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모두의 전쟁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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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 모두의 전쟁 (1)
2022.05.29.
두두두두!
노을이 끝나고 조용해진 바닷가에 말을 달리는 소리가 번졌다.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던 소리가 얼마 지나지 않아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러워졌다.
“저기다!”
말발굽 소리가 이어지는 곳은 여느 성 못지않게 크고 으리으리한 여관 건물이었다.
고급 여관에는 벌써 방마다 불이 켜져 있었다. 입구와 널찍한 정원에도 전부 등이 켜져 있어 대낮처럼 환했다.
히이이이잉!
말고삐를 잡아채자 말이 거칠게 울었다.
여관까지 말을 달려온 이들은 왕실 근위대였다.
“문을 열어라! 왕명이다!”
말에서 내린 근위대가 여관 안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네? 왕명이라니요?”
여관에 상주하는 일꾼들이 화들짝 놀라 허겁지겁 달려왔다.
“문을 열어라! 여기 묵는 자들은? 어디 있느냐?”
“그야 손님들은 방에 계십니다요. 그런데 왜 저희 여관에 왕명이……,”
“잘됐군.”
왕실 근위대는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다.
“귀찮게 들어갈 필요 없이, 밖으로 내몬다. 활을 준비해.”
“네에? 활이라니요?”
일꾼들이 놀라 손사래를 쳤다.
그사이 근위대는 입구에 걸린 등을 하나 가져와 기름을 먹인 천을 두른 화살에 불을 붙였다.
“아앗! 안 됩니다요! 불이라니요!”
일꾼들은 근위대가 하려는 짓을 알아차리고 필사적으로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화살은 무정하게도 허공을 뚫고 날아갔다.
핏! 챙!
화살이 창문을 뚫고 날아갔다.
화르르륵!
커튼에 옮겨 붙은 불이 피어올랐다.
“아악! 불이야!”
“더는 안 됩니다요! 왜 아무 죄도 없는 저희 여관에 불을 지른단 말입니까! 그만두십시오! 제발!”
“비켜라. 거슬린다.”
근위대는 말리는 일꾼들을 떠밀고는 계속 불이 붙은 화살을 쏘아댔다.
피웃! 화르르르륵!
여기저기서 불꽃이 일어났다. 넘실대는 열기가 커튼이며 양탄자며 불에 타기 쉬운 것들에 옮겨 붙었다.
“아이고! 불이야!”
“불이야! 불!”
“물통을 가져와! 대체 어디서 불이 난 게야!”
불길과 함께 소요가 번졌다.
왕실 근위대는 그 자리에 서서 무기를 뽑아들었다.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베려는 의도였다.
“……?”
그러나 건물 안에서 맨발로 달려 나오는 사람들은 대부분 일꾼들이었다.
“이 시간에 퍼질러 자고 있을 리는 없을 테고……. 왜지?”
근위대가 다시 눈짓을 주고받았다.
일꾼들은 물통을 나르며 불을 끈다고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는 다른 집에 살고 있는 주인을 깨우러 달려갔다.
“설마 없는 건가?”
티와칸이 이곳을 통째로 빌렸다고 했다.
샤르카의 왕은 오늘 약속 시간이 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티와칸은 이곳을 떠난 듯했다.
“제길……. 안에 들어가서 살펴야겠다.”
“젠장.”
왕실 근위대가 제 손으로 불을 지른 여관을 향해 마지못한 걸음을 떼었다.
역시나 티와칸은 없었다.
* * *
자정의 달이 떠올랐다.
여관에서 멀지 않은 사람 없는 바닷가에 시체가 쌓였다.
시체는 여관에 불을 지른 왕실 근위대였다.
“놓친 게 있나?”
블랙이 칼에 묻은 피를 닦으며 물었다.
“아니요. 없습니다.”
“다친 사람은?”
“다쳤다고 말할 정도는 아닙니다. 살이 베인 정도입니다.”
“좋군.”
블랙이 고개를 돌려 달을 보며 시간을 가늠했다.
“해가 뜰 때까지 네 시간 정도. 페르모스가 어디까지 와 있다고 했지?”
“네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국경에 도착해 있을 겁니다.”
“시간이 딱 맞겠군.”
블랙이 근위대의 시체를 가리켰다.
“갑옷을 바꿔 입어. 먼저 시작한다.”
“네, 주군.”
티와칸은 신속히 시체와 갑옷을 바꿔 입었다. 샤르카 왕실 근위대의 갑옷은 티와칸의 것에 비하면 가볍다고 해야 할 판이었다. 투구를 쓰고 망토마저 두르자 티와칸은 감쪽같이 왕실 근위대가 되었다.
