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외전 (4)
(138/145)
138. 외전 (4)
(138/145)
138. 외전 (4)
2022.07.27.
“아무리 봐도 따님인데.”
플램바드 부인은 수를 놓다 말고 빠드득 이를 갈았다.
리에네의 첫 아기는 딸이 아닐 수가 없었다.
입맛을 보면 딱 그랬으니까. 자신이 딸을 가졌을 때와 똑같았다. 신 과일을 자주 찾았고 비린 건 일절 먹지 못했다.
무엇보다 배 모양이 확실했다. 둥그스름하게,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솟은 배는 딸이라는 증거였다.
“그런데 그이는 대체 어디서 뭘 듣고 와서는 그렇게 우겨 대는지…… 쯧쯧.”
저렇게 확실한 걸, 헨튼 부인은 아니라고 우겨 댔다.
아들만 둘 낳아 본 자신이 모를 리 없다고 했다. 저 배 모양은 아무리 봐도 아들이며 입맛은 아기님의 성별과는 상관없이 그저 공주님 입맛이라고 했다.
“그게 아니라고!”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난 플램바드 부인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버럭 질렀다.
“공주님은 어릴 때부터 지금껏 음식 투정을 하신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걸핏하면 못 먹겠다 해대는 게 리에네의 입맛일 리 없었다.
그건 결단코 입덧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었다.
입덧은 아이를 가졌을 때 하는 것이므로, 결국 지금 음식 타령은 뱃속의 아기님이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따라서 딸이 확실했다.
생각이 거기로 가자 입가가 스르륵 풀어졌다.
“아이 참. 정말이지 얼마나 예쁘실까…….”
리에네의 아기라니.
정말 말도 못 할 정도로 예쁠 것이다.
설령 리에네가 천하의 박색을 만났어도 예쁠 아이였는데, 티와칸 공처럼 잘생긴 얼굴은 이제껏 나우크 안에서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러니 예쁘다는 말이 모자랄 정도로 예쁠 것이다.
“매일 매일 돌봐 드리는 게 얼마나 부듯할까. 벌써부터 다 마음이 이리 설레네.”
마음을 가라앉힌 플램바드 부인이 다시 수를 놓기 시작했다.
아기님이 쓸 턱받이였다. 질 좋은 푸른색 비단에 새빨간 석류가 수놓아졌다.
딸이 태어나면 이름은 셸란이 될 것이라 했다. 석류 옆에 셸란이라는 이름도 수놓을 예정이었다.
* * *
“그 양반은 뭘 안다고 그리 우겨 대는 게야.”
헨튼 부인도 마찬가지로 발을 쿵쿵 구르고 있었다.
이쪽 방에서도 수를 놓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다만 수를 놓는 사람은 헨튼 부인이 아니라 클리마였다.
아기님이 쓰실 턱받이라고 했더니 클리마는 자기가 하고 싶다며 자수를 배웠다.
처음에는 그 투박한 손가락으로 무슨 짓이냐 면박을 주었지만, 핏줄이 어디 가진 않는지 아들은 자수에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처음 한두 개를 망치긴 했어도 지금은 흠 잡을 데가 없었다.
헨튼 부인이 할 일이라고는 옆에서 실 색을 골라 주거나, 매듭을 깔끔히 짓도록 지켜보는 일밖에 없었다.
“어, 음……. 따님일 수도 있으니까…….”
클리마가 자수를 십 년쯤 놓아 온 사람처럼 이로 실을 자르려 들었다.
헨튼 부인이 당장 등짝을 때렸다.
“뭐 하는 짓이야! 아기님이 쓰실 물건에 입을 대다니!”
“엇……. 잘못했어요…….”
클리마가 후다닥 입을 뗐다.
“쯧. 계속 자수를 하려면 그 버릇은 고쳐. 아기님 쓰실 물건은 몇 배는 더 정성을 들여야 해.”
“네, 어머니.”
클리마가 착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헨튼 부인이 그 모습을 잠시 애잔하게 바라보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언제까지 품 안의 자식일 수는 없었다.
아들도 슬슬 성장을 해야 했다.
그런 의미에서 자수를 하고 싶다고 나선 건 퍽 좋은 일이었다.
사실 헨튼 부인은 아들이 꼭 기사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좋은 기사였지만, 좋은 부친은 아니었다. 좋은 남편도 아니었다.
클리마는 좋은 기사가 되기보다 좋은 가정을 꾸렸으면 싶었다.
“아기님이 어여쁘면 그런 생각도 좀 하게 되려나…….”
“네, 어머니?”
자수틀에 코를 박고 있던 아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계속해. 그 양반보다는 더 빨리 해 드려야지.”
클리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보니 새삼 화가 났다.
