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외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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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외전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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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외전 (6)
2022.08.03.
겨울인데도 해가 따스한 날이었다.
올해 겨울은 별로 춥지 않았다. 정원의 분수가 얼지 않고 맑은 물을 졸졸 흘렸다.
분수를 앞에 두고 서 있는 웅장한 회색 석조 건물은 오늘도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곳은 사 년 전 세워진 왕립 도서관이었다.
대륙 남단에서는 보유한 장서의 양이 최대라고 알려진 곳이었다. 게다가 깐깐하게 신분을 따져 출입을 제한하는 다른 곳과는 달리, 이곳은 모두가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나우크에는 요새 타지인들이 늘었다.
왕립 도서관의 장서들을 구경삼아 온 학자들이 아예 둥지를 틀고 주저앉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나라 전체가 북적북적, 들썩대는 분위기였다.
그건 도서관도 마찬가지였다.
도서관이라면 쥐죽은 듯 조용해야 할 것 같은데, 나우크의 왕립 도서관은 아주 자유로웠다. 바닥에 분필로 뭔가를 쓰며 중얼대는 사람도 있었고, 책상에 올라가 큰 소리로 암송을 하는 이도 있었다.
어떤 학설이 맞느냐며 토론하는 이들도 있었고, 그러다 왕왕 큰 싸움으로 번지기도 했다.
“셸란!”
그 소란에 누군가의 앳된 목소리가 더해졌다.
“셸란! 어디 있어? 여기 있는 거 맞지?”
누군가는 여덟아홉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였다.
실제 나이는 일곱 살이었지만 또래보다 키가 커서 더 큰 느낌이었다.
“셸란!”
남자아이가 책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는 책장들 사이로 종종 뛰어간 다음, 이어서 한 무리의 기사단이 도서관에 들어섰다.
“너는 저쪽, 너는 저쪽, 너하고 너는 저 뒤에서부터.”
방향을 지시하자 기사단이 신속하게 도서관 내부로 흩어졌다.
아이는 그렇다 치고, 기사단이 들어섰으면 한 번씩은 쳐다볼 법도 한데 다들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할 일만 했다.
기사단이 들어서는 일이 종종 있었다는 뜻이었다.
“셸란!”
남자아이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계속 크게 이름을 불렀다.
“아…… 찾았다!”
마침내 남자아이는 책장 맨 아래 구석진 자리에 책을 꺼내서 그 안에 쏙 들어가 있는 셸란을 발견했다.
셸란은 커다란 가죽 장정 책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해 나름 안락한 공간을 유지하고 있었다.
“셸란. 어서 나와.”
숨어 있는 걸 들켰어도 셸란은 평온한 얼굴이었다.
“좀 기다려. 이것만 다 읽고.”
남자아이가 손가락을 들어 남은 페이지를 가늠했다.
“아직 이렇게나 남았는데? 그 전에 랜달 경이 잡으러 올 걸?”
“디에프가 시간을 끌어 주면 가능해.”
“내가?”
디에프라고 불린 남자아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눈을 둥글게 떴다.
“여기 말고 반대쪽에서 돌아다니면 랜달 경은 그쪽을 먼저 살필 거야.”
“……그건 거짓말이잖아.”
“아무 말 안 하면 되지.”
“그래도.”
셸란이 일곱 살답지 않은 한숨을 탁 내뱉으며 쌍둥이 오빠 디에프를 쳐다보았다.
오빠라고는 해도 나이는 고작 이 분이 더 많은 정도였다.
셸란은 이 분이라는 시간이 한 인간의 인생을 두고 볼 때 누군가의 손윗사람이 될 만큼 의미 있는 숫자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대체 누굴 닮아서 저러는 걸까.”
디에프가 따듯한 초록색 눈을 잔뜩 구부리며 웃었다.
“나는 어마마마를 닮았지.”
그건 확실했다.
굵게 말려 있는 매끄러운 금발과 초록 눈은 몰라볼 수도 없었다. 동그란 코끝과 부드러운 인상도 닮았다.
그래서 셸란은 쌍둥이 오빠에게 상처가 될 만한 말은 하지 않았다.
셸란이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어마마마였고, 디에프를 울리면 왠지 어마마마가 우는 것 같아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그럼 목소리라도 낮춰. 이걸 다 볼 동안만.”
