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비밀 (2)
(129/145)
129. 비밀 (2)
(129/145)
129. 비밀 (2)
2022.06.26.
블랙이 리에네의 손에 들린 반지를 훑었다.
반지의 장치는 정교했지만 눈에 띄기 어렵기도 했다. 리에네가 반지를 물고 있지 않았다면, 그래서 어쩌다 이와 장식의 이음매 부분이 부딪치지 않았다면 그런 장치가 있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반지를 열쇠로 쓰기 위해 만든 장치라면 더 편하게 만들었을 겁니다.”
“으음……. 아닐 수도 있지 않아요? 물을 끌어오는 장치잖아요. 그걸 매일 열고 닫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생각이 진지해졌다. 흔들리는 마차를 따라 울렁거리던 속이 잊혔다.
“내가 이 장치에 대해 알고 있는 왕이라면, 클라인펠터 같은 것들이 짜증 나게 할 때 한 번씩 닫아걸고 싶어졌을 거예요.”
말은 그렇게 해도 리에네는 실제로 장치를 닫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이 줄어들면 피해를 보는 건 짜증 나는 귀족들이 아니라 대다수의 죄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매일 쓰는 장치는 아니었을 거라는 뜻입니까?”
“그렇죠. 이 반지는 그러니까 장치라기보다는 단서에 가깝지 않을까 싶어요. 장치에 접근하는 법을 암시한다든지, 그런 거요. 가이너스의 왕들은 몹시 똑똑했잖아요.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비밀은 언젠가 끊어질 수도 있으리라는 걸 몰랐을 리 없어요.”
“흠.”
“뭐, 아닐 수도 있고요. 이 반지가 장치를 움직이는 열쇠라는 것도 그냥 내가 짐작해 본 거니까.”
리에네는 반지에 난 무수한 흠집을 바라보았다. 블리니가 이 흠집들을 만들며 무슨 생각을 했을지, 그건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기록에 보면요, 반지의 보석이 떨어져서 왕이 화를 냈다고 되어 있었잖아요. 그래서 반지 모양을 바꾸었다고.”
“그랬습니까?”
“네. 그래서 반지가 이렇게 길쭉해진 거래요. 열쇠 모양처럼. 열쇠라는 이름도 그래서 붙었대요.”
리에네는 일반적인 반지에 비해 더 크고 묵직한 열쇠를 들어 이리저리 돌려 보았다.
“애초에 왜 테보다 더 큰 장식을 얹었을까요. 그건 좀 이상하지 않아요? 보석 장식이 떨어질 정도였다니, 보통은 그렇게 만들지 않잖아요.”
“장식이 그렇게 커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을지도.”
“내 말이 그 말이에요.”
리에네가 한쪽 눈을 감고 동그란 테를 통해 블랙을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장식이 특별했다는 뜻이겠죠? 이 문양을 어디서 따오거나 했을까요? 아니면 뭔가를 상징한다거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랬다면 대공녀가 알아내진 못했을 겁니다.”
“아, 맞다. 대공녀는 이 반지의 배경을 모르니까. 반지 자체에 뭔가가 숨겨져 있겠죠. ……음, 그럼 나도 깨물어 봐야 하나.”
블랙이 정색을 했다.
“관둬요. 깨끗하지 않을 겁니다.”
“아침에 씻었어요.”
“그래도.”
“깨끗해요.”
말이 나온 김에 리에네가 정말로 반지를 물었다. 블랙이 말리기 위해 다급히 손을 붙들었고, 때마침 마차가 크게 흔들렸다.
탁!
몸이 튀어 오르며 반지에서 무슨 소리가 났다.
“아, 아파…….”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알 수가 없었는데, 입을 가린 손가락 새에 피가 묻었다.
“손 치워 봐요.”
안색이 돌변한 블랙이 리에네를 끌어와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손을 떼고 보니 입술 안쪽이 찢겨 피가 나고 있었다.
“으……. 피를 보니까 더 아파요.”
블랙이 뭐라고 거친 소리를 내뱉었다. 그가 얼굴을 감싸 쥐고 상처에 입술을 갖다 댔다.
어쩐지 조금 아픈 키스 같아서 리에네가 웃는 얼굴로 미간을 찡그렸다.
“아파.”
“아직 피가 안 멎었어요.”
윗입술이 부드럽게 핥아지는 감각은 싫을 수가 없었다.
살갗이 찢어진 통증에 간질대는 부드러움이 더해져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감각이 되어 버렸다. 덕분에 아픔이 희석되었다.
블랙에게 편하게 몸을 맡기고 있던 리에네가 손가락이 허전한 걸 느끼고 주변을 더듬었다.
“아, 잠깐……. 반지가 없어요. 놓친 것 같아.”
“나중에 찾아요.”
“무슨 소리예요. 좀 놓아줘요.”
블랙이 내키지 않는 표정을 짓더니 리에네를 옆자리에 내려놓았다.
“앉아 있어요. 찾는 건 내가 할 테니.”
