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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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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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 한 번 흐르기 시작하면 (3)
2022.07.10.
“뭐라고요?”
리에네가 블랙을 밀치고 침대에서 뛰쳐나갔다. 블랙이 낮게 혀를 찼다.
그가 리에네를 따라잡으며 제 가운을 벗어 어깨에 둘러 주었다.
쾅!
리에네가 성급히 문을 열었다.
“어디…… 어딘가요? 어디서 물이…….”
“폭포입니다.”
“세상에…….”
그대로 뛰쳐나가려는 리에네를, 블랙이 멈추게 했다.
“신발은 신어요.”
“아…….”
그가 슬리퍼를 신겨 주었다.
그 잠깐 동안 리에네는 주먹을 꼭 쥐었다. 손금 사이에 땀이 고였다.
슬리퍼를 신고, 잠옷 위에는 블랙의 나이트가운을 걸친 차림새로 말에 오른 리에네는 성문을 지나 도개교를 건너 폭포를 볼 수 있는 곳까지 내려갔다.
쿠르르르릉.
계속 뭔가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20년째 텅 비어 있던 아홉 갈래의 길에서 조금씩, 그러나 끊이지 않고 물이 흐르고 있었다.
“…….”
리에네는 아무 말 하지 못하고 하염없이 물이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벌써 폭포 바닥에는 자작하게 물웅덩이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공주님 덕에 물이 더 빨리 채워지겠습니다.”
블랙이 리에네를 당겨 안으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리에네는 막 흐르기 시작한 폭포처럼, 도무지 눈물이 그치지 않는 얼굴을 블랙에게 파묻었다.
“고마……워요.”
그가 물을 가지고 돌아왔다.
그가 한 모든 게 고마웠다. 살아남은 것, 죽지 않은 것, 제 곁에서 숨 쉬는 것, 그 모든 일들이.
“내가 할 말입니다.”
블랙도 지금 그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함께 서서 물을 맞이하는 지금, 그저 모든 게 다 감사하다고.
쿠르르르릉!
새벽이 되자 물은 그저 흐르는 게 아니라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에베트 강이 범람했다.
강 주변의 땅이 온통 물로 젖었다. 어떤 거리는 발목까지 물이 찼다. 다들 옷자락을 걷어 올린 채 맨발로 겅중겅중 뛰어다녔다.
성 밖으로 나온 리에네도 마찬가지였다.
말에서 내릴 때는 치맛자락을 한껏 걷어 올려야 했다.
“그간 하수 시설을 정비하지 않았던 게 문제 같습니다.”
페르모스는 온몸이 흠뻑 젖었다. 별로 안 좋은 냄새도 났다. 그는 이제껏 내내 에베트 강이 범람한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 온 참이었다.
동행한 티와칸들도 전부 고생을 했지만, 그중에서는 페르모스가 제일 안 되어 보이긴 했다.
블랙이 리에네의 어깨를 감싸며 페르모스에게 눈치껏 너무 가까이 오지 말라는 시선을 보냈다.
페르모스가 잠시 억울한 얼굴을 했다. 그러나 리에네는 늘 그랬듯이 두 사람 사이에 빠르게 오간 눈짓을 보지 못했다.
“그럼 장치의 문제는 아니라는 건가요?”
“네. 폭포 주변을 전부 둘러보았는데, 요 며칠 수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은 장치의 문제가 아니라 에렌디라 산맥에 비가 많이 온 탓으로 보입니다. 강이 넘친 건 일시적인 일일 겁니다.”
“그렇다니 정말 다행이에요.”
“아무래도 이참에 하수 시설을 강 이남까지 새로 만드는 게 어떨까 합니다. 이런 일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좋은 생각이에요.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안……. ……음.”
또 이런 일이 있으면 절대 안 되죠, 라고 하려던 리에네는 애매하게 입을 다물었다.
왠지 지금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 같아서였다.
거리가 물에 잠겼는데, 발목을 걷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너무 행복해 보였다.
일부러 맨발로 뛰쳐나와 발장구를 치며 큰 소리로 웃어댔다. 아이들은 거리에서 헤엄을 쳤고, 아무도 말리는 어른이 없었다.
때 아닌 축제 같았다.
“비라도 오면 더 신나겠는데요. 그땐 악사를 불러야 할 것 같습니다.”
페르모스도 같은 생각을 했던지 싱긋 웃으며 한마디 보탰다.
“……그러게요. 다들 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요. 집 안에까지 물이 찼을지도 모르는데.”
“뭐, 그래도 좋은 모양이지요. 안 그렇습니까, 주군?”
“그럴지도.”
