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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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열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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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열쇠
2022.06.29.
“공주님!”
“아이고, 공주님!”
성에 돌아오자 부인들이 몹시 격렬하게 맞아 주었다.
“두 분 다 잘 지내셨어요? 얼마 안 됐는데 엄청 오래 성을 비운 것 같아요.”
“얼마 안 되긴요! 저는 벌써 한 몇 년은 지난 심정입니다!”
플램바드 부인은 리에네의 손을 꽉 붙들고 놓아주질 않았다.
“보름 정도밖에 안 됐어요. 일정보다 훨씬 빨리 돌아왔다고요.”
“보름씩이나 된 게죠! 다음부터는 저도 꼭 따라가야겠습니다.”
헨튼 부인에게는 미안한 소식을 전해야 했다.
리에네는 울먹이는 플램바드 부인을 다독이며 헨튼 부인의 손을 잡았다.
“렌펠 경이 다쳤어요, 부인. 다행히 상처는 잘 아물고 있다 하는데 몸이 많이 고될 거예요.”
“저런……. 어쩌다 그랬답니까?”
“얘기가 긴데, 저를 지키려다 그렇게 됐어요. 미안하고 고맙다는 말밖에 할 말이 없어요.”
“…….”
헨튼 부인이 입을 다물고 잠시 한숨을 삼켰다.
“그 피가 어디 안 가는 모양입니다. 분명 저 좋아서 그리했을 테니 공주님이 마음 쓰실 필요 없습니다.”
“렌펠 경 덕분에 두 번이나 목숨을 구했어요. 그걸 어떻게 잊겠어요.”
“그래도 그 아이는 공을 알아주는 이가 살아 있으니 제 아비보다 낫지요.”
그런 말은 여전히 마음이 아팠다.
리에네는 더는 말을 하지 못하고 헨튼 부인의 손을 꾹 잡고 있기만 했다.
“이젠 괜찮습니다. 다쳤다 하니 보러 가야겠네요. 아이는 어디 있답니까?”
헨튼 부인이 먼저 손을 뺐다. 이러다가는 밤새도록 손이 붙들려 있을 것 같아서였다.
“기사단 숙소에 있을 거예요. 저도 같이 가요.”
플램바드 부인이 눈을 깜박댔다.
“아니, 또 어딜 가신다고요. 먼 데를 다녀오셨는데 옷이라도 갈아입으시지 않고요.”
“다녀오고 나서요. 그리고 웨로즈 경이 어떻게 있는지도 내내 신경이 쓰였어요.”
“아, 그 기사 양반은……. 이럴 게 아니라 저도 가십시다.”
성까지 바래다준 블랙이 아예 발을 디딜 생각도 없이, 아쉬운 키스만 남기고 돌아갔던 것처럼 리에네도 할 일이 많았다.
“그럼 가요.”
클리마는 기사단 숙소에 들어가자마자 곯아떨어졌다. 헨튼 부인이 곁에 남아 하루 정도 보살피기로 했다.
웨로즈는 여전히 지하 감옥에 있었는데, 다행히도 단식을 그만둔 상태였다.
* * *
“그때보단 안색이 좋아 보여요.”
웨로즈는 오랜만에 뵙는다며 인사도 했다.
“샤르카로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잘…… 다녀오신 겁니까?”
“네.”
리에네는 샤르카에서 벌어진 일을 간략히 들려주었다.
웨로즈는 샤르카 왕성에 침입했던 일과, 그다음에 북쪽 국경으로 향해 블리니 왕자비를 인질로 잡아 온 일 등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샤르카 왕국의 근위대는 기사만 해도 백팔십 명이나 됩니다. 경비는 아무리 적어도 곱절이 넘을 겁니다. 그런데 어떻게 스물다섯으로…….”
“사실 엄청 무서웠어요. 왕실 근위대가 너무 많아서. 그런데 다들 그런 데 굉장히 익숙해 보이는 거예요.”
블리니 왕자비에게서 반지를 받아냈다는 것도 알렸다. 우연히 반지에 숨겨져 있던 비밀을 찾게 되었다고도 했다.
“나우크에 물이 돌아올 거예요.”
“공주님…….”
웨로즈의 눈에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아직 조금 더 알아내야 할 게 있지만, 그래도 하나둘씩 차곡차곡 돌아오고 있어요. 가이너스의 핏줄도, 반지도. 나우크를 만들었고 나우크와 함께 있어야 할 것들이에요.”
“저는…….”
“경도 알고 있다고 믿어요. 가이너스가 돌아오지 않으면 물도 돌아오지 않아요.”
