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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외전 (5) (139/145)


139. 외전 (5)
2022.07.31.



 
블랙이 나타났다는 것은 그가 이제 막 볼일을 마치고 성에 돌아왔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리에네를 찾았다는 뜻이고, 남에게 별로 양보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아, 벌써 돌아왔어요?”

“보고 싶어서.”

블랙이 웃는 얼굴로 들어와 리에네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리에네는 그를 보고 표정이 한껏 부드러워졌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다들 당황해 몸이 굳었다.

아이를 가진 리에네를 앞에 두고 언성을 높이며 싸웠다는 게 좋게 보일 리 없었다.


“왜 여기 있었습니까? 안 보여서 놀랐습니다.”

“오늘 사고가 있었거든요. 다들 다친 게 보이죠?”

“저런.”

블랙이 다쳤다는 사람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큰 부상이 아니라는 걸 한눈에 알아본 그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틀이면 낫겠습니다. 그 와중에 다행이군요.”

“와. 어떻게 그렇게 딱 아는 거죠. 의사도 그렇게 말했어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까 이만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리에네가 웃으면서 고개를 저었다.


“다 같이 차를 마시기로 해서요. 저는 구운 배가 먹고 싶어요. 계피가루를 뿌려서요.”

“그래서 종을 친 겁니까?”

“그렇죠. 다들 환자고, 나는 빨리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

블랙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가져다주겠습니다. 대신 나도 껴 줘요.”

클리마를 시작해서 부인들의 안색이 미묘하게 창백해졌다.


“아니, 그러실 게 아니라……. 제, 제가 가져오면 되는데…….”

“저도 거들겠습니다.”

“저도…….”

물론 환자들의 말은 소용이 없었다.


“차와 구운 배. 그리고 또?”

“음……. 당신이 먹고 싶은 걸로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요.”

블랙이 헨튼 부인의 방을 떠났다.

잠시 뒤에 헨튼 부인의 침실에 다과상이 차려졌다.

* * *

다과상인데 여유롭거나 우아하진 못했다.

클리마가 다쳤다는 말에 티와칸들이 너도나도 얼굴을 들이민 탓이었다.


“뭐? 여자 둘을 못 받아 들어서 넘어졌어? 이 자식, 안 되겠는데. 더 굴려야겠어.”

“훈련이 덜 돼서 그래. 그렇게 비실비실해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그러냐.”

말은 그런 식이었지만 다들 뭔가를 한 아름 안고 왔다.

나름의 병문안 선물이었는데, 유감스럽게도 술이 가장 많았다.

냄새에 예민한 리에네 때문에 환자가 술병을 뜯는 일은 없었다.

리에네는 따듯하고 달콤한 배를 사각사각 베어 물며 내내 웃었다.


“이 방이 이렇게 좁은 줄 처음 알았어요. 겨울인데도 후끈한 것 같아요.”

“그래서 좋다는 말 같습니다.”

“그럼요. 다들 즐거워 보이잖아요.”

리에네가 배 한 조각을 블랙의 입에 넣어 주었다.

겨울 배를 구우면 더 달아졌다. 블랙이 별말 없이 배를 받아먹었다.


“다른 음식 냄새가 거슬리진 않습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배가 맛있어요.”

사람이 많아지니 자연히 음식도 늘어났다.

어쩌다 보니 다과가 아니라 작은 연회처럼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난감해하던 환자들도 이제는 그냥 자연스럽게 음식을 나눠 먹었다.

누가 눈치 없이 술병을 뜯자고 했다가 두 부인들이 매섭게 노려보자 도로 주저앉았던 일을 제외하고는, 내내 유쾌했다.


“아니……! 이 자식들! 이런 일이 있는데 나를 안 불렀어?”

뒤늦게 페르모스가 도착했다.

페르모스는 왕실 집무실에서 각종 공문에 파묻혀 있느라 소식을 뒤늦게 들었다.

그가 왔을 때쯤에는 이미 병문안이라는 목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다들 훈훈한 방 안에 앉아 이 얘기 저 얘기 떠들며 음식을 나눠 먹는 작은 연회 같은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클리마는 끙끙 앓던 게 언제냐 싶게 침대에서 일어나 부지런히 음식을 날랐다.

덕분에 침대는 다른 사람들의 차지가 되었다.

리에네와 블랙이 가운데 앉고, 양 옆으로 부인들이 앉았다.


“아, 부관도 성에 계셨습니까?”

“그럼 없었겠냐! 좀 찾아보지 않고서!”

페르모스가 안경을 달칵대며 벽난로 앞에 다들 모여앉은 자리를 비집고 들어갔다.


“너 먹는 그거 뭐야? 좀 줘 봐.”

