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무섭지 않은 협박
(126/145)
126. 무섭지 않은 협박
(126/145)
126. 무섭지 않은 협박
2022.06.15.
“크흠.”
헛기침을 한 나우크의 공주가 돌아섰다.
블랙은 눈이 먼 모양이었다.
헝클어진 머리와 더러운 얼굴을 한 나우크의 공주는 조금도 귀엽지 않았다.
증오스러웠다. 오늘 처음 보는 얼굴인데도.
“그대가 반지를 삼켰다는 얘길 들었어요.”
저 초록 눈이 싫었다.
“시간을 따져 보면 반지가 지금까지 뱃속에 있지는 않겠네요. 나는 그 반지를 돌려받길 원해요. 그 반지는 내 남편의 물건이고, 나우크의 물건입니다. 그대의 손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나는 그 반지를 제자리에 돌려놓을 생각이에요. 돌려줘요.”
저 살구색 입술이 싫었다.
“내 거야.”
“……그럼 다르게 말을 하죠. 반지를 돌려주면 나우크는 샤르카와 불필요한 전쟁을 벌이지는 않을 겁니다. 나우크에 갇혀 있는 알리토의 대공자는 무사히 공국으로 돌아갈 것이고요. 그대에게 더는 의미가 없는 반지를 돌려주기만 하면 많은 사람이 편해질 거예요.”
저 부드럽고 편안한 목소리가 싫었다.
“내 거라고.”
“다른 사람은 상관없나요? 그대는 왕족이잖아요. 대공자는 그대의 핏줄이고요.”
“귀가 어둡나 보군. 가엾게도.”
“그럼 협박을 하죠. 그대는 지금 몸을 지킬 무기 하나 없이 티와칸의 포로가 되었어요. 그대를 편들어 줄 유일한 사람인 샤르카의 왕은 이곳에서 멀리 있고요. 알리토의 대공은 대공자의 석방을 위해 그대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보내왔어요. 나는 이 자리에서 나의 기사단에게 당신의 옷을 벗겨서라도 반지를 가져오라고 말할 수 있어요. 그편이 나은가요?”
“그런 게 협박이라고?”
블리니가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협박이라면 무서워야지. 살갗 좀 드러난다고 그게 무섭겠어?”
“무서울 거예요. 무섭지 않을 리가.”
“너는 그런가?”
“맞아요. 나는 무서워요. 저 남자가 이런 모습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런 모습이 뭔데?”
“남이 내 옷을 벗기는데 저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보고만 있을 거라 생각하면 무서워요. 평생 끝나지 않을 악몽 같겠죠. 내가 바닥까지 떨어져서 약해지고 악해지는 걸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 소름이 끼쳐요.”
“너나 그런…….”
“나는 절대로, 그런 모습은 보이고 싶지 않아. 보고 싶지도 않아.”
“…….”
블리니가 입술을 꽉 물었다.
무서운 건 강제로 옷이 벗겨지는 게 아니었다. 반지를 빼앗기는 것도 아니었다.
그걸 보고 있을 블랙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예전에 진작 버려 버린 것처럼.
제 인생에서 가치 있다고 여겼던 유일한 무언가가 그 순간 조각날 것이다.
블랙이 더 이상 자신을 욕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다. 그건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인간의 욕망에는 늘 시한이 있었으니까. 인간이 죽듯이 욕망도 죽었다. 그를 향한 자신의 욕망이 질기도록 살아 있는 것이었다.
그건 괜찮았다. 하지만 죽은 욕망보다 더 하찮은 것이 될 수는 없었다.
“그게 무섭지 않다면 그대가 그 반지를 갖고 있을 이유도 없지 않을까요.”
“…….”
블리니는 끝내 리에네가 옳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알겠어요. 선택은 그대의 몫이니. 랜달 경.”
“……네, 공주님.”
갑자기 이름이 불린 랜달이 당황하다 재빨리 앞으로 나섰다.
“이런 일을 시켜서 미안하지만 블리니 왕자비의 옷을 벗겨 반지를 회수하세요.”
“뜻대로.”
리에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가 갈릴 정도로 싫은 선한 얼굴이 더는 아무런 안타까움도 없이 자신을 쳐다보기만 했다.
“혼자서는 모양새가 험해지겠는데. 누구 하나 와서 도와.”
랜달도 마찬가지였다. 돕겠다고 나서는 티와칸도 그랬다. 자신은 적국의 왕자비도 알리토의 대공녀도 아닌, 그저 반지를 감추고 있는 석상이 된 듯했다.
“……흡.”
