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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 외전 (11) (145/145)


145. 외전 (11)
2022.08.21.



타닥타닥.

벽난로 안의 장작이 타는 소리가 아늑했다.

씻고, 잠옷을 입고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간 이들도 함께 아늑했다.

오늘은 쌍둥이들의 침대를 밀어서 나란히 붙였다. 졸지에 아주 커다란 침대가 생겼다. 가족들이 모두 함께 누울 수 있는 큰 침대였다.

그래서 쌍둥이들은 행복했다. 새벽이 다가왔지만 졸린 줄도 몰랐다.

디에프는 서랍장에 눌린 부분에 멍이 든 걸 알았지만 괜찮았다. 어마마마가 호호 불어 주니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셸란의 손톱도 마찬가지였다.


“어마마마. 이제 얘기해 주세요. 아바마마가 씻고 오시면 얘기를 마저 해 준다 하셨잖아요.”

셸란은 리에네에게 찰싹 들러붙어서 계속 지난 일을 물었다.


“맞아요. 이제 해 주세요.”

디에프가 반대쪽에서 들러붙었다.

네 명이 함께 있을 때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아이들은 리에네에게 들러붙었고, 블랙은 아이들을 안아 주는 리에네를 안았다.


“음……. 그래, 그랬지.”

리에네가 살짝 난처해진 얼굴로 블랙을 돌아보았다.


“안 할 수는 없겠죠?”

“그럴 것 같습니다.”

블랙이 정수리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마치 응원이라도 하는 것 같아 리에네가 작게 웃었다.


“나한테 전부 미루는 건 아니죠?”

“내가 해도 되겠지만 아이들이 듣기 좋게끔 순화할 자신은 없어서.”

“핑계예요.”

쪽, 블랙이 다시 입술을 붙였다.


“최선을 다해 거들겠습니다.”

“아, 너무해.”

리에네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쌍둥이에게로 눈을 돌렸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렌펠 경은 왕족이 아닌데 어떻게 왕족만 아는 길을 알고 있어요?”

고맙게도 셸란이 물꼬를 터 주었다. 리에네가 셸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을 했다.


“그건 렌펠 경이 렌펠이라는 이름을 갖기 전에도 왕을 지키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야.”

“그 왕은 아르사크가 아니라 가이너스였나요?”

“맞아.”

“가이너스의 마지막 왕이 아바마마하고 똑같은 눈을 가진 건 아바마마가 가이너스였다는 뜻인가요?”

“그것도 맞아.”

“그럼 아바바마의 성이 티와칸으로 알려진 데는 이유가 있겠네요.”

셸란의 말이 너무 어른처럼 들려와 리에네는 깜짝 놀랐다.


“……그래.”

“알고 싶어요. 얘기해 주세요.”

눈보라가 어느덧 함박눈으로 변했다.

하늘을 찢을 것 같던 거센 바람 소리 대신 소복소복 눈이 쌓이는 소리가 밤을 채웠다.

전혀 옛날이야기 같지 않은 괴롭고도 슬픈 과거는 눈 소리가 더해져 조금은 부드러워졌다.


“……래서 아바마마가 청혼을 하기 위해 나우크로 왔을 때는……. ……아, 이제 졸린가 보네.”

살살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이 잠을 불렀다.

아이들은 어느 순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블랙이 몸을 일으켜 아이들을 반듯하게 눕혔다.


“근, 데요…….”

눕히는 대로 얌전히 눕는 디에프와는 달리 셸란이 무슨 말을 중얼거렸다.


“아르사크의 왕이…… 살아 있었으면…… 기다렸…… 거예요.”

“음, 셸란? 뭐라고 했니?”

“그림…… 버리지 않았…… 잖아요.”

“…….”

“기다리고 있었…… 거예요. 가이너스의 어린 왕자가 돌아오는…….”

입술을 우물대던 셸란이 완전히 눈을 감았다. 침대에 누운 셸란에게 베개를 받쳐 주고 나자 블랙이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셸란이 한 말이요?”

“네.”

“그건…….”

잠깐 생각하던 리에네가 미안한 얼굴로 블랙의 손등을 도닥였다.


“그림 한 장으로……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의미가 크잖습니까.”

“그럴까요. 누가 한 건지는 모르는 거잖아요. 인장이 찍혀 있다고 해서 꼭 아바마마가 한 건 아닐 수도 있고.”

“생각해 봐요. 그림이 한 장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영화롭던 시절이었으니 그림 같은 거야 차고도 넘쳤을 것이다. 빈 벽이 보이지 않도록 그림과 장식물이 걸려 있었을 것이다.

