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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 외전 (7)
2022.08.07.



“어마마마!”

리에네는 후원에 있었다.

후원은 나우크 성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되었다.

한때 퍼석하게 말라 거미줄만 늘어 가던 분수는 다시 물을 뿜었고, 계절을 잊은 나무와 꽃들이 정원을 가득 채웠다.

지금은 겨울이라 다른 계절처럼 다채롭진 않았지만 이즈음에도 고즈넉한 멋이 있었다.

리에네는 후원의 구석진 곳에 서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한 셸란이 리에네를 향해 뛰어갔다.


“앗! 땅이 얼어 있습니다, 공주님!”

랜달이 소리쳤지만 셸란은 다람쥐처럼 잘도 뛰어갔다.


“어마마마!”

냅다 달려간 셸란이 리에네의 다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셸란.”

리에네는 셸란이 제 치맛자락에 이마를 한참 비벼대는 걸 바라보다 등을 도닥였다.

오늘 멋대로 도서관에 있다 끌려온 셸란에게 무슨 일이 있을지는 뻔했다.

마음이 몹시 안 좋을 것이다.

혼이 난 셸란도, 혼을 낸 블랙도.


“도서관은 잘 다녀왔니?”

“……아니요.”

대답이 시무룩했다.


“마지막 한 단을 읽지 못했어요. 이제 한 달 후에나 읽을 수 있어요. 아바마마께서 한 달 동안 도서관 출입을 금하셨어요.”

“저런. 그건 속상하겠네.”

셸란이 코를 훌쩍이다 물었다.


“한 달은 너무 길지 않아요?”

리에네가 고개를 돌리고 잠깐 소리 없이 웃었다.

가끔 다시 태어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딸이 일곱 살처럼 굴 때가 있었는데, 지금이 그랬다. 대부분 블랙에게서 혼이 난 다음이었다.


“글쎄……. 길든 짧든 약속을 어긴 건 셸란 너였으니까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

셸란은 달라질 게 없다는 걸 깨닫자 입을 다물었다.

모친과 부친은 완벽한 한쌍이었다. 그들의 관계는 너무 견고해서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다.

둘도 가끔 다투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부친이 한 달이라고 했으면 모친도 한 달이었다.

자신은 꼼짝없이 한 달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자 더 서러워졌다.

셸란이 리에네의 다리를 더 힘주어 안았다.


“어마마마는 여기서 뭘 하고 계셨어요?”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기분을 꾹 참고 말을 돌렸다.

그 마음을 알아챘는지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이 더 다정해졌다.


“디에프가 토끼굴에 지붕을 만들어 주는 걸 보면서 셸란을 기다리고 있었어.”

“……디에프가 할 것 같은 일이네요.”

“며칠 안으로 눈보라가 시작될 거야. 매년 눈보라가 치는데 올해는 날이 따듯해서 늦어지는 것 같아. 토끼굴이 눈에 파묻히면 안 되잖아.”

“……눈은 알아서 녹겠지만요.”

말은 그렇게 해도 리에네는 셸란이 아주 착한 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한 말은 눈은 알아서 녹겠지만 그래도 지붕을 만들어 주면 더 나을 거라는 뜻이었다.


“아, 셸란도 왔네.”

리에네가 셸란을 다독이는 동안 지붕을 다 완성한 디에프가 코끝에 흙을 묻힌 채 다가왔다.


“저도 안을래요, 어마마마.”

디에프가 반대쪽 다리에 매달릴 것처럼 두 팔을 벌렸다.


“안 돼.”

그걸 셸란이 말렸다.

목소리가 제법 매서웠다.


“안 돼? 왜?”

디에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지금 네 꼴을 봐. 흙투성이라고. 어마마마 옷까지 더럽히게 될 거야.”

“아…….”

디에프도 시무룩해졌다. 고개를 내려 몸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낸 그가 다시 고개를 들고 말했다.


“계속 더러워요, 어마마마.”

“그러네. 털 게 아니라 빨아야 하나 봐.”

셸란이 야무지게 손을 흔들며 디에프를 쫓아내려고 했다.


“가까이 오지 마. 더러운 게 옮아.”

“……. 어…….”

디에프가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이럴 때 리에네는 조금 난감했다.