이상한 숨소리가 제 입에서 흘러나왔다.
블리니는 그게 블랙과 눈이 마주쳐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보는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리에네가 맞았다. 저 눈은 평생 잊을 수 없는 악몽이었다.
“손 치워.”
블리니가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블랙을 바라보며 말했다.
“줄 테니까.”
“…….”
그 말을 하는데 이가 갈렸다. 턱이 빠듯하게 당겨 왔다.
“어서 내놓으십시오, 대공녀 저하.”
랜달이 블리니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블리니는 이를 갈며 가슴 쪽에 손을 집어넣었다. 속드레스의 단춧구멍에 끼워 두었던 반지가 나왔다.
퍽!
블리니가 그 반지를 집어 던졌다.
“……성질은.”
랜달이 혀를 차며 데구르르 구르는 반지를 쫓아가 집어 들었다.
“여기, 받으십시오.”
그가 반지를 내민 사람은 리에네였다.
리에네가 반지를 받고 블랙을 쳐다보았다. 그 반지가 맞다는 뜻으로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
반지에는 무수한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애지중지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매일 손에 쥐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게 블리니가 무언가를 아끼는 방법이었을지도 몰랐다.
리에네가 반지를 꼭 쥐었다.
“목적을 이뤘네요. 이제 가요. 블리니 왕자비를 묶으세요.”
블리니가 팩 고개를 치켜들었다.
“뭐라고? 묶으라니?”
“얌전히 따라오지는 않을 거잖아요.”
“어째서……. 어디로 데려간다는 거야! 반지만 주면 된다고 했잖아!”
“아뇨. 그런 말은 안 했는데. 그대가 잘못 들었어요.”
“많은 사람이 편해진다고…….”
“거기에 그대는 없어요.”
리에네가 냉정하게 말을 잘랐다.
“나는 렌펠 경이 다친 걸 잊지 않았어요. 그리고 웨로즈 경을 거짓으로 이용한 것도. 이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본인이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랜달 경, 묶으세요.”
“물론입니다.”
랜달이 어쩐지 신이 난다는 얼굴로 신속하게 블리니를 묶었다.
시녀들은 그냥 풀어 주기로 했다.
아니, 그냥 풀어 주는 게 아니라 약간만 이용하기로 했다.
“이제 남쪽 국경으로 가서 티와칸과 합류하는 거죠?”
시녀들은 잘못된 정보를 듣고 그걸 뒤늦게 도착한 바셰드군에게 알려 줄 것이다.
블랙은 웃음을 억지로 참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갈 길이 머네요. 서둘러야겠어요.”
해가 지기 전에 북쪽 국경을 넘어야 했다.
일행은 블리니가 타고 온 마차와 말을 기꺼이 쓰기로 했다.
손발이 묶이고 입을 막힌 블리니가 자신의 짐을 싣고 온 트렁크에 실렸다.
이번에 티와칸은 블루와렌으로 나들이를 가는 귀족가의 일행이 되었다.
순례복을 벗은 리에네는 블리니의 드레스를 입게 되었는데, 어색할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막상 옷을 입고 나자 왠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
다각다각!
마차가 빠르게 한적한 길을 달렸다.
어젯밤 하루 고생했다고 마차를 탈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웠다.
“고작 이런 걸 빼앗았다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면 나도 꽤 유치한 사람인가 봐요.”
리에네가 평소에는 입지 않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을 보고 블랙은 잠시 표정이 굳었다.
“내가 그간 무심했던 것 같습니다.”
“왜요?”
“밝은 옷이 잘 어울린다는 걸 이제야 알아서.”
“흠……. 이런 옷이 좋아요?”
“안 좋을 이유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나도 무심했네요. 앞으로 밝은 옷을 입도록 할게요.”
푹신한 마차 안에서 블랙이 리에네를 훌쩍 안아 제 무릎 위에 앉혔다.
“나는?”
“네?”
“나는 어떤 색을 입는 게 좋습니까?”
“당신은…….”
제법 심각하게 고민을 하던 리에네가 귀로 입술을 가져가 속삭였다.
“안 입는 게 좋아요.”
“……. 그건 곤란한데.”
“나만 볼 수 있는 모습이잖아요.”
“그런 말이 곤란하다는 겁니다.”
블랙이 웃음을 지우고 리에네의 귓불을 약하게 물었다.
살짝 따끔한 감촉은 이제 리에네에게도 곤혹스러운 감각이 되었다.
“당신……. 내가 장난 좀 쳤다고 너무 야하게 굴고 그러지 마요.”
