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어긋난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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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어긋난 채로
2022.06.12.
쾅!
“대체 뭐 하느라 못 잡고 있는 게야!”
샤르카의 왕은 이성을 잃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이성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연달아 두 번이나 당했다.
티와칸은 샤르카의 왕궁에는 문턱 같은 게 없다는 듯 제멋대로 들어와 마음껏 휘저어 놓고 떠났다.
근위대의 시체가 뒷마당에 쌓여 있는데, 정작 놈들의 시체는 한 구도 없었다.
게다가 왕은 허리를 다쳤다. 그때 별궁에서 넘어지면서 누군가가 감히 왕을 밟았다. 근위대일 게 뻔했다. 얼굴에 뚜렷하게 부츠 뒷굽 자국까지 남아 있었다.
왕이 지금 길길이 날뛰는 것은 근위대에 대한 화풀이도 포함이었다.
“국경까지 가는 길을, 심지어 길이 아닌 곳도 전부 막고 있습니다. 곧 꼬리가 밟힐 것입니다.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전하.”
“뭐라고? 지금 짐을 화나게 만드는 게 누군지 몰라 이런단 말이냐!”
쾅쾅!
왕이 미친 듯이 발을 굴렀다. 그러다 허리가 아파서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인원이 너무 부족합니다, 전하. 최선을 다하고는 있지만 근위대만으로는 국경 전체를 봉쇄할 수가 없습니다. 군대가 필요합니다.”
“이 쓸모없는 것들!”
퍽!
허리가 아파서 발을 구르지 못했던 왕은 왕좌의 팔걸이를 내리쳤다. 덕분에 손바닥도 아파졌다.
“군대가 필요합니다, 전하.”
근위대 기사는 거듭 머리를 숙였다.
“한시라도 빨리 군대를 모아 주십시오.”
“시끄럽다! 당장 나가!”
버럭 고함을 지른 왕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군대가 필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적이 남쪽 국경에 몰려와 있다 했으니까.
그런데 귀족들의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것도 사실이었다.
할 수 없이 왕은 숫자가 좀 되는 사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여덟 가문을 성으로 불러들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왕비가 좀 더 빨랐다.
딜레라스 왕비는 리에네 공주와 약속한 대로 친분이 있는 가문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냈다.
* * *
“릴 가문과 헨 가문이 기사단을 남쪽 국경으로 보내기로 했다 합니다.”
왕비는 몹시 피곤한 얼굴로 자신의 가문에서 온 사람을 맞이했다.
어젯밤 별궁을 피난처로 삼았던 왕이 얼마나 신경질을 부리고 갔는지 다들 잠을 설쳤다. 그 꼴을 보니 약하게나마 남아 있던 정도 다 떨어져 나갔다.
왕비는 지금 당장 왕이 전쟁터에 나가 목이 잘린다 해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아 걱정이었다.
“그래? 얼마나?”
“숫자 자체는 많지 않습니다. 두 가문 각자 스물 정도를 내놓았습니다.”
“왕이 그 숫자를 받아들이던가?”
“물론 대노하셨습니다. 기사라 보병과는 질이 다르지만 왕을 만족시키기엔 터무니없는 숫자였습니다. 기사를 내놓은 가문들은 기사들을 바치고 공연히 노여움을 산 꼴입니다.”
“왕은 그런 인간이지. 나머지 가문들은? 모두 여덟이 불려 왔다고 들었는데.”
“이런저런 핑계를 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전쟁이 시작되면 그때 군을 차출하겠다는 가문이 많습니다. 아직은 남쪽 국경이 열리거나 하지 않았으니까요.”
“눈치를 보겠다는 게로군. 아직 왕제들이 나서지 않고 있으니.”
“맞습니다. 제5왕제는 아들의 석방 문제 때문에라도 절대 먼저 나서서 왕의 편을 들지 않을 겁니다. 다른 왕제들은 섣불리 사병을 내주었다가 권력 관계가 뒤바뀌는 걸 염려하는 듯합니다.”
“그렇지. 먼저 나선 자가 먼저 죽는 것은 사실이지.”
왕비는 자신이 한 일이 흡족했다.
아직 렌 가문의 영향력이 살아 있고, 충분히 왕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왕은 제 아들의 죽음을 눈 감은 일과 자신을 별궁으로 내쫓은 일에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그런데 비 전하, 만약 이런 상황에서 국경이 열리면 어찌 되는 겁니까?”
