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외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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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 외전 (2)
2022.07.20.
언제 아이가 들어섰는지는 아무도 몰랐다.
리에네와 블랙도 몰랐다. 그날이었나……? 하고 고개를 갸웃댈 뿐이었다.
어쨌거나 본격적으로 겨울이 시작되자 배가 조금씩 불러오기 시작했다.
덕분에 플램바드 부인은 즐거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배 부분이 넉넉한 새 드레스를 만드는 일이 고되면서도 너무 좋다는 식이었다.
겨울이 되면 늘 혹독하게 춥던 나우크 성은 구석구석 따듯하고 환해졌다. 궁인들이 많이 늘어 가끔 리에네가 얼굴을 몰라보는 이도 있을 정도였다.
타닥타닥.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올랐다.
리에네와 헨튼 부인은 벽난로 앞에 나란히, 곰가죽 깔개를 깔고 앉아 있었다.
헨튼 부인이 불쏘시개로 장작을 뒤적였다. 그러다 한 개씩 껍질이 톡 벌어진 밤을 발견하면 긁어 와 호호 입김을 불어 식혔다.
“자요, 드세요.”
리에네는 군밤을 받아먹느라 입가가 살짝 거뭇해져 있었다.
처음에는 검댕이 묻을 때마다 닦아 주던 헨튼 부인도 시간이 지나자 포기했다. 어차피 밤은 한참 더 먹을 것 같았으니까.
“맛있어요.”
아이를 가진 뒤 리에네는 과식과 입덧 사이를 위태롭게 오갔다. 어떤 날은 물도 마시지 못했고, 어떤 날은 지치지 않고 먹었다.
어떤 날은 한 가지 음식만 먹었고, 어떤 날은 그 음식을 보기만 해도 안색이 하얘졌다.
이렇게 고생하는 임부는 본 적이 없다고 의사들도 매번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돌아갔다.
하여간 리에네가 뭔가를 먹을 수 있을 때 먹여 두는 게 좋았다. 또 언제 입덧이 시작될지 모르는 일이었다.
“잘 드시니 다행입니다. 밤은 많이 있으니 지칠 때까지 드세요.”
“……네.”
리에네가 밤을 먹을 수 있다고 하자 티와칸들이 겨울산 하나를 통째로 털어 왔다. 어찌나 많은지 창고에 다 집어넣을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렇게 밤을 싹 쓸어 오면 산짐승들이 겨우내 먹을 게 없어졌다. 결국 쓸어 온 밤 절반을 도로 산에 가져다 놓아야 했다.
많은 이들이 생고생을 한 밤은 아주 맛있었다.
“내 입맛이 매일 바뀌는 바람에 부인이 고생이 많아요.”
헨튼 부인이 열심히 까 주는 밤을 야금야금 먹으며 리에네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이걸 두고 어찌 고생이라 하겠습니까. 그이 말대로 이런 고생이라면 매일을 해도 좋지요.”
그이란 플램바드 부인을 부르는 말이었다.
두 부인은 이제 영혼의 단짝이라도 된 것처럼 지냈다. 매일 감사를 해도 모자랄 크고 작은 변화들이 쉬지 않고 나우크에 일어나고 있었다.
“참, 렌펠 경은 손가락에 동상을 입었다면서요. 이젠 괜찮나요?”
“이 추위에 밖에서 마냥 칼을 휘둘러대는데 어디 사람 손이 배겨나겠습니까. 한 번 혼쭐이 난 탓에 지금은 장갑을 끼고 다니긴 합니다.”
클리마의 기사수업은 겨울이라고 쉬지 않았다.
티와칸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들인지 이 추위에 웃통을 벗고 새벽마다 성 주변을 뛰었다. 얼음 낀 강에 풍덩풍덩 뛰어들기도 했다. 추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았다.
그 틈바구니에서 클리마는 여전히 고생이었다.
헨튼 부인은 말을 아끼는 편이었지만, 속으로는 걱정이 쌓이고 있지 않을까 싶었다.
“렌펠 경은 자기 몸을 잘 돌보는 편이 아니니까요. 내가 한 번 말해 볼까요?”
“공주님께서 말씀하시면 듣기야 하겠습니다만……. ……아니, 괜찮습니다.”
헨튼 부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마음이야 감사하지만, 당분간은 놔둘까 합니다.”
“왜요?”
헨튼 부인은 그새 새로 깐 밤을 건넸고, 리에네는 자연스럽게 받아먹었다.
두 사람은 사이가 아주 좋은 모녀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리 열심히 뭔가를 하는 걸 보기 좋아서요. 그 애는 이제껏 그런 걸 해 본 적이 없으니.”
“아…….”
“다치다 보면 알겠지요. 조심하는 법을.”
그런 말을 하는 헨튼 부인의 얼굴이 너무 엄마 같아서 리에네도 잠시 애틋해졌다.
