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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외전 (8)
2022.08.10.


계획은 완벽했다.

나우크의 왕립 도서관은 거기서 먹고 자는 사람들도 많아서 일 년 내내 문을 열어 두었다. 눈보라가 친다고 해서 새삼 문을 닫아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쌍둥이는 일단 부인들을 기다렸다가 가져다주는 과자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졸리다는 핑계로 각자 침실로 돌아갔다.

침실까지 와서 이불을 덮어 주고 등을 도닥여 준 부인들이 사라지자 쌍둥이들은 몰래 침대를 빠져나왔다.

셸란은 디에프에게 베개를 이불 아래 넣어 두라는 조언을 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불 아래가 불룩한 걸 보고 그들이 사라졌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끼익, 찰캉.

셸란이 왕의 화랑 한구석에 있는 철제 난로를 열었다.


“정말 여기로 가는 거야?”

“응.”

셸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렇게 어두운데? 게다가 난로잖아. 불에 타 죽으면 어떻게 해?”

“디에프는 이 방에 불 때는 걸 본 적이 있어?”

“음? 없는 것 같아.”

“그래. 불에 타 죽을 일은 없어.”

“…….”

디에프가 어두컴컴한 난로 안을 보다 침을 꿀꺽 삼켰다.

셸란이 도서관을 가는 길을 알려 주겠다고 했을 때만 해도 신이 났다.

잠든 척하고 몰래 어딘가를 가는 것은 나쁜 짓이었다. 그래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셸란만 아는 비밀이 있다는 건 공평하지 못했다. 자신은 셸란에게 아무런 비밀도 없었다.

그런데 그 비밀이 이렇게 어두웠다니.

디에프는 촛불도 하나 없이 저 어두운 곳을 들어가야 한다는 게 정말로 내키지 않았다.
 

 


“너무 어둡잖아. 아무것도 안 보여.”

“지하니까. 어서 들어가. 이러다 들키겠어.”

“아니, 잠깐. 이게 길이라는 건 확실해?”

셸란이 제 등을 밀어대는 것을, 디에프가 힘으로 버텼다.


“응. 도서관 갈 때마다 여기로 다녔다고 했잖아.”

“정말로? 그러니까, 정말로? 이렇게 캄캄한 곳을?”

“렌펠 경이 길을 잘 알고 있었어.”

“셸란은? 셸란도 잘 알아?”

“……대충.”

사실 너무 어두워서 셸란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클리마는 자주 다녀서 익숙하다고 했다. 무서운 건 셸란도 마찬가지라 내내 클리마의 품에 안겨서 다녔다.


“무서우면 비켜. 나 혼자 가도 되니까.”

셸란이 디에프를 밀치고 먼저 난로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디에프가 아이답지 않은 한숨을 내쉬었다.

들어가고 싶지는 않은데, 셸란이 저렇게 나오는 이상 두고 볼 수도 없겠다는 복잡한 심경을 담은 한숨이었다.


“할 수 없네.”

저렇게 무서운 곳에 셸란을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디에프가 이를 질근 물고 셸란의 뒤를 따라갔다.

* * *

그리고 일 분 만에 돌아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저 안에서 도무지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셸란은 한 다섯 걸음쯤 옮기다 깔끔하게 포기했다.


“내 방향 감각이 전부 무뎌지는 기분이었어.”

길을 못 찾겠다는 말을 셸란이 아주 고상하게 말했다.

디에프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어쨌거나 셸란의 방향 감각이 무뎌져서 몹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면 저 어두운 곳에서 꼼짝 없이 길을 잃었을 테니까.


“길이 아닐지도 몰라.”

그리고 디에프는 여전히 저런 데가 길이라는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난로잖아. 왜 난로 속에 길이 있는데?”

“비밀 통로니까. 일부러 저렇게 감춰 둔 거야.”

“음……. 왜?”

“아무도 모르게 드나들려고.”

“왜 아무도 모르게 드나들어야 하는데?”

“원래 성에는 비밀 통로가 있어야 해. 왕족한테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아이들은 쓰지 않는 철제 난로 앞에 앉아 얘기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디에프는 셸란의 옷 여기저기에 묻은 먼지를 톡톡 털어 주었다.


“그렇구나……. 그럼 렌펠 경도 왕족이야?”

“뭐? 왕족은 아르사크라는 이름을 가져야지. 디에프는 그것도 모르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 렌펠 경은 그럼 비밀 통로를 어떻게 아는 거야?”

