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반지의 주인 (1)
(119/145)
119. 반지의 주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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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 반지의 주인 (1)
2022.05.22.
시녀들은 밤새 잠도 없이 울었다.
블리니가 시끄럽다며 화를 내지 않았다면 지금까지도 울고 있었을 것이다.
수로에서 배를 타기 전 붙들린 블리니는 도로 왕자궁으로 끌려왔다.
근위대장은 재빠르게 투항했으나, 분노한 왕은 참지 못했다. 근위대장은 어젯밤 왕의 눈앞에서 목이 잘렸다.
어떻게 알았는지 비서관도 목이 잘렸다. 딜레라스 왕비가 웃는 소리가 왕자궁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와, 왕자비 전하……. 이제 그만 식사를 하셔야 할 텐데…… 흐윽!”
시녀 하나가 정신을 차리고 말을 건넸다. 그마저도 울음이 반이었다.
어제 그러고 난 뒤로 꼼짝없이 방에 갇힌 뒤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했지만 허기는 없었다.
“정신 차려. 식사는 없어.”
“네, 왕자비 전하? 식사가 없다니요.”
“도망치다 잡혀 왔는데 때맞춰 식사를 챙겨 줄 리가. 속이 시끄럽다. 입 다물고 있어.”
“그, 그게 무슨……. 그러면 저희는 어, 어떻게…….”
새파랗게 질린 시녀가 입술을 덜덜 떨며 물었다.
“그건 나도 모르지.”
블리니가 턱선을 비틀었다.
근위대장의 목이 잘릴 때 근위대가 떠드는 얘기를 들었다.
본궁의 문을 강제로 열고 들어간 블랙이 암살 운운하며 자신을 내놓으라 했다고 한 것 같았다.
이제야 마주할 마음이 들었나 싶었는데 친위대를 열셋이나 죽였다는 얘기를 들으니 느낌이 좋진 않았다.
나우크의 공주가 죽으면 국경 밖의 군대를 이끌고 오겠다는 말을 했다고도 했다.
……그게 진심인 걸까. 설마.
블리니가 엄지에 끼고 있는 반지를 문질렀다.
전쟁을 불사할 정도로 나우크의 공주에게 마음을 주고 있는 걸까.
“설마.”
나우크를 되찾으려 했다는 건 이해했다. 진작 되찾을 수 있었으면서 그렇게까지 시간을 끈 이유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원했으니 나우크로 갔을 것이다.
혼인을 한 것도 이해했다.
자신이라도 그랬을 것이다. 가장 쉽고 비용이 적게 들 테니까.
그가 그들의 관계에 이렇다 할 미련을 두고 있지 않다는 것도 알았다.
애초에 여자에게 마음을 줄 사내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무자비한 정복자였고, 자신이 정복한 것에 애정을 품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난 사내였다. 그러니 나우크의 공주에게도 자신과 똑같아야 했다. 얻어낸 다음 미련 없이 떠나야 했다.
그런데, 아닌 걸까.
나우크의 공주는 다른 걸까.
“……어째서.”
블리니가 엄지를 입으로 가져가 반지를 질근 물었다. 금으로 된 테에 이가 만든 흠집이 무수했다.
시녀들이 겁을 먹고 블리니의 표정을 살폈지만, 블리니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턱이 아리도록 이를 꽉 물고 있던 그 순간이었다.
쾅쾅!
밖에서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국왕 전하께서 오셨다! 문을 열어라!”
……올 게 왔다.
목숨을 흥정할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이.
* * *
“어떻게 그럴 수 있단 말이냐! 어떻게! 어떻게 짐에게!”
왕에게서는 피 냄새가 났다. 근위대장과 비서관의 피 냄새였다. 그 외에도 몇이나 죽였는지 모를 일이었다.
“…….”
블리니는 대꾸 없이 카우치에 기댄 자세에서 턱을 괴었다.
“대답해!”
왕이 블리니의 턱을 잡아채 강제로 눈을 마주쳤다.
“……그렇게나 죽였는데, 아직도 분이 덜 풀리셨나요?”
“대답을 하란 말이다! 대답을!”
시녀들은 얼어붙어서 새파래진 얼굴로 숨도 쉬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채 이마를 바닥에 대고 엎드릴 뿐이었다.
“무엇에 대한 답을 원하시는지요.”
“무엇에 대한 답이라니! 뻔하지 않느냐.”
“아뇨, 그렇지 않아요.”
블리니가 제 턱을 우악스럽게 움켜쥔 왕의 손등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쓸어내렸다.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을 하시는지 통 모르겠는데. 내가 뭘 어쨌다는 거죠?”
“……뭐……라고? 뭘 했느냐니. 그걸 몰라 묻는 게냐?”