“…….”
웨로즈가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저도…… 저도 알겠습니다. 이제 알겠습니다……. 제가, 제가 잘못…… 잘못 생각했습니다. 제가 틀렸습니다…….”
“맞아요. 경이 틀렸어요.”
그래서 다행이었다. 틀린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웨로즈라서. 웨로즈가 틀렸다는 걸 알아서.
“그럼 이제 경도 돌아오세요. 원래 있던 자리로. 나우크에는 경도 필요해요.”
리에네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웨로즈에게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 * *
“공주님? 아직도 안 주무십니까?”
리에네는 늦도록 왕실 집무실에 남아 있었다.
저녁 즈음 잠에서 깨어난 클리마가 옆구리를 부여잡고 끙끙대며 리에네를 찾아왔다. 아무리 가서 쉬라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아무 일도 없을 게 뻔한 궁 안에서도 꼭 옆에서 지키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리에네는 집무실 구석에 쿠션을 놓아주었다. 클리마는 쿠션을 베고 다시 잠이 들었고, 리에네는 그 곁에서 기록서를 보고 있었다.
침실에 리에네가 없는 것을 이제야 안 플램바드 부인이 찾아왔다.
“네. 할 일이 있어서요. 그런데 목소리는 좀 작게 해 줘요. 렌펠 경이 자는 중이에요.”
“네? 아이고, 저이는 또 왜 저러고 있답니까. 깨워서 돌려보낼까요?”
“소용없을 거예요. 로드 티와칸이 없는 곳에서는 자기가 꼭 옆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쯧쯧…….”
플램바드 부인이 혀를 찼다.
“그게 무슨 고집이랍니까. 몸은 저리 다쳐서 말이지요.”
“그러게요. 가뜩이나 미안한데.”
“여기 더 계실 참이라면 제가 담요라도 가져오겠습니다. 덩치도 커다란 이가 쪼그리고 있으니 어째 더 안쓰럽네요.”
“아,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담요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후다닥 어딘가로 가서 담요를 가져왔다. 클리마에게 담요를 덮어 준 부인은 방으로 돌아가는 대신 리에네의 옆에 주저앉았다.
“할 얘기가 있나요, 부인?”
“아니요……. 꼭 그렇지는 않고 공주님 곁에 좀 있어도 좋을 듯해서요.”
부인은 리에네가 성을 비운 보름 남짓한 시간이 너무 길었다고 했다. 그 허전함이 지금도 잠을 못 이루게 했다.
“꼭 샤르카 왕국에 가셔야 할 이유가 있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건 잘 해결이 된 겝니까?”
“음……. 목적은 이뤘어요. 그런데 다 해결은 안 됐어요.”
“저런……. 어쩝니까. 그럼 또 가셔야 하는 겁니까?”
“아뇨.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부인도 많이 놀랐겠어요. 갑자기 다들 국경으로 떠나고 해서요.”
“웬걸요. 처음에는 정말 큰일이 있나 보다, 하고 정신이 없었더랬지요. 공주님이 가셨는데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정말로 큰일이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며칠이 지나도록 잠잠해서 걱정도 잠잠해졌다고 했다.
“이젠 정말 다 괜찮은 겝니까? 샤르카 왕국과는 별일이 없겠고요?”
“없다고는 말 못 하는데, 곧 괜찮아질 거라는 말은 할 수 있겠네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게…… 저도 무슨 일인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웨로즈 경과 함께 신전에 다녀오신 뒤로 갑자기 샤르카에 간다고 하신 게 아닙니까. 그리고 웨로즈 경은 단식이니 하던 것을 그만뒀으니 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지요. 제가 오죽하면 신전에도 가 보질 않았겠습니까.”
“아…….”
평소 플램바드 부인을 생각하면 일부러 나서서 말을 꺼내진 않을 성격이었다.
리에네는 자신이 그간 부인에게 말을 너무 아껴 왔음을 깨달았다. 어쩌면 부인은 아직도 가이너스의 핏줄에게 전해지는 유전병을 이유로 내내 노심초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내가 부인 생각을 너무 안 했네요. 그간 못 했던 얘기를 할 때가 된 것 같아요.”
리에네가 플램바드 부인의 손을 잡고 지금까지 있어 온 긴 얘기를 시작했다.
“샤르카에는 이 반지를 찾으러 갔다 온 거였어요.”
얘기의 시작은 열쇠라고 불리던 반지였다.
“이 반지를요? 찾아오셨다고 한다면 이 반지가 원래는 나우크에 있었다는 말씀입니까?”
“네. 이 반지는…….”
