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으아아악!”
어두컴컴한 공간 속.
비릿한 냄새와 습기를 가득 먹은 회색 벽에 새빨간 그림이 흩뿌려졌다.
허억. 헉.
남자는 상상도 못한 고통에 침을 줄줄 흘리며 자꾸만 풀리려는 눈에 힘을 주려 애썼다.
따귀를 맞은 것도 아닌데 귓가엔 이명이 가득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렷하게 들려오는 발걸음 소리에 남자는 몸을 흠칫 떨었다.
뚜벅뚜벅.
남자의 코앞에서 따닥 멈춰 선 구두코가 은은한 촛불을 받아 주황빛으로 반짝였다.
“실력이 늘었군.”
“과찬이십니다.”
남자를 잡아 갖가지 고문을 시행한 그림자가 쑥스럽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귀기 어린 눈으로 제 피를 탐하던 사내가 저보다 훨씬 어린 소년에게 머쓱한 웃음을 짓는 꼴이 참으로 공포스러웠지만, 지금은 태평하게 감상이나 할 상황이 아니었다.
“그래. 배를 타고 떠나면 못 잡을 거라고 생각했나?”
살인귀를 아무렇지 않게 부리는 소년이 말했다.
작은 몸집에서 풍겨 나오는 섬뜩한 기운에 남자의 몸이 한껏 오그라들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이려던 그의 시도는 눈 깜짝할 새 지척에 나타나 턱을 움켜쥐는 그림자 때문에 실패했다.
“주군께서 말씀하신다. 얼른 대답해라.”
“우으…. 으우!”
“이런. 아무래도 이빨이 많이 나가서 발음하기가 영 시원찮은 것 같습니다.”
“너답지 않은 실수인데….”
“죄송합니다!”
남자는 재빨리 고개 숙여 부복하는 그림자와 그런 그를 무미건조하게 내려다보는 소년을 보며 질린 얼굴을 했다.
‘이 악마들! 차라리 날 죽여라!’
물론 그 간절한 외침은 마음속으로만 메아리칠 뿐이다.
“어쩔 수 없군. 자백이라도 받으려고 했는데 이 모양이니…. 대충 몇 번 더 작업하고 혈서로라도 증거를 남기도록 해.”
“명 받듭니다.”
“우으! 후으윽!”
의자에 꽁꽁 묶인 남자가 발작했다.
앞서 겪었던 고문을 또 겪을 생각에 신이 난 모양이다.
1황자는 최소한 남자가 죽지 않게 치료약 한 병을 그림자에게 건네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막 남자의 반대편 손톱이 뽑혀 나가려던 찰나.
“1환자 오빠? 어디써어?”
“…….”
1황자가 한쪽 손을 들었다.
비명 소리가 소거되고 거친 숨을 몰아쉬는 남자를 흘끗 바라보던 그가 천장을 노려보았다.
“주군?”
“잠깐 대기해.”
어찌할까 묻는 눈빛에 그리 답한 1황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쯧. 혀를 차며 긴 계단을 올라 한쪽 벽면을 터치하자, 저 멀리 복도 끝에서 자신을 부르짖는 여자아이가 보였다.
스르륵. 마법처럼 사라지는 벽을 확인한 후 소리 없이 아이의 뒤로 다가간 1황자가 영 못마땅한 얼굴로 어깨를 툭 건드렸다.
“으학! 깜짜기야.”
바로 뒤에서 나타날 줄은 몰랐는지 엘레인이 펄쩍 뛰었다.
엘레인은 잠시 무미건조한 1황자의 얼굴을 조심스레 바라보고는 오밀조밀 짜여진 입을 열었다.
“해, 해독제 완성대써. 물약 나눠줄 사람 피료해서….”
“해독제를 완성했다고?”
정말 완성할 줄 몰랐던 1황자의 두 눈이 조금 커졌다.
3일이라는 시간을 주긴 했지만 그래도 애들.
확률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여겼기에 이 일을 일으킨 주범을 잡아 와 고문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진짜 해독제를 완성했다고?
“근데 여기서 모하고 이써?”
엘레인이 서 있는 곳은 기나긴 복도였다.
방금까지만 해도 뒤에 아무도 없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게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질 않았다.
1황자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는 아이의 질문을 침묵으로 씹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사람을 보내지.”
“으, 응.”
원래 목적은 달성했지만, 괜히 시무룩해지는 엘레인이었다.
***
이후 사건은 빠르게 진정되어갔다.
1황자 휘하의 기사단이 직접 움직여서 그런지 혼란으로 가득했던 수도는 더욱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물론 그 배경에는 그들이 나눠주는 신묘한 약이 있었다.
3황자가 직접 개발했다는, 수은을 배출해주는 해독제.
당연하지만 그 해독제의 효과는 대단했고, 물약을 무료로 배포한 황궁을 향한 사람들의 신뢰도는 지금도 실시간으로 대폭 상승 중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의 원흉.