신발이 맞지 않다고 불평하는 경우가 간혹 있었는데, 어차피 시체가 두 배나 더 많기 때문에 어디선가 맞는 신발이 나오긴 했다.
“……나도 입을게요.”
블랙은 등 뒤에서 불쑥 들려오는 목소리에 홱 어깨를 돌려세웠다.
입가가 딱딱하게 굳었다.
“어디서 온 겁니까? 가까이 있을 필요 없다고 했는데.”
시체를 처리하는 모습까지 리에네가 볼 필요는 없었다. 안전한 곳에 클리마와 함께 있게 했는데, 리에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당신 혼자 하는 전쟁이 아니잖아요. 나도 입혀 줘요. 입는 방법을 모르니까.”
“안 됩니다. 방해가 됩니다.”
블랙은 일부러 차갑게 말을 잘랐다.
“알아요. 지금은 내가 필요 없다는 것. 어쩌면 나는 나우크에 있어야 했다는 걸요. 하지만 그렇다고 나 혼자 어딘가에 숨어 있는 건 더 위험한 일 같아요. 지금부터는 전쟁이잖아요.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몰라요.”
“공주님이 무사히 있는 게 지금 내게 당장 필요한 일입니다.”
“네. 그러려고요. 그래서 같이 가겠다는 거예요. 생각해 봐요. 우리가 전쟁을 시작한 이유를요. 반지를 찾으려고 하는 거잖아요. 나는 당신처럼 싸울 수는 없지만 반지를 찾는 일은 할 수 있어요.”
“그게 공주님에게 갑옷을 입힐 이유가 되진 않습니다.”
“갑옷을 입으면 내가 당신 눈앞에 있을 수 있죠. 내가 무사한지 내내 확인할 수 있잖아요.”
“그게…….”
블랙이 잇새로 숨을 뱉어냈다.
“공주님. 나는…….”
“내가 가장 무사히 있을 수 있는 곳은 당신 옆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
블랙의 미간이 구겨졌다.
리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게 아니었다.
샤르카로 출발할 때만 해도 반지를 찾는 일이 전쟁으로 이어질 줄은 몰랐다. 알았다면 리에네와 함께 온다는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함께 있었고, 서두르지 않으면 왕실 근위대에 쫓기는 신세가 될 기로에 있었다.
이 상황에서 아무리 안전한 곳이라 해도 리에네를 제 시야 밖에 두는 게 옳은 선택인지, 그 역시 확신은 없었다.
그간 겪었던 일을 그 역시 잊지 않았다.
“……잊으면 안 됩니다. 공주님의 목숨은 내 목숨입니다.”
그건 무슨 일이 생긴다면 안 된다는 말보다 훨씬 무겁고, 애틋했다.
“나도 같은 말을 하고 싶어요. 당신 목숨은 내 목숨이에요. 그러니 소중히 지켜줘요.”
결국 리에네도 근위대 갑옷을 입게 되었다.
부인들이 뜯어말린 남자 옷을 가져온 보람이 있었다. 남자 옷 위에 갑옷을 입자 아주 헐거울 정도는 아니었다.
리에네보다는 클리마가 더 문제였다.
몸이 약해져 있는 터라 갑옷을 입자 휘청이는 게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아무도 클리마를 말리지 못했다. 클리마 역시 자신이 곁에 없을 때 리에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왕실 근위대가 된 티와칸이 궁성으로 출발했다.
* * *
이미 경험이 있는 성문을 통과하는 일은 쉬웠다.
일단 근위대 복장으로 성문을 열게 만들면 성공이었다. 정체를 의심하는 경비는 빠르게 목을 베어 비명을 막았다.
티와칸은 왕이 있는 본궁까지 곧장 이동했다. 다행히 아직은 정체를 눈치채는 사람이 없었지만 조만간 시체를 들키긴 할 것이다.
그 전에 블리니를 찾는다는 계획이었다. 정보상이 말하기를, 블리니 왕자비가 도주하려다 잡힌 뒤로 거처가 본궁으로 옮겨졌다고 했다.
“나는 렌펠 경과 별궁으로 갈게요.”
일전에 와 봤던 길이 드러나자 리에네가 재빨리 블랙을 붙들고 말했다.
투구가 머리를 자꾸 눌러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리느라 볼이 빨갰다.
블랙은 그런 게 쓸데없이 귀여워 보인다고 생각했다. 적진의 한복판에서도.
“……네?”
“지금부터는 내가 할 일이 없잖아요.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게요.”
블랙이 어이가 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렸다.
“아까와는 말이 다르지 않습니까. 눈을 벗어나면 안 된다던 사람이.”
