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용서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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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용서할 수 없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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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용서할 수 없는
2022.05.15.
“이런, 씨.”
암살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몸을 돌렸다.
타다닥!
아주 빠른 속도로 암살자가 달아나기 시작했다.
“침입자가 있다!”
커다란 외침이 등 뒤에서 들려왔다.
자칫 일이 실패할 위기라는 것을 알아차린 암살자가 달리면서 활을 들어 올렸다.
지금이 아니라면 기회가 없으리라는 것은 자명했다. 어둠 속에서 암살자의 눈이 번뜩여 목표를 찾았다.
“저기 있었……. 어디 갔지?”
저 멀리 바닷가에서 걸어오고 있었던 목표가 보이지 않았다.
암살자가 빠르게 주위를 훑는데, 거짓말처럼 등 뒤에서 인기척이 생겨났다.
“여기다.”
“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던 게 문제였다.
퍽!
암살자는 바위처럼 단단한 팔꿈치에 얼굴을 얻어맞고 쓰러졌다.
“무기가 없으니.”
퍼억!
이어서 등에 무시무시한 통증이 내리꽂혔다.
방금 전까지 제 활에 걸고 있던 화살을 누가 맨손으로 잡아 제 살에 푹 찔러 넣은 것이었다.
“으아아악!”
암살자의 입에서 비명과 피가 함께 튀었다. 그러다 머리가 콱 밟혔다.
“조용히. 놀라게 하지 마라.”
이어서 놀란 마음을 억지로 다독이는 것 같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로드 티와칸! 어떻게 된 건가요? 다친 데는요? 괜찮은 거예요?”
샤르카와는 다른, 음이 낮고 부드러운 억양 탓에 암살자는 그 목소리의 주인이 그가 오늘 실패한 목표라는 것을 깨달았다.
* * *
“용서 못 해.”
리에네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정신을 잃은 클리마를 방으로 옮겨 치료를 하던 중 나온 말이었다.
칼로 인한 부상에 익숙한 용병들이 상처를 소독하고 독이 발려 있었는지 살폈다. 다행히 독은 없는 듯했다.
하지만 상처가 꽤 깊어 낫는 데 한두 달이라는 제법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 했다.
“렌펠 경은 얼마 전에도 독에 당했는데.”
클리마가 자신을 지키려다 다친 게 벌써 두 번째였다.
창백해져 진땀을 흘리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신마저 아픈 기분이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말했나요?”
랜달 역시 화가 잔뜩 난 얼굴이었다.
“샤르카 왕실입니다. 왕실의 누군지는 모르지만 왕실 마차를 타고 왔다고 합니다. 마차는 깃발도 내리고 장식도 천으로 가려 신분을 감추려 했지만 바퀴의 장식은 빼먹은 모양입니다. 그걸 보고 알았다고 합니다.”
그 말에 리에네가 블랙을 돌아보았다.
“블리니 왕자비인가요?”
“아마도.”
여럿이 걸려 있는 일이었으니 꼭 블리니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장 뚜렷한 동기를 가진 게 블리니였다.
일을 무마시키고자 했다면 클라인펠터를 노리지 나우크의 왕족을 죽이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잘 이해가 가지 않아요. 왜 나였죠? 증인이 될 클라인펠터가 아니라?”
랜달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도 그것까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주군을 노렸을 것 같진 않고요. 만약 암살이 성공했다면 그건 곧 전쟁입니다. 범인은 의외로 블리니 왕자비가 아닌 걸까요?”
“…….”
블랙이 눈매를 일그러트렸다.
감을 잡지 못해서가 아니라 너무도 그런 의도일 것 같아서였다.
“대공녀라면. 거기까지 생각했을지도.”
“으아, 주군. 아무리 알리토의 대공녀가 미친 사람이라고 해도 그렇지, 어떻게 티와칸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생각을 합니까?”
“만약 왕실 내 입지가 위태로워졌다면 전쟁도 고려해 볼 만한 상황이지. 왕실에서는 흔한 일이다.”
“와, 그렇…….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랜달은 어이가 없었는지 말을 더듬었다.
“그렇다는 건 블리니 왕자비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뜻이잖아요.”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겁니다.”
사실 블리니라면 그저 리에네를 죽이고 싶어서 암살자를 보낼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딜레라스 왕비가 증인을 확보한 지금, 블리니의 상황이 좋지 못하다는 것은 확실했다.
