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 사소한 이유 (124/145)


124. 사소한 이유
2022.06.08.



16583731932427.jpg

“아…….”

어쩐지 좀 아프긴 했다. 맞지 않는 신발을 신었더니 발이 엉망이었다.

16583731932427.jpg

“아픈 줄 몰랐어요. 그리고 사실 별거 아니고. 다들 칼에 다쳤는데 나는 고작 발꿈치가 까졌을 뿐이에요.”

16583731932437.jpg

“작은 상처라고 익숙해지지 말아요. 안 어울립니다.”

블랙은 반대쪽 신발도 마저 벗겨 냈다.

16583731932427.jpg

“안 어울리는 건 또 뭐예요. 그리고 당신도 다쳤잖아요. 여기.”

리에네는 피가 살짝 내비치는 블랙의 다리를 짚었다.

짙은 색 바지 위에 핏물이 묻어 있었다. 무릎 위쪽, 약간 다리 안쪽으로 들어가는 부위라 상처가 조금만 더 깊었거나 위치가 달랐으면 큰 부상이 되었을 것이다.

16583731932427.jpg

“여기만이 아닐 거면서.”

팔뚝과 어깨에도 군데군데 자상과 타박상이 있었다.

16583731932437.jpg

“함부로 건드리면 안 됩니다.”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붙잡아 상처에서 떼어냈다.

16583731932427.jpg

“아, 미안해요. 많이 아파요?”

16583731932437.jpg

“안 아파서 안 됩니다.”

16583731932427.jpg

“무슨 말이 그래요?”

16583731932437.jpg

“나는 지금 공주님을 굉장히 오랜만에 보는 기분이라.”

16583731932427.jpg

“……?”

땀에 젖은 머리칼을, 그가 이마에서 쓸어 넘겼다.

16583731932437.jpg

“확인하고 싶어집니다. 여기가 어디라는 것도 잊고.”

16583731932427.jpg

“그게…….”

무슨 의미인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표정을 보면 알 수 있었으니까.

16583731932437.jpg

“물이 닿으면 아플지도 몰라요. 아프면 말을 해요.”

말을 돌린 블랙이 리에네의 발에 조심스럽게 물을 끼얹었다.

물은 차갑고, 발을 쥔 손은 뜨거웠다.

갑자기 그 모순된 감각에 몸이 긴장했다.

부부가 됐고, 계속 한 침대를 써 왔어도 그는 늘 불시에 자신을 긴장하게 했다.

혀가 아릿한 이 긴장감은 그가 이토록 매혹적인 이유였다.

16583731932437.jpg

“다 됐습니다.”

수건이 없는 관계로 블랙은 제 옷으로 리에네의 발을 감쌌다.

16583731932437.jpg

“씻는 건 말리고 싶은데……. 좀 더 참을 수 있겠습니까?”

리에네가 블랙의 어깨 너머로 주위를 한 번 돌아보았다.

다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다들 익숙한 상처를 돌보고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자신만 빼고 다들 금방이라도 이동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16583731932427.jpg

“나는 참을 수 있는데, 당신은요?”

리에네가 일부러 장난을 치듯 땀에 젖은 머리칼을 블랙의 어깨에 비벼댔다.

16583731932427.jpg

“내가 이래도 참을 수 있겠어요?”

16583731932437.jpg

“하지 말아요. 너무 귀여우니까. 수하들이 보는 앞에서 난처한 꼴을 보이고 싶진 않습니다.”

16583731932427.jpg

“아, 정말……. 당신이야말로 그런 말을 아무 때나 하고 그러지 말아요. 그러면 나도 못 참는다니까요.”

그 말에 블랙이 얼굴을 바싹 들이대고 물었다.

16583731932437.jpg

“뭘 못 참는다는 겁니까?”

16583731932427.jpg

“알면서 뭘 물어요?”

16583731932437.jpg

“모르겠는데.”

블랙이 코를 마주대고 코끝을 비벼댔다.

16583731938791.jpg

16583731932437.jpg

“모르니까 알려 줘요. 참고하겠습니다.”

16583731932427.jpg

“와……. 지금 좀 얄미웠어.”

