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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 외전 (9)
2022.08.14.


보석실의 모든 장과 서랍에는 전부 열쇠 구멍이 있었고, 단단히 잠겨 있었다.

손잡이를 전부 당겨 본 아이들은 지쳐서 숨을 씩씩거렸다.


“나가서 열쇠를 가져와야 하나 봐.”

디에프가 이마를 닦아 내며 말했다.


“안 돼.”

셸란이 고개를 흔들었다.


“열쇠는 부인들이 반반씩 가지고 있어.”

디에프가 놀란 눈을 했다.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셸란?”

“예전에 물어봤어.”

그건 다섯 살도 되기 전 일이었지만 셸란은 어지간해서는 잊어버리는 일이 없었다.


“그럼 더는 방법이 없는 거야?”

“글쎄.”

지친 셸란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제 키를 넘는, 마찬가지로 열쇠로 잠겨 있는 서랍장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여기 말고 옛날 물건이 남아 있는 데가 또 있을까?”

“어디든 가능해. 그런데 우리 둘이서만 찾기에 이 성은 너무 넓어.”

“사람들한테 도와달라고 하면?”

그 말에 셸란이 코웃음을 쳤다.


“누구한테? 부인들한테? 부인 중 한 명은 성이 렌펠인데?”

“……그러네.”

“그리고 아직은 남한테 말을 할 때가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해. 우리끼리는 할 수 있는 게 없잖아.”

“방법을 찾아야지.”

셸란이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디에프는 셸란이 생각하는 시간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눈치도 없이 계속 말을 걸면 셸란은 몹시 화를 내거나, 아니면 아예 차가워지거나 했다.


“…….”

디에프는 셸란을 놔두고 다른 데로 눈을 돌렸다.

가만히 앉아서 셸란을 기다리는 일은 심심했다. 또래의 혈기왕성한 남자애들처럼, 디에프는 여기저기 기웃대고 만져보고 했다. 어떤 서랍장은 손잡이가 붙어 있어서 잡을 수도 있었다.


“어……. ……어어어?”

제 머리보다 높은 서랍의 손잡이를 어찌어찌 붙드니 몸이 매달리는 모양새가 되었다.

서랍은 하나씩 전부 잠겨 있었지만, 디에프가 제 무게로 매달리니 앞으로 조금씩 기울기 시작했다.


“어어…… 셸란!”

셸란을 불렀을 때는 이미 늦었다.

우당탕!

서랍장 전체가 앞으로 쏟아졌다.


“디에프!”

뒤늦게 디에프를 본 셸란이 벌떡 일어나 서랍장이 뒤엎어진 곳으로 달려왔다.


“……?”

그러나 디에프가 끙끙대며 서랍장을 밀고 나올 때까지, 셸란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야……. 셸란? 나 좀 일으켜 줘.”

디에프가 울상을 지으며 말해도 마찬가지였다.

괜한 서러움에 디에프의 눈에는 눈물이 차올랐다. 디에프는 동생 앞에서 울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셸란? 뭐 해?”

“…….”

“셸란. 나 아픈데…….”

셸란은 아프다는 말을 무시한 채 디에프를 지나쳤다.

디에프는 끙끙대며 몸을 누르는 서랍장을 조금 밀어냈다.


“어?”

그리고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다.

분명히 서랍장 하나를 엎었는데, 서랍장이 그 자리에 있었다. 정확히는 알맹이가 빠진 서랍장 틀이 서 있었다. 서랍장 바닥은 서랍 하나가 숨겨져 있는 것처럼 높았다.


“디에프. 이게 이렇게 생겼다는 걸 전혀 몰랐지?”

“응? 으응……. 그냥 서랍장인 줄 알았어.”

“그래. 그러니까 이건 물건을 숨겨 놓으려고 일부러 이렇게 만든 거야.”

디에프는 셸란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는 것을 알아챘다.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모를 때처럼.

똑똑.

셸란이 두툼한 바닥을 두들겨 보였다. 안에서 빈 소리가 울려 왔다.


“이걸 여는 방법이 있을 텐데.”

셸란이 고개를 갸웃대며 서랍장 바닥을 이리저리 누르고 흔들어 보았다.


“또 엎어 볼까?”

서랍장 아래서 기어 나온 디에프가 방금 전까지 아팠던 것도 잊고 말했다. 물론 셸란은 거절하지 않았다. 아픈 건 자신이 아니었으니까.


“응.”

“조심해, 셸란. 비켜서 있어.”

디에프가 틀만 남은 서랍장을 잡아당겼다.

또다시 서랍장 아래 깔리기 전에 몸을 피할 생각이었는데, 서랍장 무게가 쏟아지자 그럴 수가 없었다.


“디에프!”

디에프가 뒤로 넘어질 것 같자 셸란이 디에프의 옷자락을 뒤에서 잡아당겼다.

그러나 아이 힘으로는 턱도 없는 일이었다.

쿵!