“같이 해요.”
“좁아서 둘은 못 움직입니다.”
몸을 숙여서 반대쪽 좌석과 그 아래를 훑던 블랙이 마차 발판과 문 사이에 끼어 있던 반지를 찾아냈다.
“…….”
반지를 들어 올리던 그가 시선을 고정시켰다.
“왜 그래요? ……아.”
블랙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내린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세상에…….”
장식 부분이 테에서 반쯤 떨어진 채였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큼지막한 보석 장식 아래, 기묘한 물건이 담겨 있었다.
“이게…… 뭘까요?”
“모르겠습니다.”
블랙이 반지를 들어 올려 창으로 들어오는 햇볕 아래 두었다. 반지 주변을 떠도는 먼지 한 톨까지 남김없이 드러났다.
리에네가 그의 어깨에 턱을 올리고 반지를 뚫어져라 살폈다.
뭔지 모를 물건은 쇳조각이었다. 새끼손가락 한 마디 길이였고, 굵기는 갈대 정도였다. 그 외에는 이렇다 할 게 없었다.
한참 쇳조각과 반지를 들여다보던 리에네가 말했다.
“왜 반지 장식이 이렇게 생겼는지 알겠어요. 이 쇳조각 모양을 따른 거예요.”
“쇳조각을 감추려고 만들었겠군요.”
“그런가 봐요. 그럼 이 반지는 처음부터 장식이 분리되게끔 만든 모양이에요.”
“그런 것 같습니다.”
“대체 이게 뭘까요? 통 어디에 써야 할지 모르겠는데.”
블랙이 쇳조각을 손바닥 위에 올렸다.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기묘한 크기였다.
“아, 여기. 흠이 있어요.”
리에네가 밑바닥이라 드러나지 않았던 흠을 찾아냈다.
“블리니 왕자비가 이것도 깨물었을까요?”
“설마.”
햇빛에 흠이 있는 쪽을 비춰 보던 블랙이 고개를 저었다.
“사람 잇자국보다는 작습니다.”
“그렇구나. 그럼 그냥 흠인가.”
“아니요. 마구잡이로 생겨난 흠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일부러 만든 것 같은데…….”
“알아내야 할 게 또 생겼네요.”
창가에 바싹 붙어 서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던 두 사람이 눈을 마주했다.
“계속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네. 그리고 그때마다 단서를 찾아내는 건 공주님이었습니다.”
“음, 나보다는 페르모스 경이……. 아, 맞아. 지금은 내 덕이죠. 내가 입술을 다쳐 가면서 얻어낸 거예요.”
웃으라고 한 얘기였는데 블랙은 웃지 않았다.
“입술이 부었습니다.”
“네. 좀 아파요.”
“당분간 키스는 못 하겠군요.”
그 말을 하는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되레 리에네가 웃었다.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지으니까 내가 엄청난 희생을 한 것 같아요.”
“커다란 희생이 맞습니다.”
블랙이 손을 뻗어 와 턱을 감싸 쥐었다. 부어오른 입술을 차마 만지지 못하겠다는 듯, 턱을 엄지로 가만 문질렀다.
“내가 물었어야 하는데.”
리에네가 정색을 했다.
“아니, 그건 아니죠. 그 꼴을 내가 어떻게 보고 있겠어요?”
블리니가 깨물던 반지에 블랙이 같은 짓을 한다고 생각하면 벌써부터 화가 났다.
리에네가 쇳조각을 들어 다시 반지 안에 잘 넣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반지의 장식을 여닫을 수 있게 만드는 작은 이음새가 좀 전의 충격으로 망가진 듯했다. 장식이 고정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아갔다.
“아, 이런……. 반지에는 더 이상 보관할 수가 없겠어요. 어떡하지. 작아서 잃어버리기도 쉬울 것 같은데.”
주머니에 대충 넣기에는 너무 소중한 단서였다.
둘은 함께 고민하다, 리에네의 손수건에 싸서 블랙의 더블릿 안쪽에 달린 주머니에 넣어 두기로 했다.
마차는 여전히 빠르게 나우크를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다.
* * *
국경 지역에 도착한 것은 이틀이 지난 뒤 새벽이었다.
“세상에, 주군!”
페르모스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발을 쾅쾅 굴러댔다.
“대체 왜! 왜! 왜 말씀도 없이! 그것도 다른 길로 돌아오시는 겁니까! 왜! 그것도 샤르카의 마차를 타고서요! 하마터면 바위를 굴릴 뻔했습니다!”
안색이 새파란 것을 보니 진심이었다.
“랜달이 수신호를 보냈을 텐데.”
“그러니까! 그걸 조금만 늦게 봤으면 어쩔 뻔했냐는 말입니다아!”
사흘 전까지 서로 경계만 하던 국경 지역은 어제 처음으로 접전이 있었다. 샤르카 쪽에서 기사단과 보병을 섞은 군대 이백 정도를 합류시키려는 것을 보고 페르모스는 선제공격을 감행했다.