“그럼 위기감을 더 느끼게 해 줘요. 렌펠 경 대신 내가 심하게 다쳤다고 해요. 대신 암살자를 통해 범인이 누군지 알아낸 것으로 하면 되겠죠. 정식으로 샤르카 왕실에 항의하면 왕도 끝까지 블리니 왕자비를 감싸지 못할 거예요.”
블랙이 잠시 생각을 이은 뒤에 말했다.
“……. 괜찮은 생각입니다.”
반지와는 별개로 블리니는 암살자를 보낸 것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블랙은 자신이 행복에 취해 너무 물러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블리니가 보낸 시답잖은 군대의 목을 돌려보낸 정도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49명의 죽음 앞에 블리니는 눈도 한 번 깜박이지 않았을 것이다.
더 무겁고 확실한 대가가 필요했다.
“열을 추려. 지금 샤르카의 왕을 만나러 가겠다. 그리고 페르모스에게 전언을 보내. 뭐든 가장 빠른 방법으로.”
“알겠습니다. 전언은 뭐라고 보냅니까?”
“전원을 국경으로 보내라고.”
“네?”
“말이 통하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그…… 네, 알겠습니다.”
전쟁이라는 말에 리에네가 당황했다.
“티와칸을 전부 부른다고요? 그건 전쟁이잖아요.”
“샤르카의 왕이 정말 왕이라면, 전쟁은 없을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아닐 수도 있잖아요.”
“만일 그렇다면 그다음부터는 공주님의 몫이 아니라 내 몫입니다. 걱정 말아요. 못난 꼴을 보이지는 않을 테니.”
그 반대였다.
이미 자신이 샤르카 내에 있으니 벌써 반은 이긴 싸움이었다. 샤르카가 국경 밖의 움직임에 허둥댈 동안 그는 빠르게 궁성을 치고 항복을 받아내면 될 일이었다.
블랙은 걱정으로 얼룩진 작은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 반지를 너무 오래 잊고 있었습니다. 내 진짜 결혼 선물은 그 반지가 돼야 했습니다. 늦었지만 찾아오겠습니다.”
“……만일 나우크의 물과 당신 목숨 둘 중의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당신을 고를 거예요. 그게 무슨 말인 줄 알죠?”
리에네가 뜻밖의 말을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웃음이 먼저 나왔는데, 블랙은 그게 리에네가 아니라 자신이 할 법한 말이라서라는 것을 한 박자 늦게 생각해냈다.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공주님이 그런 말을 하면 무슨 뜻입니까?”
웃는 그에 반해서 리에네는 진지했다.
“나를 그런 형편없는 군주로 만들지 말라는 뜻이에요. 둘 중 하나를 골라야 하는 상황은 절대 안 돼요.”
블랙은 리에네가 절대 하지 않을 일을 하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만큼 걱정을 한다는 뜻이었다.
그만큼 어떤 일도 없이 무사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약속하겠습니다.”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커다란 충족감이 밀려들었다.
맹세의 뜻으로 리에네의 손등에 키스를 하던 블랙은, 그 손을 그대로 당겨 리에네를 덥석 안았다.
“그럼 다녀와요. 무사히.”
살결을 물들이는 그의 체온을 느끼며 리에네가 말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알겠습니다.”
블랙이 열 명의 티와칸과 함께 샤르카의 궁성으로 달려갔다.
그러고 나서 클리마가 잠깐 눈을 떴다 다시 잠이 들었다.
* * *
블랙은 성문을 빠르게 여는 법을 택했다.
힘으로 열려면 시간이 걸렸다. 누군가 문을 열어 줘야 했다.
“블리니 왕자비에게 전해. 티와칸의 수장이 왔다고.”
밤이 되어 막 도개교를 끌어 올리려던 경비대는 그저 황당했다.
하지만 검은 깃발을 어깨에 걸치고 온 저들을 티와칸이 아니라고 할 만한 증거는 없었다.
어찌나 빠르게 달려왔는지 말들이 몸에서 허연 김을 뿜었는데, 그 모습이 꼭 안개를 타고 온 사신들 같았다.
보기만 해도 왠지 소름이 쭈뼛쭈뼛 돋는 게 티와칸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 그럼…… 전할 테니 곧…….”
경비대가 왕자궁을 향해 달려갔다.
예상했던 시간이 지나자 답이 도착했고, 경비대는 얌전히 문을 열었다.
그러나 티와칸이 도착한 곳은, 왕자궁이 아니라 본궁이었다.