리에네가 웃는 얼굴로 블랙의 어깨를 떠밀었다.

손에 두툼하게 옷가지를 만 랜달이 눈치를 보며 다가왔다.

16583731938807.jpg

“주군. 저희는 준비가 다 끝났습니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테니 지금 이동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남쪽 국경으로 가려면 저 산을 넘어야 하는데, 능선을 넘기 전에 해가 뜨면 곤란합니다.”

16583731932437.jpg

“아, 그렇군. 공주님, 신발을 신을 수 있겠습니까?”

신발은 얼마든지 신을 수 있었다.

하지만 국경으로 가는 것은 생각을 해 봤으면 했다.

16583731932427.jpg

“그게요.”

16583731932437.jpg

“할 말이 있습니까?”

블랙이 랜달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눈짓을 보냈다.

그러나 리에네가 그를 말렸다.

16583731932427.jpg

“아니, 랜달 경도 같이 얘기했으면 해요. 딜레라스 왕비가 한 말을 경도 들었죠?”

16583731938807.jpg

“아, 저 말입니까? 네. 그 자리에 저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16583731932427.jpg

“딜레라스 왕비가 그랬어요. 블리니 왕자비가 본궁에 없다면 게름 협곡 근처의 성에 있을 거라고. 왕이 그쪽으로 보낸 것 같다고 했어요. 우리에게 근위대를 보내기 전에 실패할 것을 대비해서 미리 몸을 피하게 만들지 않았을까요?”

16583731938807.jpg

“그건 짐작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본궁 어딘가에 숨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 그렇다 한들……. 음…….”

뭔가 말을 하려던 랜달이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턱을 문질렀다.

16583731938807.jpg

“……공주님께서는 아무래도 지금 게름 협곡으로 가자는 말씀을 하는 것 같은데, 맞습니까?”

16583731932427.jpg

“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해요?”

블랙의 미간이 좁아졌다.

16583731932437.jpg

“딜레라스 왕비가 맨입으로 그런 말을 해 줬을 리는 없을 텐데……. 아무리 왕과 사이가 좋지 않다 해도 적국과 손을 잡을 건 아닙니다.”

16583731932427.jpg

“아니, 그럴 이유가 있었어요. 내가 나우크가 원하는 건 블리니 왕자비 하나라고 말을 했거든요. 블리니 왕자비를 나우크에서 처벌할 수 있으면 더는 바라지 않겠다고요. 전쟁을 크게 만들 필요가 없다고요.”

16583731932437.jpg

“……공주님.”

리에네를 부르는 목소리가 한층 무거워졌다.

16583731932437.jpg

“그게 가능했던 시간은 지났습니다. 왕이 대공녀를 넘기는 걸 거부했던 순간부터 전쟁은 시작된 겁니다.”

블랙의 말이 틀렸다는 게 아니었다.

샤르카의 왕은 약속을 지키는 대신 근위대를 보냈다. 그것은 양국 간에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의미했다.

그렇기에 리에네는 딜레라스 왕비를 만나야 했다.

16583731932427.jpg

“그럴 수 있을지도 몰라요. 딜레라스 왕비가 약속했어요. 왕이 군대를 모으는 일을 말려 보겠다고요.”

거기까지 얘기가 나오자 블랙은 리에네가 하려던 일을 짐작했다.

16583731932437.jpg

“……계속해요.”

16583731932427.jpg

“당신이 그랬잖아요. 왕비의 가문만 징집에 반대해도 왕이 군대를 모으는 일이 어려워질 거라고요. 딜레라스 왕비는 블리니 왕자비가 죗값을 치르길 바라고 있어요. 왕비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가문마다 왕이 전쟁을 하려는 이유를 알리겠다고 했어요.”

16583731932437.jpg

“군대를 모으기까지 시간이 늦춰지겠군요.”

16583731932427.jpg

“네. 당신이 말한 대로요.”

랜달이 턱을 문지르던 손으로 뺨을 긁적였다.