블랙도 싫은 얼굴이 아니었다. 리에네가 두 사람을 보며 웃는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이러다 하수 시설은 필요 없다고 말할 것 같네요. 그건 안 돼요. 에렌디라 산맥에 비가 올 때마다 이럴 수는 없다고요.”
“설마요, 공주님. 남쪽 요새 건설을 잠시 미루고 하수 공사부터 시작할 겁니다. 올해가 다 끝나기 전까지는 완성이 될 겁니다.”
“경을 믿겠어요.”
거리를 쳐다보던 블랙이 리에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이런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얘깁니다.”
리에네가 세상에서 제일 당연한 일처럼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런데요?”
“그러니까, 함께 즐기는 게 어떻습니까?”
“아……?”
블랙이 리에네의 손을 끌면서 저 앞의, 물에 잠긴 거리를 가리켰다. 종아리 절반까지 물이 찬 거리는 여전히 시끄럽고 활기찼다. 온통 웃는 사람들밖에 없었다.
텀벙대며 물장구를 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손을 잡고 춤을 췄다.
페르모스의 말대로 악사가 있으면 더 좋을 광경이었다.
아니, 악사는 필요 없었다. 사람들이 알아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좋아요.”
리에네가 활짝 웃었다.
“잠시만.”
블랙이 재빨리 몸을 숙여 리에네의 신발을 벗겼다. 페르모스가 눈치껏 신발을 받았다.
함께 맨발이 된 블랙이 리에네를 거리로 잡아끌었다.
“공주님이다! 공주님!”
“리에네 공주님!”
“티와칸 공!”
리에네를 발견한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다 말고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이 부르는 리에네의 이름은 곧 커다란 웃음소리가 되었다. 블랙이 리에네를 안고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노래와 웃음과 춤과 사람들이 하나처럼 섞여 들어갔다.
리에네는 너무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블랙이 저렇게 많이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나우크에 축복을!”
“아홉 개의 폭포가 다시는 마르지 않길!”
“공주님의 이름이 영원하길!”
저마다 한 소절씩 보태는 노래는 엉망이었고, 그래서 더 신이 났다.
흠뻑 젖은 드레스를 철벅대며 숨넘어가게 웃던 리에네의 귀에 대고 블랙이 작게 말했다.
“혹시 들었습니까?”
“뭐를요?”
“블리니 대공녀가 도망쳤다는 소식.”
“저런. 처음 들어요. 언제 그랬나요?”
“샤르카 왕이 인질과 종전 합의서를 교환한 그날 밤에.”
“저런…….”
샤르카 왕은 인질을 돌려받기 위해 아주 많은 것을 잃었다.
국고가 텅 빈 것은 물론이고 국경선까지 밀렸으며 정치적 입지도 위태로워졌다.
그런데 블리니는 왕을 버렸다.
“이제는 왕자비도 아니겠네요.”
“대공녀도 아닙니다. 알리토 대공이 공녀의 상속권을 박탈했습니다.”
대공으로서는 그게 티와칸과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럼 어디로 갔을까요?”
“알아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곳으로 갔을 겁니다.”
“흐음……. 그런데 지금 그 얘기를 하는 이유가 궁금한데요. 우리는 춤을 추는 중이잖아요.”
“그래서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라고요?”
“마음에 걸릴 만한 일은 하나도 남겨 놓고 싶지 않아서.”
“아하.”
블랙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았지만 사실 지금이 너무 행복해서 블리니 왕자비 일 같은 건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건 이제 마음 놓고 행복해하기만 하라는 말 같네요.”
“그렇습니다.”
“하하……. 그런데 사실 벌써부터 그랬어요.”
“…….”
블랙은 그랬냐는 말 대신 웃기만 했다. 웃는 얼굴로 자신을 한참 바라보다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지금 속으로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아마도 그런 말을 하고 있지 않을까.
리에네도 그를 보며 속삭였다.
그렇다면 그건 전부 이루어졌어요.
이제 남은 건 두 사람의 집에서 매 순간 행복해하는 것뿐이었다.
* * *
드레스가 흠뻑 젖었다.
그것까진 괜찮았지만 두 부인들에게 괜한 고생을 시켜야 한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런데 의외로 플램바드 부인은 아무렇지도 않게 젖은 드레스를 벗겨 주었다.
“이건 이제 버립시다.”
“……? 왜요?”
“입으실 만큼 입으셨습니다. 그 정도로 입었으면 옷도 제 쓰임을 다했다 하며 뿌듯하게 재가 될 겝니다.”
