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반지의 주인 (2)
(120/145)
120. 반지의 주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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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0. 반지의 주인 (2)
2022.05.25.
조용한 듯 보여도 여관은 내내 긴장감이 감돌았다.
블리니 왕자비를 넘겨받기로 한 기한이 오늘까지였다.
사람을 직접 보내거나 답변을 보낼 수도 있었지만 군대를 보낼 수도 있었다.
어느 쪽이든 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리고 리에네의 침실에도 긴장이 피어났다.
조금 맥락이 다른 긴장이긴 했다.
“뜨겁잖아요. 식혀야죠.”
“…….”
블랙은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죽 그릇을 들고 있었다. 숟가락에 죽을 가득 퍼 올린 그는 리에네의 말을 듣고 동작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덜어 내세요. 너무 많아요. 그러면 잘 식지 않아요.”
“알겠습니다.”
죽을 조금 덜어 낸 그가 숟가락을 공중에 들고 가만히 있었다.
“뭐 하세요?”
잠시 지켜보던 리에네가 물었다.
“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제 식어요. 불어서 식혀야죠.”
“…….”
죽을 담은 숟가락과, 리에네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던 블랙이 고개를 끄덕이고 입바람을 불었다.
후우…….
동작은 깔끔하고 주의 깊었으나 표정이 없었다.
“그 정도면 된 것 같아요.”
“그럼.”
블랙이 몸을 옆으로 틀어 침대에 기운 없이 누워 있는 클리마를 바라보았다.
클리마는 가엾게도 얼굴이 온통 새빨개진 채 블랙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입을 벌려.”
“어, 네……. 네, 네…….”
클리마가 최선을 다해 입을 벌렸다.
블랙이 그의 입에 입바람을 불어 식힌 죽을 넣어주었다.
“죽은 뜨겁지 않나요? 괜찮아요, 렌펠 경?”
“어, 네…… 네네…….”
클리마가 황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블랙은 별 말 없이 다시 죽을 퍼서 식혔다.
“입 벌려.”
“네에…….”
원래도 과하게 순한 성격의 클리마는 계속 이렇게 먹어야 하겠냐는 말은 하지 못했다. 음식을 입이 아니라 콧구멍으로 먹는 기분이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블랙도 썩 좋은 표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환자에게 따듯한 죽을 식혀서 한 입씩 먹이는 이 친밀한 행위를 리에네가 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역시 한다고 하길 잘했다. 보고 있었다면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잘하시네요.”
리에네는 묵묵히 죽을 먹이고 먹는 두 남자를 보며 흐뭇한 얼굴을 했다.
클리마를 돌보는 건 당연히 제 몫이라 여겼는데, 블랙이 끼어들어 이상하긴 했지만 썩 나쁘진 않았다.
“다행입니다.”
“아, 벌써 그릇이 다 비었어요. 더 가져올까요?”
그 말에 클리마가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아, 아니…… 괘, 괜찮습니다.”
“죽이 싫으면 다른 건요?”
“아, 아니……. 정말로 괜찮습니다…….”
“더 먹으면 좋을 텐데. 하지만 억지로 먹는 건 더 나쁠 테니 나중에라도 더 들도록 해요.”
“네, 네에…….”
클리마는 밥을 먹기 전보다 묘하게 더 기운이 없어진 모습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리에네에게는 짧고, 클리마에게는 아주 길었던 죽 먹는 시간이 막 끝나가던 참이었다.
쿵쿵쿵쿵!
계단을 마구 뛰어오르는 소리가 침실까지 들려왔다.
“주군! 급한 일입니다!”
랜달이었다.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소리부터 치는 탓에 급한 용무라는 것을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문을 열게요.”
리에네가 재빨리 몸을 돌려 문을 열었다.
“랜달 경? 괜찮으세요?”
“아, 공주……님. 후우, 물론 괜찮, 습니다. 주군도 안에 계십니까?”
“네. 들어오세요.”
숨이 차 가슴을 들썩이는 랜달에게 리에네가 물 잔을 건넸다.
랜달은 블랙을 힐긋 살피더니 정중히 사양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정말이세요? 숨이 차 보이는데.”
“그럴 리가요. 고작 계단 좀 올라온 것뿐입니다. 그건 그렇고, 정보상을 만나고 왔습니다.”
비싸지만 유능한 정보상은 궁성 내부의 일을 어디선가 잘도 엿듣고 왔다. 그리고 빠르게 이쪽에 가져다 팔았다.
“왕과 왕자비가 갈라선 것 같다고 합니다.”
기다렸던 소식에 다들 표정들이 달라졌다.
죽 한 그릇을 다 먹고 죽을 것처럼 숨을 쌔액 내쉬고 있던 클리마도 눈을 번쩍 떴다.