“렌펠 경은 왕의 개인 호위 기사잖아. 그러니까 당연히 길을 알고 있어야지.”

“그렇구나.”

“……아니,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던 디에프는 갑자기 셸란이 머리를 흔드는 바람에 눈을 둥글게 떴다.


“뭐가 아니야, 셸란?”

“모순이 있어.”

“모순이 뭔데?”

“…….”

셸란은 그 질문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디에프가 모르는 걸 물어볼 때마다 일일이 답을 해 주다가는 날이 샐 테니까.


“렌펠 경이 왕의 개인 호위 기사가 된 건 우리가 세 살 때야. 그때 렌펠 경이 수업을 마치고 정식으로 기사가 됐다고 했잖아.”

“아……. 그랬어?”

당연하게도 디에프에게는 세 살 때의 기억이 없었다. 그걸 기억하는 셸란이 이상한 것이었다.


“그런데 렌펠 경은 어릴 때부터 이 길을 다녀서 잘 아는 거라고 했단 말이야.”

“아하. 그랬구나.”

“아하, 가 아니야. 이상하지 않아? 렌펠 경이 이 길을 아는 건 그럼 사 년 전부터여야지. 그 전부터 알았다는 건 이상해. 어릴 때부터 왕의 호위 기사였던 게 아닌데.”

디에프가 손바닥을 딱 부딪쳤다.


“맞아. 그러네.”

“그럼 정말 렌펠 경이 왕족이었다는 건가?”

셸란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하지만 그것도 말이 안 되잖아. 왕족이었는데 왜 기사가 됐지? 그리고 렌펠 부인은 시녀장인데?”

“음…….”

디에프가 같이 고민하는 척 턱을 괴었다.

그러나 헷갈리기만 했다.

클리마가 왕족이면 어마마마와 아바마마는 뭐가 되는 걸까.

왕족은 한 왕국에 하나뿐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뭔가 말이 되지 않았다.


“그럼 비밀 통로인데 왕족이 안 쓰는 비밀 통로라면?”

“그런 건 없어.”

셸란이 쿵 몸을 일으켰다.


“어디 가, 셸란?”

디에프가 다급히 셸란을 따라 일어섰다.


“궁금해. 알아내야겠어.”

“뭘? 렌펠 경이 왕족인지 아닌지?”

“응.”

셸란은 이런 걸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마마마의 집무실에는 왕실 기록서가 있었다.

* * *

두 아이는 발자국 소리를 죽여 가며 왕실 집무실을 찾았다.

집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끼이익.

다시 문을 닫은 아이들은 책장 앞에 섰다.

책장에는 두껍고 몹시 큰, 오래된 책들이 빡빡하게 꽂혀 있었다.


“어두워. 글씨가 잘 안 보여.”

책등에는 기록서에 해당하는 연도가 적혀 있었다. 불이 없는 탓에 작고 희미한 글씨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응. 불이 있어야겠어.”

셸란이 의자를 밟고 올라서서 책상 위를 뒤적였다.

책상 위에는 책을 읽을 때 쓰는 촛불과 촛대가 있었다. 서랍을 열자 성냥도 있었다.

칫!

셸란은 제법 능숙하게 성냥에 불을 붙여 초를 켰다.


“이거 받아, 디에프.”

디에프가 촛대를 받았다.


“잘 들고 있어.”

셸란이 머릿속으로 연도를 계산했다.

어마마마의 대관식은 칠 년 전. 클리마가 왕의 호위 기사가 된 것은 사 년 전.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의 혼인은 팔 년 전이었다.


“이거면 되겠다.”

의자에 올라선 채 책장을 훑던 셸란이 십 년 전 기록서를 찾아냈다.


“대관식 이전의 왕의 이름을 찾아내면 돼. 그 왕의 이름이 렌펠이라면 말이 돼.”

“그렇구나.”

디에프가 감탄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십 년 전 기록을 몽땅 뒤졌어도 렌펠이라는 이름은 찾아낼 수 없었다.

대신 쌍둥이는 다른 사실을 발견했다.

초대 아르사크 왕, 그러니까 자신들의 조부 이전에는 석연치 못한 기록의 공백이 있다는 것을.

* * *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어.”

셸란이 손가락 하나를 입에 물고 발을 동동거렸다.


“왜 없지?”

아르사크 이전의 왕들의 이름은 가이너스였다. 만약 렌펠이라는 이름의 왕이 있었다면 분명히 그 사라진 기록 속에 있었을 것이다.