이번에는 둘 다 깔렸다.


“아야아…….”

“으, 아파……. 괜찮아, 셸란?”

“안 괜찮아. 아파.”

그래도 둘이 깔렸기에 충격은 덜했다. 속에 든 서랍장이 빠져 나간 만큼 비어 있는 터라 크게 다치는 일도 없었다.


“어……?”

게다가 우연한 행운도 있었다.

서랍장이 넘어지면서 셸란의 발끝이 어딘가를 건드렸는지 서랍장 바닥이 뻐끔 열렸고, 그 사이로 셸란의 발이 조금 들어가게 되었다.


“열렸어.”

“응? 뭐라고, 셸란?”

“발이……. 아, 이럴 게 아니라 빨리 치워 봐!”

쌍둥이들은 끙끙대며 서랍장 아래서 기어 나왔다, 그리고 다시 끙끙대며 서랍장을 일으켜 세웠다.

온몸에 땀이 비 오듯 흘렀다. 일곱 살 아이들에게는 너무 힘든 일이었다.

그래도 보람은 있었다.

분명 틈 없이 매끈하게 단단하기만 했던 서랍장 바닥이 살짝 들려 있었다.

셸란이 그 부분에 손가락을 넣어 위로 들어 올렸다.

툭!

장치가 되어 있었는지 조금만 힘을 주었는데도 달칵, 소리가 나며 바닥 윗면 전체가 훌쩍 들렸다.


“……이게 뭘까?”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은 딱 하나였다.

돌돌 말려서 인장으로 봉해진 종이였다. 종이가 컸다. 다 펼치면 셸란의 키만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거 열어 봐도 되는 걸까?”

괜한 긴장 탓에 디에프가 침을 꿀꺽 삼켰다.


“열어야지. 이걸 찾으려고 한 거잖아.”

“하지만 봉인돼 있잖아. 이런 건 함부로 뜯으면 안 돼.”

“그렇게 따지면 찾아서도 안 되는 물건이었지. 처음부터 감춰져 있었는걸.”

듣고 보니 또 그랬다.

아이들은 결국 봉인을 뜯기로 했다.

봉인에 찍힌 인장은 아이들의 눈에도 익숙했다. 아르사크 가문의 인장이었다.


“이건 좀 이상한데……. 이걸 숨겨 놓은 건 렌펠이 아니라 아르사크 가문이라는 거야? 그럼 어마마마라는 얘기잖아.”

“인장만 보고 그렇게 생각할 수는 없어. 일단 뜯기나 해.”

찌이익!

디에프가 봉인을 뜯었다.

커다란 종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돌돌 말린 것을 풀었다.

손을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종이 안쪽이 드러났다.

그것은 그림이었다.


“으음…….”

“음…….”

그림을 바닥에 다 펼쳐 놓은 아이들은 심각하고도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이건 그냥 그림이잖아.”

“어마마마가 그림을 왜 숨겼을까?”

커다란 그림은 근사한 초상화였다. 어깨에 하얀 털 망토를 두르고 공작 깃털로 장식한 커다란 모자를 쓴 모습이었다.

그리고 왕관을 쓰고 있었다.

그림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셸란이 말했다.


“이건 아바마마야.”

“응? 어째서?”

“눈이 아바마마잖아. 그리고 왕관을 쓰고 있고. 왕관을 쓰는 사람은 나우크에서 어마마마와 아바마마야.”

디에프가 고개를 격하게 흔들었다.


“아냐, 셸란. 이건 아바마마가 아니야. 이 사람은 조금 뚱뚱하잖아.”

“바보. 자세히 봐봐. 눈 색깔도 머리 색깔도 다 아바마마잖아.”

“하지만 생긴 게 다르잖아. 난 잘 모르겠어.”

“디에프. 아바마마하고 똑같은 눈 색깔을 가진 사람을 이제껏 본 적이 있어?”

“응?”

그 말에 디에프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없는 것 같아.”

“그렇지? 그리고 자세히 보면 닮았어. 다르게 보이는 건 살이 쪄서 그런 거야. 살이 찌면 사람은 다르게 보여. 웨로즈 경도 그랬잖아.”

“아, 맞다.”

비로소 디에프가 동의했다.


“그런데 이상해. 아바마마 그림을 왜 감춰 둔 걸까?”

“음…… 살이 쪘을 때 그린 거라서.”

“그래도 아바마만데?”

“어마마마는 살찐 모습이 보기 싫었을지도 모르잖아.”

“그건 아닐 것 같은데…….”

별안간 셸란이 그림을 뒤집었다.


“왜 그래, 셸란?”

“뭔가 숨겨져 있을까 해서.”

살이 조금 더 쪘다는 걸 빼고는 평범한 그림을 굳이 감춰 둘 이유는 없을 것이다.

셸란은 아무것도 그려져 있지 않은 뒷면을 열심히 살폈다.

그래서 알아낸 것은 가장자리에 못 자국이 있다는 것이었다.