“저도 애를 셋씩이나 낳아 봤다면서 대체 그걸 왜 몰라. 아무리 봐도 아드님인 것을. 배 모양만 봐도 알아야지.”
변덕스럽게 변하는 입맛이나, 밤에는 아이가 자꾸 찬다며 번번이 잠에서 깨는 게 다 아들이라는 증거였다.
따님이라면 훨씬 더 얌전했을 것이다. 엄마 몸을 힘들게 할 일도 없었다.
아들이 확실했다.
“아유, 얼마나 훤칠하실까.”
태어날 왕자를 생각하며 헨튼 부인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의 끝은 조금 쓰긴 했다.
아무래도 죽은 둘째 아이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왕자님은 아프시지 말아야 할 텐데.”
헨튼 부인은 페르난드 왕자가 어릴 때 또래보다 작고 허약했던 것을 기억했다.
다행히 두 분 다 젊고 건강하실 때 아이를 가졌으니 태어날 아이는 부디 건강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런 비극은 다시는 없어야 하니까.
“자수는 네가 하니 어미는 신전에 다녀오면 되겠다.”
헨튼 부인이 말하자 클리마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었다.
“그런데 왜 가시게요?”
“태어날 왕자님을 위해 기도를 드리려고.”
“그럼 이걸 다 하고 같이 가세요. 기왕이면 아기님 물건에 축성을 받아오면 더 좋을 테니.”
“그럴까, 그럼?”
남편이었으면 저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시 아들은 좋은 부친이 될 싹이 보였다.
“너 혼자 하면 느릴 테니 같이 해야겠다. 이리 좀 줘 봐. 나눠서 하게.”
“네, 어머니.”
모자는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앉아 자수를 완성했다.
푸른 비단에 빨간색 석류가 수놓아진 턱받이에는 디에프라는, 미리 지어 놓은 왕자의 이름이 함께 수 놓였다.
* * *
“여기는 어쩐 일이라지요?”
“내가 할 소리네요.”
하필이면 신전 계단 입구에서 딱 마주쳤다.
플램바드 부인은 헨튼 부인과 그 아들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모자가 느닷없이 신전 방문이라니.
길이고 계단이 꽁꽁 얼어붙은 이 계절에.
이 계절에는 어지간히 신실하지 않고서야 신전에 드나드는 사람이 없었다. 신관들도 큰일이 있지 않고서야 아래로 내려오는 일이 드물었다.
그런데 굳이 왔단 말이지.
추우면 나처럼 무릎이고 허리고 저려 온다는 양반이.
그렇다면 이유는 딱 하나였다.
아기님을 위해 축성을 받으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럼 볼일 보세요. 나는 올라가겠으니.”
헨튼 부인도 눈치 빠르게 플램바드 부인의 용건을 알아챘다.
하는 일도, 생각도 비슷한 사람들이었으니 당연했다.
“좀 천천히 가요. 무릎도 시원찮으면서. 너 먼저 가렴.”
헨튼 부인이 축성용 천으로 꽁꽁 싸맨 무언가를 클리마에게 건넸다.
클리마가 착한 얼굴로 눈을 끔벅거렸다.
“같이 가시는 게 나을 텐데……. 혼자 가다 혹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도울 사람이 있어야 하고…….”
“이 눈치도 없는 것아.”
헨튼 부인이 클리마의 등짝을 후려쳤다.
클리마가 인상을 쓰며 아프다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어서 올라가지 않고 뭐 해! 이 양반은 알아서 올라가겠지!”
모자가 실랑이하는 사이 플램바드 부인은 치맛자락을 걷어 올리고 계단을 밟았다.
“그럼 계속 혼내세요. 나는 갑니다.”
“그 나이에 무슨 성격이 그리 급하답니까? 우리도 어서 가자.”
행여나 뒤처질세라 헨튼 부인도 허둥지둥 플램바드 부인의 뒤를 쫓아갔다.
그리고 사고가 생겼다.
* * *
“끄으응…….”
뭐, 예견된 사고였다.
꽁꽁 언 계단을 구두 신은 발로 서둘러 올라가다 보니 누가 미끄러졌고, 깜짝 놀라 서로 옷자락을 붙들다가 호되게 같이 넘어졌다.
그나마 계단을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넘어진 게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덕분에 클리마는 두 부인을 양팔에 부축해 돌아오느라 때 아닌 고생을 했다.
플램바드 부인은 무릎 옆에 커다랗게 멍이 들었고, 헨튼 부인은 팔꿈치가 그렇게 되었다.
뼈가 부러지지 않아 참 다행이었다. 그게 다 클리마가 제 한 몸을 바쳐 두 부인을 지켜 낸 탓이었다.
클리마는 뒤통수에 혹이 생겼고, 등짝 전체에 멍이 들었다.