무시무시한 수은을 가득 때려 넣은 것도 모자라 값비싸게 팔아먹었던 자본주의의 괴물은 피해자들의 손에 넘겨졌다.
돌에 맞아 죽든.
똑같이 살이 썩는 고통에 당하든.
죽지만 않으면 되는 선에서 그는 죗값을 치를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틀 이내에 황궁 기사들에게 인계하기로 약속했으니, 이후에 이쪽에서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이상 보고를 마칩니다.”
톡. 토옥.
정보대신의 보고가 끝이 나자, 책상 위를 두들기던 손가락이 우뚝 멈추더니 황제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드물게도 그는 매우 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는 상태였다.
“아이들이 큰일을 해냈군.”
“정말 대단하신 분들입니다. 황제 폐하를 닮아서인지 아주 영민하십니다. 허허.”
딱딱하게 정보를 읊어대던 모습은 어디 갔는지 인자한 할아버지 상으로 돌아온 정보대신이 기분 좋은 웃음을 흘렸다.
황제는 그런 그를 보며 피식 웃더니 정보대신을 향해 명했다.
“오늘부로 부서, 식품의약안전부를 새로이 추가하겠다.”
“식품과 의약품의 안전을 확인하는 부서입니까?”
“그래. 앞으로 모든 식약품들은 식약부의 인증을 받지 않으면 제국에서 판매하지 못한다. 연금술사가 만든 물약과 신전에서 만든 성수도 예외는 아니다.”
“3황자님께서 만든 선크림도 말씀이십니까?”
“당연하다.”
황제의 단호한 말에 정보대신이 감탄을 했다.
그 말은 즉, 황궁에서 만드는 것 역시 식약부의 인증을 받지 않으면 유통할 수 없다는 말!
‘앞으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겠군.’
청렴결백한 사람들만 모아 정직하게 운영되어야 하는 이곳에 어쩌면 하이에나들이 떼거리로 몰려들지도 모른다.
앞으로 바빠질 것을 예감한 정보대신은 통통 허리를 두들기며 허허롭게 웃었다.
“흠. 이렇게 된 거 아르닐이 만든 선크림도 거기서 생산, 판매하면 되겠군.”
“오호? 이것 참. 재무대신이 아주 좋아하겠군요.”
식약부에서 3황자의 선크림을 직접 만든다면 사기꾼이 만든 것과 똑같다는 반발심은커녕 오히려 그 효능을 제대로 재현했다며 황궁의 위상이 절로 높아질 것이다.
거기다가 수요에 비해 심각하게 떨어지는 공급 역시 단번에 해결이 가능하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이조가 아니겠는가?
밝기만 한 미래에 껄껄 웃는 정보대신을 보며. 황제 또한 매우 흡족한 얼굴로 말했다.
“아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지?”
***
엘레인은 자그마한 손을 열심히 움직여 흙을 덮었다.
정성을 담아 촉촉한 흙더미가 작은 둔덕을 이루게 한 뒤, 팡팡! 있는 힘껏 두드리기만 하면 끝!
-무우우!
“아차차. 물도 줘야겠지?”
-무우! 무!
짐짓 근엄하게 몸체를 위아래로 흔드는 운디네가 참으로 귀엽다.
운디네를 향해 방긋 웃어준 엘레인은 뒤쪽에 있는 황자들이 보이지 않는 각도로 잉차잉차 앉은걸음으로 몸을 돌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작은 둔덕을 가리켰다.
“요기다가 물 조금만 뿌려줄래? 운디네의 힘을 받으면 더 잘 자랄지도 몰라.”
-무우우!
그런 거라면 당연히 오케이다.
공중으로 한 바퀴 몸을 돌린 운디네가 신이 난 얼굴로 동그랗게 입을 그러모았다.
그리고는.
찌익——
“헉, 뭐야! 방금 엄청 불길한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뒤에서 아르닐과 투닥거리고 있던 라네즈가 흠칫 몸을 굳혔다.
혹시나 싶어 허공을 향해 섀도복싱을 하는 라네즈의 모습에 아르닐의 눈이 짜게 식었다.
“바보 형. 허공에다가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저주야. 저주가 가까이에 있어!”
“저주? 저번에 꽃 심으면서 풀린 거 아니었어?”
“…….”
“…….”
순간 쌍둥이 형제의 눈이 쪼그려 앉아 있는 작은 등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이번에 정령초를 뽑은 사람은…?
“엘레인!”
“꼬맹아!”
“우앗! 깜짝이야.”
헐레벌떡 엘레인 곁으로 다가온 두 황자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나하나 살펴봤다.
그 집요한 눈동자에 엘레인은 많이 당황하고 말았다.
“가, 갑자기 왜들 구래?”
“아니이! 생각해 보니까 정령초를 뽑으면 정령한테 저주를 받잖아! 너 아무렇지도 않아? 혹시 누가 공중에서 침을 뱉는다든가 뭐 그러지 않아?”
