!

흠뻑 젖은 머리칼에서 물이 흘러내렸다.

머리칼 사이로 젖어서 하얗게 빛나는 살결이 보였다.

16550965292525.png

“별궁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16550965292521.jpg

“네, 전하? ……아, 그건…….”

비서관의 표정이 굳었다.

블리니는 제 아이에 대해 할 말이 있다는 자를 만나기 위해 별궁에 가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몰래 들어가야 했다.

그럴 수 있는 방법을 가져오라는 요구였다.

16550965292521.jpg

“몹시 위험한 일입니다. 혹시라도 국왕 전하께서 아시면…….”

16550965292525.png

“너희들. 나가.”

비서관의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블리니가 시녀들을 내보냈다.

왕자궁에 남은 시녀들은 전부 알리토 공국에서 데려온 이들이었다. 왕자궁의 비밀이 견고한 이유였다.

쿵.

욕실의 문이 닫혔다.

16550965292525.png

“이리로.”

블리니가 손가락을 들어 비서관에게 손짓을 했다.

비서관이 입술을 지그시 물고 다가왔다. 블리니가 손짓을 멈춘 손을 가만히 들고 있자 그가 스스로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췄다.

16550965292525.png

“지금 당장은 아니야.”

블리니가 비서관의 턱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16550965292525.png

“위험하다면 밤에 가겠어. 왕이 잠든 다음.”

16550965292521.jpg

“그건……. 그렇다면…….”

16550965292525.png

“갈 수 있는 거지?”

16550965292521.jpg

“……그렇게 만들겠습니다.”

16550965292525.png

“좋아.”

블리니가 가르릉 웃으며 손을 잡아 뺐다.

16550965292525.png

“셔츠를 벗어. 바지도 걷고.”

16550965292521.jpg

“…….”

비서관이 셔츠를 벗자 블리니는 그에게 시녀들이 두고 간 비누를 가리켰다.

16550965292525.png

“시녀들이 없으니 네가 내 목욕 시중을 들도록. 천천히, 부드럽게.”

16550965292521.jpg

“……감사합니다, 왕자비 전하.”

비서관이 마른침을 삼키며 비누를 잡았다.

블리니가 안도하듯 가늘게 웃었다.

왕이 잠들고 나면.

또 다른 문제가 잠이 들 것이다.

언제가 됐든 블랙은 제 발로 와야 했다. 일을 그렇게 만들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블리니의 생각은 틀렸다.

왕은 생각보다 더 인내심이 없는 자였다.

16550965349716.jpg

 

* * *


16550965292521.jpg

“옷을 갈아입는 데 너무 오래 걸리신다 하여 국왕 전하께서 보내셨습니다. 혹 왕자궁에 일손이 부족하지 않은지 염려하셨습니다.”

왕이 사람을 보냈다.

뱀처럼 매서운 눈을 가진 본궁의 시종장이었다.

16550965292525.png

“목욕을 하는 중이라 전해.”

사람이 없으면 그냥 갈 것이지 굳이 욕실 앞까지 와서 닫힌 문에 대고 말을 걸었다.

비서관은 없는 척 숨을 죽였고 블리니는 첨벙 물소리를 냈다.

16550965292521.jpg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런데 혹시 본궁의 비서관이 왕자궁을 찾았습니까?”

블리니가 동작을 멈추고 피식 웃었다.

16550965292525.png

“그건 왜 묻지?”

16550965292521.jpg

“국왕 전하께서 찾으시는데 보았다는 사람이 없습니다.”

16550965292525.png

“내가 사람을 찾아 주는 이던가?”

16550965292521.jpg

“……송구합니다, 왕자비 전하. 그럼 물러가겠나이다.”

시종장이 멀어졌다.

그가 완전히 방을 떠났다는 말을, 시녀 하나가 욕실 문을 두드려 전해 주었다.

16550965292525.png

“늙어서 욕심은.”

블리니가 고개를 저어댔다.

16550965292525.png

“안 하던 짓을 다 하네. 제 정부도 한 번 간수해 본 적 없는 자가.”

반면에 비서관의 얼굴은 파랗게 질렸다.

블리니의 말대로, 평소에는 하지 않던 짓이었다. 달에 하나 꼴로 애첩을 갈아치우는 왕은 남들의 문란함에도 신경을 쓴 적이 없었다.

16550965292521.jpg

“저는…… 이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왕자비 전하.”

블리니가 대놓고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16550965292525.png

“이제 와서?”

16550965292521.jpg

“그게…… 국왕 전하께서…….”

블리니가 스르륵 몸을 일으켜 비서관의 어깨를 손톱으로 쿡 눌렀다.

16550965292525.png

“마음대로 해. 하지만 지금 이 욕조에서 발을 뺄 수는 있어도 내게서 완전히 발을 뺄 수는 없을 거야. 잊지 말도록. 오늘 밤, 왕이 잠든 후에.”

16550965292521.jpg

“알……겠습니다, 왕자비 전하.”

