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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 비밀 (1)
2022.06.22.


크림 외에도 이것저것 묻은 얼굴과 손을 씻고 지하 창고에 갇혀 있는 블리니를 찾았을 땐 정오가 되어 가고 있었다.


“……아침을 먹고 있다고 들었는데.”

어둑한 창고에 들어서는 리에네를 보며 블리니가 짜증을 내뱉었다.

블리니는 착실히 손발이 묶여 있었고, 리에네는 혼자였다. 블랙은 문밖에 있었다.


“지금이 아침인가?”

“식사가 오래 걸렸어요. 무슨 얘기를 할 건가요?”

“그 남자는 먹여 주는 걸 좋아해. 손으로든, 입으로든.”

“무슨…….”

리에네가 눈썹을 웅크렸다.


“침대에서는 늦도록 게으름을 피우고. 생긴 것과 다르게. 밤에는 재우지 않고 늦잠을 자게 만들지.”

“…….”

열이 받긴 했다.

다 사실이었으니까.


“그래서요?”

리에네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짜증을 숨기지 않았다.


“가까워지면 느슨해져. 아이처럼. 더는 경계를 하지 않아.”

……뭐지, 진짜.

다 맞는 말이야.


“이 세상에 나밖에 없다는 듯 굴지.”

“……할 말이 그거라면 나는 가 보겠어요. 아는 얘기를 굳이 그대에게서 듣고 있을 이유는 없으니까.”

리에네가 발을 막 돌리려는데 블리니가 물었다.


“네게는 그렇게 굴어?”

“네. 나한테도 똑같이 굴어요. 그대가 내 남편을 나보다 잘 안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라면 실패예요.”

“왜……?”

“……뭐?”

블리니가 예상외의 표정을 짓는 바람에 리에네는 조금 당황했다.


“뭐가 왜라는 건가요. 그런 남자니까 그렇게 구는 거겠죠.”

“그런 남자가…….”

“이 얘긴 더 이상 하지 않겠어요. 의미도 없이 불쾌하기만 하니까. 그럼 더는 할 말이 없는 건가요?”

“왜…….”

“쉬도록 해요. 딱한 처지가 돼서 쉽진 않겠지만.”

리에네가 몸을 돌렸다.

손이 문고리를 당기는 순간 블리니가 입을 열었다.


“그 반지, 평범한 반지가 아니야.”

“……?”

다시 몸이 돌아섰다.


“비밀이 숨겨져 있어. 나를 놓아줘. 그럼 알려 주겠어.”

“그게 사실인가요?”

“반지를 가져와. 보여 줄 테니.”

“…….”

아무리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지금 하는 말이 거짓말 같진 않았다.

리에네는 블리니를 쳐다보았다. 지금 한 말이 진심이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럼 블리니에게도 조금은 양심이 있다는 말이 될 테니까.


“놓아달라는 건, 샤르카로 보내 달라는 말인가요?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그대는 샤르카로 가게 되어 있으니까. 나우크를 거쳐서 가겠지만.”

“……더는 너희들과 있고 싶지 않아. 볼일이 남았다면 빨리 끝내. 그리고 다시는 보지 않는 것으로.”

그 대답에서 리에네는 샤르카로 돌아가길 원치 않는다는 속내를 읽어냈다.


“아뇨. 그대는 지금 전쟁 포로예요. 샤르카의 항복을 받아낼 때까지는 나우크의 수중에 있어야 해요.”

“반지의 비밀이 궁금하지 않아? 알려 준다잖아!”

“내가 알아낼 거예요.”

“네가 어떻게?”

“아직은 모르죠. 하지만 그대가 알아냈다면 나도 알아낼 수 있어요.”

블리니가 아드득 이를 갈았다.


“……네가 이런 인간이라는 걸 그 남자도 알고 있나? 그 얼굴로 선한 척만 하는 위선자라는 걸?”

“그대가 나를 위선자라 하는 게 우습군요. 내가 위선을 떨 필요가 뭐가 있나요? 그대처럼 명확한 적도 없을 텐데.”

“…….”

“말했듯이, 나는 그대가 저지른 일을 아무것도 잊지 않았어요. 시답잖은 거래를 제시할 요량이면 앞으로는 입을 열지 말아요. 그대를 마주하는 건 내게 불쾌한 일이에요.”

달칵.

리에네가 문을 잡아당겼다.

등 뒤에서 블리니가 처음으로 내뱉는 절망이 들려왔다.


 

* * *

문을 열고 나오자 블랙이 있었다.


“별일 없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별일이 있었으면 진작 알았을 거잖아.

살짝 눈썹이 꼬였다.

언젠가 그 손톱 가위를 발견했을 때와 비슷했다. 블랙이 잘못한 건 아니었지만 자신은 마음이 꼬였다.


“나는 방으로 돌아갈게요. 나우크로 출발하는 건 언제죠?”

“원한다면 언제든지.”

