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외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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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외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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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7. 외전 (3)
2022.07.24.
겨울 내내 리에네는 길고 혹독한 입덧에 시달렸다.
증상은 같았다. 어떤 날은 먹을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전혀 먹을 수 없었다. 어떤 음식이 괜찮았다가 잠깐 사이에 전혀 괜찮지 않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몸을 추스르는 일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대부분은 기운이 없어 침대에 누워 있었고, 어쩌다 잠깐 산책만 나갔다 와도 진이 빠졌다.
그러다 보니 블랙이 내내 곁에 붙어 있었다.
“오늘은 이건가 봐요.”
리에네는 벌써 세 개째 석류를 먹고 있었다.
옆에서 석류를 까 주는 블랙의 손끝은 즙이 묻어 붉었다.
“신기해요. 이전에는 먹어 본 적도 없는 과일인데 이제는 막 자다가도 생각이 난다니.”
야디온 만을 얻은 뒤로 새 항구에는 조금씩 배들이 오가는 중이었다.
무역업은 이제 시작이긴 했지만 페르모스는 조짐이 좋다고 했다. 그는 벌써 커다란 무역선을 네 척이나 주문했다. 그중 한 척은 제 돈으로 샀는데, 십 년 앞을 내다본 투자라고 했다.
어쨌거나 그 덕에 이런 겨울에도 신선한 석류를 먹을 수 있었다.
“이거라도 먹으니 다행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블랙이 더 지쳐 보였다.
아이가 들어선 뒤부터 지금까지 입덧으로 고생하는 리에네를 보며 블랙은 내내 아이는 하나로 족하다는 다짐을 했다.
“그런데 이런 말은 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이러다 또 못 먹게 되더라고요.”
“아…….”
블랙이 즉시 입을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가 어찌나 변덕스러운지 입맛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변했다. 한참 잘 먹다가도 갑자기 역해졌다며 속을 게워 내는 일도 다반사였다.
“많이 먹어요.”
블랙이 부지런히 석류를 깠다. 속껍질을 꼼꼼하게 골라 주는 손이 오늘따라 더 잘생겨 보였다.
사실 이 남자는 항상 잘생겼지만.
요새 블랙은 리에네를 따라 식욕을 잃으면서 살이 빠졌다. 그 바람에 인상이 좀 변하고 눈매가 더 날카로워졌다.
그게 안 되어 보이면서도 가끔씩 등이 오싹할 정도로 잘생겨 보여서 큰일이었다.
……큰일이지. 더 잘생겨지면 어떡해.
그럼 나는 아이를 낳자마자 또 가지게 될걸.
리에네가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석류알을 씹는데 누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주군. 접니다.”
랜달이었다.
“맹세코 두 분을 방해할 생각은 없었습니다만, 그래도 알려드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서 말입니다.”
말투가 몹시 조심스러웠다.
리에네의 몸이 좋지 않으면 블랙의 기분도 엉망이라는 사실을 다들 이미 너무 잘 알고 있는 탓이었다.
“대의회 귀족들이 아기님의 선물을 가져왔다는데, 들여보내야겠습니까?”
“……선물?”
오도독.
리에네가 입에 들어온 석류알을 씹다 말고 중얼거렸다.
왠지 조짐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블랙이 미간을 찌푸렸다.
“……욱!”
역시나였다.
블랙이 재빨리 옆에 놓아둔 물그릇을 리에네의 입에 대 주었다.
“욱!”
목숨을 붙여 주었던 망할 인간들이 리에네의 입맛을 망쳐 놓았다.
* * *
쾅!
알현실 문이 부서질 것처럼 열렸다.
그리고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 티와칸 공이 들어오는데, 다들 찔끔 오금이 저리는 경험을 했다.
표정이 여기 있는 저들 전부 토막을 내도 시원치 않겠다는 식이었다.
다섯 귀족들은 이유도 모른 채 몸을 떨어 댔다.
드륵, 털썩!
블랙이 알현실 의자에 앉았다.
알현실에는 의자가 하나밖에 없었고, 그 의자는 알현 온 자들을 내려다보기 위해 바닥보다 높은 단 위에 놓여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져 있다는 소리였는데, 그래도 금방 목덜미를 잡힐 것 같은 무섬증이 돋아났다.
“…….”
게다가 왜 아무 말이 없는 걸까.
왕족이 먼저 인사를 해야 자신들도 인사를 할 수 있었다.
다섯 귀족들은 오들오들 떨면서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런 시간이 한참은 흐른 것 같았다.
“주군. 이만 좀 봐주시지요. 저러다 오줌이라도 싸면 어쩝니까.”
블랙의 옆에 서서 시큰둥하게 귀족들을 바라보던 페르모스가 입을 열었다.
먼저 나서 준 건 고마웠는데, 내용이 좀 듣기 그랬다.
“공주님이…….”
무슨 말을 하려던 블랙이 말을 끊고 숨을 탁 내뱉었다.
