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외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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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외전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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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외전 (10)
2022.08.17.
“그건…….”
렌펠 부인이 멈칫, 말을 삼켰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일이 아닌 듯합니다.”
“왜요?”
“누가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건가요?”
렌펠 부인의 표정이 일곱 살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해졌다.
“아마도 공주님과 왕자님이 아직은 어리시기 때문일 겁니다.”
“네?”
“그 말은 이상한데요.”
렌펠 부인은 아주 오래전 누군가를 잃어 본 적이 있는 그런 쓸쓸한 미소를 지었다.
“하여간 이곳을 정리해야겠습니다. 이 그림은 제자리에……. 아니, 국왕 전하께 말씀드리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두 분은 어쩌다 이걸 발견하게 되신 겁니까?”
쌍둥이들이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순간이었다.
“어,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늘 잠겨 있는 보석실의 문을 열고 들어와 이제껏 아무도 모르는 그림을 찾으셨다고요? 보석실 문을 여시려면 플램바드 부인의 열쇠를 빌려오셔야 했을 텐데요.”
“…….”
“…….”
“대답이 없으신 걸 보니 몰래 빌려오신 모양이로군요.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겠습니다. 두 분 다 이리 오세요. 여기를 나가서 플램바드 부인에게 열쇠를 돌려드리는 겁니다.”
이대로 가면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한 채 혼만 나게 될 게 뻔했다.
셸란이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좋아요. 그렇게 할게요. 대신 저 초상화가 왜 아바마마처럼 생겼는지 말해 주세요.”
“저는 말씀드리지 못하는 일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럼 저는 여기서 나가지 않을래요.”
셸란이 보석실 바닥에 냉큼 주저앉았다.
“셸란……?”
난처해하며 셸란을 바라보던 디에프가 결국 동생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둘 다 착하고 순한 아이들이었지만 고집은 있는 편이었다. 아마도 그건 리에네를 닮았을 것이다.
셸란이 저렇게 나오면 블랙이 나서야 말릴 수 있었다.
“공주님. 그게 왜 그리 알고 싶으신 겝니까. 나중에 좀 더 자라시면 아시게 될 텐데요.”
“제게는 몹시 중요한 일이에요. 그렇지, 디에프?”
디에프가 렌펠 부인과 셸란을 번갈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셸란에게 중요하다면 제게도 중요해요, 부인.”
“……. 두 분께서 계속 고집을 피우신다면 저는 오늘 저녁 간식을 드리지 않겠습니다. 두 분의 엉덩이를 때리는 일은 제가 못 하지만 간식을 드리지 않는 일은 할 수 있지요. 어쩌시겠습니까?”
“아, 그건…….”
그건 싫다는 말을 하려던 디에프를 셸란이 소매를 홱 당겨 말렸다.
“좋아요. 간식을 안 먹을게요.”
“오늘만 아니라 내일도 안 드릴 겁니다. 공주님께서 좋아하시는 강낭콩 푸딩도 더는 만들지 않을 겁니다.”
“그건…… 그건 너무해요.”
“그럼 일어나서 플램바드 부인께 열쇠를 돌려드리러 가십시다.”
“그건…… 안 돼. 그래도 안 갈래요.”
셸란은 고개를 흔들어 갈등을 털어냈다.
지금 알고자 하는 것은 몹시 중요한 일이었다. 렌펠 경이 왕족이었으며, 그래서 어쩌면 정체를 감추고 복수하려고 들지도 모른다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내야 하는 시점이었다.
같은 성을 가진 렌펠 부인은 그림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려고 들었다. 둘 사이에는 뭔가 연관성이 있었다.
자고로 비밀을 감추는 사람은 선인이 아니었으니까.
“저는 그 그림이 뭔지 알아야 해요.”
셸란은 앉는 것도 모자라 아예 바닥에 드러누웠다.
디에프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누웠다.
“하아…….”
렌펠 부인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두 분은 여기 계세요. 저는 가서 강낭콩 푸딩을 먹겠습니다.”
“…….”
그 말에 셸란이 잠시 몸을 움찔했다.
그래도 쌍둥이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 * *
계속 있으면 감기가 들고도 남을 것이다.
보석실에는 벽난로도 없었다.
할 수 없이 플램바드 부인과 헨튼 부인은 리에네가 임신했을 때 쓰던 화로를 꺼내 와 불을 피워 주었다.
그리고 두툼한 담요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눕게 했다. 쿠션과 이불도 잔뜩 생겨났다.
그러니 춥지는 않았는데 배가 조금씩 고파지기 시작했다.
