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르닐의 연구실에서 긴급회의가 열렸다.
내용은 수도에서 돌아다니고 있는 짝퉁 선크림에 대한 것!
서로 눈치만 보고 있는 가시방석 공간 속.
셋 중 가장 심기 불편한 얼굴을 하고 있던 라네즈가 불편한 침묵을 깨트렸다.
“요즘 나 빼고 둘이서 뭘 하고 있나 했더니, 이런 걸 만들고 있었던 거였어?”
“딱히 형을 따돌리려고 한 건 아니었어. 애초에 형은 이런 거에 관심 없잖아.”
“무슨 소리야? 나도 화장품에 관심 많거든?”
라네즈의 반응에 아르닐과 엘레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 저건 또 무슨 금시초문 발언이래?
크흠. 헛기침을 한 라네즈가 주머니 속 호랑이 연고를 꺼내 들었다.
“자, 봐봐. 발론드 공작가에 있을 때 나는 이걸 매일 발랐었다고.”
“…이건 연고 아냐?”
“화장품에 관심 많다면서 왜 연고를 꺼내고 그래?”
“어? 이거 화장품 아니야? 몸에 바르는 걸 보고 화장품이라고 하는 거 아니었어?”
라네즈의 당당한 소신 발언에 두 아이의 눈이 짜게 식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형의 지능을 너무 과대평가했던 것 같아.”
“뭐? 너 지금 시비 거는 거야?”
“딱히. 그냥 화장품이랑 의약품도 구분 못하는 사람이 조금 신기했던 것 정도?”
“우씨. 시비 거는 거 맞잖아!”
라네즈가 발끈하자 아르닐은 모르는 척 휘파람을 불었다.
말똥말똥. 엘레인이 쳐다보고 있어서 선빵 날릴 수도 없고.
결국,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애써 진정시킨 라네즈가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어쨌든 네가 만든 선크림을 유통하기도 전에 비슷한 물건이 판을 치고 있다, 이거지?”
“맞아. 굳이 포도 향을 쓴 것도 그렇고 얼굴에 발라서 미백 효과를 내는 것과 햇볕에 살이 타는 것을 막는 기능을 내세우는 것도 똑같아.”
“심지어 로고까지 비슷하다고 하니 이거 완전 빼도 박도 못하네.”
“끄응.”
아르닐의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연구실 보안을 신경 쓰지 않은 것은 엄연히 자기 잘못이었지만, 그래도 막상 일이 벌어지니 속이 쓰린 것은 어쩔 수 없다.
심지어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런데 그 선크림을 사용한 사람들의 피부에 문제가 생겼다라….”
“작은 문제도 아니고 살이 썩고 문드러지는 엄청난 문제지.”
아르닐이 정정하자, 엘레인과 라네즈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지금 수도는 이 놀라운 화장품 때문에 난리가 난 상태다.
처음엔 눈에 띄게 피부가 확 좋아지고 탱탱해진다는 소문에 너도나도 이 화장품을 사들이며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물건값이 꽤 나가서 대부분의 소비자가 부유한 평민과 귀족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
물론 이것은 숫자상으로 큰 피해를 내지 않았다 뿐이지, 짝퉁 선크림을 사용한 사람들은 현재 지옥을 겪고 있었다.
“누가 봐도 네 걸 훔쳐서 똑같이 만든 것 같은데…. 혹시 네 것도 며칠 사용하면 살이 썩는 거야?”
“무슨 소리야? 내가 만든 선크림은 절대 그렇지 않아! 안전한 성분들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도 그렇고 이미 임상 시험까지 마친 상태란 말이야!”
“아, 알았어. 난 그냥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지.”
씩씩거리며 수치스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고 있는 아르닐.
라네즈는 그런 동생의 모습에 미안하다고 사과하며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그럼 짝퉁 선크림을 만든 놈들은 안에다가 뭘 넣은 거래? 대체 뭘 넣었기에 그런 심각한 증세를 보이는 거야?”
“…수은이야.”
“뭐? 수은이 뭔데?”
“있어. 중독되면 위험한 중금속이.”
몇 년 전, 수은을 다루던 연금술사 몇 명이 정신 이상 증세와 심각한 통증을 호소하며 병상에 드러누웠다.
원인은 수은을 가열한 증기에 많이 노출된 탓.
증기로 노출돼도 이 정도인데 피부에 직접 바르기까지 했으니….
현재 사람마다 다르지만, 빠르면 6일째 사용한 사람부터 서서히 증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나마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소수라서 이 정도인 거지, 만약 화장품을 사용한 모든 사람이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 지금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발칵 뒤집어질 것이다.
“근데 말이야. 우리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이렇게 고민할 필요가 있나?”
“어? 그건 그렇긴 한데….”
아르닐이 말을 흐렸다.
뭔가 마음에 걸려 하는 아르닐의 모습에 라네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놈들이 네 물건을 훔쳐서 베낀 건 괘씸하지만, 일이 이렇게 됐는데 ‘쟤네들이 내 거 베꼈어요!’라고 할 순 없는 노릇이지. 잘못하다간 화살이 우리 쪽으로 돌아올 수도 있어.”