“애들은 원래 그렇게 크니까요. 그 애는 그런 걸 배울 시기가 아닌 듯도 하지만.”
유년을 클라인펠터에게 빼앗겼던 클리마는 이제야 느리게 진짜 삶을 시작하는 중이었다.
그걸 지켜보는 게 좋다는 말은, 지난 세월을 이미 용서했다는 말과도 비슷했다.
“……밤이 많다고 했죠?”
“네, 공주님.”
“그럼 많이 구워요. 렌펠 경한테도 나눠 주고 싶어요.”
헨튼 부인이 손사래를 치면서 웃었다.
“아기님이 드실 밤 아닙니까. 놔두세요. 그 애는 다 잘 먹어서 괜찮습니다.”
“밤은 원래 겨울에 먹는 거잖아요. 생각해 보니까 나만 먹을 게 아니었어요.”
그렇게 밤을 잔뜩 굽게 됐다.
잘 구워진 밤을, 껍질을 까서 주머니에 담았다. 껍질을 까느라 손가락 끝이 까맣게 되었다.
밤이 가득 담긴 주머니는 클리마의 침실에 가져다 두었다.
밤늦게 고된 수업을 마치고 방에 돌아온 클리마가 맛있게 구운 밤을 먹고 잠이 들 것이다.
* * *
“그래서 당신 것도 구워 놨어요.”
그런 말을 하는 리에네의 얼굴은 조금 시무룩해 보였다.
“그런데 껍질을 너무 열심히 깠더니 손끝이 다 까매졌지 뭐예요. 씻었는데도 잘 안 지워져요. 이러다 새 드레스에 얼룩이라도 지면 플램바드 부인이 속상해할 텐데.”
블랙은 밤이 가득 든 주머니를 내려놓으며 웃었다.
손이 까매졌다고 눈꼬리를 늘어트리는 리에네가 너무 귀여웠다.
“금방 괜찮아질 겁니다. 따듯한 물로 씻으면 될 텐데.”
“손만 씻는 건데 물을 데우기도 번거롭잖아요.”
“드레스를 더럽히는 것보다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블랙이 습관처럼 이마에 키스를 남기면서 말했다.
“기다려요. 물을 데워 놓을 테니까.”
“아, 내가 할게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어요.”
“알아요. 그런데 내가 할 겁니다.”
“그런 일을 하기에 당신은 너무 바쁜 몸 아니에요?”
“그래도 선물을 받았으니까. 비록 클리마에게 주려던 걸 조금 나눠 준 것 같지만.”
농담인 건 알았지만 그래도 리에네는 정색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뭔가를 해야 하는 순간에도 늘 당신 생각을 한 거라고요.”
“압니다. 그래도 듣고 싶었어요.”
“……나 참. 은근 속이 좁다니까.”
“좁아질 땐 좁아집니다.”
리에네가 장난으로 눈을 흘겼고, 블랙은 그 표정이 귀엽다며 또 웃었다.
“그럼 잠깐 있어요.”
“네.”
사람을 시켜도 되는 걸 자신이 하겠다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리에네는 그 이유를 기꺼이 받기로 했다. 그런 건 남들이 끼어들 수 없는 둘만의 일이었으니까.
잠시 후 블랙이 욕실에서 물그릇을 들고 돌아왔다.
물그릇을 탁자에 올려놓은 그가 말했다.
“손 이리 줘요.”
“아, 그 전에.”
리에네는 블랙이 내려놓은 주머니를 열었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맛은 보고 해요.”
리에네가 군밤 하나를 블랙의 입에 넣어 주었다.
“맛있어요?”
“네.”
밤을 씹느라 입술과 목젖이 움직였다.
이 남자는 왜 먹을 때도 이렇게 잘생겨 보일까.
리에네가 고개를 갸웃대며 침을 꿀꺽 삼켰다. 블랙이 웃는 얼굴로 왼쪽 손을 가리켰다.
“이리 줘요.”
“……네.”
따듯한 물에 손이 담겼다.
블랙이 젖은 손에 비누를 문질러 꼼꼼히 여러 번 문질러 댔다.
손가락이 매끄럽게 서로 얽혀 들었다.
“아……. 이거 좋네요.”
리에네가 눈을 반쯤 감고 중얼거렸다.
“앞으로 손이 더러워질 일을 종종 해야겠군요.”
“음……. 다음에는 당신이 해요. 내가 씻겨 줄게요.”
“좋은 생각입니다.”
왼쪽 손을 꼼꼼히 닦아 낸 블랙이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다.
“그럼 이제 오른손.”
“네.”
아무 생각 없이 오른손을 내밀던 리에네는 그가 자꾸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왜 내내 웃어요?”
“공주님이 예뻐서.”
“이상한데. 평소에는 그렇게 안 웃잖아요.”
“지금 공주님이 유난히 예쁜 거라고 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상하네.”