액자에 끼워 넣어 뒀던 것처럼.


“어딘가 걸려 있었을 거야.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와……. 셸란은 그런 것도 아는구나.”

“관찰력이 조금만 있으면 알 수 있는 일이야.”

새침하게 대답한 셸란이 뭔가를 하나 더 발견하고 눈을 비볐다.


“디에프.”

“응?”

“여기 봐 봐.”

“어디?”

“여기.”

셸란이 가리키는 것은 봉인을 뜯느라 살짝 찢어진 인장 문양이었다.


“어마마마의 이름이 아니야.”

“어, 정말?”

왕의 인장에는 왕가의 문양과 왕의 이름이 함께 들어갔다. 쌍둥이들은 리에네의 이름 대신 생소한 레데르라는 글자를 읽었다.


“아르사크의 첫 번째 왕이겠지?”

“응.”

그럼 이 그림을 봉해 놓은 것은 자신들이 태어나기도 전인, 까마득한 옛날 일이라는 뜻이었다.


“그럼 말이 안 되는데……. 아바마마는 왕관을 쓰고 있는걸.”

아바마마가 왕관을 쓰게 된 건 두 분이 함께 대관식을 치르고 나우크의 공동 통치자가 된 이후의 일이었다.


“게다가 첫 번째 왕의 시대는 아주 옛날이지. 아바마마는 그때 우리처럼 어렸을걸.”

“아, 그래? 그래서 뚱뚱한 걸까?”

“바보 같으니. 이건 뚱뚱한 어른이지 뚱뚱한 아이가 아니잖아. 이건 아바마마가 아니야.”

“음? 아바마마가 맞다면서?”

“그건 그렇지만…….”

한 번 아바마마라고 생각하니 이제는 살찐 아바마마로 보였다. 도무지 다른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던 쌍둥이들이 고민에 빠졌다.


“그럼 이건 대체 어떻게 된 거지…….”

그때였다.

쿵!


“여기들 계셨군요!”

보석실의 문이 쾅 열렸다.


“앗!”

“……!”

쌍둥이들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 와중에 셸란은 재빨리 걸음을 옮겨 그림을 가려 보려고 애를 썼다.

보석실에 들어선 사람은 시녀장 렌펠 부인이었다.

디에프가 침을 꿀꺽 삼키며 셸란의 손을 끌어와 쥐었다.

애초에 그들이 보석실을 뒤지기 시작한 것은 렌펠 경의 정체를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렌펠 부인과 렌펠 경은 다를 게 없었다.


“두 분을 찾느라 제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십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십시다. 대체 왜 여기서 놀고 계신 겁니까. 여기는 놀 만한 것도 없는 데다가 가구가 많아 위험한……. ……이럴 수가. 벌써 하나 엎으셨군요.”

뒤엎어진 서랍장을 시녀장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리 오십시오. 어디 다친 데는 없으십니까?”

렌펠 부인이 몸을 낮추며 먼저 셸란의 손을 살폈다.

다행히 다친 데는 없다고 말을 하려는데, 렌펠 부인이 매가 부럽지 않은 눈썰미로 손톱 끝이 살짝 까져 있는 걸 발견했다.


“후우……. 조금만 잘못됐어도 멍이 크게 드셨을 겁니다.”

“…….”

“이를 어쩌나. 손톱을 잘라 드려야겠네. 손톱이 거칠면 세수할 때 피부를 긁을지도 모릅니다. 어디 다른 데는 또 없습니까?”

“…….”

렌펠 부인의 말이나 행동은 여느 때처럼 부드럽고 다정했다.

도무지 나쁜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고는 볼 수가 없었다.

디에프도 같은 생각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자꾸만 곁눈질을 보낼 리가 없었다.


“그럼 이제 디에프 왕자님. 이쪽으로 오세요. 왕자님은 다치신 데가……. ……이런.”

디에프를 살피려 각도를 틀던 렌펠 부인이 어설프게 숨기고 있던 그림을 발견했다.


“뭘 찾으셨습니까?”

“음, 그게…….”

이제껏 딱히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운 적이 없는 쌍둥이들이 눈짓을 주고받는 사이, 렌펠 부인은 바닥에 떨어진 그림을 들어 올렸다.

부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세상에, 이건……. 이 그림이 남아 있다니…….”

“이게 누군지 아세요?”

“정말로 아바마마가 뚱뚱했을 때예요?”

렌펠 부인이 그림을 쥐고 들여다보자 쌍둥이들이 재빨리 부인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렌펠 부인은 분명히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었다.

그림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표정이나, 가늘게 흔들리는 손이 증거였다.


“이분은…… 펨브로윈 왕이십니다.”

“그게 누군데요?”

렌펠 부인은 꺼질 듯한 한숨을 조용히 흘려보냈다.


“가이너스 왕가의 마지막 왕이셨습니다.”

“가이너스?”

디에프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런데 왜 아바마마처럼 생겼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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