“…….”
라네즈의 말이 맞았다.
하지만 왜일까? 형의 말에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었다.
아르닐이 침묵하고 있을 때. 그것이 긍정의 침묵이라고 생각한 엘레인은 괜히 안절부절못했다.
‘이거 이러면 안 되는데?’
아르닐이 이대로 포기하면 애써 만든 선크림을 판매할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면 엘레인의 몫도 날아가는 거고, 목돈 쌓는 것도 실패….
“포기하면 안대!”
“응? 하지만 괜히 엮였다가 쌍으로 욕을 먹을 수도 있는데.”
“구롬 이 일 땜에 고통받는 사람들 그냥 내버려 둘 꺼야…?”
그렁그렁.
엘레인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얼굴을 하자 라네즈와 아르닐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그들이 허둥지둥거리며 연신 아니라고 고개를 젓자 엘레인이 마지막 대미를 장식했다.
“글고 겨우 이거 때문에 아르 오빠가 열심히 만든 선크림 못 팔게 된 거. 에레이 너무 슬퍼.”
“엘레인….”
엘레인의 진심(?)이 마음에 닿은 걸까?
허공을 유영하던 손을 거두어낸 아르닐이 굳게 결심한 얼굴로 말했다.
“아무래도 형을 불러야겠어.”
“…누구? 설마 첫째 형?”
아르닐의 말에 라네즈는 물론, 엘레인도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래. 형은 이런 쪽으로 머리가 잘 돌아가잖아. 어쩌면 우리가 피해를 받지 않게 하면서 이 일을 해결해줄 수도 있어.”
“그렇긴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형을 끌어들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마탑주를 돌려보내려고 이미 한 번 형의 이름을 빌려(?) 썼었다.
그걸 기억해낸 라네즈가 영 떨떠름한 얼굴로 말하자 아르닐이 뚱한 얼굴로 답했다.
“그래도 아버지 귀에 들어가는 것보단 낫지.”
“좋았어. 형을 부르자!”
“???”
엘레인은 황제 이야기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결정을 내려버리는 라네즈를 보며 입을 떡 벌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것 아닙니까?’
많은 의미가 담긴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자니, 아르닐이 엘레인의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편지 쓰는 건 엘레인이 잘하니까 우리 좀 도와주라.”
“응? 그치만 나 글씨 잘 몬 쓰는데….”
“글 쓰는 건 내가 할 테니까 내용물에만 신경 쓰면 돼. 어떻게, 안 될까…?”
여전히 편지를 쓰는 데에는 젬병인 두 쌍둥이 형제라, 그나마 편지 좀 써 본 경력이 있는 엘레인의 힘이 절실했다.
아르닐이 옆구리를 콕콕 찌르자 눈치껏 다가와서 불쌍한 눈빛을 보내는 라네즈.
쌍둥이 형제의 지극정성 부탁에 결국 엘레인의 작은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라써. 내가 도와줄게.”
“다행이다. 덕분에 살았어!”
“역시 꼬맹이라면 도와줄 줄 알았다니까?”
가장 힘든 관문을 넘었다는 생각에 라네즈와 아르닐이 서로를 얼싸안으며 기쁨을 표출했다.
그리고 그 순간.
벌컥!
“화, 황자님!”
“엉? 빌이잖아?”
“아씨. 저리 떨어져.”
라네즈의 전속 시종. 빌의 등장에, 뒤늦게 자신이 무슨 자세를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아르닐이 형을 밀쳤다.
그러나 균형 하나 흐트러지지 않는 자세로 동생에게서 떨어져 나간 라네즈가 헉헉. 숨을 고르는 빌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일이야? 귀신이라도 본 사람처럼.”
“예? 그, 그게. 지금 밖에 1황자님이 오셨다는데요?”
“?”
데구르르. 한 차례 눈을 굴리며 하는 시종의 말에 세 아이의 몸이 덜컥 멈추었다.
그러니까 지금 누가 왔다고?
* * *
1황자는 2년 전과 별다를 바 없는 황궁을 바라보았다.
여덟 살 무렵.
천재적인 두뇌를 인정받아 일찍이 아카데미에 입학했던 그는, 열 살이 된 지금 벌써부터 고학년 수업을 듣고 있다.
워낙 이례적인 일이기에 사건 사고도 잦았고, 문맥에서 알 수 있듯이 나름 아카데미에서 바쁘게 살아왔던 그였기에 변함없는 황궁의 모습이 퍽 신기했다.
히히힝——
그렇게 시답잖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어느덧 문 앞까지 다가온 마부가 열심히 1황자의 눈치를 보며 말을 꺼냈다.
“저, 황자님. 혹시 언제 내리실 건지….”
“조금만 더 기다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예? 예에….”