“잘됐네요. 마차를 타고 가나요?”

“네.”

“그럼 옷을 갈아입지 않아도 되겠군요. 나도 준비가 됐어요.”

“마차를 대기해 놓겠습니다. 그런데…….”

“네?”

블랙이 웃는 얼굴로 리에네의 앞에 섰다.

갑자기 걸음이 막힌 리에네가 주춤하다 옆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걸 다시 블랙이 쫓아왔다.


“눈을 안 마주치는 걸 보니 마음 상한 일이 있었나 봅니다.”

……무슨 일인지 알 거 아냐. 말소리가 안 들릴 거리도 아니었는데.


“알면 비켜 주시겠어요? 얼굴은 좀 나중에 보고 싶어요.”

“나는 지금 봤으면 하는데.”

블랙이 쑥 고개를 내리는 바람에 잠깐 눈이 마주쳤다.

리에네가 블랙의 뺨을 밀어냈다.


“아, 정말. 좀 나중에 봐요.”

“지금 봐요.”

“지금은 좀 그래요.”

기를 쓰고 눈을 피하는 리에네의 손목을 쥔 채 블랙이 웃음소리를 참았다.


“그때 겪었잖습니까. 나는 공주님이 혼자 마음을 풀도록 내버려 두는 성격이 아니라는 걸.”

손톱 가위 때 얘기였다.

……생각해 보니 내 기분이 나쁜 이유도 똑같네.

아냐, 아냐. 달라. 그때는 내가 오해한 거였지만 지금은 아니라고.


“그때하고는 달라요.”

입술이 저도 모르게 비죽거렸다. 리에네가 다시 한번 블랙을 밀었다.


“비켜 줘요.”

블랙은 밀려나지 않았다.

말한 대로, 그는 리에네를 혼자 내버려 두는 성격이 아니었다.


“얼굴을 봐주면 화를 풀어 주겠습니다. 날 믿어 봐요.”

“……그렇게 심각한 건 아니에요. 당신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니까 금방 풀어질 거라고요. 지금은 그냥, 마음만 좀 그런 거예요. 이러지 않아도 돼요.”

“리에네.”

블랙이 고집스럽게 옆으로 돌아가 있는 리에네의 얼굴을 붙잡고 이마를 마주 댔다.

더는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공주님은 왜 이렇게 한결같습니까.”

“……뭐라는 거죠. 아무튼 놓아줘요. 당신이 그러면 오히려 더 해소가 안 될 것 같아서 싫어요.”

“공주님이 싫다고 하는 건 내게는 다 좋은 일입니다.”

“이번에는 진짜, 진짜거든요.”

“잠깐이면 됩니다. 나 좀 봐줘요.”

“봐서 뭐 하게요.”

“화가 풀리게 될 겁니다.”

“아니, 그거야 자연히 그렇게 되겠죠. 나라고 좋아서 화를 내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그냥 나 혼자 기분이 안 좋은 거지만.”

“공주님.”

“자꾸 부르지 말아요. 마음 약해지게.”

“공주님. ……리에네.”

……아, 진짜.

이 남자는 다 좋은데 이 버릇은 좀 고쳐야 해.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 좀 내버려 두란 말이야. 알아서 풀 거라고도 했으면. 좀.


“……좋아요. 볼 테니까 바로 놔줘요.”

리에네가 그를 떼어놓겠다는 심정으로 내키지 않는 시선을 마주했다.

블랙은 화가 날 정도로 입술을 크게 늘여 웃고 있었다.

대체 왜 웃는 거야. 나는 기분이 너무 나쁜…….


“거짓말입니다.”

“……뭐가요?”

“대공녀가 한 말.”

“……? 어떤 게요?”

“전부 다. 반지에 비밀이 있다는 말을 빼고. 그건 나도 모르는 일이니까.”

“전부…… 다?”

리에네가 눈을 깜박거렸다. 잘 믿기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봐도 거짓일 부분이 없었다.


“거짓말. 전부 당신이 하는 짓이잖아요.”

리에네가 블랙을 떠미는 손에 힘을 주었다.


“놔줘요, 진짜. 이젠 화가 나려고 해요. 아무리 그래도 나한테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니죠.”

“대공녀한테는 그런 적이 없습니다.”

“……. 그런데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데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확실한 건 나는 그런 적이 없다는 겁니다.”

“……? 그건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

“이상하긴 합니다.”

“…….”

리에네가 밀던 것을 멈추고 대신 까치발을 들어 블랙의 얼굴을 붙들었다. 얼굴 어딘가에 거짓말의 흔적이 남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구석구석 살폈다.

그 의미 없는 동작에 블랙이 무릎을 굽혀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럼 어떻게 알았지. 당신이 알려 준 게 아니라면요.”

“다시 가서 물어봐요. 아니면 내가 물어보겠습니다.”