딜레라스 왕비라고 배신을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리에네 공주는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달콤한 말로 자신을 속이고 군대를 모으는 일을 방해한 다음 강제로 국경을 열 수도 있었다.
“일단 왕이 책임을 져야겠지. 어제 일로 제법 숫자가 줄었다 하지만 왕실 근위대는 샤르카에서 가장 덩치가 크지 않나.”
하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전쟁을 시작한 것은 왕이었으니까. 감당을 하는 것도 왕의 몫이었다.
말했듯이, 왕은 대가를 치러야 했다. 자신과 아들에게 한 짓에 대해.
“수고했어. 아직 왕이 부르지 않은 가문은 어찌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알아봐.”
“예, 비 전하.”
왕비가 애를 쓴 탓에 왕이 군대를 모으는 일은 계속 진전이 없었다.
* * *
“저기라고……?”
블리니는 협곡 입구에 자리한 성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성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사냥터를 오갈 때 종종 쓴다더니, 그런 표시는 나지도 않았다. 성벽에는 이끼와 풀이 돋아 있었고, 하나 있는 탑에도 마찬가지였다.
“의외로 소박한 취향이 다 있었네.”
탁!
블리니는 더는 볼 것도 없다는 듯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벗어서 발끝에 걸어 놓은 구두를 괜히 까닥대는데 기분이 좋지 않았다.
“……과연.”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는 말에는 동감이었다.
하지만 굳이 이런 외진 곳을 고른 왕의 선택은 이해할 수 없었다.
“피신이 아니라 추방 같은데.”
블리니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행여나 애먼 불똥이 튈까 시녀들이 짐짓 고개를 숙였다.
블리니는 습관처럼 반지를 문지르려다가, 더는 손가락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괜히 미간을 비틀었다.
왕이 반지를 보면 발작을 하는 바람에 더는 끼고 있을 수가 없었다.
그 반지를 도로 뱉어내느라 목에서 피가 나올 정도였다. 그 고생을 했는데 눈치가 보여 이제 끼고 있을 수가 없었다.
“……짜증 나.”
생각해 보면 남편을 죽인 일부터 지금까지 한 일은 블랙을 끌어들이기 위해서였다.
무슨 짓을 해도 결과는 내내 예상 밖이었다. 하다못해 이젠 늙은 왕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아침마다 옷을 고르는 신세가 되었다.
“공국으로 갈까.”
작고 허름한 성에서 죽은 듯 머물 생각을 하자 두통이 일었다.
공국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왕실 근위대가 제 말을 쉽게 들을 것 같지도 않았다.
이것저것 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투성이였다. 블리니는 손가락으로 지끈대는 머리를 누르며 입을 다물었다.
하루라도 빨리 전쟁이 났으면 좋겠다 싶었다.
왕이 죽고, 샤르카 왕국은 적당히 찢어지고, 그리고 다 죽어간다는 나우크의 공주도 빨리 죽었으면.
……끼이익, 탁.
세상 모든 게 전부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성 안으로 들어섰다.
“도착했습…….”
도착했으니 내리라는 말이 중간에 멈췄다.
정중히 마차 문을 열었어야 할 손짓도 없었다.
“……?”
블리니가 시녀에게 턱짓을 했다. 문을 열어 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시녀가 일어나기 전, 알아서 문이 열렸다.
쾅!
문을 연 자는 왕실 근위대가 아니었다. 투박한 순례복을 걸치고 있었다.
“겔름 성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한참 기다렸습니다. 너무 굼뜬 게 아닙니까?”
“……? 너는…….”
블리니는 대륙의 온갖 억양이 뒤섞인 그 투박하고 걸걸한 목소리를 기억했다.
그가 머리 위에 덮어쓴 커다란 후드를 뒤로 젖혔다.
짜증과 경멸과 묘한 장난기가 뒤섞인 눈이 블리니를 향해 웃음을 던졌다.
“저를 기억하시나 봅니다, 황송하게도. ……미친 대공녀께서.”
“…….”
블리니의 얼굴이 홱 굳었다.
랜달. 그자의 이름은 랜달이었다.
* * *
근위대 열 명이 죽는 건 순식간이었다.
블리니는 몸이 굳은 채 장난처럼 쓰러지는 시체들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게.
이게 누구도 아닌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이라는 게.
첫눈에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작은 성의 앞마당에는 근위대의 시체가 쌓였다.