안쓰럽게도, 있는 용기 없는 용기 다 내어 물어본 마부는 짤막한 두 마디에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더 지났을까.
황궁 외벽에 사용된 재질을 모두 파악했을 무렵.
저 멀리 소란스러운 소리와 함께 낯익은 얼굴의 두 아이가 헐레벌떡 뛰어오는 게 보였다.
끼이익. 탁.
기다리고 있던 아이들의 등장에 1황자도 몸을 움직였다.
드디어 1황자가 마차에서 내린다는 생각에 마부의 얼굴이 매우 밝아지는 것을 보며. 1황자의 그림자가 작게 일렁거렸다.
“5분 30초인가.”
자신이 왔다는 소식을 저쪽으로 보낸 지 딱 5분 30초가 지났다.
신체적인 성장을 해서인지 생각보다 빠릿빠릿한 동생들의 움직임에 한쪽 눈썹을 들썩거리자, 아까보다 조금 더 가까운 거리에서 재잘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뭐야. 진짜로 왔잖아?”
“헉헉. 말은 그렇게 하면서, 허억. 형이 미리 부른 거 아냐?”
“미쳤어? 내 마음대로 형을 막 부르게? 그리고 너 운동 좀 해라. 빌보다 더 비실거리면 어쩌자는 거야?”
“마법사는 비실거려도 되거든?”
2년 전보다 훨씬 사이가 좋아 보이는 두 쌍둥이 형제.
상당히 달라진 분위기를 뽐내며 지척까지 다가온 녀석들이 이제야 첫째 형을 보며 눈치를 봤다.
“혀, 형. 왔어?”
“키 많이 컸네….”
잔뜩 주눅이 든 아르닐과 부럽다는 얼굴로 첫째 형을 바라보는 라네즈.
1황자는 그중 땅 밑으로 꺼질 것 같은 아르닐을 똑바로 보며 한 걸음 다가갔다.
“아르닐. 예전보다 얼굴색이 많이 좋아졌구나.”
“응? 고, 고마워?”
“그런가. 내 마법 논문이 잘 되어가서 기분이 좋은 거였나?”
“어헉!”
아르닐이 헛숨을 들이켰다.
역시 알고 있었던 건가!?
예전부터 정보 수집력 하나는 엄청난 사람이었으니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막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저 얼굴을 보고 있자니, 뱀 앞의 생쥐처럼 온몸이 뻣뻣해진다.
아르닐이 아무런 반박도 못하고 딱딱하게 굳어있는데, 이번엔 1황자의 시선이 라네즈에게로 향했다.
“그나저나 라네즈. 등에 업고 있는 건 뭐지?”
1황자는 라네즈의 등에 업혀 있는 인형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라네즈에게 이상한 취미가 생겼다는 정보는 없었는데….
“그런 거 아니거든!”
“…….”
“요!”
서늘한 시선에 재빨리 뒷말을 덧붙인 라네즈가 엘레인을 사뿐히 내려놓았다.
든든한 등에 가려져 있다가 그제야 제대로 모습을 보인 엘레인은 황제를 연상시키게 하는 미소년을 보고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한 마디로 바늘 하나 찔러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처럼 생겼다는 뜻이다.
“아, 안냐쎄요.”
“그렇군. 이 아이가 이번에 아버지께서 입양했다던 그 아인가.”
재빨리 고개 숙여 인사하자, 고저 없는 목소리가 귓가를 때린다.
분석하듯 엘레인을 바라보던 1황자는 다시금 점이 되어 사라지는 아르닐을 향해 말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뭐라 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하지 마.”
“핫! 정말?”
“대신 무슨 일로 그런 짓을 한 건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다.”
“…물론이지.”
확 밝아진 얼굴이 확 어두워진다.
엘레인은 진짜 1황자 앞에서 꼼짝도 못하는 쌍둥이 형제를 보며 눈알을 데룩 굴렸다.
‘이제 대충 이야기가 끝난 것 같으니 우리 쪽 이야기를 해도 되지 않을까?’
때마침 라네즈도 그 생각을 했는지 기세 좋게 앞으로 나서며 외쳤다.
“형! 근데 우리 지금 진짜 큰일 났어!”
“큰일?”
“수도가 발칵 뒤집힌 건 이미 알고 있지? 그거 원래 우리가 만든 건데 누가 우리 걸 따라 만들었다고!”
속 시원하게 외친 라네즈가 너도 말 좀 해보라는 듯 아르닐의 옆구리를 찔렀지만, 소심하게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하기만 한다.
결국, 보다 못한 엘레인이 라네즈를 도왔다.
“그 사람 때문에 우리도 나쁜 사람으로 몰릴 수도 이써!”
약간 두서없고 뭔가 많이 생략되어 있었지만, 1황자가 현 상황을 이해하기엔 아주 충분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 사건의 범인이라는 거냐?”
“어?”
무시무시하게 옭아매는 서늘한 기운.
제2의 황제라고 봐도 손색없는 그의 차가운 눈빛에 세 아이는 꽁꽁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