21년 전에 사라졌던 반지가 나우크로 돌아왔다. 가이너스의 이름과 함께.
얘기가 계속될수록 플램바드 부인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 * *
“……네?”
리에네가 되물었다.
벌써 세 번째였다.
“뭐라고요?”
리에네가 목소리를 높이자 죽은 듯 잠들어 있던 클리마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공주님…….”
그가 눈을 비비며 리에네의 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리에네는 몰랐다.
지금, 정신이 없었으니까.
“그게…… 정말이에요? 그게, 정말?”
“왠지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면 그런 게 있을 리 없잖습니까.”
플램바드 부인은 리에네가 보여 준 반지 안의 물건이 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그러지 말고 같이 가십시다. 제가 보여 드릴 테니.”
“네……. 네, 그래요. 어서…… 어서요.”
리에네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켰다. 기록서가 무릎 위에 있던 것도 잊고 일어서는 바람에 그 커다랗고 묵직한 책등에 발등을 찍힐 뻔했다. 클리마가 적절한 순간에 책을 붙들어 주었다.
“가, 가요. 가요, 어서. 어서요.”
리에네가 플램바드 부인의 손을 끌어당겼다.
손이 아주 차가웠다. 차게 질린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본 플램바드 부인이 제 손으로 리에네의 손등을 덮었다.
“너무 떨지 마세요, 공주님. 그러다 행여 넘어지시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너무 서두르지도 마시고요.”
“네, 네……. 빨리 가요.”
서두르지 않으려고 하는데 걸음이 자꾸 빨라졌다. 나중에는 거의 달리는 지경이 되었다.
“하아, 하아…….”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를 데려간 곳은 보석실이었다.
얼마 전까진 보석실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텅 비어 있던 곳이었는데, 지금은 보석을 담을 함을 새로 맞추느니 마느니 하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텅 빈 함은 잠가 놓을 필요도 없어서 함마다 있는 열쇠는 한데 묶어 벽에 걸어 두기까지 했었다.
지금은 모든 함에 보석이 담겨 안전하게 잠겨 있었다.
열쇠 꾸러미도 열쇠함에 깊숙이 보관되어 있었다.
플램바드 부인은 그 열쇠 꾸러미를 집어 들었다.
“여기, 보이십니까?”
열쇠가 아주 많았다.
보석실을 잘 아는 자가 아니라면 어떤 열쇠로 무얼 열어야 할지도 알 수 없을 것이다.
“공주님께서도 기억하시지요? 공주님이 작으셨을 때 이 방에 와서 종종 놀곤 하셨잖습니까. 열쇠로 함을 열어 보시기도 하고요. 이 열쇠는 공주님이 찾으신 겝니다.”
수많은 열쇠 중 조금 이상한 열쇠가 하나 있었다.
끝이 잘린 것처럼 짤막한 열쇠는 어떤 잠금쇠와도 맞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 가지에 몰두하면 집요해지는 구석이 있던 리에네는 그 열쇠를 모든 열쇠 구멍에 맞춰 보았다.
그리고 쓸모가 없는 열쇠라는 결론을 내렸다.
“다른 열쇠들은 끝부분이 이만큼 더 있지 않습니까. 이 열쇠는 그러니까 이만큼, 딱 손가락 한 마디만큼이 모자란 게지요.”
“아……!”
리에네가 갑자기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플램바드 부인은 하마터면 몽당 열쇠를 떨어트릴 뻔했다.
“이걸 여기에 붙여 보면 열쇠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럴…… 그럴 거예요. 맙소사. 부인은 천재였어요!”
리에네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플램바드 부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그런 말은 조금 무섭습니다, 공주님. 제가 어느 날 병에 걸리면 어쩌시려고요.”
“그 병에 걸릴 수 있는지 없는지는 페르모스 경이 말해 줄 거예요. 하여간 너무너무 엄청난 걸 생각해 줬다고요.”
“어째 그게 딱 떠오르지 않겠습니까. 열쇠라 하니 말이지요. 공주님은 어릴 때 일이라 까맣게 잊으셨던 모양입니다. 자, 이러지 마시고 어서 한번 해 봅시다.”
“네, 어서…….”
곁에서 보고 있던 클리마가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다들 숨을 죽이고 몽당 열쇠를 꺼내 들어 반지 안에 들어 있는 조각과 대어 보았다.
“여기, 아무래도 끼우게 되어 있는 것 같아요!”
몽당 열쇠는 끄트머리 부분이 비어 있었다. 거기에 쇳조각을 끼워 넣자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두 개가 하나였던 것처럼 맞물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