블랙에게서 연락은 없지, 따로 알아낼 수 있는 것도 없지, 그렇다고 적이 경계를 늦추는 것도 아닌 대치 상태에서 적의 숫자가 늘어나면 좋지 않으리라는 계산에서였다.
그리고 대기만 하고 있으려니 좀이 쑤셔서 참을 수가 없었다.
어쨌거나 1차 전투는 티와칸의 승리였다. 국경에 도착한 이백 명은 합류하지도 못하고 반 이상이 궤멸했다. 나머지가 간신히 합류했으나 멀쩡한 인간보다 부상자가 더 많을 것이라고 했다.
“하여간! 제가 그렇게 길을 닦아 놓았으니 주군께서 편히 오신 거란 말입니다아!”
말 한마디 한마디에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블랙이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페르모스의 어깨를 툭, 쳤다.
“잘했다.”
“이이익! 잘했다마다요!”
마차에서 내린 블랙은 숨 돌릴 틈도 없이 국경 너머 샤르카의 진영을 살폈다.
부상자 무리가 합류해 평소보다 인원이 늘었다. 그러나 전투를 개시할 낌새는 조금도 없었다.
“이백. 왕이 끌어들일 수 있는 인원이 거기까지였나 보군.”
“이유가 뭔진 모르겠지만 통 전쟁을 하려는 놈들 같진 않습니다. 저 숫자면 티와칸과 전쟁은커녕 저들 국경도 못 지킬 텐데요.”
“저쪽은 모병에 애를 먹고 있는 중이다. 왕과 왕비의 사이가 틀어진 게 아직까지 잘 먹히는 모양이야.”
“주군이 손을 쓰신 겁니까?”
“리에네가.”
“아하. 그것 참 효율적인 전술인데요.”
“맞아.”
페르모스는 맞다는 말을 하며 블랙의 표정이 은근슬쩍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여기서 며칠 동안 혼자 개고생을 한 자신에게는 내내 무표정이었으면서 리에네 공주의 얘기를 할 때는 뿌듯한 얼굴이었다.
……그것 참 너무하시네.
페르모스가 입을 실룩대며 턱을 저었다.
혼인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더니. 주군께서 딱 그 짝이시네.
“그럼 전쟁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설마 저 꼴로 계속하려고 할까요? 어지간히 정신이 나가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조만간 항복을 해 올 것이다.”
“하, 그렇습니까? 샤르카에서 뭘 어떻게 하고 오신 겁니까?”
“인질을 잡아 왔거든.”
“인질이요? ……설마, 왕자비라도 잡아 오신 겁니까?”
블랙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리에네가 하자고 한 거야.”
“아하……. 그러시군요. 반지도 회수하셨습니까?”
“음. 반지 안에 감춰 둔 물건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그것도 리에네가 알아낸 거야.”
“……그러시군요.”
페르모스는 이제 그만 울분을 잊기로 했다.
표정을 보니 자신이 아무리 뭐라고 해도 귀에 들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그럼 이제 인질이 있다는 걸 알려야겠습니다. 조건은 어떻게 할까요?”
“글쎄……. 그건 네 의견이 필요할 것 같은데. 샤르카에서 뭘 얼마나 얻어낼 수 있을 것 같나?”
그래도 자신의 쓰임새는 굳건했다. 페르모스는 애써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현명한 통치자가 있다는 건 좋은 일이었으니까.
“그쪽이 얼마나 애가 타는지를 따져야겠지요. 인질로서 왕자비의 가치는 얼마나 됩니까?”
“꽤.”
“그럼 목록을 작성해 보겠습니다. 여기 머무실 겁니까?”
“전쟁이 마무리되기 전까지는.”
“공주님은요?”
그 말을 하는 순간 표정이 달라지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놓칠 수가 없을 것이다. 저렇게나 대놓고 인상을 쓰는데.
“……성으로 가야지.”
그래. 그것도 떨어져 있기 싫으시다는 말이구나. 그렇구나.
“지금 갑니까? 모셔가라 이르겠습니다.”
블랙이 잠깐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둘만 골라. 내가 다녀오겠다.”
“네?”
“이유까진 묻지 마.”
“……네에.”
그래도 너무하다는 자각은 있으시구나. 그렇구나.
“협상할 목록을 작성하고 있어. 모셔다드리고 곧장 돌아올 테니.”
“그러지 말고 편히 있다 오시지요. 목록 작성이 아주 길 것 같습니다.”
페르모스가 반쯤 포기한 심정으로 말했다.
블랙의 뺨 근육이 미세하게 튀어 올랐다. 분명히 웃음을 감추려고 벌어지는 일이었다.
“……됐어.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게 우선이다.”
그래. 그래도 뭐가 우선인지는 알고 계시는구나. 그럼 됐지.
“다녀오십시오.”
블랙은 국경에 도착한 지 오 분도 안 돼서 다시 마차에 올랐다. 나우크 성까지 리에네를 데려다주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