그 시체들을 등지고 보기 흉한 로브를 걸친 인간들이 자신과 시녀들을 에워쌌다.
그중 하나는 어젯밤까지 제 꿈을 헤집어 놓았던 남자였다.
그가 저 꼴을 하고 저를 찾았다. 그를 마주하는 시간을 수만 번 생각했어도 이런 식으로는 아니었다.
자신이 마치 죄라도 진 것처럼, 시체에 둘러싸여 무기력해진 모습으로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채는 아니었다.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보는군요. ……블리니 바셰드.”
“…….”
자신에게 말을 건네는 여자가 그중에서 가장 싫었다.
색이 진한 금발이 눈에 들어왔다.
헝클어지고 지저분했다. 세수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몸에 걸친 순례복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지금 말을 거는 그가 나우크의 공주일 것이다.
블리니는 처음 보는 생명체를 보듯 리에네를 바라보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우크의 공주가 그 남자와 똑같은 차림새를 하고 제 앞에 서 있다는 게.
“……죽어야 하는데.”
블리니가 입술을 달싹였다.
“거짓말이었어?”
리에네가 뭐라고 하기 전에 블랙이 리네에의 어깨를 뒤에서 감싸 안아 거리를 벌리게 했다.
“가까이 가지 마십시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
입술이 뒤틀렸다.
블리니는 한참 후에야 제 입술에서 뒤틀리고 메마른, 이상한 웃음소리가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었다고 했잖아. 죽어간다고.”
말에도 웃음소리가 섞였다.
“공주가 죽으면 당신은 과거를 되찾는 게 아니었어?”
자신을 거절한 그가 나우크의 공주에게 청혼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블리니가 믿었던 것은 하나였다.
블랙은 과거를 되찾아야 했고, 그 과거를 빼앗아간 사람이 나우크의 공주라는 사실.
청혼은 수단이었다. 그래야 했다.
블랙이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 일은 없었다. 그런 걸 할 줄 모르는 남자였다. 자신을 품지 못했던 것처럼, 다른 모든 것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나우크의 공주가 특별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없어야 했다.
“죽이려고 혼인한 거잖아. 아니면 혼인 같은 건 하지 않았을 거잖아.”
“반지는.”
블랙은 블리니가 하는 말을 듣지 않았다.
들을 이유가 없다는 식이었다.
“몸에 지니고 있다는 걸 알아. 돌려주면 죽이진 않겠어.”
그를 보는 눈가에 경련이 일어나는 듯했다.
“공주를 죽여. 그럼 돌려줄게.”
“……정신을 못 차렸군. 네가 지금…….”
“잠깐만요.”
나우크의 공주가 블랙의 팔을 잡아당겼다. 블랙의 몸이 쉽게도 끌려갔다. 자신이 아는 한 가장 단단하고 무거웠던 몸이었다.
“약속했잖아요. 나한테 맡기기로.”
나우크의 공주가 기도 안 차는 소리를 하는데 블랙이 그 얼굴을 향해 싱긋 웃었다.
“맡기고 있습니다.”
“아니라고요. 자꾸 말을 섞고 있잖아요. 그건 싫다고 했어요.”
저런 말을 하는데 웃는 이유가 뭘까.
“저런 헛소리를 공주님이 듣고 있게 만들 수는 없잖습니까.”
“그래도 말하지 마요. 가까이만 있어도 기분 나쁘니까요. 지금 내가 세수를 안 한 얼굴이라는 건 알죠?”
“압니다.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옷도 엉망이고, 심지어 이 옷에서는 냄새도 나요.”
“내 옷에서도 나요.”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지금은 공정하지 못하다고요. 블리니 왕자비는 나와는 다르게 아주…… 말끔하잖아요.”
블랙은 더러워진 금발을 다정하게도 쓸었다.
“맞아요. 공정하지 못합니다. 공주님은 냄새나는 순례복을 입으면 갑자기 귀여워지는 사람이라.”
“아니! 그런 말을 하면 안 되고요!”
나우크의 공주가 이쪽을 돌아보며 블랙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키가 한참 클 텐데, 저 입이 잘도 막혔다.
“우리는 반지를 돌려받아야 하잖아요……. 당신은 입을 다물고 있어요.”
“…….”
블랙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블리니의 눈에는 그 모든 게 다 아귀가 어긋난 인형극처럼 보였다.
말이 안 되잖아.
전부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