“말을 안 하니 알 수가 있을까요. 대체 뭘 물어보시는 건데요.”
왕이 이를 갈더니 내뱉었다.
“네가 가졌다는 아이. 그리고 바셰드의 죽음.”
“바셰드가 죽은 게 이제 와서 문제가 되나요? 전하께선 기뻐하셨잖아요.”
“뭐? 짐이 대체 언제……!”
“한 방울의 눈물도 흘리지 않으셨죠. 장례식은 짧게 끝내셨고요. 장례식 이후 어떤 애도도, 추모도 없었어요. 그런 죽음을 이제 와 슬퍼하기라도 하겠다는 건가요?”
“……그럼 지금 네 말은, 네가 정말로 바셰드의 죽음에 손을 썼다는 말이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을 뿐이죠. 그런 말로 전하를 통해 무언가 이익을 얻겠다는 것이겠고요. 그 말을 누가 했나요?”
왕이 말을 섞기 시작했으니 승산은 제게 있었다.
“비 전하가 아닌가요? 비 전하라면 그리 할 만도 하지요. 나를 싫어하니까. 누구에게든 아들이 죽은 책임을 지게 만들고 싶을 테니까.”
“…….”
딜레라스가 클라인펠터를 왕 앞에 들이댔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투정을 다 받아 줄 수는 없잖아요. 죽은 자식한테 매달린다고 제 집안은 엉망으로 만들어 놓으면 더는 투정이라 할 수도 없고요. 안 그래요?”
“그럼 왜…… 도망을 친 게냐.”
“비서관이 도망치라고 해서요. 딜레라스 왕비가 군대라도 보낸 줄 알았어요. 본궁이 시끄럽긴 했잖아요.”
“…….”
왕이 미간을 좁혔다.
말수가 적어지는 것은 좋은 징조였다. 턱을 움켜쥔 손도 점차 느슨해졌다.
“전하께서 오셔서 다행이에요.”
느슨해진 손목을 블리니가 쓰다듬기 시작했다. 그 은근한 손짓을 왕이 굳은 눈매로 쳐다보았다.
“피곤해요. 이만 쉬고 싶어요.”
“……아이는.”
하지만 왕은 쉽게 의심을 놓지 않았다.
“네가 가졌다는 아이는 왕실의 핏줄이 맞는 게냐?”
“전하.”
블리니가 나긋하던 표정을 차갑게 바꾸었다.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아무리 전하라 해도 하지 말아야 할 말이에요.”
“대답을 해. 왕실의 핏줄인 게냐?”
답은 블리니도 알지 못했다.
“설마 아닐까 봐.”
블리니가 아는 건 누구의 씨든 상관없이 자신이 낳는 아이는 왕족의 삶을 살게 되리라는 점이었다.
“이제 그만 해요. 전하께서 보고 싶은 게 내 목이 교수대에 걸리는 꼴이 아니라면. 아시잖아요. 딜레라스 왕비가 하고자 하는 대로 끌려가면 결국 결론은 그렇다는 걸. 정말로 내가 사라지길 바라세요?”
“…….”
왕의 눈이 저울의 추처럼 흔들렸다.
사라지지 않기를 바랐다.
저 젊고 싱싱한 육체가 매일 손이 닿는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했다. 저 몸이 낳을 왕실의 핏줄을 원했다.
그러나 원하는 것을 가지려면 대가가 필요했다.
티와칸의 수장 또한 블리니를 원하고 있었으니까.
“하나 더.”
“뭐가 더 있나요?”
“왜 나우크의 공주에게 손을 댔느냐.”
“…….”
“티와칸의 수장은 자신이 데려온 선물 때문이라는데 그게 아니라면 다른 이유가 있어야지.”
블리니는 저도 모르게 일그러지려는 얼굴 근육에 힘을 주었다.
“내가…… 그런 게 아니라면?”
“정말이냐? 암살자가 네 물건을 내놓았는데도?”
“그야 누가 훔쳐 가서 덮어씌우려는 거겠죠. 내가 나우크의 공주를 죽일 이유가 대체 어디 있다고.”
그 말은 블리니의 실수였다.
좀 더 정교한 거짓말을 했어야 했다.
“……그렇다면 바셰드 군 오십은 왜 보낸 게냐?”
“…….”
그 말에 아차 싶었다.
왕은 블리니가 나우크로 보냈던 오십의 죽음을 눈감아준 당사자였다.
“나우크에 손을 쓸 이유가 있었던 게 아니라면.”
“그건…….”
“그게 대체 무엇이냐.”
바셰드 군 50, 정확히는 49명의 죽음이 있었기에 왕은 블리니가 암살자를 보냈다는 말을 부정하지 못했다.