16583731938807.jpg

“그런데 그럼 우리가 더 유리하지 않습니까? 군대도 제대로 모이지 않는다면 상대하기 훨씬 쉬워지겠는데요. 두 달 안에 항복을 받아 낼 수 있을 겁니다.”

16583731932427.jpg

“그러면 두 달 동안 많은 사람이 죽겠죠.”

리에네가 차분히 말을 덧붙였다.

16583731932427.jpg

“나는 무조건 전쟁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에요. 설령 우리가 반지를 돌려받고 그것으로 끝내자고 해도 샤르카는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요. 그때는 필연적으로 전쟁이 이어지겠죠. 하지만 피하려는 시도는 해 볼 수 있잖아요.”

16583731932437.jpg

“샤르카의 왕이 공주님처럼 생각하진 않을 겁니다.”

16583731932427.jpg

“알고 있어요. 하지만 왕은 왕자비를 나우크에 넘겨주지 않으려고 전쟁을 하겠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우리는 왕자비가 아니라 정확히 반지를 돌려받길 원하는 거잖아요.”

16583731932437.jpg

“대공녀를 이대로 포기하자는 말입니까? 공주님께 암살자를 보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얼마든지 똑같은 짓을 할 인간입니다.”

16583731932427.jpg

“음……. 블리니 왕자비도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겠죠. 그건 꼭 나우크에서 하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내 생각에는, 블리니 왕자비가 샤르카 왕국에서 앞으로도 무사히 지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아요. 딜레라스 왕비는 여전히 클라인펠터라는 증인을 가지고 있잖아요.”

16583731932437.jpg

“……흠.”

블랙이 짧은 숨을 내뱉었다.

그리 달가워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16583731932427.jpg

“그리고 딜레라스 왕비에게 블리니 왕자비의 처분을 나우크에 맡긴다는 서약서를 받기로 했어요. 왕이 아니라 왕비가 서명한 것이라도 효력은 있어요. 엄연히 왕자비보다 왕실 서열이 위예요.”

랜달이 계속 턱을 저었다.

16583731938807.jpg

“대놓고 암살자를 보내는 판국에 서약서 한 장에 큰 의미를 둘 것 같진 않습니다만…….”

16583731932427.jpg

“있는 것과 없는 것은 달라요. 샤르카의 귀족들에게도 전쟁에 반대할 명분이 되고요.”

미간을 찌푸리고 있던 블랙이 불쑥 질문을 했다.

16583731932437.jpg

“네가 샤르카의 왕이라면 지금쯤 무얼 할 것 같나?”

16583731938807.jpg

“네? 제게 물으신 겁니까?”

보통은 이런 질문을 받는 것은 페르모스였다. 랜달이 조금 당황하다가 아는 한에서 답을 했다. 어차피 블랙은 자신이 페르모스의 역할을 대신하길 바라지는 않을 것이다.

16583731938807.jpg

“음……. 일단 우리를 잡으려고 할 겁니다. 약이 오를 대로 올랐을 테니. 근위대를 닦달하고 있지 않을까요?”

16583731932437.jpg

“그럼 근위대는. 우리를 잡으려면 뭘 해야 하지?”

16583731938807.jpg

“그야…… 머저리들이 아닌 이상 동선을 예측해야지요. 우리가 앞으로 어디로 갈지 생각해 볼 겁니다. 우리는 수적으로 불리하니 일단 국경으로 가서 일행과 합류해야 하고……. 음, 남쪽 국경으로 가는 길을 막겠군요. 물론 우리는 길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산을 타고 있지만.”

16583731932437.jpg

“그래. 근위대는 남쪽에 집중될 것이다.”

16583731938807.jpg

“그렇지요.”

리에네가 반색을 하고 말했다.

16583731932427.jpg

“그럼 게름 협곡으로 가는 길은 방해가 없겠군요. 우리가 그쪽으로 가는 줄은 모를 테니까요. 딜레라스 왕비가 게름 협곡에 대해 말해 준 건 아무도 모르잖아요.”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16583731932437.jpg

“속도를 높이면 정오가 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반지를 얻어내고 대공녀를 인질로 잡아 북쪽 국경을 넘으면 블루와렌 시를 통해 나우크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16583731932427.jpg

“그러면 샤르카의 군대와 마주칠 일도 없겠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일에 랜달이 떨떠름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16583731938807.jpg

“으어……. 그렇게 되면 음, 놀면서 뒤통수를 치는 기분이겠는데요. 생각보다 심심해지는 것 같지만. 음……? 또 썩 나쁘지는 않고…….”