리에네가 블랙의 머리카락을 살짝 잡아당기며 입술을 뗐다.
“장난도 좀 봐 가면서 쳐요.”
한 사람은 키스를 하려 들고, 다른 사람은 숨넘어가게 웃으며 입술을 피하는 장난이 한동안 이어졌다.
그래서 같은 생각을 했다.
어서 집으로 돌아갔으면 좋겠다는.
깃발을 떼어내 왕실 소유라는 것을 감춘 마차는 해가 지기 전, 국경에 도달했다.
국경을 넘어서부터는 블루와렌이었다.
* * *
“으응?”
연락용 매가 날아왔다.
언젠가부터 정보상에게서 연락이 끊겼다. 전쟁 얘기가 나오고 상황이 험악하게 돌아가니 눈치 빠른 정보상이 알아서 발을 뺀 것이다.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눈이 가려진 것 같은 불편함은 어쩔 수가 없었다.
게다가 블랙에게서 온 연락이 ‘합류 지연. 대기.’ 이런 식이라면 답답함은 배가 되었다.
그것 참 이상한 일이었다.
페르모스는 매를 옆 사람에게 넘기고 저 아래 내려다보이는 샤르카의 남쪽 국경 수비대를 관찰했다.
희한하게도 눈에 띌 정도의 인원 보충은 없어 보였다.
저 정도면 두 시간 안에 정리가 끝날 것이다. 두 시간 안에 국경을 밀고 샤르카 왕국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저 자식들은 겁이 없는 건가, 아니면 멍청한 건가. 어쩌자고 저러고 있는 건데?”
티와칸들 대다수가 같은 의견이었다.
어제부터 뭔가 열심히 경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인원이 너무 적었다.
“혹시 함정일까요? 우리가 먼저 내려오길 바라서?”
“그건 다 점검하지 않았냐? 그럴 만한 게 통 보여야지.”
“함정을 아주 잘 파 놓았으면…….”
“샤르카 군에 나보다 머리 좋은 놈이 있다고? 너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냐? 엉?”
티와칸이 턱을 긁적였다.
“아니, 그럴 수도 있지 않습니까. ……뭐, 아니면 놈들이 멍청한 것이고요.”
“딴에는 경계를 하는 걸 보니 우리가 있는 걸 모르는 게 아니야.”
냉정해져야 했다.
함정이 있거나, 아니면 합류할 군대에 문제가 생겼을 것이다.
“그만한 문제가 뭐가 있지?”
샤르카 왕국에 있는 블랙이 이미 본궁을 헤집어 놓았다는 얘기는 들었다. 안타깝게도 왕이 죽거나 잡혔다는 얘기는 없었지만 티와칸이 당했다는 얘기도 없었다.
상식적으로 그다음에는 샤르카 왕국 전체가 전쟁 준비로 정신이 없어야 했다.
“……돌겠네, 진짜. 안 되겠다. 매를 준비해. 주군께 묻기라도 해야겠어.”
“샤르카 안으로 매를 보내자고요? 우리가 보내는 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어쩔 수 없잖아. 그리고 우리 매를 잡을 만한 인간이 샤르카에 얼마나 된다고.”
“아, 그건 그렇다 쳐도 말이죠.”
“시끄러워. 일단 보내. 쫓기면 알아서 돌아올 거야.”
“주군께서 뭐라 하시면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휘익!
잠시 후 티와칸의 진영에서 매가 날아갔다. 눈 깜짝할 새 하늘 높이 날아오른 매는 까만 점이 되었다.
* * *
“여기가 어디라고요?”
리에네가 다시 물었다.
블루와렌 시의 성벽을 통과했을 때는 늦은 저녁이었다.
다들 피로가 누적된 상태라 하룻밤 잠을 자고 난 뒤 나우크로 이동하는 것으로 얘기가 됐다.
마차는 널찍한 대로를 달려 번화가 인근의 어떤 저택에 도착했다.
블루와렌의 중앙 광장을 마주 보는 저택은 높이 솟은 붉은색 담이 인상적이었다. 저택 안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아 처음에는 그저 벽인 줄 알았다.
정문을 통과하자 그 안에는 북적대는 도시와는 전혀 다른 한적함이 펼쳐져 있었다.
널찍한 정원에는 큼지막한 분수가 물을 뿜었고, 나우크에서는 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정원수가 이국의 향취를 뿜어냈다.
“블루와렌에 올 때 묵는 곳입니다.”
블랙은 리에네의 손을 팔에 얹고 흰색 기둥이 늘어선 회랑 안으로 들어서며 답했다.
“그러니까 당신 집이라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