어쨌거나 오른손도 그렇게 매끄럽게, 꼼꼼하게, 가끔은 야한 기분이 들게 뽀득뽀득 닦였다.
“와……. 다 지워졌어요. 씻기는 솜씨가 아주 좋으시네요, 전하.”
“손 말고 다른 데도 잘 씻길 수 있을 것 같은데. 확인해 볼 생각은 없습니까, 전하?”
“음……. 몸이 좀 더 무거워지면 한 번 부탁드릴게요.”
“약속한 겁니다.”
“네, 그럼 다음에……. ……아, 벌써 다 먹었네.”
왼손을 자연스럽게 밤이 담긴 주머니에 넣고 휘적이던 리에네가 문득 손짓을 멈췄다.
“아……? 그런데 내가 이걸 왜 먹고 있었지? 이건 당신 거였는데?”
블랙은 다 먹은 사람이 할 말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아이가 먹고 싶었나 봅니다. 괜찮습니다. 밤은 아직 많이 있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래도 내가 먹으려고 했던 게 아니란 말이에요. 당신한테 주려고 일부러 주머니에 담아 둔 건데.”
당황하던 리에네가 이내 울상이 되었다.
“나는 낮에도 잔뜩 먹었는데…….”
그러고 보니 블랙이 웃고 있던 게 자신이 자꾸 밤을 먹어 대서 그런 것 같았다.
말이나 좀 하지. 나한테 줬으면서 왜 뺏어 먹냐고.
……그런데 그런 말을 할 사람이 아니긴 하구나. 그래도 속상해.
“열심히 깐 건데…….”
리에네가 정말 울 것 같아지자 블랙이 서둘러 리에네를 끌어안았다. 리에네는 요새 눈물이 많아졌다. 부인들의 말로는 아이를 가지면 그렇게 된다고 했다.
블랙은 그래서 좋다고 생각했다. 리에네는 자주 우는 대신 또 그만큼 자주 웃었다.
“밤은 또 구우면 됩니다.”
“아니,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나는 당신이 내가 준 걸 맛있게 먹는 모습을 기대했단 말이에요.”
“나도 그랬습니다.”
“뭐가 그랬는데요?”
“공주님이 내 밤을 맛있게 먹는 게 좋았습니다.”
“으음. 그렇게 말하면…….”
초옥, 입술이 코끝에 닿았다.
“내가 구워 준 것도 같고. 정작 손이 더러워지도록 애쓴 건 공주님인데.”
“……당신은 너무 물러요.”
그 말에 블랙이 커다란 폭소를 터트렸다.
가끔 그가 저렇게 웃을 때가 있었다. 리에네는 시원하게 들려오는 그 웃음소리가 너무 좋았다.
“어디서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은 없었는데.”
“정말인데요. 지금도 너무 무르게 굴잖아요.”
“……뭐, 그런 걸로 해요. 공주님한테는 무른 걸로.”
“듣고 보니 그게 더 좋네요. 그래도 이 계절에 밤은 진짜 맛있거든요.”
블랙이 요새 살이 뽀얗게 오른 뺨을 엄지로 쓸면서 물었다.
“그럼 더 구울까요?”
“네.”
“손이 또 더러워질 텐데.”
“그럼 더 좋죠. 이번에는 내가 씻겨 줄게요.”
“공주님이야말로 너무 후한 사람 같습니다.”
“고작 이런 걸로 후하다고 하지 말아요. 그럼 내가 평소에 구두쇠 같았다는 말로 들리잖아요.”
“그게 더 좋은데.”
“구두쇠가 더 좋다고요?”
요새 재정이 좀 넉넉해졌다고 자신이 너무 낭비를 했다는 말일까 싶어 리에네가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런 말은 아니겠지만……. ……그런데 요새 아기 물건을 이것저것 사들이긴 했지. ……아니, 하지만 다 필요한 거 아니야? 그러는 이 남자는 아기용 왕관을 세 개나 맞췄는데?
“네. 다른 사람한테는 조금 더 야박하게 굴어도 됩니다. 후한 건 나한테만 해요.”
“아…….”
……그럼 그렇지.
돈 쓰는 걸 말하는 게 아니었어.
“혹시나 해서 묻는 거지만 아기 물건을 좀 덜 사라는 말은 아니었죠?”
“안 사도 됩니다. 공주님이 안 사면 내가 살 테니까.”
그래, 이런 사람이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무 많이 사진 말아요.”
“……밤을 가져오라고 해야겠습니다.”
블랙이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대답 안 했잖아요. 너무 많이 사지 말라고요. 당신은 잠깐 쓰고 말 왕관을 세 개나 사는 사람이니까 걱정스러워요.”
“……. 알겠습니다. 너무 많이 사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대답이 순순해서 리에네는 대답하기 전 아주 짧은 침묵을 그냥 흘려 넘겼다.
그래서는 안 됐다는 걸 깨달은 건 아이가 태어난 다음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