“강낭콩 푸딩 먹고 싶다…….”
셸란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아무거나 다 먹고 싶어.”
디에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간식을 안 주겠다고 한 건 렌펠 부인이었으니까 플램바드 부인은 다르지 않을까?”
“……바보 같은 소리야. 둘은 한편이야. 쌍둥이나 다름없다고.”
“우리도 쌍둥인데. 그래도 셸란하고 나는 다르잖아.”
“말꼬리 잡지 마. 내 말은 두 사람이 다르게 행동할 리 없다는 거니까.”
“하지만 플램바드 부인은 엄청 친절해.”
“렌펠 부인도 그랬어.”
“그건 그렇네…….”
디에프가 시무룩해진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배가 고프고, 심심하고, 보석실은 깜깜했다.
“셸란. 나 있지……. 어마마마가 보고 싶어.”
“아바마마도.”
“아바마마는 우리가 이런 걸 알면 혼내실 것 같아.”
“그건 그래. 하지만 어마마마라고 다르진 않을 거야.”
“그래도 이유는 들어 주실걸.”
“응. 이유를 듣고 혼내시겠지. 잘못한 일에 대해서는.”
“그건 그렇지…….”
“그러니까 잘못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을 말해야 해.”
“맞아.”
쌍둥이들은 다시 조금 기운을 냈다.
“어마마마가 오면 뭐라고 할지 생각해 보자.”
“그래. 그게 좋겠어.”
밤이 계속 흘렀다.
쌍둥이들은 눈보라에 가려져 희미해진 달빛을 받으며 깜박 잠이 들었다.
* * *
“네? 뭐라고요?”
리에네는 새벽이 다 되어서야 성으로 돌아왔다.
얼음이 언 강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몹시 힘들었다.
그래도 다 같이 애를 쓴 덕분에 아무도 죽지 않았다. 부상자들은 더러 있었지만 사망자는 없었다. 감사한 일이었다.
눈보라가 그치는 대로 더 튼튼한 다리를 만들 생각이었다.
하여간 그런 하루를 겪고 파김치가 되어 성으로 돌아오니 아이들이 없었다.
“그래서 지금 두 분 다 보석실에 계십니다. 저녁을 굶고 잠이 드셨네요.”
“기가 막혀서……. 그런 고집은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요?”
플램바드 부인은 딱 잘라 답했다.
“전하께 배웠지요.”
“제가요?”
“설마 아니겠습니까.”
리에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나는 그래 본 적이 없다고요. 가이너스의 핏줄 탓이겠죠.”
이번에는 플램바드 부인이 고개를 저을 차례였다.
“……뭐, 그리 생각하십시오. 목욕물이 아직 데워지는 중이니 조금만 기다리세요. 옷이라도 먼저 갈아입으시겠습니까?”
“아뇨. 아이들부터 볼게요. 고집 피우는 걸 계속 놔둘 수는 없잖아요.”
리에네가 플램바드 부인을 앞세워 보석실로 향했다.
쌍둥이가 잠든 보석실에는 헨튼 부인이 곁에 앉아 아이들을 살피고 있었다.
“오셨습니까. 가신 일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부상자가 몇 명 생겼어요. 다행이라고 해야겠죠. 그나저나 아이들 때문에 벽난로도 없는 방에서 부인이 고생이었네요.”
“아이들을 키우면 원래 이 일 저 일 있는 법이지요. 그래도 두 분 다 의젓하십니다.”
“아, 그건 지금은 못 믿겠어요. 이런 말썽쟁이들을 두고.”
외투만 겨우 벗은 리에네가 아직 찬 기운을 품은 채 아이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셸란. 디에프.”
“……으음. ……어, 어마마마?”
디에프가 먼저 눈을 떴다. 셸란은 잠귀가 어두운 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디에프가 일어나면 금방 따라서 잠을 깨고는 했다.
“어마마마!”
셸란이 답삭 안겨들었다.
“나는 옷이 젖었을 텐데. 이렇게 안으면 네가 추울 거야, 셸란. 떨어져 있는 게 좋아.”
“너무 뵙고 싶었어요.”
“저도요.”
셸란이 하는 짓을 디에프가 따라했다.
리에네는 더는 말리지 못하고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걸 보면 천사가 따로 없는데 말이야.
그런데 부인들을 그렇게 고생시켰다고. 대체 왜 그랬을까.
“그래. 나도 너희들이 아주 많이 보고 싶었어. 가능하면 둘 다 얌전히 침대에서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이렇게 봐도 반가운 건 어쩔 수가 없네.”
“저도요.”
“저도 반가워요.”