“왜 남 먹는 걸 노리십니까. 다른 거 드십시오.”

“뱃속에 들어간 거 뱉게 만들기 전에 내놔라.”

“……드세요.”

리에네가 배를 다 먹고는 블랙의 소맷자락을 쿡쿡 잡아당겼다.


“페르모스 경이 빼앗아 먹은 게 뭐예요? 나도 먹고 싶어요.”

“……아, 저건 못 먹을 겁니다.”

“왜요?”

“닭 염통을 구운 건데 마늘을 많이 넣어요. 냄새가 강할 겁니다.”

“그래도 맛있어 보여요.”

“그럼 먹어 봐요. 못 먹겠으면 말고.”

마침 염통구이는 페르모스가 빼앗아 먹은 게 마지막이었다.


“아이고, 그럼 드셔야지요. 제가 얼른 부엌에 다녀오겠습니다.”

플램바드 부인이 습관처럼 일어섰다.

그러나 반가운 마음과는 달리 아직은 지팡이를 짚고 걸어야 하는 상태였다.

하필 지팡이가 헨튼 부인이 앉은 쪽에 놓여 있었다.

헨튼 부인은 지팡이를 건네주는 대신 킁, 코웃음을 쳤다.


“갈 사람은 따로 있겠네요.”

헨튼 부인이 왼손으로 쥐고 있던 포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리에네나 블랙이 보기에는 두 사람 다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 다 앉아 있어요. 어딜 가려고요.”

블랙이 손가락을 부딪쳐 소리를 만들었다. 근처에 있던 티와칸들이 제꺽 시선을 보내왔다.


“부엌에 다녀와. 음식이 모자라다.”

“네, 주군.”

동작들이 시원했다.

괜히 민망해진 플램바드 부인이 리에네의 등 뒤로 눈을 흘겼다.

그 지팡이 좀 옆에 있는데 냉큼 집어 주지 그랬냐. 우리 공주님이 드시고 싶다는데 당연히 내가 살뜰히 다녀오는 게 맞지 않느냐.

대충 이런 의미였다.

그걸 헨튼 부인이 놓치지 않고 보았다. 헨튼 부인이 눈을 가늘게 뜨고 코웃음을 쳤다.

하이고, 그 다리로 잘도 다녀왔겠네, 하는 얼굴이었다.


“……내가 진짜.”

플램바드 부인이 빠드득 이를 갈았다.


“부인? 왜 그러세요?”

리에네가 깜짝 놀라 플램바드 부인의 어깨를 붙들었다.


“누구 때문에 다쳐서 이 꼴이 됐는데.”

“그게 지금 내 탓이라는 겝니까?”

헨튼 부인도 가만있지 않았다.


“아니, 거기서 사람을 잡아당기면 넘어지는 게 당연하지.”

“잡아당기긴 누가 먼저 잡아당겼는데.”

“무슨 소리예요, 그게? 그럼 내가 잡아당겼다는 말입니까?”

“내 알기론 그렇네요.”

“아니, 내가 언제……!”

목소리가 막 높아지려고 할 그 시점에서 블랙이 적절히 말싸움을 끊었다.


“그만. 아이가 듣는다.”

리에네도 한마디 할 때가 됐다.


“두 사람 그만 화해하는 게 어때요?”

플램바드 부인이 민망한 듯 고개를 홱 돌렸다.


“화해라니요. 그건 상대도 같은 마음일 때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까.”

“같은 마음이잖아요.”

“그럴 리가요! 방금 전까지 뭐라 하는지 보셨잖습니까?”

헨튼 부인이 자신이 뭘 어쨌냐는 식으로 눈을 부릅떴다.


“네. 부인이 자꾸 지팡이를 짚고 걸으니까 걱정하던 걸요. 그렇지 않아요, 렌펠 부인?”

“그…… 크흠.”

헨튼 부인은 대답 대신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그건 부인도 마찬가지잖아요. 그게 아니라면 왜 지팡이를 짚고 여기를 왔는데요? 내가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억지를 부려서 따라왔으면서.”

“그게 꼭……. 그야 공주님이 어딜 가시는데 마땅히 제가 따라야지요.”

“그렇게 말해도 아무도 안 속아요, 부인. 어쨌거나 서로 같은 마음인데 화해를 하지 않을 이유가 없잖아요.”

헛기침을 멈춘 헨튼 부인이 작게 말했다.


“아무래도 아기님이 태어나시기 전까지는 어림없을 겝니다.”

시비의 시작은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생각이 너무 확고하다는 데 있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아기님이 공주님인 걸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마음을 돌려먹을 사람이 아니지요.”

“그건 내가 할 말이고요.”

싸우는 와중에도 두 사람은 똑같았다.