“아니,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하고 그래요.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일로 블리니 왕자비를 마주할 생각은 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꼭 필요하지 않은 일이란 건 확실합니까? 내게는 지금 공주님의 의심을 푸는 게 매우 중요한데.”

“음…….”

블랙의 얼굴을 잡은 손에 힘이 풀리고 그저 부드럽게 쓰다듬는 게 되었다.


“그 자세는 불편할 테니 일어나세요.”

“내 말을 믿는지 말해 주면.”

“그건 아직 생각 중이에요. 그런데 음…….”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자니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혹시, 그렇게 해 주길 바랐던 건 아닐까.

나는 이 남자가 나를 좋아해서 하는 모든 일이 좋으니까.

이 남자가 경계를 풀고 느슨하게, 쉴 새 없이 웃어 가면서 이 세상에 나밖에 없는 것처럼 애정을 쏟아붓는 게 가끔은 믿기지 않을 정도니까.

이런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느껴지니까.

너무 좋아서 아직도 꿈같으니까.

그런 걸 바랐나 봐…….


“믿어요.”

“다행이군요.”

블랙이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리에네는 다시 훌쩍 높아진 눈높이를 따라가다 충동적으로 그를 끌어안았다.


“다른 사람한테는, 그러면 안 돼요.”

“……무슨 그런 헛소리를 합니까.”

블랙은 리에네가 했던 말을 빌려왔다.


“그런 건 생각하지도 말아요. 알겠습니까?”

“네.”

리에네가 블랙의 가슴에 뺨을 비볐다.


“화내서 미안해요.”

“미안해하지 말아요. 나는 공주님이 이럴 때마다 좋아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인데.”

“내가 혼자 막 오해해서 화를 내는 게 좋아요?”

“그건 그만큼 내가 좋다는 말이잖습니까. 지난 일도 아까울 만큼.”

……그건 맞지. 맞아. 나는 과거도 아까워.


“나도 그렇습니다. 이미 지나간 일도 전부 다 아까워요.”

“당신은 어떻게 그런 말만 하는 거예요.”

이런 걸 바랐겠지. 그 사람도.

그런데 이 남자는 내 거야…….


“당신은 내 거예요.”

불쑥 튀어 나가는 말에 블랙이 소리 내어 웃었다.


“네. 공주님 겁니다.”

“잊으면 안 돼요.”

다정한 속삭임을 한참 주고받은 두 사람이 지하를 떠났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둘이 주고받았던 말은 블리니의 귀에도 들렸다.

귀를 막고 싶었지만 손이 묶여 할 수가 없었다. 대신 바닥을 까드득 긁어대던 손톱이 기어코 부러졌다.

절망도, 악의도 함께 부러졌다.

* * *

블루와렌에서 나우크까지 가는 시간은 오 일 정도였다.

티와칸은 속도를 높여 사흘로 줄이기로 했다. 덕분에 마차는 바퀴가 부서져라 달렸고, 마차를 타는 동안은 엉덩이도 얼얼했다.


“으……. 그 마차가 아까워요. 샤르카에 두고 온 거요. 그건 빨리 달려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건에 아쉬움을 드러내는 건 별로 그답지 않은 일이었는데, 그건 그만큼 마차가 덜컹댄다는 뜻이었다.


“몇 개 더 주문해야겠습니다.”

“몇 개씩이나요?”

“지금처럼 피치 못할 사정으로 두고 오는 경우를 대비해서.”

“음…… 사치스럽긴 하지만 지금은 어쩐지 동의하고 싶어져요.”

리에네는 아침보다 기운이 없어 보였다. 뺨이 창백했다.

블랙이 팔을 뻗었다.


“와서 안겨요. 내가 안고 가면 좀 나을 겁니다.”

“유혹적이긴 한데 거절하겠어요. 내 엉덩이 조금 덜 아프겠다고 당신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런 이유라면 나도 거절하겠습니다. 이리 와요.”

“진심이에요.”

……사실 속이 안 좋단 말이야.

멀미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아침을 먹자마자 요란하게 흔들리는 마차를 오래 타서 그런 것도 같았다.

조금만 천천히 가자고 할까……. 아니, 나 하나 편하자고 그럴 수도 없잖아.

참을 수 있을 때까진 참아 보자.

리에네는 숨을 천천히 내쉬면서 오른쪽 엄지에 낀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블랙도 모르는 무언가를 블리니가 알고 있다면, 분명히 우연히 알아냈을 것이다. 리에네는 블리니가 그랬듯이 반지를 손에 끼고 있기로 했다. 이리저리 만져 보다 보면 같은 우연이 찾아올 것이라 믿었다.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거짓말일 수도 있습니다.”

블랙은 반지에 집중하는 창백한 얼굴을 오해했다.

반지의 비밀이 빨리 드러나지 않아 초조해한다고 여겼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이 반지가 열쇠라면, 뭔가 장치가 숨겨져 있어야 할 것 같잖아요. 비밀이 있는 게 맞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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