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131/145)
131.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131/145)
131.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2022.07.03.
“맙……소사……. 진짜…… 진짜 열쇠가 있었어. 진짜 열쇠였어.”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리에네가 두 눈을 비볐다.
플램바드 부인도 계속 입을 다물지 못했다.
“어쩜 좋단 말입니까. 이건 정말이지……. 이게, 이 작은 열쇠 하나가 물을…….”
권능이라는 말을 쓸 만도 했다.
제 손바닥에 놓인 이 쇳덩이의 무게는 가볍지만 동시에 엄청나게 무거웠다.
“그럼 이제 이 열쇠에 맞는 열쇠 구멍을 찾아야겠군요.”
열쇠를 찾았지만, 아직도 끝이 아니었다.
“밤이 늦었지만 찾아볼래요?”
클리마도, 플램바드 부인도 찬성이었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아예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습니다.”
“저, 저도요…… 아, 가서 어머니도 불러오겠습니다. 어머니도 기꺼이 도우실 겁니다.”
클리마는 다친 사람답지 않게 부리나케 움직여 헨튼 부인을 데려왔다.
잠시 후 헨튼 부인까지 넷이 된 일행이 걸음을 옮긴 곳은 왕의 화랑이었다.
* * *
“여기가 시작일 거예요.”
리에네는 확신했다.
나우크 성의 위치나 기반은 모두 물을 끌어오는 장치와 연관이 있었다.
가이너스의 핏줄들만 아는 폭포 뒤 미로도 그랬다. 미로는 장치와 연결되어 있었고, 미로로 곧장 들어설 수 있는 입구가 왕의 화랑에 있었다.
“조금 이상하잖아요. 이 방은 방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작고, 용도도 알 수가 없어요. 그러니까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 만들었을 거예요.”
가이너스 왕가의 가장 큰 비밀이니 왕의 침실 근처에 있는 것도 당연했다.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온 비밀처럼, 그 비밀을 왕이 아닌 자는 애초에 접근할 수 없게 설계되어 있었다.
“그런 것을 우리가 먼저 손을 대도 되겠습니까. 원래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인데.”
헨튼 부인은 물을 되돌릴 수 있다는 말에 기뻐하면서도 차분히 걱정을 드러냈다.
“가이너스의 물건이니 가이너스의 핏줄이 나서야지요.”
“부인의 말도 맞아요.”
리에네 역시 비슷한 마음이 들긴 했다.
하지만 블랙은 아닐 것이다. 그는 이미 가이너스가 독식하고 있던 권능을 포기했다.
그런 힘을 독차지하고 있었기에 모든 일이 벌어졌다고 말한 사람이었다.
“물은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잖아요. 그런 걸 한 사람이 가져서는 안 돼요. 로드 티와칸…… 페르난드 왕자가 한 말이에요.”
리에네가 잠시 온전해진 열쇠를 쓸었다.
내가 만일 그 남자였다면.
나도 같은 생각을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지금만큼 블랙의 결정이 옳았다는 확신이 든 적도 없었으니까. 물은 한시라도 빨리 돌아와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끼리 찾았다고 해도 기뻐할 거예요.”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냥 어서 찾읍시다. 뭐라는 걸 알고 나니 한시도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리에네가 결론을 내렸다.
“그렇게 해요. 로드 티와칸께는 찾는다는 말 대신 찾았다는 소식을 전하도록 해요.”
“뭘 찾으면 되는 겁니까?”
리에네가 열쇠를 잘 보이도록 내밀었다.
“이 열쇠가 들어갈 만한 구멍이나 자물쇠요.”
클리마는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방에 비해 크지 않은 이곳을 전부 살펴보겠다는 심정인지 발뒤꿈치를 들고 벽에 바짝 눈을 들이댔다.
다들 클리마를 따라 했다. 의자에 올라서서 눈이 닿지 않는 곳도 살피고,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보다 낮은 곳도 살폈다.
나중에는 고개도 아프고 어깨도 뻐근했지만 다들 열의에 넘쳐 힘든 줄도 몰랐다.
* * *
시간은 자정을 넘었다.
그리고 사람이 더 있어야겠다는 의견의 일치 하에 웨로즈가 합류했다.
다들 조금씩 지쳤다. 플램바드 부인은 땀이 다 흐른다며 소매를 걷어 올렸다.
벽난로 안의 통로를 몇 번씩이나 살폈던 클리마는 얼굴이 까맣게 변해 있었다.
“이상해……. 여기가 아니었을까요?”
“어휴……. 이 작은 방을 훑는 것만으로도 이리 힘든데, 성 전체를 살펴야 한다는 말씀입니까?”