어찌어찌 성까지 돌아온 뒤 클리마는 그대로 앓아누웠다.
“끄응…… 어, 어…… 공주님?”
한창 앓는 소리를 내던 클리마가 방으로 들어서는 리에네를 보고 후다닥 몸을 일으켰다.
그런 걸 보면 앓는 것도 엄살이었다. 모친이 곁에 있으니 저도 모르게 엄살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니,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습니까. 몸이 많이 무거우신데.”
헨튼 부인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다들 그냥 있어요. 다친 사람들이 왜 일어나고 그래요. 다쳤다니까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리에네는 혼자 온 게 아니었다.
등 뒤에 쭈뼛대며 서 있는 플램바드 부인도 있었다.
목발 삼아 지팡이를 짚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다.
“대충 얘기는 들었어요. 뼈는 다친 데가 없고 타박상이 심한 거라 하루 이틀이면 낫는다고요. 그래도 누워 있는 걸 보니 많이 아픈가 봐요.”
클리마가 다시 기를 쓰고 일어났다.
“괘, 괜찮습니다! 안, 아프…… 끄응.”
“괜찮긴 뭐가 괜찮아요.”
리에네가 클리마에게 다가갔다.
“여기 앉으세요, 공주님.”
헨튼 부인이 자신이 앉던 의자를 끌어왔다. 팔이 아파 인상을 쓰며 한 손만 썼다.
플램바드 부인이 차마 그 꼴은 못 보겠던지 지팡이를 짚고 다가와 거들려고 했다.
리에네가 두 사람을 보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의자에는 플램바드 부인이 앉는 게 좋겠어요. 다리가 불편하잖아요, 지금.”
“…….”
“아니, 저는 괜찮…….”
어색해하는 플램바드 부인의 손에서 헨튼 부인이 지팡이를 빼앗아 들었다.
“앉아요. 그 다리로 뭘 어쩌겠다고.”
“엇.”
지팡이를 빼앗긴 플램바드 부인이 별 도리 없이 의자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리에네는 클리마의 발을 옆으로 밀고 침대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두들겼다.
“렌펠 부인은 여기 앉으세요.”
“아니요. 저는 다리는 멀쩡합니다.”
“부인도 환자예요. 앉으세요.”
“팔을 좀 못 쓰는 게 무슨 큰일이라고요.”
“어서요.”
리에네가 고집하자 헨튼 부인도 마지못해 침대 끝에 걸터앉았다.
두 부인이 어색하게 시선을 피했고, 클리마는 얼굴을 벌겋게 달군 채 어쩔 줄을 몰랐다.
“저, 정말 괜찮은…… 빨리 나을…….”
“빨리 안 나아도 돼요. 대신 푹 쉬고 잘 낫도록 해요. 부인들도요.”
클리마가 고개를 끄덕이고, 부인들은 시선을 내리깐 채 답을 피했다.
나 참. 다들 수줍어하기는.
플램바드 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따라온 데는 이유가 있었다. 클리마에게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헨튼 부인이 지팡이를 빼앗아 의자에 앉게 만든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 몸을 하고 보러 와 줘서 고맙고, 괜히 몸 고생시키지 말라는 말을 하고 싶었을 게 뻔했다.
리에네가 피식 웃었다.
“기왕 다들 한 방에 모였는데 차라도 마셔요. 나는 지금 음…… 구운 배가 먹고 싶은데. 다들 생각 없어요?”
“그럼 드셔야지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다.
그걸 헨튼 부인이 재빨리 말렸다.
“아서요. 그 다리로 어딜 간다고. 내가 가요.”
“아니, 그 팔로 뭘 한다고요. 놔둬요. 내가 갈 테니.”
“지팡이를 짚는 그쪽이나 나나.”
“지팡이는 꼭 안 짚어도 되거든.”
“괜한 허세 부리지 말고. 그 나이에 무릎 관리 잘못하면 평생 지팡이 신세야.”
“아니, 나만 이 나이야? 같이 늙은 처지에 무슨.”
“내가 한 살 더 어리지 않겠어요?”
“한 살 차이가 무슨 대수라고!”
이러다 또 싸우게 생겼다.
리에네가 사람을 부를 때 쓰는 종이 매달린 줄을 잡아당겼다.
“그냥 사람을 불러요. 요새 일꾼도 많이 늘었잖아요.”
종은 부인들의 방에도 있었고, 리에네의 침실에도 있었다. 단지 나우크 성의 사람들은 자기 일을 자기가 하는 습관이 밴 탓에 종을 쳐서 사람을 부르는 일이 거의 없을 뿐이었다.
종이 땡땡 울리고, 잠시 후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찾았습니까?”
성 안의 일꾼이 아니라, 블랙이었다.
한창 언성을 높이던 두 부인은 꿀을 한 입씩 먹은 얼굴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