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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5. 외전 (1) (135/145)


135. 외전 (1)
2022.07.17.



“화가 나.”

리에네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늦가을에 수확된 복숭아를 씹었다. 원래 나우크에서는 볼 수 없는 과일이었는데, 야디온 만까지 국경이 확장되면서 외국에서 들어오는 것을 맛볼 수 있게 되었다.

페르모스는 새로운 돈벌이에 눈을 돌렸다. 야디온 만에 대륙 남단의 최대 항구를 만들겠다는 야심을 지치지도 않고 떠들었다.

향후 십 년 안에 대륙의 무역 판도가 바뀔 거라고 했다. 새로운 항구에 리에네의 이름을 붙이겠다고도 했다.

뭐, 그건 좋았다.

어쨌거나 더 잘살게 된다는 얘기였으니까. 그 덕을 보는 사람들은 끝도 없을 것이다.

사실 지금도 돈이 너무 많아져서 주체를 못 하겠다 싶을 정도였지만, 재물은 원래 많을수록 좋은 것이었다.


“화가 난다고.”

아삭!

문제는 시기였다.

가을이 시작될 무렵, 리에네는 아이를 가진 줄 알았다. 달거리를 한 달 걸렀으니 다들 그게 틀림없다고 했다.

블랙은 아이 머리 크기에 맞춘 왕관을 세 개나 만들게 했다. 어떤 보석이 더 잘 어울릴지 알 수 없으니 태어나면 골라 보자는 의도였다.

그런데 거짓말처럼 다음 달에 다시 달거리가 시작되었다.

너무 실망을 한 탓에 사흘을 앓아누웠을 정도였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의사들을 한 대씩 때리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마침 계절도 계절인지라 리에네는 상실감과 우울감, 그리고 지금처럼 불쑥불쑥 솟구치는 화를 참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제까지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싶지도 않을 만큼 울적했는데, 지금은 모든 일에 다 화가 났다.

복숭아는 맛있는데 먹을 때 즙이 흘러서 손이 끈적해졌다.

그것도 화가 났다.

아삭!


“화가 나.”

먹다 보면 딱딱한 복숭아씨가 걸리는 것에도 화가 났다.

임신이 아니라던 의사들한테 화가 났고, 다시 생각해도 어떻게 그럴 수 있냐 싶었고, 널뛰는 감정을 삼키느라 침실에 혼자 틀어박혀 있는 자신에게 화가 났다.


“싫다.”

손바닥에서 손목을 타고 흘러간 복숭아즙이 잠옷에 작게 얼룩을 남겼다.

하필 거위 속깃털처럼 새하얀 새 잠옷이었다.


“……싫어.”

리에네는 반쯤 먹다 만 복숭아를 쥐고 가만히 숨을 골랐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는데, 그래도 되는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서 기가 막혔다.

왜 이러지, 내가.

사방에는 온통 좋고 행복할 일뿐이라는 걸 아는데도 마음은 생각을 따라가지 못했다. 혼자서만 발이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어쩌면 좋지.

이러다 울 것 같아서 리에네가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다른 건 몰라도 우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짓 같았다.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에 누군가의 연한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게 미안해서 리에네는 블랙을 피하는 중이었다.


“손을 닦아 주고 가겠습니다.”

“야디온 만에 가야 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벌써 출발한 줄 알았는데.”

“페르모스를 보냈습니다. 발이 떨어지지 않아서.”

“……그냥 가지 그랬어요.”

그럼 그를 피해야 한다는 부담감은 하나 덜 수 있었을 것이다.

블랙이 리에네의 손에 아직도 들려 있는, 반쪽짜리 복숭아를 조심스레 가져갔다.


“내가 보기 싫습니까?”

……그럴 리가.

나는 그냥, 당신을 보는 게 부끄러운 거죠.

리에네가 무의식중에 작게 고개를 젓는 것을 본 블랙이 이마에 다정한 입맞춤을 남겼다.


“그게 아니라면 조금만 참아 줘요. 나는 공주님의 손을 닦아 주고 재빨리 사라질 테니까.”

“…….”

욕실로 간 블랙이 수건을 가져왔다. 차갑지 않은 물에 적신 수건은 부드럽게 얼룩을 닦아 냈다.


“생각해 봤는데,”

손이 말끔히 닦였어도 블랙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사라지지도 않았다.


“복숭아를 작게 잘라 놓으면 즙이 묻을 일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렇겠네요. 부인한테 잘라 달라고 해야겠어요.”

“내가 하면 안 됩니까?”