“거리로 따지면 안 될까요? 여기서라면 멀리 있는 게 아니잖아요.”
“별궁은 왜 가려는 겁니까?”
“딜레라스 왕비와 얘기를 해야겠어요.”
“무슨 얘기를? 샤르카의 왕비가 왕에 비해 상식적인 사람이라 해도 지금 상황에서는 얘기가 다를 겁니다.”
“그걸 모르진 않아요. 그래도 딜레라스 왕비와는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부분이 있잖아요. 그 점을 그냥 넘어가면 안 될 것 같아요.”
블랙이 투구 안에서 입술을 질겅였다.
“솔직히 말해요. 그러기 위해서 같이 오겠다고 한 겁니까?”
“없다고는 못 하죠. 하지만 내가 한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이곳에 당신이 있으니까 나도 내가 할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
잠깐 생각을 곱씹은 블랙이 말했다.
곧 이곳은 다수의 근위대를 상대해야 하는 전투가 시작될 것이다. 리에네가 있어서 좋을 게 없었다.
“대신 랜달을 데려가요. 그건 양보 못 합니다.”
“알았어요.”
어디든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투구를 쓴 탓에 무리였다.
게다가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상할 터였다.
“나중에 투구를 벗게 되면 키스해요.”
리에네가 빠르게 말을 하고 돌아서자 블랙이 덥석 손을 붙들었다.
“말만 하고 가는 겁니까?”
“지금은 못 하잖아요.”
“……내게 빚진 겁니다.”
“그게 왜 빚이에요?”
“꼭 받아낼 거라.”
블랙이 손을 놓아주었다.
“무사히.”
“당신도 다치지 말아요.”
리에네와 클리마가 방향을 틀었다.
랜달을 불러 두 사람을 가리킨 블랙이 귓가에 대고 작은 말을 남겼다.
“리에네가 다치면 네가 죽는다.”
“……그,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순간 소름이 쭉 돋은 랜달이 부리나케 두 사람의 뒤를 쫓아갔다.
캉!
어디선가 칼소리가 들려왔다.
리에네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블랙이 소리를 따라 고개를 틀었다.
“시작인가.”
전쟁의 시작이었다.
* * *
“전하의 명이다. 비 전하께 말씀을 전하라 이르셨다.”
자정이 훌쩍 넘은 별궁은 조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잠들어 있었고, 문을 지키는 야간 경비 두 명만이 깨어 있었다.
여기는 아직 본궁에서 벌어진 일이 전달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 시간에 말입니까?”
“급한 일이라 하셨다.”
갑자기 근위대 세 명이 별궁을 찾는다니, 급한 일은 맞을 것이다. 경비들은 별 생각 없이 문을 가리고 있던 창을 치워 주었다.
리에네 일행은 그렇게 별궁 안으로 들어서려고 했다.
“……잠깐.”
하지만 경비 하나가 그들을 불러 세웠다.
다른 사람에 비해 감이 좋은 자였다. 그래서 유감이었다.
“뭔가 이상한데……. 본궁에서 왔다면 왜 투구를 쓰고 있는 거지? 본궁에서 온 게 맞습니까?”
“그런데.”
랜달은 태연하게 대꾸하며 이쪽을 향해 기울어지는 창을 잡았다.
“투구를 벗으십시오. 왕족 앞에서 얼굴을 가릴 수는 없…….”
퍽!
랜달은 잡고 있던 창을 홱 낚아채 방향을 바꾸는 일 없이 그대로 경비의 목을 찍었다. 경비는 비명도 없이 쓰러졌다.
“무슨……! ……읍…….”
다른 경비가 창을 세워 달려들었다. 그러나 클리마가 더 빨랐다. 창백한 얼굴로 땀을 주르륵 흘리면서도 클리마는 경비의 등 뒤에서 팔꿈치를 낚아챘다.
“잘했어.”
동작이 멎는 짧은 틈에 랜달이 마찬가지로 창끝으로 목을 가격했다.
순식간에 경비 둘이 쓰러졌다.
“왕비가 쓰는 방이 어딘지 아십니까?”
랜달이 투구를 벗으며 물었다. 확실히 본궁 안에서 투구를 계속 쓰고 있는 건 무리였다. 클리마가 랜달을 따라 투구를 벗었다.
“공주님은 그냥 쓰고 계십시오. 길을 아신다면 앞장서 주시고요.”
“네. 알고 있어요. 이쪽이에요.”
별궁의 규모는 작은 편이 아니었지만 한 번 왔던 곳을 찾아가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적어도 아홉 개의 폭포 뒤에 숨겨진 미로에서 길을 찾는 것보다는 훨씬 쉬웠다.
리에네는 기억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