“이 방이 아니라면 어디라는 걸까요. 분명히 이 방인 줄 알았는데.”
리에네는 아예 바닥에 앉아 텅 빈 벽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아, 잠깐……. 이 방은 왕의 화랑이라고 했다면서요. 그렇죠?”
“그렇지요.”
“그러니까 예전에는 이 방에 그림이 많이 걸려 있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랬…… 아니, 분명히 그랬지요. 저도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그림이 어쨌다는 말씀입니까?”
“열쇠 구멍이 벽에 있다면 말이에요, 그림으로 가려 놨을 거예요. 그렇죠?”
만약 공연히 화랑이라 이름 붙인 방을 만들어 벽에 그림을 잔뜩 걸어 둔 이유가 구멍을 감추기 위해서라면.
리에네가 벌떡 일어나 비밀 통로가 숨겨진 둥그런 벽난로가 있는 맞은편 벽에 섰다.
“내 기억이 맞다면, 여기에 가장 큰 그림이 있었어요.”
허겁지겁 리에네를 뒤따라 온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네, 맞아요. 제가 그 액자 위에 쌓인 먼지를 털곤 했습니다. 액자가 제 키를 넘어 발판을 써야 했지요.”
리에네가 벽 앞에 서서 양팔을 벌렸다.
“그림이 이 정도 크기가 됐나요?”
“그보다 조금 더 컸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작지는 않았습니다.”
“그럼 그 그림은 문만 한 크기였겠네요. 성인 남자가 드나들 수도 있을 만큼요.”
“아……?”
리에네가 벽을 더듬었다. 무슨 의도인지 알아차린 클리마가 재빨리 옆으로 다가와 같은 행동을 했다.
“여, 여기……! 공주님!”
그림을 떼고 난 벽은 보기 흉했다. 액자 자국이 선명해서 새로 칠을 해야 했다.
이 방에서 그림이 사라진 것은 아주 어릴 때, 그러니까 부친이 생존해 있을 때였다.
그 당시라면 돈이 없어서 그림을 팔아치운 게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가이너스 왕가에 관련된 그림들이라 치워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벽에 남은 흔적을 말끔히 지워 없앴다.
그러니 열쇠가 들어가야 할 곳도 보이지 않게 됐을 것이다.
“여기!”
흥분한 클리마가 아예 리에네의 손을 끌어와 방금 전 자신이 가리킨 곳에 댔다.
리에네도 알 수 있었다.
희미하게 귀를 울리는 달칵, 소리를.
“벽돌이…… 움직이는 거죠?”
“네, 네!”
클리마가 손끝을 세워 방금 전 살짝 눌렸던 벽돌의 모서리를 이리저리 움직여 보였다.
새로 한 칠이 부스스 떨어지며 벽돌 한쪽 끝이 움푹 들어갔다. 힘이 가는 대로 전부 밀자, 벽돌은 절반을 돌아 그 안에 숨겨진 열쇠 구멍을 드러냈다.
“여기가 맞았어요!”
“세상에나!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은 소리를 지르고, 헨튼 부인은 입을 틀어막고, 웨로즈는 하얗게 굳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열게요.”
리에네 역시 너무 떨려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열쇠를 구멍에 넣었다. 힘을 주어 옆으로 돌리자 찰칵, 열쇠가 돌아갔다.
“맙소사! 맙소사!”
열쇠는 그저 열쇠가 아니었다. 그 자체로 또 다른 장치였다는 듯, 그림으로 가려졌던 벽의 일부가 스스륵 움직였다.
“세상에,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손을 잡았다. 부인의 손도 미친 듯이 떨리고 있었다.
벽 뒤의 공간에는 계단이 길게 뻗어 있었다. 그 어떤 이정표도 없었지만 어디로 향하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은.
* * *
샤르카 왕은 생각보다 끈질겼고, 기대보다 멍청했다.
인질로 잡힌 블리니 왕자비를 구해 낸답시고 사람들을 보냈다. 그래 놓고 괜히 일부 병력으로 싸움을 걸어 이쪽의 눈을 돌리려는 시도를 했다.
저쪽의 움직임을 훤히 꿰고 있던 페르모스는 오히려 한숨을 쉬었다. 가뜩이나 모자란 병력을 둘로 나눠 놨으니 이건 친절하게 각개격파를 하라며 제 손으로 군사를 갖다 바치는 꼴이었다.
하여간 하라는 대로 해 주었다.
전투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고, 샤르카 군은 완전히 전의를 상실했다.