가이너스 왕가가 연상되는 것들은 모두 사라졌다.

사라진 왕실 기록서를 보면 가이너스의 흔적을 지우는 데 얼마나 집착적이었나 알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남긴 그림이었다.

의미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쩌면 그 그림이 우리가 찾아야 했던 마지막 열쇠였나 봅니다.”

과거는 되돌릴 수 없고, 이미 죽은 자들도 되돌릴 수 없었지만, 용서할 수는 있었다.

그 당시 일곱 가문의 반역을 주도했던 테르난 클라인펠터가 죽은 이상 부친이 어떤 입장이었는지 명확히 알 길은 사라졌지만, 용서로 피어날지도 모르는 작은 씨앗 하나가 남아 있었다.


“당신은 정말 그걸로 다 잊을 수 있어요?”

리에네가 작게 속삭이듯 물었다.


“나는 이미 다 잊었습니다. 당신도 안다고 생각했는데.”

“……맞아요. 내가 못 잊은 거예요.”

“이제 그만 잊어도 됩니다. 사실 진작 잊었어야 할 일입니다.”

하지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쉽게 잊으라고 하는 블랙이 이상한 것이었다.

이상하고…… 굉장한 사람.

내가 이 남자였다면 나우크는 영영 물을 되찾지 못했을 거야.


“이제 그만 우리도 잘 시간 같은데……. 피곤하지 않습니까?”

블랙이 귓가에 입술을 붙이며 물었다.


“네. 우리도 돌아가요.”

잠결에 그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디에프가 발로 이불을 걷어찼다. 셸란이 머리로 베개를 밀어냈다.

블랙이 잠시 리에네를 놓고 돌아서서 이불을 덮어 주고 베개를 괴어 주고 했다.

손길은 자상한 아빠의 그것이었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하다는 게 흠이었다.


“이러면 곤란한데.”

“뭐가요?”

“아이들이 당신을 너무 좋아해서.”

“그게 곤란해요?”

“내가 당신을 혼자 차지할 시간이 계속 줄어들잖습니까.”

“그건 또 무슨 소리죠?”

블랙이 아이들을 힐긋 곁눈질로 가리켰다.


“봐요.”

이번에는 셸란이 이불 안으로 파고들다 아예 이불을 떨어트렸다. 블랙이 이불을 줍는 사이 셸란이 슬금슬금 옆으로 몸을 옮겨 디에프의 이불을 빼앗기 시작했다.


“이렇게 잠버릇이 나쁜지 몰랐네요. 그런데 이게 왜 나를 좋아한다는 거예요?”

블랙은 디에프의 이불을 찾아 주고, 셸란에게 원래 이불을 덮어 주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라서.”

“음?”

“당신이 보고 있으면 유난히 심해져요. 가지 말라고 붙드는 것처럼.”

“……? 정말로요? 난 몰랐는데.”

“당신은 나처럼 예민하지 않으니까.”

어쨌거나 이불을 잘 덮어 준 블랙은 리에네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가요. 아, 발자국 소리는 내지 말아요. 그러다 정말 못 떠날 수도 있으니까.”

“설마요.”

리에네가 걸음을 옮기자 쌍둥이 중 누군가가 끄응, 하고 숨소리를 내뱉었다.

리에네가 고개를 돌리자 블랙이 양손을 리에네의 귀에 얹었다.


“그냥 잠결에 나오는 소리니까 신경 쓰지 말고 걸어요. 조용히.”

“발소리를 죽여도 문을 열 땐 소리가 날걸요.”

“일단 문을 열면 되돌릴 수 없습니다.”

“누가 또 이불을 차면 어떡해요.”

“추우면 알아서 찾아 덮을 겁니다.”

“그건 너무 매정한 부모 같은데.”

“합리적이고 공정한 부모입니다. 이불을 차면 춥다는 깨달음 정도는 얻게 놔둬요.”

“으흠.”

여전히 매정하게 들리긴 했지만 블랙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매일 밤 자는 걸 내내 지켜볼 수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아이들은 몹시 빨리 자랐다. 리에네에게는 한없이 아기 같아도, 이젠 아기가 아니었다. 걷어찬 이불 정도는 스스로 다시 덮을 수 있을 나이였다.

끼이익, 탁.

조심스럽게 문을 연 블랙이 서둘러 문을 닫았다.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아, 까먹고 있었어요.”

왕의 침실까지는 손을 잡고 걸었다. 멀지 않은 침실을 향해 가며 리에네가 속삭였다.


