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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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2.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2)
2022.07.06.
“여기예요.”
“여기로군요.”
두 사람이 거의 비슷한 말을 했다.
성을 한참 지나서까지 먼 길을 마중 나온 리에네는 키스할 틈도 주지 않고 그를 잡아끌었다.
블랙은 내심 그게 불만이었는데, 리에네가 그렇게나 흥분했던 이유를 알고 서운함을 모두 잊었다.
열쇠가 완성되었다.
열쇠가 숨겨진 문을 열었다.
가이너스의 비밀이 제 앞에서 계단을 드러내고 있었다.
“내려가 보진 않았습니까?”
블랙은 지금에서야 미뤘던 키스를 했다. 리에네가 이마에 닿는 입술의 감촉을 음미하는 것처럼 눈을 감았다.
“무서워서요.”
“뭐가?”
“만약…… 만에 하나라도 생각이 틀린 거라면요.”
“틀릴 리는 없을 것 같은데.”
등 뒤에서 페르모스가 끼어들었다.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아니, 그게 아니면 뭐 이렇게 엄청난 장치를 공들여 해놨겠습니까. 이건 성을 지을 때부터 미리 다 계산을 하고 만든 겁니다.”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살짝 쥐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이게 아니라면 다른 데 있을 겁니다. 그건 함께 찾으면 됩니다.”
“네. 알아요.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어야만 내려가 볼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리에네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그럼 이제 가 볼까요?”
“기꺼이.”
계단은 비좁고, 가팔랐다.
등을 하나 손에 든 블랙이 앞장섰다.
그 뒤를 리에네가, 그 뒤를 페르모스가, 다시 그 뒤를 클리마가 뒤따랐다.
두 부인들도 동행하고 싶어 안달이었지만 그러자니 인원이 너무 많았다. 웨로즈는 차마 데려가 달라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침만 꿀꺽 삼켰다.
“조심해요.”
리에네는 한 걸음 먼저 앞서 내려가 자신이 발을 디딜 곳에 미리 등을 비춰 주는 블랙을 향해 웃었다.
이젠 결과가 어떻다 해도 무섭지 않았다.
그와 함께 다른 길을 찾으면 될 테니까.
툭, 두근.
한 발을 내딛는데 심장이 뛰었다.
리에네는 블랙의 손을 꽉 움켜쥐고 한 발자국씩 걸음을 옮겼다.
“제발…….”
플램바드 부인의 간절한 기도 소리가 꽤 멀리까지 들려왔다.
아마도 부인은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기도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 * *
가이너스 왕가의 비밀 문을 발견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그다음 날 샤르카 왕국이 항복했고, 그다음 날 블랙이 성으로 돌아왔다.
그날 함께 비밀문으로 들어섰고, 밤이 되어 돌아왔으니 기관을 움직인 지 오 일째라는 뜻이었다.
아홉 개의 폭포 뒤에 감춰진 장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이 거대하고, 정교했다.
페르모스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그 공기도 없는 곳에서 너무 흥분을 하는 바람에 몇 번이나 정신을 잃을 뻔했다고 했다.
비밀문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면, 그 끝에 우물처럼 둥글게 쌓아 올린 단이 있었다. 우물과 다른 점은, 안이 텅 비어 있다는 점이었다.
그 단 가운데 있는 손잡이를 끝까지 돌리면 철컥,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단이 아래로 아주 깊이 내려갔다.
그리고 동시에 단에 가려졌던 문이 드러났다. 그 문을 열고 나가면 아는 길이 나왔다. 벽난로 안에서 이어진 비밀 통로였다.
들어가는 길과 나오는 길이 명확히 구분된 이유는, 아무래도 이게 물을 다루는 장치이기 때문이었다.
만에라도 하나 장치에 이상이 있을 경우 길이 하나라면 손을 쓸 도리가 없을 테니까.
이런 말을 하며 페르모스는 가이너스의 피를 이은 자들은 대체 머리가 얼마나 비상한 것인지 모르겠다며 내내 흥분을 토해 냈다.
하여간, 장치를 움직였다.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이제 남은 건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잠깐, 잠깐만요. 들리는 것 같지 않아요?”
리에네는 오 일 내내 틈만 나면 같은 소리를 했다. 벽이든 바닥이든 불시에 귀를 갖다 대면서 물이 흐르는 것 같다고 했다.