티와칸에서는 기습의 대가로 블리니 왕자비의 긴 머리칼을 썩둑 잘라 샤르카군에 보냈다. 피가 나지 않는 곳을 자른 것은 알리토 대공의 체면을 차린 것이라 못을 박았다.
그다음 날 샤르카군의 사령관 역할을 맡은 자가 투구를 벗은 채 칼 대신 두루마리를 하나 들고 걸어왔다.
그 두루마리는 페르모스가 작성한 종전서와 합의 목록이었다. 샤르카 왕의 서명과 인장이 찍혔다는 게 달랐다.
그날 저녁, 국경이 깨끗해졌다.
샤르카군은 남은 인원을 추슬러 돌아갔고 티와칸에서 청구한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십 년에 걸쳐 나누어 갚기로 했다.
그리고 국경선에 변화가 생겼다.
야디온 만이 있는 곳까지 국경선이 밀렸다. 새로운 국경선을 정비하는 작업은 티와칸의 몫이 되었지만, 돈은 샤르카 왕국에서 부담해야 했다. 이번 일로 왕의 개인 자산이 훌쩍 줄었을 것이다.
국경을 정리한 티와칸이 성으로 회군했다.
시간은 마침 정오 무렵이었고, 날은 약간 서늘했지만 해가 화창했다.
“이런 짓을 왜 했는데.”
블랙이 입술을 실룩였다.
블랙도, 블랙이 타는 말도 덩치가 큰 바람에 어지간해서는 그가 짓는 표정이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승전은 알려야지요. 다들 걱정했을 게 아닙니까.”
성이 보이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사람들의 환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국경이 정리되었다는 소식은 새보다 빠르게 나우크에 번졌다.
샤르카 왕국과 전쟁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일어 뒤숭숭해 하던 나우크의 사람들이 신이 나 몰려나왔다.
전쟁이 벌어진 줄도 모르게 끝을 내고 왔다는 티와칸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팔이 떨어질 정도로 손을 흔들어대면서 목이 터져라 티와칸 공의 이름을 부르는 나우크가 블랙은 낯설었다.
“이렇게 되리라는 걸 네가 예상하지 못했나?”
“이 정도까지 좋아할 줄은 몰랐습니다. 이제 티와칸이란 이름에 대한 공포는 남아 있지 않나 봅니다.”
“죽은 자를 기억하는 이들에게는 남아 있겠지.”
“그야 뭐…….”
블랙은 주위를 돌아보는 일 없이 앞으로만 향했다.
페르모스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이다 속도를 높여 블랙을 따라갔다.
“그래도 변화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여섯 가문의 횡포가 사라진 것만으로도 다들 숨통이 트였을 텐데요. 그걸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리고 무엇보다 공주님이 달라지신 게 눈에 보일 테니까요.”
저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상냥하고 아름다운 공주님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라진 걸 모두 보고 있을 터였다.
“변화는 강물 같지 않습니까. 한 번 시작되면 걷잡을 수 없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나우크는.”
페르모스가 말을 끊고 잠시 등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서는 신들의 땅처럼 까마득해 보이는, 에렌디라 산맥이 있는 방향이었다.
“엄청난 수원을 지닌 곳이니까요. 강이 흐른다고 하면 졸졸 소리만 들리는 게 아니라 아주 세차게 흐를 겁니다. 그 무엇도 막을 수 없도록 말입니다.”
“그럴지도. ……잠깐.”
“네?”
갑자기 블랙이 탄 말이 앞으로 뛰쳐나갔다. 페르모스가 무슨 일이 있나 싶어 고개를 한껏 앞으로 빼다가, 곧 허탈한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다가온 랜달이 물었다.
“무슨 일 있는 겁니까? 제가 쫓아갈까요?”
“그럴 필요 없어.”
“사람들이 겁을 먹는 것 같은데요?”
“그러다 말겠지.”
“너무 태연하신 거 아닙니까? 혹시 클라인펠터의 잔당들이거나 하면……. ……아, 이런.”
랜달도 블랙이 갑자기 앞서서 달려간 이유를 알게 되었다.
“공주님이 마중을 나오셨군요.”
“그게 아니라면 저렇게 부리나케 달리실 이유가 없지.”
“아……. 뭐, 그렇지요.”
어쨌거나 티와칸의 무사 귀환은 승전의 증거였고, 그것은 마음껏 환호해도 된다는 이유였다.
나우크는 티와칸이 전부 성으로 들어갈 때까지 내내 시끄러웠다.
그리고 환호가 최고조에 이른 어느 시각,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나우크 성의 지하 감옥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공교롭게도 딜레라스 왕비가 라피트 클라인펠터의 교수형을 허가한 것과 같은 시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