“둘 다 벌을 받아야 하는데. 오늘 그런 사고를 쳤으니까.”

“동의합니다. 부인들을 속이고 침실을 비운 건 잘못한 일이니까.”

“보석실 바닥에 누워 떼를 쓴 것도요. 아, 보석실 열쇠를 몰래 빌려온 것도 안 되죠. 무슨 벌을 내리면 좋을까요? 헨튼 부인은 앞으로 강낭콩 푸딩을 만들어 주지 않겠다는 말을 했대요.”

“그건 별개고.”

“그렇죠. 뭐가 좋겠어요? 눈을 치우는 걸 거들라고 할까요?”

눈보라가 쳤으니 바깥에는 못해도 종아리까지 눈이 쌓였을 것이다.

얼기 전에 어서 눈을 치워야 하는데, 성 안의 모두가 들러붙어야 할 만큼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방금 전까지 아이들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며 매정하게 굴던 블랙이 감기를 걱정했다.


“따듯하게 입히고, 감기가 들 만큼 오래 밖에 놔두지 않으면 돼요. 당신이 공연히 눈싸움을 거들지만 않으면 감기 걸릴 일은 없을걸요.”

“좀 매정한 것 같은데.”

“와. 그건 내가 한 말인데. 적반하장 같아요, 전하.”

리에네가 킥킥 웃으며 침실 문을 열었다.

플램바드 부인이 미리 불을 피워 놓은 방은 포근했다.

탁.

블랙이 발을 움직여 문을 닫았다.

손을 쓰지 않은 것은, 두 손이 지금 몹시 바쁘기 때문이었다.


“보고 싶었습니다.”

양손이 리에네의 뺨을 감싸 쥐었다.

손바닥에서 시작된 따듯한 열기가 전신에 골고루 번지기 시작했다.


“나도요.”

“그럼 보여 줘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일렁이는 장작불 외에는 온통 어둠이었다.

리에네는 어둠이 이렇게 포근하게 느껴지는 곳은 세상에 또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요?”

“당신이 원하는 대로.”

블랙이 어둠처럼 그윽해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숨결이 피부에 닿아 어깨를 오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고개를 좀 낮춰 줘요.”

“기꺼이.”

블랙이 무릎을 살짝 구부렸다. 리에네가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에 걸며 입술을 겹쳤다.

동시에 몸이 번쩍 들렸다.

두 사람에게는 너무 익숙한 일이었다.


“내일은 다들 늦잠을 자면 좋겠네요.”

등이 푹신한 이불에 닿았다. 한 손으로 리에네의 목을 받친 블랙이 다른 손으로는 가운의 매듭을 풀었다.


“그럴 겁니다. 다들 피곤했으니.”

“그건 당신도 피곤하다는 말 같은데.”

“네. 피곤해질 예정입니다. 아침이 되면.”

옷감이 바스락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리에네는 여전히 숨 막히게 근사한 남편의 얼굴을 며칠간의 그리움을 담아 어루만졌다.


“지금은 조금도 안 피곤하다는 거네요?”

“그럼 큰일이지.”

블랙이 고개를 숙여 몸을 겹쳤다. 매일 더 달아지는 것 같은 입술이 귓불을 스쳐 뺨을 간질이며 내려왔다.


“당신도 아니길 바라는데.”

입술이 닿은 곳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흐트러지는 옷감도, 구석구석 닿는 손길도, 가까이에서 스며드는 숨결도 눈물이 날 만큼 좋았다.


“나는 미룰 수 있을 것 같아요. 피곤해지는 걸.”

리에네가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블랙이 한 팔로 리에네의 다리를 감싸 무릎을 세우게 하며 물었다.


“언제까지 미룰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음……. 글쎄요. 내일 아침까지?”

“좋군요.”

이어서 입술이 삼켜졌다.

그 어떤 것도 부럽지 않은 순간이 찾아들었다.

리에네는 눈을 감고 나직한 한숨을 흩뿌리며 블랙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

다음 날 아침으로 가는 시간은 아직 많이 남아 있었다.

나우크 성은 유례없이 늦은 아침을 맞이했다.

밤사이 쌓인 눈에는 새 발자국이 장식처럼 남았다.

정오 해가 뜰 무렵, 이제야 잠에서 깨어나 아침밥을 든든히 먹은 사람들이 나와 눈을 치우기 시작했다.

눈을 치우던 일이 눈사람을 만드는 일이 되고, 이어서 눈싸움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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