라네즈가 엘레인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울상을 지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런 일이 있었던가.
댕댕. 머릿속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젓는 데에 성공한 엘레인이 멀미를 참고 말했다.
“아냐. 아직 그런 건 업써.”
“크윽. 아직 정령들이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분명해. 곧 있으면 저주가 시작된다구!”
-무우!
옆에서 운디네가 ‘내 주인한테 그럴 리가 없잖아!’라는 의미를 담아 볼을 부풀렸지만, 라네즈에게 그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
그때 아르닐이 라네즈를 퍽 밀치며 엘레인의 앞에서 고개를 푹 숙였다.
“엘레인 미안해. 내가 뽑으러 갔어야 했는데. 저주에 대해서 완전히 까맣게 잊고 있었어.”
“괜차나. 일케 씨앗도 심었으니까 정령님들도 화 안 낼 꺼야.”
“정말 그럴까…?”
아르닐의 얼굴이 조금 풀렸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라네즈도 오뚝이처럼 몸을 일으키고는 팔짱을 끼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꼬맹이처럼 귀여운 애한테까지 해코지할 리가 없지.”
“바보 형답지 않게 맞는 말을 다 하네. 엘레인 정도면 세계 최고 귀요미지.”
오랜만에 의견이 일치한 두 형제가 씨익. 미소를 지었다.
반면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라네즈와 아르닐 덕분에 엘레인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 사람들이 눈에 콩깍지라도 끼었나…. 주책맞게 뭐 하는 거람.’
말하는 쪽은 저쪽인데 어째서 부끄러움은 내 몫인 걸까?
엘레인은 타오르는 얼굴을 쪼끄만 손으로 가리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
“사이좋게 다들 모여 있었군.”
쫑긋.
황제의 목소리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운 엘레인은 머리 위를 덮는 따스함에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빠?”
오자마자 갑자기 딸내미의 머리를 쓰다듬는 황제의 모습에 쌍둥이 형제는 벙쪘다.
한동안 일 때문에 바쁘던 양반이 간만에 등장해서는 지금 저게 뭐 하는 짓일까?
혹시 엘레인을 빼앗아 가려는 건 아닌지 잔뜩 긴장하고 있는데, 이번엔 진짜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헉!”
“아, 아버지?”
눈앞에 벌어진 말도 안 되는 일에 쌍둥이 형제는 물론이고 엘레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제는 엘레인에게 했던 것처럼 라네즈와 아르닐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더니, 피식. 기분 좋은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잘했다.”
“…?”
황제는 그 말만 툭 던지고는 여느 때처럼 쿨하게 자리를 떠났다.
엘레인은 여전히 이게 무슨 상황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데, 쌍둥이 형제는 그게 아니었지 묘한 얼굴로 입꼬리를 들썩거렸다.
“혀엉. 이거 진짜 맞아? 꿈 아니지?”
“으응. 아버지가 우릴 인정해주셨어….”
그 말을 끝으로 아르닐과 라네즈는 약간의 온기가 남아 있는 제 머리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과연. 그런 건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던 황제가 이번 사건을 보고 세 아이에게 칭찬을 했다.
쌍둥이 형제에게는 처음 받아보는 아버지의 인정이었기에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는 거였다.
엘레인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푸흐흐 웃고 있는 두 아이를 보며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주었다.
‘여기선 빠져주는 게 도리지.’
-무우?
엘레인은 괜히 흐뭇한 기분을 느끼며 유리 온실을 빠져나왔다.
일도 해결됐겠다.
간만에 맛있는 디저트나 양껏 집어 먹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행복한 얼굴로 막 발걸음을 옮기는데.
“어?”
엘레인의 눈에 관료들이 볼 수 있는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공지할 것이 별로 없어 비어 있는 곳인데 오늘은 아니었다.
호기심을 갖고 게시판 가까이 다가간 엘레인은 까치발을 들고 내용을 확인했다.
“이거는?”
엘레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곳엔 몇 년 뒤에서나 나타나는 식약부의 이른 등장과 그곳에서 하는 일. 그리고 새로 생긴 법 따위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중 가장 눈길을 사로잡는 문구.
<3황자가 개발한 선크림은 식약부에서 독점 생산 및 판매한다.>라는 글을 확인한 엘레인의 눈에 절망이 드리웠다.
“이, 이럴 쑤가….”
피땀 흘려 내 돈 마련에 힘썼더니 아빠가 홀랑 먹어버렸다.
엘레인은 어째서 황제가 친히 찾아와서 무려 칭찬을 했는지를 깨닫고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내, 내 돈. 내 도오온이…!”
또르르. 한쪽 눈에 구슬 같은 눈물을 흘린 엘레인이 아련하게 하늘을 올려다봤다.
손톱만큼 있던 지분이 빛으로 화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