“……아니, 못 봐주겠어.”
다섯 가문의 귀족들은 그 말에 다시 눈앞이 노래졌다.
“이틀 만에 겨우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아, 저런.”
페르모스가 귀족들을 힐끔 돌아보며 혀를 찼다.
“석류를 드시는 와중에 다시 입덧이 온 모양이로군요. 공주님께서 내내 고생이신 걸 알면서도 저들이 뻔뻔한 낯짝을 들이민 탓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게 꼭 다 너희들 탓이니 알아서들 제 손으로 목을 자르는 게 좋지 않겠냐는 말 같았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찌 선물을 가져온 이들에게…….”
블랙이 눈썹을 치켜들었다.
“누가 말해도 좋다고 했나.”
“……헙.”
즉시 입이 다물렸다.
입술을 꾹 물고 새파란 낯짝이 된 귀족들을 하나하나 천천히 돌아보며 블랙이 말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나는 너희들 목을 자를 마음이 없었어. 클라인펠터를 포함해서.”
“모, 목만…….”
목만 붙여 놨지 팔다리는 뽀각뽀각 잘도 부러트리지 않았냐는 항변이 나오다 도로 기어들어 갔다.
“자를 걸 그랬지. 하는 짓을 보면.”
“……저, 저희는 정말 몰랐습니다. 공주님께서 그런…….”
한참 만에 로사델이 입을 열었다.
이전과 비교하면 공손하기 이를 데 없어진 말투였다.
블랙은 쓸데없이 말을 받아 주거나 하진 않았다.
그가 페르모스에게 손짓을 했다.
“어떤 선물을 가져왔는지 열어 봐. 내가 왜 이것들을 참아 줘야 하는지.”
“네, 주군.”
또 다른 긴장과 걱정이 귀족들을 꽁꽁 묶었다.
이 추위에 기껏 선물을 가져왔더니 이런 취급이냐는 불평은 그새 말끔히 사라지고 없었다.
왜 더 좋은 걸, 더 많이 가져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뿐이었다.
“사이좋게 다섯 가문이 함께 준비해 왔다고 합니다.”
결코 작지 않은 궤짝 하나가 알현실로 들어섰다.
혼자서 궤짝을 들고 들어온 티와칸이 성의 없이 궤짝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텅!
궤짝에서 제법 무거운 소리가 났다. 그러나 하는 말은 전혀 달랐다.
“무게를 보니 깃털처럼 가벼운 게 뭐 쓸 만한 물건이 들어 있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그럼 열어 볼 것도 없겠군.”
쿵!
블랙이 한 발을 구르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돌려보내. 아직 정신들 못 차린 것 같으니까 마차 대신 걸어가게 해라. 발이 아니라 손으로. 한 번 겪고 나면 두 번 다시 이딴 걸 핑계로 성에 찾아올 만용을 부리지는 못하겠지.”
“너무 관대하신 것 아닙니까? 이자들이 또 무슨 짓을 꾸며댈 줄 알고요.”
엘라로이덴이 허겁지겁 양손을 내저었다.
“무슨 짓이라니……! 이제 세금도 꼬박꼬박 잘 내고 있는데 무슨 말을 그리 하시오! 맹세코 우리는 아르사크를 향한 충심에서 선물을 드리고자 온 것이외다!”
그 말을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충심이 고작 그 정도입니까?”
페르모스가 턱짓으로 궤짝을 가리키며 빈정거렸다.
“깃털처럼 가벼운 충심이겠군요.”
다시 말하지만 궤짝은 가볍지 않았고, 작지도 않았다.
다만 티와칸들이 다들 장신에 체격이 크다 보니 바닥에 덜렁 놓인 궤짝 하나가 몹시 초라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다.
“이, 이건…… 그, 그러니까 지금 가져온 것이고…… 더…… 마련하겠습니다.”
귀족 중 하나가 울 것 같은 얼굴로 웅얼댔다.
“그럼 지금 가져와.”
블랙이 칼질을 하듯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너희들이 또 여길 드나드는 꼴은 보여 주기 싫으니. 다섯 집안이니 선물도 다섯 개로 만들어.”
“이 무슨……. ……아, 알겠소이다.”
다섯 귀족들은 서명은 하게 해 준다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발이 아니라 손으로 걸어가게 만들라는 그 말뜻은 알고 싶지 않았다. 겪고 싶지도 않았다.
“나우크의 다섯 대의원들은 아르사크의 피와 나우크의 통치권을 이을 티와칸의 후예를 충심으로 환영하겠소이다.”
억지 인사를 마친 귀족들이 눈물을 삼키며 각자 집으로 편지를 보냈다.
금고에서 이러저러한 것들을 챙겨 오라는 내용이었다.
클라인펠터라는 구심점을 잃어버린 귀족들은 이제는 고분고분해졌다.
블랙이 직접 언급한 적은 없었지만, 귀족들은 은연중에 블랙의 진짜 이름을 눈치채고 있었다.
