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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 한 번의 쓸모 (118/145)


118. 한 번의 쓸모
2022.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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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관을 쓸 머리가 있으니 말귀를 알아들었으리라 믿겠습니다.”

탁!

미련 없이 걸음을 떼려던 블랙이 잠깐 발을 멈추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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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말한 건 전부 나우크의 공주가 살아 있을 때 유효합니다. 만일 내 아내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티와칸의 수장이 옅은 푸른 눈을 칼날처럼 좁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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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왕국을 전부 부수겠다.”

쾅!

티와칸의 수장이 후려치듯 문을 열었다. 고막이 얼얼한 소리와 함께 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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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은 왜 친위대가 오지 않았는지 보게 되었다.

사실 앞에는 친위대의 시체가 저 복도 끝까지 끝도 없이 늘어져 있었다.

하나둘씩 허겁지겁 달려오다 차례로 목이 잘리거나 가슴팍이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멀어져 갔다.

왕은 먹먹해진 귀를 저도 모르게 마구 잡아당기고 있다가 뒤늦게 소리를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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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비를……! 왕자비를 데려와! 어서!”

멋대로 들어와 왕궁을 휘젓고 돌아가는 블랙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 같은 건 할 수도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국경 밖에 있다는 나머지에게 국경을 넘을 이유를 주는 것이었으니까.

지금은 오히려 블리니를 살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사실이 아닐 것이다. 오해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블리니가 그런 짓을 할 리 없었다.

하지만 왕자궁에는 블리니가 없었다.

근위대에 한바탕 난리가 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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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을 수가 없네.”

블리니는 계속 그런 말을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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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짓을 한 거지?”

티와칸의 수장이 찾아왔다고 했을 때 올 게 왔다 싶었다. 블리니는 왕실 근위대를 왕자궁으로 불러들였다.

반갑긴 해도 준비는 하고 있어야 했으니까. 오늘따라 본궁에 근위대 숫자가 적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 다음 성문을 열게 했다.

하지만 블랙은 오지 않았다.

그가 방향을 틀어 본궁으로 갔다고 했을 땐 뭔가가 제 속에서 빠드득 비틀리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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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랬을까. 어차피 나를 보러 왔을 텐데.”

암살이 성공해 나우크의 공주가 죽었다면 블랙은 더더욱 자신을 찾아야 했다.

화풀이 정도는 받아 줄 생각이었다. 남아 있는 감정을 전부 쏟아내는 걸 지켜봐 주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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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알 거잖아. 내가 얼마나 그 혼인이 싫었는지.”

그건 다른 말로 자신이 아직 청혼에 대한 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렇게나 거리낌 없이 속마음을 드러내고 있는데, 왜 거기에는 답이 없는 걸까.

왜 왕비니 왕이니 하는 것들을 끌어들이는 걸까.

왜 직접 반지를 가지러 오지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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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자비 전하…….”

시녀들이 생각에 잠긴 블리니의 눈치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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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 가셔야 합니다. 비서관께서…… 아무래도 별궁에 손을 쓸 방도가 없으니 자리를 피해 몸을 보전하시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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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것 같은 목소리에 블리니가 비로소 고개를 치켜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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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를수록 좋다 하였습니다. 자칫…… 왕자비 전하께서 위험해지실 수 있다고…….”

괜한 경고가 아닐 것이다.

클라인펠터를 딜레라스 왕비에게 넘긴 게 블랙이었으니 그는 자신이 벌인 짓을 전부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이제 왕도 같은 사실을 알게 됐다는 뜻이었다.

물론 왕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리라는 확신은 없었다. 그가 여전히 제 편을 들리라는 확신도 없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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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이라…….”

블리니는 사내를 두고 모험을 하지 않았다.

사내만큼 부정확한 것도, 쉬이 흔들리는 것도 없었다. 한 번 쓰고 버리는 게 뒤탈이 없었다. 왕도 비서관도 쓰임새를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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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리해야지.”

블리니가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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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을 싸. 알리토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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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왕자비 전하.”

내심 발을 구르고 있던 시녀들이 부리나케 움직였다. 언제라도 살 수 있는 것들은 빼고, 돈과 보석만을 챙겼다.

왕자궁에 와 있던 왕실 근위대장이 길을 안내했다.

