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벗어날 수 없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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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7. 벗어날 수 없도록
2022.06.19.
블랙은 어리둥절해하는 리에네의 코를 툭 쳤다.
“나우크 같은 의미가 아니라 편의상 가지고 있는 곳입니다. 쉴 곳은 필요하니까.”
“그게, 음……. 당신 엄청 부자군요.”
“부관이 유능한 덕에.”
티와칸 전체가 편히 쉬고 잘 만큼 커다란 저택은 정돈이 잘되어 있기도 했다. 저택의 관리를 맡은 자가 내일 아침 일찍 일꾼들을 보내올 것이라 했다.
“집이 있었어.”
리에네는 나우크 성보다 더 잘 꾸며져 있는 것 같은 저택 내부를 보다 한숨을 쉬었다.
블랙이 등 뒤에서 리에네의 정수리에 입술을 댔다.
“집이 아닙니다.”
“집인데 왜 집이 아니라고 해요…….”
“공주님이 없었으니까.”
“…….”
리에네가 고개를 뒤로 젖혀 블랙의 눈을 마주했다. 거꾸로 보이는 동그란 코끝이 괜히 사랑스러웠다.
“괜히 하는 말은 아니죠?”
“괜한 말을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하긴. 당신은 그런 사람이죠. 블루와렌에서 살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이렇게 좋은 집이 있는데?”
“활기차고 편리한 곳이지만, 여기서도 늘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랬구나……. 가끔 신기해요.”
“어떤 게?”
“당신이 나우크로 돌아온 게요. 당신은 대륙 여기저기를 다 가 봤을 거잖아요.”
“딱히 그렇진 않은데.”
“그렇다 해도 나우크보다 좋은 곳이 많이 있었겠죠. 그런데도 돌아왔잖아요.”
“말했듯이, 다른 곳에는 공주님이 없었으니까.”
리에네가 피식 웃었다.
“그건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인 줄 알겠어요. 나우크에 돌아올 때부터 내게 진심이었던 건 아니잖아요?”
“알고 있었을 겁니다. 결국은 이렇게 되리라는 걸.”
“음……. 그것도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 같은데.”
“사실 나도 내가 이런 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데 공주님이…….”
블랙이 잠시 말을 끊고 눈썹을 찡그렸다.
리에네가 머리 위로 손을 뻗어 블랙의 눈썹을 만지작거렸다.
“내가 뭘요?”
“클라인펠터에게 마음을 준 적이 없었다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겠던데.”
“아……?”
“이렇게 됐을 겁니다. 언제가 됐든.”
“아아…….”
리에네가 작게 턱을 끄덕이자 블랙이 목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입술 위치가 뒤바뀐 키스는 새로웠지만 역시 하던 대로가 좋았다.
“돌아가면 나우크 성도 손을 봐야겠어요. 당신을 원래 있던 곳보다 못한 곳에서 살게 만들 수는 없잖아요.”
저택 중앙의 계단 앞에서 블랙이 리에네를 안아 들었다.
“이 집이 공주님 눈에 괜찮습니까?”
“어떻게 아니라고 하겠어요.”
“그럼 가져요.”
“……네?”
저벅, 저벅.
블랙이 리에네를 안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여기 말고도 두어 군데 더 있습니다. 다 가져요. 이제 내게는 필요 없는 곳이 되었으니까.”
“와……. 너무 많은데요. 그런데 나한테도 필요 없……. 아니, 아니에요. 다 줘요.”
리에네가 블랙의 목덜미에 파고들었다.
“당신한테 달리 갈 곳이 있으면 안 되니까. 다 줘요. 하나도 빼놓지 말고.”
“좋습니다. 대신 공주님도 뭔가를 해 줘요.”
“좋아요. 내가 줄 수 있는 거라면 줄게요.”
“물건은 아니고.”
“그럼 뭔데요.”
블랙이 잠시 걸음을 멈추고 리에네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갔다. 그가 뭐라고 속삭이자 리에네의 볼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그건 좀 너무…….”
“안 됩니까?”
“안 된다고 하면 집은 안 줄 건가요?”
“네.”
블랙이 너무 단호하게 안 된다는 말을 하는 바람에 리에네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럼 어쩔 수 없네요. 좋아요. 해 줄게요.”
“약속한 겁니다.”
갑자기 계단을 오르는 걸음이 빨라졌다.
블랙이 리에네를 데려간 곳은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이었다.
잠시 후 욕실에서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 * *
블랙이 쓰는 3층 방의 발코니에서는 저택 뒤편으로 흐르는 강을 볼 수 있었다.