“일부러 없앤 거야. 틀림없어.”

방금 전부터 셸란이 하는 말을 잘 따라갈 수가 없었던 디에프는 멋도 모르고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왜지? 설마 아르사크의 왕이 힘으로 왕관을 빼앗은 걸까?”

“응? 그건 그러니까, 음…….”

디에프가 생소한 단어를 찾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반역.”

“아, 그래. 반역. 반역은 아주 나쁜 짓이잖아.”

“반역을 일으킨 이유에 따라 다르겠지. 이전의 왕이 너무 무능한 폭군이라 왕국에 도움이 안 되는 인물이었을지도 모르잖아.”

“으음……. 잘 모르겠어.”

셸란은 잘 모르겠다는 디에프를 붙들고 찬찬히 가르쳐 줄 성격이 아니었다.


“만일 렌펠이 왕족의 이름이었다면 이건 아주 심각한 문제야.”

“왜?”

“렌펠 경이 정체를 감추고 아르사크 가문에 복수하려고 하는 건지도 모르니까.”

“어? 복수?”

디에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것도 아주 나쁜 일이잖아? 복수를 하면…… 그럼 어마마마가 죽어?”

“몰라.”

셸란이 콩콩 굴러대던 발을 멈췄다.


“그러니까 알아내야 해.”

“어떻게? 기록이 없어졌잖아.”

“응. 그러니까 찾아야 해.”

“없어진 걸 어디서 찾아?”

“그건…….”

셸란이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덩치가 크고 몸집이 재빠른 클리마 렌펠. 늘 도서관에 데려다주는 착한 사람. 그러나 왕족들만 알아야 하는 길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어쩌면 렌펠은 가이너스와 아르사크 사이에 잠깐 왕이었을지도 몰랐다. 그게 사실이라면 그는 정체를 감추고 아르사크 왕족에게 복수를 하려고 하는 건지도 몰랐다…….

셸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생각할수록 무서운 얘기였다.

셸란이 무서워하자 디에프도 덩달아서 무서워했다.


“셸란. 그럼 어떻게 해야 해?”

“뭔가가 남아 있을 거야.”

셸란이 결론을 내렸다.


“비밀 통로가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야. 렌펠이 정말 왕이었다면 뭔가를 남겨 놨을 거야.”

“하지만 이제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잖아.”

“지금 렌펠 경은 성에 없잖아. 방을 뒤져 보자.”

“아……! 그럼 되겠다.”

 

두 아이는 집무실을 나와서 북쪽 탑으로 몰래 숨어들었다.

아르사크 수호 기사단이 숙소처럼 쓰는 북쪽 탑은 이런저런 일들로 오늘은 텅 비어 있었다.

* * *

그러나 클리마의 방을 뒤졌어도 건진 건 없었다.

침대 하나, 옷장 하나가 전부인 클리마의 방은 사실 뒤질 것도 없었다. 베개를 열어 탈탈 뒤집었어도 깃털만 날릴 뿐이었다.

베개 하나를 망가트린 쌍둥이는 보석실에 가기로 했다.

보석실은 오래된 것들을 보관하는 곳이었고, 그러니 뭔가를 찾을 가능성이 제일 많은 곳이기도 했다.


“고개 들지 마, 디에프.”

“그럼 깜깜해서 좀 무서운데……. 알았어.”

디에프가 바닥에 엎드렸다. 셸란은 디에프를 밟고 올라가 열쇠 구멍에 열쇠를 밀어 넣었다.

보석실 열쇠가 어마마마의 침실에 있다는 사실을 셸란이 알고 있다는 게 놀라웠다. 하지만 셸란은 어떻게 그걸 알았는지는 말해 주지 않았다.

디에프가 볼 땐 렌펠 경보다 셸란이 더 감춘 게 많은 사람이었다.


“무거워, 셸란.”

“좀 참아. 내가 디에프보다는 가볍다는 걸 알잖아.”

“응…….”

“그리고 조용히 해. 들키면 어쩌려고.”

“아, 맞다. 조용히 할게.”

디에프가 인상을 쓰면서도 소리를 삼켰다.

한참 열쇠를 쩔꺽대던 셸란이 어느 순간 환호했다.

찰칵!


“됐다! 열었어!”

끼이익.

보석실의 문이 열렸다.

열쇠를 챙겨 디에프의 더블릿 주머니에 넣은 셸란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응.”

침을 꼴깍 삼키는 소리가 아무도 없는 보석실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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