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4화 (34/417)

34화

다행히 오해는 오래 지나지 않아 풀렸다.

1황자를 연구실로 데려가, 수도에 나돌아다니는 가짜와 아르닐이 만든 진짜가 가진 성분을 하나하나 비교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만든 샘플을 하녀가 훔쳐서 지인에게 전해준 뒤, 그 지인이 진짜가 나오기도 전에 가짜를 만들어서 수도에 풀었다…?”

“맞아. 아까도 보여줬다시피 우리 제품에는 사람에게 해로운 건 하나도 없어. 오히려 짝퉁을 내놓은 사람 때문에 애먼 사람들과 우리가 피해를 보고 있는 거라고.”

1황자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져서인지 아르닐이 당당하게 자기주장을 하고 나섰다.

과연…. 동생의 호소에 고개를 끄덕인 1황자는 순식간에 결정을 내렸다.

“너희들은 이 일에서 손 떼.”

“잠깐만, 형. 대체 무슨 일을 하려고?”

다짜고짜 손을 떼라니.

어이도 없었지만,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아르닐이 겁을 상실하고 1황자의 옷깃을 다급히 붙잡았다.

잠시 그것을 내려다본 1황자가 가볍게 아르닐의 손을 떼어내더니 무미건조한 얼굴로 말했다.

“너희는 이 물건을 만든 적도 없는 거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는다. 그것만 지킨다면 이 일은 쉽게 해결할 수 있어. 남은 처리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말고 이 일에서 완전히 손 떼.”

싸늘한 그의 말에 아르닐은 주먹을 꽉 쥐었다.

대체 남은 처리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딱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럼 내가 만든 물건들은?”

“방금 말했을 텐데. 그 물건들은….”

“아니! 그건 내가 원하는 게 아니야!”

1황자의 말을 잘라먹은 아르닐은 자기 자신도 깜짝 놀랄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순간 아차 했지만, 이미 내뱉고 난 후.

아르닐은 아무런 감정 없는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1황자에게 자신의 생각을 똑바로 전했다.

“형에겐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이건 내가 열심히 만든, 내 노력의 산물이야. 이걸 만들면서 처음으로 인정도 받았고 덕분에 만드는 즐거움도 알았어. 그런데 그런 걸 쉽게 버리라고?”

“시답잖은 고집 부리지 마. 잘못하면 너는 물론, 황실에 오점이 될 수 있어.”

“하지만…!”

“아무리 네가 결백하다고 한들, 그걸 증명할 사람은 전부 황실 소속이고, 애초에 황자가 이런 불미스러운 일에 엮였다는 것 자체가 스캔들로 삼기 좋지. 그런데도 여전히 네 고집대로 할 셈이냐?”

타박하는 말에 아르닐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가 꾹 다물어졌다.

형의 말이 맞았다.

그의 너무나도 현실적인 지적에 아르닐의 신념이 푹하고 꺾였다.

아니. 완전히 고개가 꺾이기 전.

“방법이 이쓸지도 몰라!”

“엘레인…?”

자리를 박차고 끼어든 엘레인이 두 눈에 힘을 빡 주며 1황자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마주쳐오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공허한 눈동자.

심연과도 같이 깊은 동공에 등골이 서늘해질 때쯤, 엘레인의 시선이 먼저 비켜 내려갔다.

슬프게도 눈싸움에서 졌지만, 이대로 포기할 수는 없는 법!

“수은을 빼내며는 더 이상 피해를 입지 않을 수도 이써!”

“수은을 빼낸다고?”

엘레인의 확신에 가득 찬 외침에 아르닐은 물론, 라네즈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 회귀 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

그때는 아주 먼 미래. 아르닐이 어른이었을 때 그가 만든 선크림을 누군가 따라 만들다가 발생한 일이지만, 결국 내용은 같았다.

지금껏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선뜻 방법을 알려주지 못했지만, 생각해보면 바로 옆에 약초학 지식이 엄청난 분이 있었다.

‘여전히 조합법을 알지 못하지만…. 아르닐이라면 메인 재료만 알려줘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을 거야.’

이전에 약을 개발한 사람도 아르닐이니까.

꼬마 아르닐이라고 해도 못 만들 거란 법은 없다.

그런 마음을 담아 다시 1황자를 올려다보자, 그가 양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그걸 어떻게 빼낼 생각이지?”

“해독제를 만들며는 돼!”

“뭘 만들어?”

1황자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 다음으로 선명한 표정이었지만, 이 역시 부정적인 반응이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미간을 좁히며 자신의 허리에 닿을까 말까 한 엘레인을 슥 내려다봤다.

“우습군. 고작 네 살짜리가 어떻게 해독제를 만든다는 건지….”

이번에도 역시 현실적인 지적.

뼈를 때리는 말에 잠시 침묵한 엘레인은 아르닐의 소매를 땡땡 잡아당겼다.