“그게 무슨 의미죠?”
“사이가 틀어진 모양입니다. 자세한 것까진 아직 알아보지 못했다고는 하는데, 어제 왕자비가 달아나려고 한 일로 왕의 심기가 크게 상했답니다.”
근위대장과 비서관을 비롯한 몇몇이 즉석에서 목이 잘린 얘기도 전해졌다.
“그리고 확실하지 않은 일이라 어찌 된 건지 모르겠다며 한 말이 하나 더 있었습니다.”
이게 진짜였다.
“왕이 왕자비에게 준 반지가 있었나 봅니다. 왕이 반지를 돌려받으려 했는데, 왕자비가 저항하다 반지를 삼켰답니다. 이 얘기는 하도 모양새가 이상해서 다들 못 본 척하고 있답니다.”
왕이 왕자비에게 다른 보석이 아닌 반지를 주는 경우는 없었다. 말 그대로 모양새가 이상했다. 아무리 왕자가 죽었다지만 둘 사이의 내연 관계를 의심하게 만드는 일화였다.
“왕이 준 반지라면 삼키지는 않았을 것이다.”
블리니의 성격을 아는 블랙은 상황이 대강 짐작이 갔다.
“내게 줘야 하는 반지겠지.”
“저도 주군께서 찾으시는 반지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그것도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샤르카의 왕이 대체 주군의 반지에 대해 뭘 알고 있을까요? 그건 몇 명을 제외하고는 모르는 일 아닙니까?”
반지의 비밀을 샤르카 왕국에서 알게 된다면 문제가 복잡해졌다.
반지를 탐내는 자가 반드시 생길 것이다. 반지를 돌려받기가 험난해질 게 분명했다.
“알 리가 없어요. 우리도 얼마 전에야 알게 된 거잖아요.”
리에네가 잠시 생각한 후에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대공녀가 반지에 대해 뭔가를 안다고 해도 그걸 왕에게 말했을 리 없고.”
“그럼 왕이 선물해 준 다른 반지였을까요?”
“말했듯이, 그런 반지라면 삼키지는 않았을 겁니다.”
리에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로 빼앗기기 싫었나 봐요.”
그 한숨 같은 말에는, 대공녀가 아직 그렇게나 당신을 마음에 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작은 근심이 담겨 있었다.
“그게 지금 가진 유일한 무기라 그럴 겁니다. 빼앗기면 나와 협상할 게 없어지니까.”
랜달이 우려를 드러냈다.
“그런데 아직 샤르카의 왕이 움직이고 있는 것 같진 않습니다. 왕자비를 이쪽에 넘기려면 그래도 준비를 해야 할 텐데요. 정보상 쪽에서도 딱히 군대가 움직이는 것 같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더 기다려 봐야 합니까?”
샤르카의 왕은 변덕이 심하다고 했다.
블리니 왕자비와 사이가 틀어졌다지만 언제 마음이 바뀔지 모를 일이었다.
“아직은 시간이 있어.”
블랙이 말한 시한은 오늘까지였다.
오늘은 아직 넉넉히 남아 있었다.
“만일 왕자비를 넘기지 않겠다고 나오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럼 정말로 전쟁입니까?”
“샤르카의 왕이 그 정도로 멍청한 인간이라면. 달리 방법이 없을 테니.”
블랙은 어제 이미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왕인데 그렇게까지 멍청하겠습니까? 왕자를 죽인 왕자비 하나를 위해 전쟁이라니요. 이해타산이 안 맞지 않습니까.”
“이해타산이라는 것 자체를 모를 만큼 멍청한 왕도 얼마든지 있으니까.”
“음……. 뭐, 그야 그렇지요. 그렇다면 거기까지 생각을 해 둬야겠군요. 알겠습니다.”
블랙과 랜달은 아주 단순한 문제처럼 얘길 했지만, 내용은 조금도 그렇지 않았다.
아직 전쟁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리에네에게는 가능한 한 피하고 싶은 결론이었다.
“나는 반지를 돌려받고 끝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리에네가 의자에 앉아 있는 블랙의 머리칼을 만지작대며 말을 이었다.
“전쟁은 너무 큰일이잖아요.”
“그렇다 해도 오래가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요.”
전쟁에 관해서라면 그와 자신의 시간이 아주 많이 다를 것이다.
하루 이틀 만에 전쟁이 끝나더라도 리에네에게는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가고도 남을 만큼 긴 시간이 될 터였다.
“샤르카의 왕이 멍청이가 아니길 기도해야겠어요.”
전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사람답지 않은 평온한 얼굴로 블랙이 싱긋 웃었다.
“저도 같은 걸 바라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바람과 믿음은 다른 얘기였다.
* * *
“흑…… 흐윽…… 그, 그게…… 제가 알기로는…….”