이만하면 안아 주는 건 충분히 했다 싶을 때 리에네가 아이들에게서 몸을 떼어 냈다.
“그럼 이제 인사 말고 다른 걸 해야지. 일단 너희들이 왜 침실이 아니라 여기 있는지 말해 볼까?”
“그게요…….”
셸란이 영특해 보이는 눈을 도르륵 굴리는 걸 리에네는 놓치지 않았다.
“그래. 말해 봐.”
“그게요오…….”
이어서 나오는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아무도 없는 데서 말씀드리겠어요. 이건 나우크의 왕실을 위협하는 아주 크고 중요한 문제니까요.”
“뭐……?”
디에프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쌍둥이들은 몹시 진지했다.
* * *
아이들은 정말 눈 깜박할 새 자라는구나…….
그게 오늘 말썽을 피운 얘기를 다 듣고 난 리에네의 감상이었다.
보석실에서 자리를 옮겼다.
두 부인이 아이들을 침실로 옮기는 동안 리에네는 간단하게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시간이 매우 늦었는데도 아이들은 리에네가 올 때까지 눈을 말똥말똥 뜬 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얘기를 시작했다.
디에프는 문으로 가서 혹시나 누가 엿듣는지는 않는지 확인했고, 셸란은 리에네의 귀에 대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하 통로를 알고 있는 렌펠 경이 수상했다는 것, 그러다 왕실 기록서를 찾아보았다는 것, 기록의 일부가 사라졌다는 것, 그래서 보석실까지 갔다는 것. 보석실에서 아주 수상쩍은 그림을 발견했다는 것, 렌펠 부인이 그림에 대해 알고 있는 사실을 숨겼다는 것.
그래서 더 의심스럽다는 얘기가 쉬지도 않고 조곤조곤 흘러나왔다.
언제 이렇게 컸지.
나는 그 남자가 나타날 때까지 조금도 몰랐던 일이었는데.
나우크의 과거를 숨겨 둔 이유는 하나였다.
아이들은 아직 어렸다. 이제는 거의 30년 전 일이 되어 가는 그 과거는 많이 치유가 되었다지만 아이들이 알기에는 여전히 너무 무거웠다.
성년이 될 때까지는 비밀에 부쳐 두고자 했던 일을 아이들이 스스로 알아냈다.
리에네는 그게 기특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조금 서운하기도 했다.
이렇게 빨리 자라면 나는 어떡하라고.
나는 아직 너희들이 마냥 작기만 한 아기들 같은데.
“렌펠 경은 왕족이 아니야.”
어쩌면 아이들은 비밀을 알아도 될 만큼 자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르사크 가문 이전에 왕관을 물려받았던 가문은 가이너스였어. 렌펠이라는 성은 내가 준 거야. 가이너스의 피를 지켜 준 대가로.”
“……?”
“음…….”
아이들은 헷갈리는 눈치였다.
“가이너스의 피가 지켜졌다면 어째서 아르사크가 왕관을 물려받은 건가요? 그러는 왕국은 없잖아요.”
“그건 나우크가 몹시 특별한 곳이었기 때문이야.”
“어떻게 특별한데요?”
“음, 그건…….”
리에네가 말을 고르던 중이었다.
쿵쿵!
누군가 다급히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리에네가 문을 향해 말했다.
덜컥, 쌍둥이의 침실 문이 열리고 들어온 사람은 리에네와 함께 알라우딘으로 갔던 티와칸이었다.
그는 아직 몸이 다 데워지지 않아 코끝이 빨갰다.
“전하! 주군께서 돌아오고 계신답니다. 대강 한 시간 정도 거리가 남은 것 같습니다.”
“아, 정말인가요?”
저도 모르게 입가가 벌어졌다.
다행이었다.
모두가 무사했다.
쉴 새 없이 인간 세상을 휘몰아치는 눈보라가 조금은 포근하게 느껴졌다.
리에네가 벌떡 일어섰다.
“한 시간이라면 얼마 남지 않았네요. 성문까지 마중을 가야겠어요.”
“저도 갈래요.”
“저도요.”
쌍둥이들이 리에네의 치맛자락에 매달렸다.
아주 늦은 시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억지로 재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눈보라는 곧 그칠 테고, 그러면 눈보라 때문에 소식이 늦어진 누군가를 반갑게 마중 나가는 일도 봄처럼 녹아 버릴 테니까.
“대신 망토를 단단히 둘러야 해. 양말도 신고, 귀마개도 해야 해.”
“네, 어마마마.”
아이들과 함께 꽁꽁 몸을 감싼 리에네가 성문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