“그건 할 수 있어.”
그리고 디에프는, 이 분 늦게 태어난 동생이 하는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자신이 오빠인 탓에 뭐든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쪽이었다.
“여기에 책 더 쌓아 줄까? 셸란이 잘 가려지게.”
“됐어, 그건. 어차피 디에프를 보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도 다 알 거야.”
“안 보여도?”
“……안 보여도.”
이상하단 말이야.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다들 똑똑한데. 디에프는 정말 누굴 닮은 거지.
셸란이 고개를 흔들자 목덜미에서 단정하게 자른 까만 머리가 찰랑거렸다.
책을 읽을 때 머리카락이 닿는 게 싫어 셸란은 짧은 머리를 선호했다.
머리를 감거나 말리는 일도 머리가 짧은 게 더 유리했다. 셸란이 긴 머리를 좋아하는 경우는 어마마마밖에 없었다.
그 머리는 긴 게 더 보기 좋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옅은 푸른 눈은 표정까지 부친과 똑같았다.
셸란이 다시 책에 집중했다.
디에프는 가만히 앉아 말을 붙이거나 하지 않았다.
셸란은 그게 일곱 살짜리치고 퍽 기특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말로는 디에프가 똑똑하지 않다고 하지만, 사실 다른 일곱 살짜리와 비교하면 디에프는 꽤 괜찮은 편이었다.
언젠가 나우크에 놀러 왔던 알리토 공국의 아이들은 그야말로 재난 같았다. 도무지 대화를 이어 갈 자신이 없었다.
남은 페이지가 반으로 줄어들 무렵이었다.
“셸란 공주님! 여기 계셨습니까!”
랜달이 나타났다.
“아니, 왕자님도요! 먼저 발견을 하셨으면 말씀을 해 주시지 않고요!”
“어……. 그게…….”
디에프가 변명할 말을 찾지 못해 눈을 도르륵 굴리는 동안 셸란이 책을 살짝 들어 보였다.
“이것만 읽으면 돼요.”
“하아……. 죄송하지만 그건 제 선에서 봐드릴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셸란이 작은 복숭아 같은 입술을 실룩이며 몸집에 비해 한참 커다란 책을 내려놓았다.
셸란이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건 그래 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아는 탓이었다.
랜달이 기사단을 끌고 왔다는 건 저를 찾는 사람이 아바마마라는 뜻이었으니까.
아바마마는 다 좋았지만 책을 보는 일에는 엄격했다.
책 읽는 시간을 제한하고 읽을 수 있는 책도 줄였다. 어떤 책들은 아예 손을 대지 못하게 했다.
셸란은 그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왜.
책을 보는 게 뭐가 어때서.
셸란이 가장 재미있어하는 건 모르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그걸 가장 손쉽게 하는 방법이 책을 읽는 것이었는데, 아바마마를 비롯한 어른들은 그게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일인 것처럼 굴었다.
그건 아무래도 이상했다. 세상의 상식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나한테만 그러신단 말이야. 디에프에게는 그러지 않는 걸 보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거야.
일곱 살치고 걱정이 될 만큼 똑똑한 셸란은 그런 것마저 짐작했다.
어떻게든 이유를 알아내야겠어.
그래야 앞으로 내 인생이 편해질 테니까.
“디에프. 도와줘. 내가 어질러 놓은 건 치우고 가야 하니까.”
“응, 좋아. 도와줄게.”
디에프가 기특하게도 책 정리를 도왔다.
“두 분 가만히 계십시오. 제가 후딱 하겠습니다.”
물론 도서관의 책들은 일곱 살짜리 아이들에게는 너무 크고 무거운 관계로, 대부분의 정리는 랜달이 도맡아 했다.
그래도 디에프가 세상에서 가장 쓸모 있는 일곱 살이라는 셸란의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쌍둥이 오빠가 디에프라서 다행이었다. 알리토 대공가의 그 아이들 같았으면 자신은 차라리 형제가 없길 바랐을 것이다.
* * *
“셸란.”
셸란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이제 시작이었다.
아바마마의 엄한 모습이.
“약속했지.”
“…….”
“도서관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가는 걸로. 그리고 네가 읽을 책은 미리 제목을 알려 주기로 했고.”