비서관이 축축한 손을 떨면서 옷가지를 주워 입었다.

블리니는 그가 나가든 말든 상관없이 미지근하게 식은 물 속에 머물렀다.

16550965292525.png

“저렇게 굴면 귀찮아지겠는데.”

그렇다고 왕을 죽이자니 제 자리가 더 곤란해질 듯해서 그럴 수도 없었다.

16550965292525.png

“전쟁은 이럴 때 나야 하는 것을.”

왕실이 뒤죽박죽일 때 전쟁은 언제나 좋은 핑계가 되어 주었다. 내부의 잡일은 전쟁이 모두 휩쓸어 갔다.

왕이 친정이라도 나가 노상에서 죽어 버리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16550965292525.png

“……역시.”

역시 나우크의 공주를 이 땅에서 죽였어야 했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어쨌거나 이 땅에 있긴 했으니까.

16550965292525.png

“…….”

블리니가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어떻게 해야 나우크의 공주를 죽일 수 있을까.

* * *


16550965415463.jpg

“안 믿겨요. 클라인펠터가 그렇게 쉽게 입을 열다니. 더 험한 꼴을 볼 줄 알았는데.”

사람이 없는 바닷가에는 오늘도 다른 노을이 내려앉았다.

붉은 해가 푸른 바다에 내려앉을 때 내는 색이 너무 다채로워 리에네는 잠시 걸음을 멈췄다.

블랙이 등 뒤에서 제 체온으로 리에네를 덮었다.

16550965415463.jpg

“왕 앞에서 증언만 하면 신병을 나우크에 넘겨주기로 한 것도요. 당신이 그럴 줄 몰랐어요.”

이런 말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이었다.

1655096541547.jpg

“대가를 보장하면 빨리 입을 열 거라 생각했습니다. 포기가 빠른 성격 같아서.”

16550965415463.jpg

“음……. 내가 알기로도 끈기가 있는 편은 아니었어요.”

1655096541547.jpg

“다행입니다. 왕이 조금이라도 빨리 대공녀와 손을 끊을 테니.”

16550965415463.jpg

“맞아요. 덕분에 나우크로 돌아가는 일이 좀 더 빨라질지도 모르겠네요.”

바닷바람은 여전히 낯설었다.

차고, 습하고, 여러 가지 냄새가 났으며 왠지 모르게 애틋한 감정이 들게 했다.

1655096541547.jpg

“나우크가 벌써 그립습니까?”

16550965415463.jpg

“약간? 하지만 아직은 참을 만해요. 그런데 당신 없이 나 혼자 왔다면 진작 돌아가고 싶어졌을 거예요.”

블랙이 웃으며 리에네의 머리칼을 쓸었다.

1655096541547.jpg

“나는 지금도 꽤 좋습니다. 정말로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16550965415463.jpg

“나우크에 물이 돌아오고, 그래서 내가 걱정할 일이 줄어들면 다른 나라도 가 보고 싶어요.”

1655096541547.jpg

“그렇게 해요. 좋은 곳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16550965415463.jpg

“와. 어떻게 그렇게 좋은 말만 하는 거죠.”

리에네가 몸을 훌쩍 돌려 블랙을 꼭 끌어안았다. 그래서 블랙은 웃음을 지울 틈을 만들지 못했다. 입술이 내내 옆으로 늘어나 있었다.

16550965415463.jpg

“그래도 반지를 돌려받으려면, 대공녀와 한 번은 만나게 되겠죠?”

1655096541547.jpg

“싫습니까?”

16550965415463.jpg

“좋을 리가.”

1655096541547.jpg

“그럼 다른 사람을 통하겠습니다.”

16550965415463.jpg

“으음……. 그럴 수는 없지 않을까요?”

블리니 대공녀가 순순히 반지를 내어줄 것 같진 않았다. 그랬다면 샤르카까지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16550965415463.jpg

“반지는 무엇보다 중요한 거니까 내 투정은 접어 두겠어요. 대신 상황이 허락한다면 대공녀를 만나는 자리에 나도 같이 있고 싶어요.”

1655096541547.jpg

“그건 내가 싫은데.”

16550965415463.jpg

“왜요?”

고개를 들고 자신을 쳐다보는 리에네의 눈을, 블랙이 잠깐 가렸다.

1655096541547.jpg

“무슨 짓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라.”

16550965415463.jpg

“그래서 위험하다면 당신도 마찬가지예요.”

1655096541547.jpg

“꼭 몸을 해치려고 들 거라는 말은 아닙니다. 대공녀는…….”

블랙이 잠시 말을 골랐다.

1655096541547.jpg

“굉장히 쉽게 타인을 불쾌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입니다.”

블리니는 지옥을 묘사한 세밀화를 쳐다보고 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먼발치에서는 강렬하게 눈길을 잡아당기는 화려한 그림인데, 좀 더 다가서면 채색으로 가려 둔 묘사가 드러나는.

블루와렌에서는 현란한 색채였던 블리니가 몇 년 뒤 알리토에서 다시 만났을 때는 묘사가 되어 있었다.