블랙은 그러는 리에네가 귀여우면서도 안쓰러웠다.
“소리가 나면 보이기도 할 겁니다. 그만하고 침대로 와요.”
“그건 그럴 테지만요…….”
리에네가 마지못해 벽난로 앞 바닥에서 귀를 떼고 침대로 걸어왔다.
실룩대는 입술이 사랑스러웠다.
블랙은 참지 못하고 리에네의 팔을 끌어와 키스부터 했다.
“으음……. 잠깐만요. 실망한 나를 달래려는 건 알겠는데, 조금만 나중에 해 주면 좋겠어요.”
블랙이 리에네의 머리칼을 이마 위로 쓸어 넘기며 눈을 마주쳤다.
“그 반대였는데.”
“뭐가요?”
“공주님을 달래려는 게 아니라 나를 달래려는 것이었습니다. 요새 공주님은 내게 통 관심을 주지 않으니까.”
“아, 저런……. 아니, 그런 적 없는데요?”
“오 일 내내 그랬습니다. 우리가 얼마 만에 키스하는 건지 알고는 있습니까?”
“그야…… 매번 하지 않았어요?”
“내가 하는 건 셈에서 빼요. 공주님이 키스를 되돌려준 적은 없으니까.”
“이상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리에네는 통 믿기지 않는 일이라는 눈짓을 열심히 보냈지만 블랙이 받아 주지 않았다.
결국 리에네가 블랙의 품으로 파고들어 그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게, 걱정이 되니까요. 뭘 잘못한 게 아닌가 싶어서. 그게 아니라면 아직도 물이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잖아요.”
“애초에 잘못할 만한 게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지만…….”
기관 장치는 아주 단순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할 일은 손잡이를 돌리는 것밖에 없었다.
페르모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들이 더 많을 것이고, 낙차를 계산해 수량을 알아서 조절하게끔 되어 있을 것이라 했다.
그게 벌써 오 일 전이었다.
오 일 내내 제 심장은 너무 세차게 뛰다 못해 아플 지경이었다.
“오래됐으니까……. 장치가 고장날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건 페르모스가 최선을 다해 알아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죠.”
“페르모스가 모른다면 여기 있는 누구도 모릅니다.”
“그것도 그렇죠.”
리에네가 한숨을 쉬며 블랙의 옷자락을 공연히 잡아당겼다.
“만일 물이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방법이 아주 없는 건 아닙니다. 국경을 넓히기로 했으니 그쪽에 새로 성을 짓고 다 같이 이주하는 방법도 있고.”
“……그러게요.”
엄청나게 큰일이 되겠지만 블랙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울 것 같았다.
리에네가 블랙의 목을 끌어안았다.
어깨에 턱을 얹자 블랙이 느리게 등을 쓰다듬었다.
“알아요. 당신 말이 맞다는 거. 우린 이제 예전처럼 힘들지도 않을 거고, 궁핍하지도 않다는 걸요. 그래도 좀…….”
“무얼 아쉬워하는지는 이해합니다. 그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는 말아요. 그새 얼굴 살이 빠진 것 같습니다.”
“요새 입맛을 좀 잃긴 했어요. 소화도 잘 안 되는 것 같고.”
“마음을 너무 써서 그래요. 공주님이 그러면 내가 괴롭습니다.”
계속 등을 어르는 블랙의 손길이 더할 나위 없이 다정했다.
리에네가 그의 목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내가 그 생각을 못 했네요. 내가 이러고 있으면 당신도 힘들 텐데.”
“알면 기운 좀 내 봐요.”
“애써 볼게요.”
리에네가 고개를 살짝 틀어 볼을 비벼 오자 블랙이 턱을 붙잡아 입술을 비볐다.
“고되어 보이니 나를 즐겁게 해달라고는 못 하겠군요. 그만 자도록 해요.”
리에네가 맞닿은 입술을 살짝 깨물어 대며 웃었다.
“으음……. 그건 반대로 유혹 같은데요.”
“아닙니다. 살이 빠져 보인다는 건 진심입니다.”
“아……. 정말요? 보기 싫어요?”
“그럴 리는 없고.”
블랙은 리에네의 몸을 들어 침대에 눕혔다.
얼굴선을 가린 머리칼을 가지런히 정돈해 주는 손은 다정하기만 할 뿐이었다.