“당신이요?”

“칼은 잘 쓰는 편인데.”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당신 칼은 그렇게 쓰는 칼이 아니잖아요.”

“믿어 봐요. 작은 칼도 잘 쓰니까.”

“…….”

“정말입니다.”

블랙은 정말로 사람을 불러서 음식을 자르는 데 쓰는 작은 칼을 가져오게 했다.

그가 침대 맞은편에 앉아서 복숭아를 한 입 크기로 자르는 광경을 보고 있으려니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둥그런 접시에 토막토막 잘린 복숭아가 수북하게 쌓였다. 바구니에 담긴 복숭아를 전부 다 자를 때까지, 두 사람은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많이 잘라 놓으면 다 먹지도 못한다는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더 할까요?”

블랙은 족히 일주일은 먹을 복숭아를 잘라 놓은 다음 이렇게 물었다.


“내가…….”

울지 않으려고 했다. 정말이었다.

그러기엔 너무 염치가 없는 일 같았으니까.


“……해서 그런 거면…… 어떡해요.”

“무슨 말입니까?”

“내가…….”

리에네가 중간에 입술을 한 번 꾹 물었다.


“……거짓말을 했, 잖아요. 그래서…….”

없는 아이가 있다고, 그랬잖아요.

한동안 당신을 속였잖아요.

만약 지금이 그 대가라면. 그럼 어떡하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까?”

블랙이 한쪽 눈썹을 찡그렸다. 저건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사람들은 사소한 거짓말 같은 걸로 일일이 대가를 치르고 살진 않습니다. 공주님도 알 텐데요. 세상은 그렇게 단순하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걸.”

“그렇긴 한데……. ……아니, 그렇게 말할 일이 아니잖아요. 이건 우리 아이 일인데.”

“올 때가 되면 올 겁니다. 안 와도 상관없는 일이고. 우리는 아직 신혼입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요. 그렇게나 좋아했으면서.”

“공주님은 지금이 부족합니까?”

“그건…… 아니죠.”

“그럼 된 것 같은데. 나도 그러니까.”

블랙이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복숭아 접시를 치웠다.

그리고 눈앞으로 바짝 다가왔다.


“혼인한 지 일 년도 안 됐습니다. 아이는 너무 빨랐어요.”

“……아니, 빠르고 말고가 어디 있어요. 아인데.”

“나는 있어요.”

블랙이 이마로 넘어온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시선이 남김없이 마주쳤다. 블랙이 이마를 맞대었다.


“나 혼자 독점하고 싶으니까. 아직은.”

“그런 말 안 했잖아요. 아이가 생겼다고 했을 때는.”

“아이가 생겼다는데 할 말은 아니니까.”

“음……. 그럼 당신은 지금이 더 좋아요?”

“아이가 있다면 있는 대로 좋았을 겁니다. 지금이 지금 이대로 좋은 것처럼.”

코끝이 코끝을 간질였다.

가끔은 숨 막히는 키스보다 이게 더 야하게 느껴질 때가 있었다.


“어쨌거나 신혼은 다시 돌아오진 않으니까.”

“그건…… 그래요.”

블랙이 작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도 마찬가지였다. 자주 웃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지 한 번 들려올 때면 심장을 간질거렸다.


“나는 그래서 한 일주일 정도 한가할 예정입니다.”

“대신 페르모스 경이 바쁘겠네요.”

“그건 공주님이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페르모스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것도 맞죠.”

비로소 리에네도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무척 쓸데없는 일로 괜히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걸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그리고 공주님은 어디가 아픈 건 아니고.”

블랙이 입술을 피해 입가에 살짝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아프진 않아요.”

“딱히 몸을 조심할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음……. 서운하긴 하지만 그렇겠죠.”

“내가 꼴 보기 싫은 것도 아니고.”

“그럴 리가요.”

블랙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럼 이제 뭘 하면 좋겠습니까?”

“글쎄요…….”

리에네가 잘생긴 코끝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일주일이나 한가하다는 거지, 지금.

그럼 뭘 해야 할까…….


“생각이 너무 길어지는 것 같은데. 좀 거들어도 되겠습니까?”

툭.

블랙이 더블릿의 매듭을 풀었다.

셔츠 깃이 벌어지며 단단한 빗장뼈가 드러났다. 언제나 그렇듯이 근사했다.


“으음……. 이건 거드는 게 아니라 강요하는 것 같은데. 아닌가요, 전하?”

두 사람은 곧 대관식을 치를 예정이었다.