그러자 화들짝 놀라며 말하는 아르닐.

“어, 그거 내가 도와주면 어떻게든 될 것 같아!”

“힘쓰는 일이라면 내가 도와주면 되고!”

마법과 약초 지식이 풍부한 아르닐에 이어 힘센 라네즈까지 엘레인을 옹호하고 나섰다.

잠시 쌍둥이 형제가 하는 꼴을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내려다보던 1황자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3일. 실패하면 내 뜻대로 하겠다고 약속해.”

“너무 짧아!”

“여유 부릴 시간이 없을 텐데?”

1황자의 말에 현 수도 상황을 떠올린 아르닐이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최선을 다해 볼게.”

“…대신 인력이 부족하면 내게 말해.”

“혀엉!”

아르닐이 잔뜩 감동한 얼굴로 1황자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스윽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

여전히 쌀쌀맞은 첫째 형이었으나, 세 아이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

1황자가 떠나고 엘레인은 메인 약초에 관해 설명했다.

“전에 오빠가 살려준 정령초 있자나. 그 정령초를 쓰면 될 꺼야.”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확실히 정령초를 사용한다면 몸에 나쁜 기운을 몰아낼 수 있을 거야. 그런데….”

아르닐은 인상을 썼다.

그가 알기에는 황궁 내에 존재하는 정령초는 단 하나.

고작 그걸로 수도에 있는 수많은 사람을 모두 구할 수 있을까?

“정령초 정수를 만들며는 한 방울로도 많은 사람들을 구할 수 있지 아늘까?”

“그렇구나! 황실 서고에 가면 정수를 만드는 책을 찾을 수 있을 거야. 하지만 단기간에 물약 한 병으로 수은을 모두 빼내려면 촉매가 필요한데….”

아…!

감탄사를 내뱉은 아르닐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리고는 멍때리고 있는 라네즈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뭐, 뭔데?”

“형. 이건 형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나만 할 수 있는 일?”

아르닐의 입바른 말에 낚인 대어가 팔딱팔딱 뛰었다.

오밀조밀 붙어 있는 근육을 자랑하며 뭐든 부탁하라는 쌍둥이 형의 말에 아르닐의 입꼬리가 사악하게 올라갔다.

“아버지 황좌에 있는 정령석. 그걸 좀 떼어와 줘.”

“뭐어어!? 너 미쳤어? 그 짓거리를 또 하면 이번에야말로 아버지가 날 죽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까 형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하는 거잖아. 아직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보다는 이미 한번 시도해 본 형이 더 잘할 테니까 말이야. 아니면 설마… 아직 어린 엘레인한테 시키려는 건 아니지?”

“너 이 자식! 꼬맹이한테 위험한 일은 절대 안 시켜!”

“그럼 정해졌네.”

아르닐이 라네즈와 자신. 그리고 엘레인을 차례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나는 황궁 서고에. 형은 정령석을. 엘레인 너는 정령초를 뽑아와 줘.”

“알아써. 나한테 맡겨.”

“하씨. 이걸 거절할 수도 없고…!”

흔쾌히 대답하는 엘레인과 벅벅 뒤통수를 긁으며 짜증을 내는 라네즈.

그 두 사람을 보며 아르닐이 빙긋 웃었다.

“역시 가족 하나는 잘 뒀단 말이야.”

첫째 형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우리를 믿고 있으니 기회를 준 것일 터다.

고작 3일뿐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아르닐은 어떻게든 3일 안에 물약을 만들어낼 것이라 다짐하며 힘차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렇게 아이들이 각자의 위치로 움직이고 있을 때, 1황자의 방에서는….

“…이렇게 진행하고 있습니다.”

“흐음.”

황제와 황태후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온 뒤.

2년 만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1황자는 그림자가 푸는 정보를 정리하며 매끈한 턱을 쓰다듬었다.

“처음부터 방법을 알고 있었던 건가?”

“단언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정령초에 대한 정보를 황녀님께서 먼저 말씀하신 것을 보아, 이미 알고 있었을 확률이 높습니다.”

“고작 네 살배기가 그런 희귀 정보를 알고 있다니. 참 신기한 일이군.”

정령초로 수은을 빼낸다는 말은 듣도 보도 못했다.

하지만 정령초의 성질을 생각한다면 아주 불가능한 것도 아니다.

‘과연 보통 인물은 아니라는 건가.’

잠깐 지켜본 결과, 두 동생 사이에 변화가 생긴 원인은 굴러들어온 꼬마 여아가 확실했다.

다행히 그 변화는 긍정적이었으나, 1황자의 심기는 불편했다.

“어떡할까요? 뒤를 캐볼까요?”

“아니. 그래봤자 네 살짜리 꼬마애야. 알아보는 거야 내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면 되는 거고, 지금은 따로 해야 할 일이 있다.”

1황자의 말에 그림자가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주군이 매우 신경 쓰는 것을 뒤로 무르고 다른 일을 시킨다는 것은 그의 칼에 피를 묻힐 시간이 됐다는 것.