“걱정하는 겁니다. 혹시 앓기라도 할까 봐.”
“…….”
나는 내내 장치가 고장난 게 아니냐는 말만 하고 있었는데.
이 남자는 그 시간에 나를 걱정하고 있었네.
리에네가 블랙을 향해 팔을 뻗었다.
“안아 줘요.”
“그래요.”
블랙은 벌어진 팔 안으로 들어와 다정하게 등을 다독였다.
“……이렇게 말고요.”
리에네가 고개를 내밀어 블랙의 귓불을 입술로 물었다.
“다르게 안아 줘요.”
잠옷 가운 밑으로 블랙의 어깨 근육이 꿈틀대는 게 느껴졌다.
“……안 됩니다.”
“왜요?”
“말했듯이, 공주님이 지금 썩 괜찮은 상태가 아니라서.”
“아픈 데는 없는데요.”
“아파질 겁니다. 그냥 자도록 해요.”
“아플 걸 어떻게 알아요.”
“공주님보다는 내가 잘 압니다.”
“왜요?”
“공주님은 자신에게 무심하고, 나는 반대로 몹시 예민하니까.”
“그렇다고 당신이 예언가라는 말은 아니잖아요.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 안 들어요?”
리에네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블랙이 걸치고 있는 가운은 끈이 하나였다. 리에네가 꽁 묶여 있는 끈을 만지작대며 눈으로 살짝 웃었다.
“나는 진짜 아픈 데 없단 말이에요.”
“공주님…….”
블랙이 제 가운 끝을 당기려고 하는 리네에의 손등을 손으로 덮었다.
“……나는 아프더라도 나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야…… 맞는 말이죠.”
“크게 앓든 작게 앓든 죽지만 않으면 똑같으니까.”
“그렇게 말하니 내 생각하고는 좀 다르게 들리긴 하는 것 같은데…….”
“공주님은 예외로 두고 싶습니다. 그러니 이런 위험한 짓은 하지 말아요.”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결국 가운 끈에서 떼어 냈다.
“어서 눈 감아요.”
“……너무해.”
리에네가 작게 중얼대며 침대 위에 털썩 엎드렸다.
블랙이 동그란 뒤통수를 사랑스러워 어쩔 줄 모르겠다는 눈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숙여 어깨에 입을 맞췄다.
“오늘이 지나면 나아져 있길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이 너무 엄살을 떠는 거예요. 나에 대해서요.”
“익숙해져요. 평생 그럴 거니까.”
“어쩔 땐 부인보다 더 심한 것 같아.”
그런 말을 하면서 리에네가 불시에 몸을 홱 돌렸다. 눈이 마주치고, 리에네는 그가 피할 틈 없이 아랫입술을 쪽 물었다.
“……하.”
블랙이 낮게 한숨을 내뱉었다.
리에네가 씩 웃으며 블랙의 목을 끌어당겼다.
“공주님은 아무것도 모릅니다.”
“모르는 건 당신 같은데요.”
“……그러면 모르는 척하겠습니다.”
블랙이 입을 벌리고 잡아먹을 것 같은 키스를 시작했다.
벌써부터 숨이 가빠졌다. 리에네는 손가락 사이를 간질여대는 머리칼의 감촉을 느꼈다. 제 입에서 새어나가는 모든 소리가 야릇하게 들렸다.
입술이 잠깐 떨어진 틈을 타 리에네가 속삭였다.
“있잖, 아요. 잠깐, 불은 끄는 게…….”
“그런 건 모릅니다.”
“아니 왜…….”
“나한테 집중해요. 다른 데 말고.”
“…….”
불 끄는 걸 왜 몰라.
그런데 키스가 너무 달아져서 다른 건 정말 모르는 일이 되어 버릴 것 같았다. 목덜미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헝클어졌다. 머리카락을 치운 블랙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투둑.
당기지 않았는데도 가운 끈이 마찰에 의해 저절로 풀어졌다.
그 순간이었다.
탕탕!
커다란 노크 소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의 두 사람을 뒤흔들었다.
“주군! 공주님!”
“……?”
랜달이었다.
이 시간에 랜달이 침실까지 달려오는 일은 거의 없었다. 무시하기에는 목소리에 묻어나는 흥분이 너무 컸다.
“주무시더라도 일어나십시오! 물이…… 물이 흐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