새벽에 깨어난 리에네는 블랙이 입는 것과 똑같은 잠옷 가운을 걸치고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이 수면에 닿아 차고 나른한 물안개를 만들어내는 시간이었다.
“……왜 벌써 일어났습니까.”
딴에는 조용히 움직인다고 했는데 블랙이 바로 일어나 뒤쫓아 왔다.
“물소리가 들려서요.”
“시끄러웠습니까?”
“아뇨. 시끄럽다기보다는……. 나우크에서는 들을 수 없는 소리라 낯설었어요.”
그래서 잠이 일찍 깼다는 말이었다.
리에네가 발코니 난간에 걸터앉자 블랙이 허리를 받쳐 주었다.
“강가라 그런지 공기가 건조하지 않아요.”
“이 시간이면 더 할 겁니다.”
잔잔히, 하지만 꾸준히 흘러가는 강을 보며 리에네가 말했다.
“나우크도 이렇게 될까요?”
그렇게 묻는 리네에의 목에는 블리니에게서 돌려받은 반지가 팬던트가 되어 걸려 있었다.
블랙이 손을 뻗어 반지를 들어 올렸다.
블리니에게 컸던 반지는 리에네에게도 컸다. 엄지에 끼고 있으면 블리니처럼 반지를 내내 만지작대고 있을 것 같아 목에 걸기로 했다.
“이게 정말로 열쇠 역할을 하는 반지라면. 그렇게 될 겁니다.”
“……숨을 못 쉬겠어요.”
리에네가 반지를 든 블랙의 손에 뺨을 비볐다.
“너무 좋아서……. 너무 꿈같아서.”
블랙은 반지를 내려놓고 리에네의 뺨을 감쌌다.
“조금만 기다려요. 곧 현실이 될 테니까.”
“어서 돌아갔으면 좋겠어요.”
블랙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어제 함께 욕실에 있을 때만 해도 며칠 더 있으면 좋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음……. 그 순간에는 진심이었어요. 미안해요. 생각이 바뀌어서.”
“좀 미안해해요. 나는 며칠 있을 생각에 설렜으니까.”
“알아요. 나도 그랬어요. 어제까지는.”
“이젠 아닙니까?”
“네. 물소리를 들으니까 다른 건 하나도 생각을 못 하겠어요. 가슴이 너무…… 계속 쿵쿵거려요.”
블랙이 발코니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아 눈높이를 맞추었다.
“공주님.”
“네.”
“그럼 이제 나우크를 떠나올 때 했던 생각은 끝난 겁니까?”
“아…….”
샤르카 왕국으로 함께 가겠다는 말을 하며 리에네는 생각할 게 있다고 했다.
-내가 정말로 이 왕관을 쓰길 원하는지, 준비가 되긴 했는지, 그럴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나우크 밖에서 보고 싶어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내가 준비가 됐는지 안 됐는지. 아직도 내 마음 한구석에서는 나우크의 왕은 당신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해요. 내 왕관은 자격 없이 주어진 거니까.”
“이제껏 그 왕관을 머리에 얹고 나우크를 지켜 온 건 공주님이었습니다.”
“내가 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그냥, 뭐가 됐든 아무래도 상관이 없을 것 같아요. 그런 게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우크에 물이 돌아온다는데.”
블랙이 웃음 같은 기묘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공주님에게 자격이 있다는 말 같습니다.”
“내가 나우크의 군주로서 잘한 일이 있다면 그건 당신의 청혼을 받아들인 거예요. 그래서 당신이 돌아왔고, 물이 돌아오는 거잖아요.”
“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게 말입니다.”
머리로는 생각하지 않고 있을지 몰라도, 마음으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을 것이다.
왕관을 쓸 자격이라는 건 단순히 왕족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생기는 게 아니라는 걸.
샤르카의 왕도, 블리니 대공녀도 딱히 왕관과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들이었다. 그런 인간들을 눈으로 보았으니 결론을 얻었을 것이다.
리에네가 반지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건 가이너스 가문의 반지잖아요. 당신이 지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러니 공주님 겁니다.”
“……당신 건 다 내 거예요? 그럼 안 될 텐데.”
“왜 안 됩니까?”
“왜냐면 나는 욕심쟁이 같거든요. 당신 집들을 가져왔는데 조금도 미안하지 않고 마냥 좋아요. 당신은 이제 나우크 말고는 갈 데가 없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다른 걸 줘도 다 받고 싶어요.”