“……네.”
“이렇게 번번이 약속을 어기면 곤란해.”
“…….”
아바마마가 얼굴에서 표정을 지우면 괜히 주변의 온도가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셸란은 부친이 불편했다.
부친이 진심으로 웃을 때는 어마마마를 대할 때밖에 없었다.
사실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면서 셸란은 괜히 부친만 어려운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런 걸 보면 겉모습이 판에 박은 듯 닮은 두 부녀는 성격도 비슷했다.
“다음부터는 약속을 지킬게요.”
“아니. 이미 두 번을 어겼잖아. 세 번째에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셸란이 발끝을 보고 있던 고개를 와락 들어 올리며 물었다.
“그럼 어떻게 하실 건데요?”
블랙이 턱을 쓸었다.
셸란은 믿지 않겠지만 벌을 내리는 것은 그로서도 어려운 일이었다.
“한 달간 도서관 출입 금지.”
셸란이 턱이 아프도록 입을 벌렸다.
“세상에……. 그건 너무해요!”
“약속을 안 지킨 건 너야, 셸란.”
“…….”
옅은 푸른색 눈이 다채롭게 움직였다.
기가 막힐 정도로 블랙을 닮은 얼굴은 예쁘다는 말이 부족했다. 셸란은 작은 볼을 실룩대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지금 표정만큼은 일곱 살답게 보였다. 사실 셸란이 아이 같아지는 유일한 순간은 블랙에게서 야단을 맞을 때였다.
“그 한 달 동안 저는 바보가 될지도 몰라요. 나우크는 장차 바보를 왕으로 맞이하겠죠. 그건 이 땅의 모두에게 손해예요.”
“바보가 아니라 평범한 일곱 살이 되겠지.”
“두 개는 똑같은 말이에요.”
“천만에.”
블랙이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리에네 외에는 아무도 몰랐지만, 블랙은 아이들에게 꽤나 무른 편이었다.
그가 엄격함을 고집하는 건 셸란이 지나치게 책을 읽는 일밖에 없었다.
그건 가이너스 왕가의 유전병을 고려할 때 늘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똑똑하고 예쁜 딸아이가 사랑스러운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마음껏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그건 블랙에게도 늘 마음 아픈 일이었다.
“한 달 동안 일곱 살답게 노는 법을 배우도록. 디에프가 잘 가르쳐 줄 거야.”
셸란이 입술을 내내 삐죽거리며 말했다.
“세상에 자식이 멍청해지길 바라는 부모는 아바마마밖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 셸란. 나는 네가 평범하고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그게 그거라고요.”
“이미 했던 말이다. 그리고 나는 네 고집에 동의할 생각이 없어. 이제 나가 봐도 좋아.”
“…….”
셸란이 분하다는 듯 발을 쿵 구르며 억지로 인사를 한 뒤 몸을 돌렸다.
“아, 한 가지 더.”
“……?”
“몰래 도서관에 갈 때 렌펠을 이용하는 건 그만둬. 렌펠은 할 일이 따로 있다.”
셸란이 아무도 모르게 성을 빠져나와 도서관을 가는 걸 돕는 사람이 클리마였다.
그것까지 알고 있었다니, 앞으로는 도서관에 몰래 갈 수도 없다는 뜻이었다.
“…….”
셸란은 두 볼을 퉁 부풀리며 있다가 문을 두드렸다. 아무리 호소하는 얼굴로 쳐다봤자 부친은 마음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밖에 있던 랜달이 문을 열어 주었다.
“많이 혼나셨습니까?”
랜달이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셸란의 눈치를 살폈다.
한바탕 혼이 났을 테니 기분이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을 것이다.
“……어마마마는 어디 계세요?”
셸란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리에네를 찾았다.
앞으로 한 달이 몹시 끔찍하게 여겨졌다. 울적할 땐 역시 어마마마의 곁에서 어리광을 부리는 시간이 필요했다.
“지금은 후원에 계실 겁니다.”
랜달이 저보다 한참 작은 공주님을 향해 무릎을 굽혔다.
이리 보고 저리 보아도 블랙과 닮은 조그마한 얼굴이 시무룩해하는 게 어찌나 귀여운지 자꾸 웃음이 터지려고 해서 곤란했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