* * *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렇게 묻는 왕에게 친위대장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티와칸은 길을 막는 친위대를 힘으로 떠밀고 안으로 들어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벌어졌다.
칼등으로 얻어터진 친위대장은 늑골이 부러졌다. 숨도 쉬기 버거웠지만 정신을 놓을 수도 없었다.
“티와칸의 수장께서 알현을 요청하기에 모셔 왔습니다.”
친위대장이 찢어진 입가로 피를 뚝뚝 흘리며 저런 말을 하는데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왕은 없었다.
“……지금 당장.”
왕이 이 가는 소리를 손가락질로 묻었다. 문을 가리는 손가락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나가거라. 당장.”
“경계할 필요 없습니다, 전하. 목을 따러 온 게 아니니. ……오늘은.”
블랙이 인사 대신 손에 든 칼을 친위대장에게 턱 넘겼다.
엉겁결에 칼을 받아든 친위대장은 생각지도 못한 무게 탓에 뒤로 헛발질을 했다.
“앉으십시오.”
제 집처럼 의자를 손으로 가리키는 블랙을 보며 왕은 사실상 의미가 없는 말을 했다.
“여기는 짐의 사실이다. 짐의 사실에서 누가 짐에게 그런 말을 한단 말이냐. 짐은 이 시간에 누구를 만날…….”
“앉아.”
블랙의 목소리가 한 겹 차가워졌다.
“내가 얘기만 하고 가겠다는 마음을 바꾸기 전에.”
“…….”
샤르카의 왕이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도록 친위대가 아무도 달려오지 않았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무, 무슨…….”
툭!
쩔그렁!
블랙은 왕 앞에 까만 주머니를 던졌다. 둔탁한 소리로 보건대 안에 들어 있는 것은 금화나 그런 것이었다.
“왕자비의 물건이라더군요.”
“……뭐?”
“나우크의 공주에게 화살을 날린 자가 한 말입니다.”
“……무, 무슨…….”
비로소 왕은 티와칸의 수장이라는 자가 제 친위대를 짓밟으며 여기까지 온 이유를 알아챘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 하는……. 왕자비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 냐.”
이유를 알아채자 손이 떨렸다. 왕은 얼른 손을 아래로 내려 떨림을 감추었다.
믿기지도 않을뿐더러 믿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블리니가 한 짓은 티와칸을 제 집 앞마당으로 불러들이는 일이었다. 그 결과가 벌써 눈앞에 있었다.
“원한다면 화살을 쏜 자를 데려오겠습니다. 아직 목은 붙어 있습니다. 다른 곳은 아니지만.”
“…….”
조금 빠르게 들리는 상대의 말은 아주 뚜렷하게 귀에 박혀 들었다.
샤르카의 왕은 티와칸의 수장이 몹시 분노한 상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화가 났지만 참고 있다는 것도, 그렇지만 언제라도 분노를 터트릴 수 있겠다는 것도.
여기가 샤르카 왕국의 궁 안이라고 해도.
왕은 애가 타는 곁눈질로 친위대장을 살폈다.
지금이라도 친위대나 근위대가 나타나 이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그를 구해 주길 바라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밖은 여전히 조용했다.
“본국의 왕자비에게 암살자를 부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 아이는 얼마 전 남편을 잃고 슬픔에 잠겨 그 무엇도…….”
이번에도 왕은 말이 잘렸다.
“딜레라스 비 전하에게 나우크가 드린 선물이 하나 있습니다. 블리니 왕자비가 가졌다는 아이가 자신의 아이라는 것을 증언할 인간이. 왕자비는 뒤늦게라도 손을 쓰고 싶었나 봅니다.”
거기까지 말한 블랙이 홱 돌아섰다.
그는 쓰러질 것처럼 비틀대며 제 칼을 들고 있던 친위대장에게서 칼을 가져왔다.
쿵!
칼끝이 바닥을 찍었다.
대리석 바닥에 쩍 금이 가는 것을 친위대장과 왕이 똑똑히 보았다.
“나는 왕자비에게 책임을 묻고 싶습니다. 내일까지 내가 있는 곳으로 왕자비를 넘기십시오. 샤르카 왕실은 왕자비의 일에 어떤 관여도 하지 않겠다는 왕의 서약과 함께. 서약이 잘 지켜지는지 국경 밖에 대기시켜 둔 티와칸 전원이 확인하겠습니다.”
“그, 그…….”
그건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