귀기가 흐르는 그의 눈동자를 보며 1황자가 명했다.

“놈을 잡아 와. 산 채로.”

덧붙이는 말에 그림자의 잇새 사이로 안타까운 숨이 토해졌다.

아쉽지만 오늘 당장 피를 보지는 못할 것 같다.

***

“성공이다!”

연구실에서 환호가 울려 퍼졌다.

그곳엔 꾀죄죄한 몰골의 아르닐과 곯아떨어진 엘레인. 그리고 황좌를 닦느라 지금 이곳에 없는 라네즈를 대신해, 그의 애검만이 애처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엘레인, 일어나 봐. 드디어 완성했어!”

“우음? 앗! 잠깐 졸았나 바. 미아내….”

“그것보다 이것 좀 봐봐.”

“이거는…?”

엘레인은 투명한 유리 속 영롱한 빛을 내뿜는 약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설마 완성한 거야?”

“그래! 아까부터 계속 말하고 있었다고. 사람들한테는 직접 먹여봐야 알겠지만, 일단 인면 개구리가 먹은 수은은 전부 배출해 냈어.”

아르닐의 손이 수조 안의 물에 둥둥 떠 있는 개구리를 가리켰다.

“근데 오빠. 저거 지짜 인면 개굴이 맞어?”

엘레인은 두 눈을 의심했다.

험상궂은 사람 얼굴이 그대로 보여, 징그럽기 짝이 없는 인면 개구리가 어딘가 해탈한 듯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다.

아니. 개구리니까 사람 좋은 미소는 좀 아닌가.

어쨌든 이건 또 다른 느낌의 징그러움에 인상을 쓰고 있자 아르닐이 엘레인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정령초의 기운이 몬스터에게 영향을 줘서 그런 것 같아. 물론 소형 몬스터이기 때문에 영향을 받을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것 외에 다른 부작용은 전혀 없었어.”

“오빠 지짜 대단해! 그럼 사람들한테 바로 먹여도 되겠네?”

“에헴. 이게 바로 이 아르닐 님의 클라스가 아니겠어.”

여동생의 칭찬에 아르닐의 어깨가 으쓱거린다.

그런 그에게서 잠시 눈을 뗀 엘레인은 약병 옆에서 푹 늘어져 있는 운디네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수고했어, 운디네.’

-무우우!

정령석만으로는 부족하다 생각한 엘레인은 아르닐이 약을 완성하는 족족 운디네에게 정화 기능을 담아 달라고 부탁했다.

어쩌면 저 인면 개구리가 보이는 부작용은 운디네의 정화 기능 때문이 아닐까?

정령초가 뽑혀 나가고 크게 실망한 운디네인데, 이렇게 큰 도움까지 줬으니 조만간 기분 전환 좀 시켜줘야겠다.

“아차차. 이럴 때가 아닌데.”

한동안 으쓱 춤을 추던 아르닐은 뒤늦게 정신을 되찾고는 샘플을 들고 일어났다.

“자, 얼른 가자. 빨리 사람들에게 이걸 먹어야 부작용이 낫지.”

사실 고작 하루 정도의 실험 정도로는 완벽히 안전하다고 볼 수 없지만, 물약 개수도 한계가 있고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는 것도 위험했다.

심지어 엘레인이 보기에 그가 만든 물약은 어른 아르닐이 만들어 배포했던 물약의 색깔과 냄새가 완전히 똑같았다.

물의 정령의 힘이 깃들어서 그런지 회귀 전에 봤던 것보다 더 영롱한 것 같기도 하다.

‘운디네의 힘이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해주겠지.’

약의 효능도 키워주고 안전장치까지 해주니 물의 정령 진짜 최고다.

아르닐의 손을 잡고 일어선 엘레인은 책상 위를 보며 물었다.

“물약은 어느 정도 만들어써?”

“어? 일단 여분으로 열 병 정도?”

이런. 턱도 없다.

사람들에게 물약을 주고 수은을 배출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계속해서 약을 만들어줄 사람도 중요했다.

“오빠는 여기서 계속 물약 만들고 이써.”

“아, 맞다. 나는 물약을 만들어야 되네. 근데 너는 어디로 가게?”

“나는 1환자 오빠 보고 오께. 1환자 오빠가 부족한 인력 빌려준다구 해짜나.”

“그렇구나! 그렇게 하면 되겠네!”

아르닐이 감탄했다. 연구에 집중하다 보니 첫째 형이 했던 말은 까맣게 잊고 있던 상태.

그는 엘레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빙긋 미소 지었다.

“알겠어. 그럼 그쪽은 너한테 맡길게. 잘 부탁해.”

“응! 금방 다녀오께!”

엘레인은 활기차게 외쳤다.

그리고 멈칫.

설마 혼자 찾아왔다고 홀대하지는 않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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