지옥을 믿지 않아도 그런 그림을 내내 보고 있으면 마음 속 어딘가가 뭉개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 것이다.

리에네가 그런 기분을 겪을 이유는 없었다.

선한 사람이니 남들보다 더 견디기 어려울 것이다.

16550965415463.jpg

“그건 너무…… 끔찍한 사람이라는 말로 들리는데요.”

블랙은 대답 대신 바닷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칼을 손가락으로 빗어 넘겼다.

1655096541547.jpg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건 굳이 알지 않아도 됩니다.”

살아 있는 인간이 굳이 지옥을 엿보고 올 필요가 없는 것처럼.

16550965415463.jpg

“뭔가 내 생각하고는 많이 다르네요. 나한테 대공녀는 막연하게 당신의 옛 연인이라는 느낌이었는데.”

1655096541547.jpg

“함께 보낸 시간이 있었다는 걸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과 공주님은 별개로 남았으면 합니다.”

16550965415463.jpg

“음……. 내가 혹시 마음이라도 상할까 봐 걱정하는 거라면 괜찮아요. 라피트 클라인펠터도 형편없는 인간인 건 마찬가지잖아요.”

블랙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1655096541547.jpg

“그 정도라면 이런 말은 안 합니다.”

16550965415463.jpg

“아……. 그러니 더 걱정이 되는데요. 클라인펠터도 별짓을 다 했는데. 나를 강제로 짐마차에 태우기도 했고.”

그러니까 갑자기 걱정이 됐다.

블리니는 클라인펠터보다 몇 배나 더 끔찍하고 질겼으니까.

1655096541547.jpg

“그만 돌아갈까요. 바닷가의 밤은 춥습니다.”

블랙이 리에네를 돌려세웠다.

주변에 인기척은 없다지만 이 장소는 너무 노출되어 있었다. 여관의 담 어딘가에서 숨어서 화살이라도 날리면 어두워 잘 보이지도 않을 것이다.

16550965415463.jpg

“그래요. 해도 다 졌어요.”

블랙이 리에네를 감싸듯 안고 바닷가를 떠났다.

그리고 그 선택은 매우 적절했다.

생각이 아니라 예감이라고 해야 할 정도로, 정말로 지금 이 순간 여관 담 뒤에 누군가가 숨어 있었다.

화살을 든 채.

* * *


16550965292521.jpg

“크억!”

클리마는 화살을 든 자를 보자마자 다가가 주먹을 날렸다.

마음이 급해서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사정을 봐주지 않고 날린 주먹은 상대의 앞니를 깨트렸다.

16550965292521.jpg

“윽, 우우…….”

아마도 암살자일 그가 피를 쏟으며 비틀거렸다. 발밑으로 떨어진 화살을 보자 정신이 돌아왔다. 클리마는 침착하게 암살자의 등 뒤에서 목에 팔을 걸었다.

16550965292521.jpg

“큭!”

16550965292521.jpg

“너는 누구야.”

16550965292521.jpg

“크, 크읍! 큽!”

16550965292521.jpg

“누가 보냈어.”

16550965292521.jpg

“큿, 수, 숨을…….”

16550965292521.jpg

“말 안 하면 부러트릴 거야.”

암살자가 몸부림을 쳤다. 클리마는 커다란 덩치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그를 붙잡고 있었다.

그러나 암살자는 단도를 하나 숨기고 있었다. 몸부림을 치면서 허벅지 안쪽에 묶어 뒀던 단도를 꺼내 클리마를 찔렀다.

16550965292521.jpg

“……아파.”

옆구리를 찔린 클리마가 눈매를 찡그렸다. 암살자는 이때다 싶었는지 힘껏 클리마를 떠밀었다.

16550965292521.jpg

“안 돼.”

클리마는 칼에 찔린 아픔을 참고 암살자를 꽉 붙들었다.

16550965479625.jpg

 

16550965292521.jpg

“내가 놓쳐서…… 공주님이 사라졌어. 이젠…… 다시는 안 돼…….”

16550965292521.jpg

“놔! 어디서 이런 등신 같은 게!”

암살자는 기가 막혔는지 옆구리에 박아 넣은 칼날을 크게 비틀었다.

16550965292521.jpg

“……읏.”

클리마가 작게 비명을 질렀다.

16550965292521.jpg

“놔!”

16550965292521.jpg

“안 돼…….”

암살자가 화살을 쏘려 한다는 것을 알았다. 클리마는 두 번 다시 리에네에게 무슨 일이 생기도록 놔두지 않겠다는 마음에 암살자를 더 힘껏 움켜쥐었다.

옆구리가 몹시 아팠고, 눈앞이 흐려졌다. 손에서 점차 힘이 풀렸다.

16550965292521.jpg

“……어이, 거기 누구야!”

천만다행으로, 누군가가 그들을 발견했다.

뒷마당을 지키고 있던 티와칸이었다.

16550965509232.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