어쩌면 그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나우크에 물이 돌아왔다는 건 가이너스라는 이름도 돌아왔다는 뜻이었으니까.
귀족들은 새삼 제 목이 붙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며 선물을 바치고 성을 떠났다.
당분간 몸을 바싹 낮추고 살아야겠다는 다짐과 함께.
* * *
“이제 석류는 꼴도 보기 싫어졌어요.”
리에네가 한숨을 내쉬었다.
대의원들이 왔다는 얘기에 갑자기 시작된 입덧이 해가 다 지고 나서야 멎었다. 공교롭게도 다섯 귀족들이 겨우 집으로 돌아간 시간이었다.
그러니 입맛이 좀 돌아와서 리에네는 강낭콩 푸딩을 먹는 중이었다.
“아쉽네요. 걸을 만해지면 가서 싫은 소리를 해 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퍽!
푸딩을 담는 숟가락질이 험했다.
입덧이야 매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만큼은 리에네도 다섯 귀족들 탓이라고 믿었다. 돌아서면 구토가 나오는 지경이 아니었으면 정말로 쫓아가서 한마디 하려고 했다.
“다시 부르면 됩니다.”
블랙은 자신이 알아서 적당히 겁을 먹게 했다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리에네에게는 리에네가 누려야 할 즐거움이 있었으니까.
“그건 됐고요. 그 인간들을 대할 생각을 하면 속이 안 좋아져요.”
“그건 곤란합니다.”
블랙은 부드러운 동작으로 리에네가 쥔 디저트용 숟가락을 가져갔다.
그가 푸딩을 떠서 입에 넣어 주며 말했다.
“그래도 선물은 제법 성의를 담아 가져왔습니다. 보석실로 옮겨 놓았는데 보러 갈까요?”
“음……. 지금은 말고. 내일이요. 뭘 가져왔어요?”
“이것저것.”
“희한하네요. 금 정도나 가져올 줄 알았는데.”
“물론 금도 있습니다.”
리에네가 푸딩을 삼키며 싱긋 웃었다.
“녹여서 뭐라도 만들까요?”
“요람은 어떻습니까.”
“요람이요? 그건 너무 크잖아요.”
“모자라면 더 내놓으라고 하면 됩니다.”
미소가 커다란 웃음이 되었다.
리에네는 모르고 있었지만 그건 블랙에게서 옮아 온 습관이었다.
“와, 그건 진짜 너무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나를 폭군이라고 할지도 몰라요.”
“설마요. 그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생각이 났는데요,”
리에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웃음의 잔상이 남아 있는 얼굴은 뺨이 좀 여위었어도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금 요람은 아무래도 너무 사치스러운 것 같아요. 기념주화를 만드는 게 어때요? 아이 이름을 넣어서.”
“그거 좋군요.”
사실 블랙은 금 요람 정도야 사치라고 부를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별것도 아닌 일로 리에네와 다툴 마음은 없었다.
“넉넉히 만들어 두겠습니다. 그 전에 아이 이름을 지어야겠군요.”
“그러게요. 그런데 아들일지 딸일지 모르잖아요. 플램바드 부인은 딸일 것 같다고 하고, 헨튼 부인은 아들이 틀림없다고 했어요. 나는 전혀 모르겠고요.”
“낳기 전까진 모르는 게 당연한 일 같은데.”
“부인들은 배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대요. 그런데 둘이 말하는 게 전혀 달라서 듣다 보면 더 모르겠어요.”
둘 다 상대방 말에 전혀 수긍을 하지 않는 바람에 하마터면 찻잔을 집어 던지며 싸울 뻔했다. 요새 들어 두 사람더러 영혼의 단짝 같다고 하는 말은 취소해야 할지도 몰랐다.
“당신은 어느 쪽이 더 좋아요?”
“뭐든 상관없어요. 공주님이 건강하기만 하다면.”
“아기가 아니라 내가요?”
“둘 다. 하지만 하나를 골라야 한다고 하면 내게는 공주님입니다.”
“와. 무슨 이런 아빠가 다 있어. 내가 아기라면 엄청 서운하겠어요.”
“그래도 어쩔 수 없고.”
블랙이 어지간한 일에는 자신에게 맞춰 준다는 걸 리에네는 알고 있었다.
그는 평상시에는 물 같은 사람이었다. 이쪽으로 흘러와 달라고 하면 어렵지 않게 흘러와 주었다.
그러니까 그가 흘러오지 않는 일이 있으면, 그건 그만큼 양보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이 사람한테는 내가 늘 최우선이라는 거겠네.
리에네는 서운함은 아기 몫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그래도 아기 앞에서 저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앞이라서 했을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만.
“그럼 이름은 뭐라고 할까요? 같이 생각해 봐요.”
“두 개를 생각해 놔야겠군요.”
“맞아요. 아들 이름, 딸 이름.”
달이 뜨도록 고심한 이름 두 개는 하나도 버려지는 일이 없이 쓰일 예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