더러워져도 괜찮으니 안으라고 하면 디에프의 기분은 나아질지 몰라도 셸란이 화를 낼 것이다.


“그럼 이렇게 하자. 디에프는 안지 말고 대신 손을 잡아. 그건 싫어?”

“아니요. 손 잡는 것도 좋아요.”

리에네는 한쪽 다리에는 딸을 매달고, 반대쪽 손으로는 아들의 손을 잡은 채 후원에서 돌아왔다.


 
이틀 뒤 눈보라가 시작되었다.

* * *

눈보라가 치는 시기면 모든 게 멈추었다.

밖을 오가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고, 다들 집에 틀어박혀 벽난로 앞에 모여 앉아 있거나 했다.

미리미리 장작을 잔뜩 패 두고 음식도 가득 채워 두었다.

그리고 지금 누리는 따스함에 감사하며 이 따스함을 지니지 못한 다른 이들을 걱정했다.

그런데 올해 나우크 성은 그러지 못했다.

 


“아직도 소식이 없는 건 눈보라 때문에 고립됐다는 뜻입니다.”

왕실 집무실에 긴장이 감돌았다.

블랙은 눈보라가 시작되기 전에 돌아와야 했다. 국경 순찰 시기가 공교롭게도 맞물렸다. 유독 따듯한 날씨 탓에 눈보라가 뒤늦게 온 탓이었다.

하여간 블랙은 눈보라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 말은 성으로 돌아와야 하는 시기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페르모스는 블랙이 피치 못할 사고로 저 밖 어딘가에서 고립되어 있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을 보내 수색을 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이 시기를 밖에서 맨몸으로 견딜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야죠.”

리에네는 미칠 것 같은 불안감을 누르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렇다면 누가, 얼마나 가야 하죠?”

“제가 스물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그리고 렌펠을 빌려주셨으면 합니다. 흔적을 찾는 데 녀석만큼 뛰어난 사람은 없으니까요.”

“물론이에요.”

리에네가 책상 아래서 초조하게 손을 마주 잡았다.

페르모스는 리에네가 일부러 더는 말을 보태지 않는 이유를 알아챘다.

무서울 것이다. 이 겨울의 혹독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니까.


“그럼 어서 출발해 줘요. 정말로 사고가 생긴 거라면 한시가 급하니까.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내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전부 가져가세요. 마차든 썰매든.”

“알겠습니다.”

페르모스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하필 공교롭게도 그때 랜달이 집무실 문을 두들기며 들어섰다.


“죄송합니다, 전하. 급히 알려 드릴 일이 있어서……,”

“뭔데요?”

“알라우딘 다리의 탑이 무너졌습니다.”

“뭐라고요?”

알라우딘 다리는 에베트 강을 가로지르는 여섯 개의 다리 중 하나였다.

목조로 만들어졌지만 다른 다리에 비해 이동량이 많았다. 번화가를 잇는 곳이라 늘 다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었다.

그런 곳이 무너졌다니, 큰일이었다.

다리 끝의 탑이 무너졌으면 다리도 무너질 가능성이 높았다. 사람들이 얼어붙은 강으로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피해가 얼마나 되는지 가서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모르니 다리는 폐쇄해야 하고요. 부관께서 가 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그건 안 돼요.”

대답은 페르모스가 아니라 리에네가 했다.

사고가 동시에 터졌다. 마음이 타들어 갈 것 같아도 머리는 차가워야 했다.


“페르모스 경은 말한 대로 국경 쪽 수색을 해 주세요. 랜달 경은 나와 같이 알라우딘으로 가요.”

“네? 전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알라우딘의 지형이라면 나도 알 만큼 아니까요. 그리고 구조 작업이라면 이전에도 해 본 적이 있어요. 다른 사람들보다 도움이 될 거예요. 페르모스 경, 출발하세요. 괜히 시간을 낭비할 필요 없습니다.”

랜달 못지않게 페르모스도 안색이 달라졌다.


“이런 날씨에 전하가 움직이신 걸 알면 주군께서 절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그건 나중 일이에요. 그리고 잘못은 그이가 했죠. 제 시간에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페르모스 경의 잘못이 아니라 그이의 잘못이라는 내 말을 전해 줘요.”