블랙이 몸을 일으켰다. 난간에 발을 올리고 앉아 있던 리에네를 이쪽으로 돌리며 그가 가운 끈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건 내가 절대 공주님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말도 되는데…… 그건 안 무섭습니까?”
“그게 왜 무섭죠? 그 반대가 무서운 거 아닌가요?”
“내 걸 공주님이 다 가져가면, 나는 더는 잃을 게 없어집니다. 공주님을 빼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리에네가 모르지 않으리라 믿었다.
“나는 당신이 그러길 바라는 건데요.”
이렇게 꼭 듣고 싶은 대답을 해 주었으니까.
“그럼 다 가져가요.”
“나중에 다른 말 하기 없어요.”
“공주님이야말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새벽 공기가 묻은 입술이 달았다. 한참 입술을 삼키고 있자 잠옷 가운이 느슨해졌다.
“나는 좀 더 자고 싶은데…… 공주님은?”
“나도요.”
“그럼 들어가요.”
블랙이 리에네를 안아 들고 발코니를 떠났다.
나란히 침대에 누웠지만 잔다는 건 거짓말이 되었다.
흐트러지던 잠옷 가운 두 벌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침실 안을 달아진 숨소리가 채웠다.
* * *
결국 느지막한 시간에 침실로 가져온 아침을 먹던 중이었다.
“……블리니 왕자비가요?”
“네, 공주님.”
랜달이 블리니의 전언을 가져왔다.
리에네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흠…….”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굳이 얘기를 들어줄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차피 헛소리일 겁니다. 공연히 거기까지 내려가는 걸음이 아까우실 겁니다.”
랜달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당신은요?”
블랙은 리에네가 한 입 먹은 채 손에 들고 있던 빵을 고개 숙여 물다가 답했다.
“……중요한 얘기는 아닐 겁니다. 얼굴을 마주하기 싫으면 무시해요.”
“그보다는 왜 당신이 당신 걸 놔두고 내 손에 들린 빵을 먹는지가 더 신경 쓰이긴 해요. 그렇지만 만나 보긴 하겠어요.”
“이렇게 하면 먹여 주는 것 같아서. 꼭 만나야 합니까?”
“먹여 달라고 하면 되잖아요. 그리고, 네.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궁금하긴 하네요.”
“내가 말하기 전에 해 줬으면 해서. 그럼 식사를 마치고 가는 걸로 해요. 나도 같이 갈 겁니다.”
“가끔 당신이 내게 바라는 게 이해가 안 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원한다니 해 주고 싶어요. 빵 말고 뭐가 먹고 싶은가요?”
“포도가 좋겠습니다.”
“자요.”
입으로 가져다주는 포도를 블랙이 손가락까지 부드럽게 삼켰다.
랜달이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냥 대공녀가 이 모습을 보면 되겠습니다. 그럼 얘기를 하자느니 하면서 귀찮게 굴 일도 없을 텐데.”
“……나는 네가 계속 거기 있는 이유를 모르겠는데.”
포도를 씹느라 블랙이 잠깐 사이를 두고 말을 하자 랜달이 후다닥 허리를 폈다.
“지금 즉시 나가 보겠습니다. 편히 식사 나누십시오.”
랜달이 나가자 거리가 더 가까워졌다. 자신이 앉은 의자를 제 쪽으로 끌어당기는 블랙을 보며 리에네가 웃었다.
“이번엔 어떤 거요?”
“포도.”
“솔직히 말해요. 일부러 그러는 거죠. 또 손가락을 물려고.”
“문 건 아니었습니다.”
물린 게 아니라 먹히는 느낌이었다.
“손으로 줄 거면 포도 말고 다른 것도 상관없어요.”
“그럼 이것.”
리에네가 장난을 치듯 찐득한 계피 크림이 발려져 있는 돼지 구이를 집어 들었다.
“이래도 먹을 거예요?”
“줘요.”
블랙이 구이를 한 입 베어 물자 크림이 미끄러지며 리에네의 손목을 타고 흘렀다. 그러자 입술이 크림 자국을 따라 움직였다.
“아…… 너무해.”
리에네가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블랙의 뺨에 발랐다.
“당신도 당해 봐요. 이런 게 묻으면 내가 음식이 된 것 같단 말이에요.”
블랙이 뺨을 내밀었다.
“먹어 줘요.”
“정말이지…….”
쓰게 웃던 리에네가 뺨을 핥았다.
더 맛있지는 않았지만, 분명히 더 맛있기도 했다. 이해할 수 없지만 완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도 아니었다.
서로 장난을 치느라 아침 식사는 꽤나 오래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