시녀들은 금방 입을 열었다.
사실 아는 게 많지 않아서 오래 입을 다물고 있을 것도 없었다.
“그, 그 반지가…… 티와칸의 수장이 지녔던 물건이라는 소문이 있긴…… 해, 했습니다.”
대공가에서 티와칸에게 먼저 청혼서를 내밀었던 일을 모르는 시녀는 없었다.
반지에 얽힌 일을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블리니가 청혼을 할 정도로 블랙을 마음에 들어 했다는 얘기는 다들 들어본 적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어울리지 않게 애지중지하는 반지가 소문과 묶였다.
“무어라?”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나오자 왕이 눈을 부릅떴다.
시녀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닦달하던 근위대가 손을 멈췄다.
“티와칸의 수장이라 했느냐?”
“네, 네에…….”
고개를 끄덕이던 시녀는 저쪽에서 이쪽을 바라보는 블리니와 눈이 마주치고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소, 소문이었습니다. 정확히는 모릅니다.”
“소문이든 뭐든!”
왕이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질렀다.
시녀가 울 것처럼 목을 움츠렸고, 블리니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그래서 나우크의 공주를 죽이려 했던 게냐?”
“…….”
“대답해! 입을 열어라!”
왕이 아무리 핏대를 세워도 블리니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방금 깨진 건 비밀이 아니라 제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이익! 왜 짐을 보지 않느냐! 왜 말을 하지 않는 게야!”
“…….”
“어서! 답을 하란 말이다! 어서!”
“…….”
퍽!
분을 못 이긴 왕이 블리니를 홱 떠밀었다. 블리니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평소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 모습으로, 바닥에 엎드린 블리니가 기운 없이 목을 꺾었다.
“감히 네가! 감히 짐에게!”
왕이 발로 바닥을 쾅쾅 굴렀다.
하지만 아무리 분풀이를 해도 블리니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대로 생이 빠져나간 조각상 같았다.
그전까지 살아 움직이는 게 이상했던.
왕이 블리니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걸 당장! 당장 붙들어서 목을……!”
“……전하?”
근위대는 반신반의하면서도 칼을 뽑아 들었다.
그러나 막상 날이 잘 선 칼이 움직이려 들자 왕은 마음을 바꾸었다.
“……아니, 아니야!”
왕은 근위대를 홱 밀치고는 손을 내밀었다.
“내가 직접 베겠어! 칼을 내놔. 티와칸에는 목이 없는 시체를 보낼 것이다.”
“전하…….”
근위대가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왕명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왕의 손에 칼이 쥐였다.
왕은 쥐는 자세마저 어색한 칼을 들고 블리니를 향해 돌아섰다.
“네가 왕실에 저지른 죄는 끝도 없다. 짐이 친히 그 죄를 물을 것이다.”
“…….”
블리니는 왕이 칼을 쥔 것을 알았을 텐데도 꼼짝하지 않았다.
“……이익!”
챙그랑!
그마저도 소용이 없자 왕은 칼을 내던지고 블리니에게 다가가 우악스럽게 팔을 움켜쥐었다. 그런 다음 몸을 질질 끌어 옆방으로 향했다.
“아무도 이 문을 열지 마라!”
지금 블리니가 시녀들과 함께 머물던 방은 사실이었으니 그 옆방은 침실이었다.
쾅!
문이 닫혔다.
조각상처럼 굳어 있던 블리니가 미간을 약간 찡그렸다.
둘만 한 방에 있게 되자 갑자기 공기가 역해지는 기분이었다.
“네가…… 네가 감히…….”
왕은 찌푸려진 얼굴을 향해 이를 갈았다.
“감히 내게…….”
“…….”
왕이 드러내는 것은 배신감이었다.
블리니가 석상처럼 미동 없던 몸을 일으켰다.
왕의 배신감이 어디서 시작됐는지, 블리니는 빠르게 알아차렸다.
왕은 아들의 죽음도 배신으로 여기지 않았다. 그가 화를 내게 된 건 반지 때문이었다.
왕은 자신을 갖고 싶어 했다. 갖지 못하니 배신감을 느끼고 화를 내는 것이었다.
“전하.”
블리니는 그 마음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자신이 지금 느끼는 감정도 그랬으니까.
갖지 못하니 제 손으로 죽여 없애고 싶은 감정은 아주 예전부터 제 것이었다.
블리니는 깜짝 놀랄 정도로 힘껏 왕의 옷깃을 쥐었다.
“그를 죽여 줘요.”
“……뭐?”
“죽여 줘요. 그럼 내 마음은 자유예요.”
그를 떠나 누구에게든 갈 수 있으리라는 말이었다.
“죽여 줘요.”
“…….”
왕의 눈동자가 풍랑에 휘말린 것처럼 거칠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