아이를 가졌으면 봄으로 미뤄졌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겨울에 해도 좋을 것이다. 눈으로 뒤덮인 나우크 성의 전경은 몹시 아름다울 테니까.


“천만에요. 강요가 아닙니다, 전하. 강요는 이런 걸 두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중간에 말을 끊은 블랙은 리에네의 입술을 덥석 삼키며 몸을 침대에 눕혔다.

푹신한 베개 위로 머리가 툭, 떨어졌다. 리에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침대에 누울 걸 강요하는 왕은 폭군이라고 들었는데.”

“계속 웃어요.”

블랙이 더블릿을 마저 벗어 던졌다.


“이젠 웃을 틈이 없을 테니까.”

블랙의 무게가 몸 위에 겹쳐졌다. 양손을 겹쳐 깍지를 쥔 자세로, 블랙이 키스를 시작했다.

약간 현기증이 났다.

리에네가 손가락 새에 느껴지는 블랙의 손가락을 꾹 쥐며 입술을 열었다.

커튼을 비집고 들어오는 늦가을 해가 화창했다. 햇살이 살갗에 닿는 작은 열조차 야했다.


“복숭아 향이 납니다. 공주님한테서.”

블랙이 부풀어 오른 입술을 핥으며 중얼댔다. 푸른 눈이 뜨거운 안개처럼 몽롱했다.

그가 이런 눈을 할 때마다 리에네는 등이 오싹 저리는 기분이었다.


“복숭아를 먹었잖아요…….”

“그러니까.”

블랙이 다시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키스라기보다는 살갗을 맛보는 느낌에 더 가까웠다.


“맛있어.”

“…….”

그 말이 머리 한구석을 오싹 달구는데, 갑자기 입맛이 당겼다.


“잠깐만요.”

블랙의 입술이 턱선을 타고 내려가는 동안, 리에네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

블랙이 이해를 못 하겠다는 눈으로 몸을 일으키는 리에네를 바라보았다.


“산딸기 파이가 먹고 싶어요.”

“……지금 말입니까?”

“네.”

리에네가 말을 하면서 주먹을 꼭 움켜쥐었다.


“어떡하죠. 너무 먹고 싶어요. 한 번 떠오르니까 다른 건 생각이 안 나요.”

“……그러니까, 지금?”

“네.”

“…….”

블랙이 잠깐 천장을 한 번 쳐다보았다.


“만들어 오라고 하겠습니다. 그럼 파이를 기다릴 동안…….”

아삭.

그런 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리에네는 벌써 일어나 복숭아 접시를 끌어안고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있었다.

한 입 크기로 잘라 놓은 복숭아는 입에 쏙 들어가 즙이 흐를 일도 없었다.


“이렇게 해놓으니까 진짜 좋은 것 같아요.”

“……그렇다니 다행입니다.”

블랙이 약간 찡그린 얼굴로 웃었다.

꼭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할 것처럼 접시를 꼭 안고서 복숭아를 아삭대는 리에네는 행복해 보였다.

요 며칠 내내 혼자서 마음을 앓던 때와 비교한다면 지금은 그저 감사하다고 해야 했다.


“파이 말고 생각나는 건 없습니까?”

“아직은요. ……아, 강낭콩 푸딩이 먹고 싶은 것 같기도 해요.”

“다른 건?”

“봐서요. 이상하게 엄청 배가 고파요.”

“며칠 제대로 먹지 못했으니까.”

블랙이 반이나 풀린 셔츠의 매듭을 다시 채웠다. 복숭아를 먹느라 바쁜 리에네는 그가 다시 옷을 입는 것도 몰랐다.

셔츠를 다 입은 블랙이 리에네에게 다가가 재빨리 관자놀이에 입술을 댔다.


“다녀오겠습니다.”

“아, 잠시만요.”

리에네가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를 블랙의 입에 넣어 주었다.

남의 마음도 모르고 복숭아는 달고 사각거렸다.


“맛있죠?”

“……네.”

눈가를 접어 가며 웃는 리에네가 복숭아처럼 보였다.

블랙은 참지 못하고 리에네의 입술에 묻은 즙을 핥았다.


“내 몫도 조금 남겨 줘요.”

“복숭아는 많아요.”

“그것 말고.”

공주님을.


“…….”

그가 소리 내지 않은 그 말을 알아들었던지 리에네가 볼을 살짝 붉혔다.

블랙이 어렵게 입술을 놔주었다.

어쨌거나 일주일은 한가할 예정이었다. 시간은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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