리에네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아들이든 딸이든 그게 왜 두 사람이 싸울 이유가 된다는 거죠? 아직 몰라서 그렇지 성별은 벌써 정해졌다고요. 싸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누가 옳은지가 중요한 겁니다, 공주님.”

“맞습니다. 제가 명색이 아르사크 가의 유모인데, 태어나실 아기님 성별을 모르다니요.”

“그건 누구도 모르는 거죠.”

“그러니까 그걸 모를 수가 없단 말입니다. 유모니까요.”

헨튼 부인이 거들고 나섰다.


“그렇습니다, 공주님. 모를 수가 없지요.”

……그래. 이렇게 똑같으니까 싸우는 거였어.


“그래서 다시 한번 더 말씀드리지만, 아기님은 공주님이실 겁니다.”

“왕자님이십니다.”

“아니, 진짜. 그게 아니래도.”

“그러니까 기다려 봅시다. 누가 맞는지.”

누구 때문에 다쳤는지, 그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사실 그걸로는 싸울 마음도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건 누가 맞느냐였다.


“그럼 정말로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렇게 지낼 거예요?”

두 부인들은 각자 자존심을 걸고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페르모스가 나서지 않았다면.


“그거라면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르모스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다가왔다. 리에네가 저도 모르게 코를 킁킁거렸다.

입덧이 언제 있었냐 싶게 음식 냄새가 아주 맛있게 느껴졌다.


“두 분 다 맞으실 겁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죠?”

“아들 하나 딸 하나. 둘을 낳으실 테니까요.”

“아?”

리에네가 당황해 배를 쓸었다.


“쌍둥이라고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죠?”

“입덧하시는 걸 보고서요. 워낙 극적이지 않습니까. 마치 두 명이서 기를 쓰고 싸우는 것처럼 말이지요.”

“으음…….”

리에네는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이가 둘이라고 하는 말은 아이를 가졌다고 하는 것과 또 다른 얘기였다.


“아니, 그런……. 쌍둥이는 어지간해서는 없는 일인데.”

“그러게 말입니다. 게다가 그런 걸 입덧만으로 안답니까. 입덧이야 변덕스러운 게 맞는데.”

두 부인은 페르모스의 말을 믿지 않는 기색이었다.

페르모스가 결국 제 말이 맞을 거라는 식으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아기님이 태어나면 알겠지요.”

“그래요. 어디 두고 봅시다.”

“암요. 쌍둥이가 어디 그리 흔하겠냐고.”

“제 말이 맞습니다.”

페르모스도 자기가 틀렸다는 건 죽기보다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어쩌다 보니 이제 아들이냐 딸이냐가 아니라 하나인지 둘인지 하는 문제가 되었다.
 

 


“나 참. 아이를 빨리 낳는 수밖에 없겠네요.”

다행인 건 페르모스가 공동의 적이 되는 바람에 두 부인의 사이가 금방 회복될 것 같다는 점이었다.

리에네가 작게 중얼거리자 블랙이 정색을 했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아이는 제때 태어날 겁니다. 행여나 그런 생각은 말아요.”

그냥 하는 말도 양보하지 못하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리에네가 블랙에게 머리를 기대며 물었다.


“아이가 둘이면 어떨 것 같아요?”

“……어떨지 눈앞에서 보이는 것 같은데. 지금.”

웃음소리가 새어나갔다.


“하하……. 하지만 다퉈도 사이가 나빠 보이진 않잖아요.”

“하나가 좋을 것 같습니다. 둘이면 공주님이 그만큼 더 고생을 해야 한다는 말이니까.”

“나는 둘이 더 좋을 것 같아요. 하나도 예쁠 텐데, 둘이라면 두 배로 예쁘겠죠.”

블랙이 잠깐 한숨을 쉬었다.


“공주님 몸을 먼저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 와선 어쩔 수 없는걸요. 아이는 벌써 생겼는데.”

“……. 너무 큰 말썽은 부리지 않길 바라야겠군요.”

블랙이 둥글게 부푼 배에 고개를 가까이 가져갔다. 입술이 작게 무슨 말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을 했어요?”

“몹시 엄한 부친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니 얌전히 굴라고.”

“당신이 잘도 그러겠어요.”

리에네가 싱겁게 웃었다.

평소 자신에게 무른 블랙을 보면 아이들에게도 절대 엄한 아빠가 될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두고 봐요. 내가 어디까지 엄하게 굴 수 있는지.”

“못 그런다니까요.”

결론은 하나였다.

일단 아이가, 혹은 아이들이 태어나야 답을 알 수 있었다.

해가 바뀌고 따듯하다 못해 푸근해진 어느 좋은 계절에 리에네는 산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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