페르모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 말을 전하면 정말로 살아남지 못할 것 같은데요.”

“두고 보죠. 어서 출발하세요.”

“그럼……. ……하, 알겠습니다.”

페르모스가 랜달의 등짝을 주먹으로 툭 쳤다.


“반드시 무사히 모시고 돌아와라.”

“……그건 부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

리에네가 몸을 일으켰다.

서둘러야 하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준비하고 가죠.”

“네, 전하.”

 

눈보라는 여전히 사나웠다.

* * *

일곱 살이라고 해도 눈보라가 무섭다는 건 알았다.

그러나 얼마나 무서운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시장하진 않으십니까? 식사를 하신 지 꽤 됐는데요.”

리에네가 알라우딘 다리로 떠나고, 아이들은 한창 눈물을 글썽였다.

이 무서운 날씨에 모친이 나서야 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자신들이 버려진 기분이 들었다.

부인들이 살뜰히 챙겼지만 아이들은 내내 시무룩했다.

셸란은 체스판을 꺼내 들었지만 말을 움직이다 말았고, 디에프는 평소처럼 저도 끼워 달라며 졸라대지 않았다.


“배 안 고파요…….”

거짓말 조금 보태 어린 송아지처럼 쉴 새 없이 먹어 대는 쌍둥이들이 밥을 거부했다.

부인들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러면 안 되지요. 그럼 대신 과자를 드시겠습니까?”

“과자…….”

싫다고는 하지 않았지만 기운을 내기에는 부족했다.


“평소 드시는 과자가 아니라 버터와 설탕을 듬뿍 넣어서 달고 폭신한 과자를 가져다드릴게요. 두 분이 좋아하시는 뜨거운 크림도 가져오겠습니다.”

“…….”

쌍둥이가 슬쩍 눈을 마주했다.


“자두 잼도 같이 먹어도 돼요?”

셸란이 물었다.

두 부인이 부리나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입니다.”

“그럼 먹을래요.”

“잠시만 계십시오.”

플램바드 부인과 헨튼 부인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날씨가 이러면 멀쩡한 사람도 괜히 울적해지기 마련이었다. 더 울적해 하시기 전에 맛있는 것을 잔뜩 드시게 해서 기분을 달래야 했다.

좀 전처럼 계속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내내 안쓰러워서 견디지 못할 것이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두 부인이 서둘러 쌍둥이의 방을 떠났다.

* * *



“그런데 말이야…….”

쌍둥이 둘만 방에 남았다.

어쩐지 평소보다 파들파들 흔들리는 것 같은 촛불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디에프가 입을 열었다.


“……되게 심심해.”

평소 같으면 디에프가 심심하다는 말에 코웃음을 쳤을 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툭, 데구르르.

셸란이 체스 말을 판 위에 굴렸다.

이런 날에는 페르모스와 같이 체스를 둘 줄 알고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는데,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렌펠 경도 없고 말이야.”

“맞아.”

클리마는 쌍둥이들과 가장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즐겁게 놀아 주는 사람이었다.

디에프는 자신을 가뿐히 안아 머리 위까지 번쩍번쩍 들어 주는 클리마가 그리웠고, 셸란은 아무도 모르게 자신을 도서관까지 데려다줄 수 있는 클리마가 보고 싶었다.


“……가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셸란이 의자에서 끙차 내려섰다.


“왜, 셸란?”

대답을 하지 않은 셸란은 창가로 다가갔다. 창문이 높아 볼 수가 없자 그 옆의 의자를 끌어와 냉큼 올라섰다.


“밖에 사람이 아무도 없어.”

“그야 눈보라가 치니까.”

“렌펠 경도 없고, 어마마마도 없고, 아바마마도 없고.”

“응…….”

디에프가 시무룩하게 중얼대는데, 반대로 셸란의 눈은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페르모스 경도 없고, 랜달 경도 없어.”

“알아……. 왜 자꾸 말하는 거야.”

“그러니까 나한테까지 신경을 못 쓸 거라고.”

“음……? 그게 무슨 말이야?”

“도서관에 갈 수 있어.”

“뭐?”

디에프가 놀라 입을 딱 벌렸다.


“어떻게? 이 날씨에?”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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