단지 왕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믿고 있었다. 티와칸의 수장이 주장하는 대로, 아이의 친부가 누군지 입을 막으려던 이유가 아니라.
이유도 없이 군대를 보내고 암살자를 보낼 수는 없었다. 블리니에게는 나우크의 공주를 없애고 싶은 이유가 있었다.
“짐이 티와칸과 전쟁을 감수해야 할 만한 이유겠느냐?”
“…….”
입은 다물었지만 블리니는 필사적이었다.
필사적으로 답을 찾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리에네를 죽이고 싶어 하는 한 가지 이유가 너무 선명해서였다,
“내가 암살자를 보낸 게 아니에요.”
“군대는 보내지 않았느냐.”
“…….”
말문이 막혔다.
왕은 블리니가 이러는 걸 처음 보았다.
“내게 말을 못 할 이유더냐?”
“…….”
아닌 척했지만 눈썹이 파르르 흔들리는 것까진 감추지 못했다.
“그렇다면 티와칸의 수장이 한 말이 사실이겠구나.”
“아니, 그건 아니…….”
“아니면.”
곤란하면 습관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반지를 물려던 블리니의 손이, 왕의 손에 부딪쳤다.
“……이 반지. 짐은 늘 그게 네 손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지.”
왕이 반지를 보았다.
어지간해서는 빼는 일이 없는, 아름다운 왕자비에게는 너무 헐겁고 굵직한 반지를.
“반지의 주인이 따로 있는 게냐?”
“새삼 그걸 왜 물어요.”
“네가 답을 하지 않으니.”
“…….”
말이 또 막혔다.
“반지를 이리 다오.”
왕이 블리니의 손을 쥐고 엄지에서 반지를 뽑으려 들었다.
“하지 마요.”
블리니가 손을 오므렸다.
그 모습도 아주 이상했다. 반지 같은 물건에 애착을 갖는 블리니라니, 너무 생소했다. 그 어떤 보석을 안겨 주어도 블리니의 반응은 늘 같았다.
“내놔.”
“왜 애 같은 짓을 하고 그러세요. 이걸 가져가서 뭘 어쩌려고.”
“누가 주인인지 알아보겠다. 혹시 모르지. 티와칸의 수장이라면 아는 일일지도. 알리토에서 인연이 있다 하지 않았느냐?”
블리니의 안색이 변했다.
“안 돼. 못나게 굴지 마세요. 반지의 주인이 누군지 왜 중요하죠?”
그 이유는 블리니가 말하고 있었다. 달라진 안색과 불안정해진 눈짓으로.
“내놔. 아니면 짐도 너를 지킬 수 없다.”
“지키지 않겠다면? 어떻게 하겠다는 말씀인데요? 티와칸의 수장이 시키는 대로 얌전히 나를 넘겨주겠다는 건가요?”
“그리되겠지. 그러니 반지를 내놓아라.”
“싫어. 차라리 그렇게 해요. 나를 그 남자한테 데려가.”
“무어라? 그 반지가 그리 아깝단 말이냐?”
왕은 일이 틀어진 지금, 그 반지 하나가 블리니의 담보라는 것을 몰랐다.
“그렇다니 꼭 알아내야겠다.”
왕은 한껏 오므린 손가락을 억지로 펴서 반지를 빼려 들었다. 힘으로는 감당할 수가 없었던 블리니가 대뜸 왕의 뺨을 후려쳤다.
짜악!
처음에는 정적이 감돌았다.
아무도 방금 벌어진 일을 믿지 못해 입만 벌리고 있었다. 왕도 마찬가지였다.
“……감히!”
왕이 뒤늦게 노기를 터트리려는 순간, 블리니가 재빨리 왕을 끌어안고 귓가에 속삭였다.
“반지는 놔둬요. 이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대신 다른 걸 하세요. 뭐든 전하께서 원하는걸.”
“이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블리니가 이렇게 절박하게 군 적도 없었다. 왕은 블리니를 홱 떠밀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두고 짐에게 이리 군다는 말이냐. 그걸 믿으라 하면 안 되지.”
왕은 비틀대는 블리니를 보며 눈보라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밖에 들어오너라.”
왕실 근위대에게 하는 말이었다.
철컥, 문이 열리고 근위대가 들어섰다.
“예, 전하.”
“왕자비에게서 반지를 가져오너라.”
“뜻대로.”
어젯밤 근위대장의 죽음을 겪은 근위대는 정체 모를 독기가 잔뜩 올라 있었다.
저벅저벅!
블리니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근위대를 바라보다 손가락을 입에 집어넣었다.
“……읏!”
목이 꿀꺽 움직이는 것을 다들 보았다.
“뭐 하는 짓이야! 삼키지 못하게 해!”
왕이 소리쳤으나 이미 늦었다.
블리니는 반지를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