16583731932437.jpg

“대신 빨라야 해. 북쪽 국경을 해가 지기 전에 넘어야 해. 블루와렌은 밤에 국경을 열지 않으니.”

16583731938807.jpg

“쫓기는 일이 없는 대신 그만큼 숨이 차겠군요.”

16583731932437.jpg

“다들 준비시켜.”

16583731938807.jpg

“네, 주군.”

랜달이 훌쩍 몸을 돌려 일행을 향해 뛰어갔다.

16583731932427.jpg

“그럼…… 이렇게 결정이 된 거예요? 게름으로 가는 걸로요?”

16583731932437.jpg

“네.”

짧고 간결한 답에 오히려 리에네가 어리둥절해졌다.

16583731932427.jpg

“나는 좀 더…… 음, 그러니까 당신이 좀 더 고민할 줄 알았는데…….”

16583731932437.jpg

“이제껏 공주님이 원하는 걸 내가 들어주지 않은 적은 없을 텐데요.”

16583731932427.jpg

“아,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이건 사소한 일이 아니잖아요. 그리고 내 생각이 틀렸을지도 모르고요.”

16583731932437.jpg

“사소한 일이든 아니든 내게는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공주님 생각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16583731932427.jpg

“정말요?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요?”

16583731932437.jpg

“네.”

블랙은 잠깐 고개를 숙여 리에네와 이마를 마주 댔다.

16583731932437.jpg

“내게 이제껏 전쟁은 개인적인 이유에서 벌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랬습니다. 나는 대공녀가 공주님에게 손을 쓰려 드는 게 몹시 화가 났으니까.”

16583731932427.jpg

“나도 화가 나긴 했어요…….”

16583731932437.jpg

“공주님이 전쟁을 하려는 이유는 나와는 다를 겁니다. 그러니 전쟁을 피하고자 하는 이유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공주님은 어떤 게 나우크를 위해서 더 나은지 생각했을 겁니다.”

16583731932427.jpg

“그건 그런데……. 개인적인 이유도 있어요. 두 달이나 전쟁을 하게 되면 나는 두 달 동안 당신과 떨어져 있어야 하잖아요? 그리고 매일 마음을 졸일 테고.”

이마에 닿은 이마가 훌쩍 떨어졌다.

16583731932437.jpg

“그런 이유라면 진작 말을 하지 그랬습니까.”

16583731932427.jpg

“아니, 그건 너무 사소하고 개인적인 거라,”

16583731932437.jpg

“가장 마음에 듭니다.”

블랙이 입술을 삼켰다.

손에 꼽을 정도로 유난히 짧은 키스는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만큼 강렬했다.

16583731932437.jpg

“……나머지는 블루와렌에서.”

블랙이 입술을 놓아주었다.

그렇게 수 없는 키스를 했어도 지금은 어쩐지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게 부끄러웠다.

아마도 장소와 걸맞지 않게 너무 뜨거워서 그럴 것이다.

16583731932427.jpg

“……네. 블루와렌에서.”

리에네가 괜히 손부채질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16583731932437.jpg

“앉아 있어요. 신발을 가져올 테니.”

블랙이 신발을 가져와 신겨 주었다.

빨갛게 까진 발을 조심스레 다루는 그를 볼 때마다 계속 심장이 두근거렸다.

산을 벗어난 일행은 인근에서 말을 구했다.

인근에는 순례자의 마을이 있었는데, 북부에서 내려오는 순례자들 때문에 새벽에도 늘 장이 서는 곳이었다.

순례자들이 입는 두꺼운 로브를 구해 몸 위에 걸치자 일행은 그대로 순례자 행렬이 되었다.

게름 협곡까지 가는 길은 생각 이상으로 쉬웠다.

16583731973505.jpg

16583731975975.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