“아니, 부인. 오래 입긴 했는데 그 정도는 아니죠. 그리고 제가 옷을 적셔 오긴 했지만 흙탕물은 묻히지 않으려고 애썼어요.”
“흙탕물이 문제가 아닙니다, 공주님. 저 옷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낡긴 했어도 멀쩡한데요…….”
“고행 주간에 들어선 신관들이나 멀쩡하다 할 옷입니다. 공주님, 이제 저도 이런 말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단호한 손길로 젖은 드레스를 건네자 헨튼 부인이 마찬가지로 단호하게 그걸 받아들었다. 보지도 않고 돌돌 말아 나무통에 넣는 게, 기어코 버리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무슨 말을요?”
“공주님은 이제 부자십니다. 그렇지요?”
“네? 제가요?”
“암만요. 제가 엊그제 그 안경 쓴 이로부터……. 아, 내 정신 좀 봐. 페르모스 경으로부터 내년 치 왕실 예산을 받았지요.”
“그런데요?”
“처음에는 숫자에 0이 하나 실수로 더 붙은 줄 알았지 뭡니까.”
“……?”
“저는 도저히 일 년 안에 그 돈을 다 쓸 자신이 없지 뭡니까.”
“그럼 안 쓰고 놔두면 될…….”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갑자기 엄한 얼굴을 하는 바람에 리에네가 어릴 때처럼 침을 꿀꺽 삼켰다.
“네, 부인. 왜 화를 내고 그래요.”
“하여간 제 말은, 이제 너무 오래 입으신 옷은 버려도 된다는 뜻입니다.”
헨튼 부인이 절도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그게 더 무서웠다.
“앞으로 십 년간 샤르카 왕국에서 전쟁 배상금을 보내기로 했다 들었습니다. 공주님의 부군께서는 그 엄청난 돈이 푼돈으로 보일 만큼 원래 재산이 많으시다는 말도요. 그러니 저는 내일부터 공주님의 옷장을 정리하겠습니다. 이참에 버릴 건 싹 다 버리고 새 옷을 지을 겝니다. 그리고 일꾼도 더 고용하겠습니다.”
“일꾼은 물론 더 필요하죠…….”
이번에는 헨튼 부인도 말로 거들었다.
“일단 열 명 정도만 들이겠습니다. 차차 훈련이 되면 더 들이고요. 그리고 이참에 빈방도 전부 손을 봐야 할 듯합니다. 이 넓은 성에 사람이 쓰는 곳보다 쓰지 않는 곳이 더 많다니요.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음…… 필요하다면 해야죠.”
여기서 일꾼이 왜 그렇게나 필요하며, 빈방까지 전부 새로 꾸밀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큰일 날 것 같았다.
나우크는 달라지고 있었다.
나우크 성도 전부 달라질 때가 되었다.
“좋아요. 그렇게 해요. 예산이 넉넉하다니 다행이네요. 그럼 일단 성에 들일 만한 사람들부터 추려 볼까요? 그건 비서관을 불러서…….”
“아니요, 공주님.”
플램바드 부인이 칼같이 리에네의 말을 잘랐다.
“그건 이제 저와 이이가 맡겠습니다. 원래도 공주님께서 하실 일은 아니었지요. 이제 공주님께서는 원래 하실 일을 할 때가 되었습니다.”
“네. 괜히 청소를 거든다 하지도 마시고요.”
그거야 부인 둘이 힘들어할까 봐 그랬다.
“……페르모스 경이 굉장히 유능하잖아요. 그래서 그런지 제 일이 많이 줄었어요.”
리에네가 변명처럼 작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음……. 저는 예전보다 덜 바쁠 것 같거든요.”
두 부인이 나란히 서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이제 더 바빠지시겠지요.”
“그렇지요.”
“아닌데요.”
둘 다 리에네의 말은 듣지도 않았다.
“두고 보십시오. 이젠 그리될 테니. 공주님께서는 정식으로 대관식도 치르셔야 하지 않습니까?”
“아……. 그게 있긴 하네요.”
대관식이라니.
너무 예전에 뒤로 미뤘던 문제라 지금은 새삼스럽다 못해 낯설 정도였다.
클라인펠터 가에서 끝까지 대관식보다 혼인식이 앞서야 한다고 우겨대는 통에 리에네는 아직 정식으로 왕관을 물려받지 못했다.
“공동 대관식 같은 것도 가능하려나. 물어봐야겠네.”
“그리고 대관식보다 더 중요한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이번에는 헨튼 부인이었다.
“말해주세요. 그게 뭔데요?”
“아기를 낳으셔야지요. 겨울에 들어서면 배가 불러오는 게 금방일 텐데, 대관식 준비를 하시려면 힘들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