그 역시 한 번 쓰다 버릴 사내였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가장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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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근위대장이 왕자비의 편에 섰다고 해도, 대부분의 근위대는 왕의 명령을 따랐다.

그들은 왕자비를 데려오라는 왕의 명령에 따라 사라진 왕자비를 뒤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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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빌어먹을.”

근위대장은 잘못된 줄을 골랐다는 것을 느꼈다.

왕자비가 지금 성 밖으로 나갈 일이 생겼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는 크게 문제가 되리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성 밖에 새 남첩이라도 만나러 가는 줄 알았다. 왕족들이야 게을러서 보통은 제 둥지로 사람을 끌어들이지만, 요새는 왕이 눈치라도 주나 싶을 뿐이었다.

그런데, 뭔가 잘못되었다.

사방팔방 왕자비를 찾는다는 외침이 들려왔다.

미로가 있는 정원으로 숨어들어 경비대 마사로 가려던 계획이 바뀌었다. 후원에서 이어진 수로를 타고 내려가 배를 이용해 빠져나가야 했다.

몸을 틀어 방향을 바꾸면서도 근위대장은 갈등했다. 갈등이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아무래도 도망치는 것 같은 모양새를 한 왕자비의 명령을 따르는 건 바보짓 같았다.

묵직한 금화 주머니를 받긴 했지만 자칫 근위대 자리가 간당간당해질 수 있는 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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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왕자비 전하…….”

근위대장은 수로로 향하던 숲길에서 걸음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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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히 말씀을 해 주셔야겠습니다. 지금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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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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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정말로 도주가 맞았다.

근위대장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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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저는 더 이상 모실 수가 없습니다.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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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블리니 왕자비가 눈매를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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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날 때부터 샤르카의 사람임을 헤아려 주십시오. 길은 저쪽입니다. 수로를 따라 걷다 보면 배를 묶어 둔 곳이 있을 겁니다. 그 배를 타고 가시면 됩니다.”

그만 발을 빼려는 근위대장을 블리니가 붙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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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도 안 될 줄은 몰랐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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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그게 무슨……. 아니, 손을 놓으십시오. 저는 이 이상 국왕 전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습니다.”

그나마 돈을 받았으니 가는 건 못 본 척해 주겠다는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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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늦은 일이야.”

블리니가 근위대장에게 바싹 붙어 서서 입술을 달싹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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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네 목을 붙여 둘 거라는 생각은 버려. 헛되고 헛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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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말을 하시는 겁니까.”

근위대장이 마른침을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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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에 하나 내가 붙들리면 왕은 네 이름도 알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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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그러지는 근위대장의 입술에 블리니가 손가락을 얹어 말을 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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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알리토에 무사히 도착하면 얘기가 달라지겠지. 네가 바라는 건 뭐든 손에 쥐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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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비대장은 고개를 뒤로 젖혀 블리니의 손을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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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안 됩니다. 제 가족이 모두 샤르카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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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 새로 만들면 되지 않나? 말했잖아. 뭐든 얻게 될 거라고. 신분, 재산, 여자. 뭐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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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어떻게 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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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여기 남으면 다 죽게 되는 건 마찬가지. 같이 죽으면 가족이 무슨 소용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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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위대장이 눈동자를 흔들었다.

뭐든 얻게 되리라는 말은 눈앞에서 움직이는 붉은 입술처럼 유혹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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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쪽으로 가 봐! 수로로 연결되는 길이 있다! 대장이 함께 있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숲 입구에서 들려오는 외침은 공포가 되었다.

블리니 왕자비의 말이 맞았다. 이제는 발을 뺄 수 없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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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맹세하십시오. 뭐든 해 준다는 말을 지키겠다고. 저는 지금 이 순간부터 왕자비 전하의 목숨을 구한 사람입니다.”

맹세는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맹세 또한 일회용이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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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맹세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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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맹세의 증거를.”

근위대장은 블리니의 머리를 끌어당겨 좀 전부터 어른대던 붉은 입술을 허겁지겁 삼켰다.

블리니가 눈을 치켜뜬다 싶더니 근위대장의 혀를 피가 나도록 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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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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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증거로 삼아.”

블리니가 입술에 묻은 피를 핥으며 말했다.

근위대장은 별수 없다는 듯 입 안에 고인 피를 꿀꺽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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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쪽입니다. 길을 따라오는 것 같으니 숲을 가로질러 가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소리를 내지 마십시오.”

다들 입을 다물고 걸었다.

혀에 묻은 피 냄새가 비렸다.

* * *

랜달이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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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만큼은 운이 안 따라 준 모양입니다.”

도망친 블리니 왕자비가 수로에서 붙잡혔다는 소식은 다음 날 아침에 전달되었다.

정보상이 흥분해서 직접 여관으로 달려왔을 정도였다.

현재는 왕자궁 어딘가에 갇혀 있다고 하는데, 왕이 노발대발하고 있고 딜레라스 왕비는 다시 본궁으로 돌아오려 간을 보는 중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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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히 궁을 빠져나갔어도 알리토까지 가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국경에 도착할 즈음이면 길이 막혔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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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렇지.”

그때쯤이면 티와칸이 국경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도주는 자충수였다.

이제 블리니의 변명을 들어줄 인간은 없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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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이 대공녀를 넘기긴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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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두고 봐야겠지. 알리토에서 움직일 수도 있다. 대공이 딱히 딸을 애지중지하지는 않았지만 체면을 챙기려 들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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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움직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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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이 선택을 하겠지. 딸일지, 아들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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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퍽 난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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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도 않아. 알리토에 광산이 남아 있던가? 규모가 괜찮으면 바꿔 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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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의외라는 듯 눈을 끔벅이던 랜달이 곧 의미를 깨닫고 손뼉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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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모르지만 부관은 아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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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산이 아니라 해도 뭐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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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네, 없진 않을 겁니다. 알리토 공국이니. 요새를 건설할 돈은 거기서 다 나오겠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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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그렇게 되면 혼인 선물을 할 생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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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엇, 선물을 또 하신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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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덩치가 큰 건 아직 안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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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음……. 네, 그렇……지요.”

블랙이 너무 당연한 듯 말을 하는 바람에 랜달도 잠시 헷갈렸다.

원래 혼인 선물은 그렇게 종류별로 주고, 주고 또 주는 것인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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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가 덩치가 커요?”

이렇게 묻는 사람은 리에네였다.

방끼리 연결된 문을 열고 들어오다 마침 마지막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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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얘기 아니었습니다. 더 자지 그랬습니까.”

블랙은 랜달이 움찔할 정도로 빠르게 움직여 리에네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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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잤어요. 샤르카 왕실에서 들려온 소식은 없나요?”

말은 그렇게 해도 리에네가 늦도록 클리마를 돌보았다는 걸 블랙은 알고 있었다.

클리마는 아직 혼자서 거동을 못 하는 상황이었다. 리에네가 하는 일은 사실상 지켜보는 것뿐이었는데, 잠이 오지 않을 만큼 걱정이 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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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정보상이 다녀갔습니다. 대공녀가 도주하다 붙잡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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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저런……. 그럼 왕의 비호는 끝났나 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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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직 대공녀를 넘겨준다는 말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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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군요. 그럼 나도 당분간 더 환자인 척을 해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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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안에 연락이 올 겁니다.”

블랙은 아침잠이 묻어 있는 눈가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듯, 입술을 문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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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을 시간인데. 먹고 싶은 건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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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그 노랗고 말캉한 과일이 먹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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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겠습니다.”

샤르카에 온 뒤로 블랙과 내내 붙어 있는 통에 눈치가 조금 빨라진 랜달이 재빨리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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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에 두 분의 식사를 준비하라 이르겠습니다. 천천히 말씀 나누십시오.”

랜달이 후다닥 방을 떠났다.

블랙은 밖에서 안이 보이지 않도록 적당히 커튼을 친 뒤 리에네를 향해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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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 전에 하고 싶은 건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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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서 묻는 거죠.”

리에네가 웃으며 두 팔을 벌렸다. 블랙도 마주 웃으며 그 팔에 슥 몸을 밀어 넣었다.

클리마가 다치는 일만 없었어도 더없이 행복한 아침이었을 것이다.

샤르카의 왕이 전갈을 보낸 것은 오늘이라는 기한을 아슬아슬하게 넘기지 않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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