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경악과 침묵이 어우러진 파티장.
이 속에서 엘레인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머리부터 발끝까지 핫이슈가 된 황제를 보며 딸꾹질을 하는 것이다.
“딸꾹!”
“…….”
엘레인은 황급히 입을 막았다.
‘뭐지. 방금 무지갯빛 점성 물질 뒤로 스산한 빛이 스쳐 지나간 것 같은데.’
이것 참. 후일이 두려워서 숨 하나 제대로 쉴 수가 있나.
엘레인은 자꾸만 튀어나오는 딸꾹질을 막으려 애쓰며 아까부터 계속 석상처럼 굳어있는 황제를 불안한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황제는 움직일 생각을 않는다.
그렇다는 말은…?
‘이거 혹시 선 채로 기절한 거 아니야!?’
엘레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후에 있을 일을 생각하면 이대로 쭉 기절해주는 편이 좋았지만, 그렇다고 황제의 정신줄에 상처를 입히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이미 그의 완벽한 이미지에 엄청난 타격을 준 상황에서 ‘선 채로 기절했다’는 소문은 그리 큰 타격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엘레인은 두려움 반. 걱정 반이 섞인 얼굴로 황제의 정신을 일깨우려고 했다.
‘이봐요, 황 씨. 여기서 자면 입 돌아가요!’
엘레인이 허우적거리는 몸짓으로 황제를 향해 애처롭게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거짓말처럼 황제의 몸이 움직였다.
“딸꾹!”
황제는 엘레인을 사뿐히 바닥에 내려놓고는 얼굴에 묻은 그것을 슥 털어냈다.
다시 드러난 서늘한 눈매에서 폭풍 전야와 같은 살벌한 기세가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자, 여기저기서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엘레인은 그 소리가 마치 저승길 열리는 소리로 다가왔다.
“당장….”
황제답지 않게 끝이 조금 떨리는 목소리에 엘레인의 심장이 철렁거렸다.
생각보다 정신적인 충격을 크게 받은 듯한 모습에 양심이 쿡쿡 찌르며 몸이 오들오들 떨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게 황제의 무언가를 자극한 것일까?
갑자기 더욱 인상을 구긴 황제가 아까와는 비교조차 되지 않는 살벌한 기운을 내뿜으며 명했다.
“당장 의원과 사제를 불러와라.”
“…?”
황제의 음산한 목소리에, 엘레인은 물론이고 파티장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벙쪘다.
지금 당장 무슨 조처를 해야 할 것 같은 사람은 누가 봐도 황제였다.
그런데 갑자기 의원이라니?
아무리 황녀가 토를 하긴 했다지만, 그렇게 심각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아가야!”
그때 사람들을 헤치고 황태후가 달려왔다.
평소의 카리스마와 우아한 걸음걸이는 어디다 내팽개쳤는지 잰걸음으로 달려온 그녀가 엘레인을 와락 끌어안았다.
“괜찮으냐? 이렇게 많은 토를 하다니. 혹시 몹쓸 병에라도 걸린 것이냐?”
아아. 황태후의 말에 그제야 사람들은 납득했다.
확실히 아이의 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기에 저것은 너무나 많은 양이었다.
황태후는 차마 토사물로 뒤덮인 몸으로 가까이에 가지도 못하고 신경질적으로 주변을 서성거리는 제 아들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정신 사납다!”
우뚝.
황태후의 호통에 황제는 거짓말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그제야 자신의 행동이 엘레인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턱을 굳힌 황제가 멀거니 서 있기만 하자, 이번엔 양쪽에서 쌍둥이 황자들이 달려왔다.
“꼬맹이! 괜찮은 거야?”
“혀어엉. 엘레인 어디 아픈가 봐. 어떡해애!”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에 엘레인은 눈알만 데룩 굴렸다.
금붕어 똥처럼 각각 푸른 마탑주와 발론드 가의 공작을 달고 온 그들은 발을 동동 구르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허어. 내, 치료 마법을 배워 뒀어야 하는데.”
“끄응. 나 또한 이런 쪽으로는 조예가 없어서 말이오.”
다 큰 어른들이 엘레인을 바라보며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도움이 되지 못해 미안하다는 그 두 사람은 물론이고. 어쩌다 모두의 관심을 받게 된 엘레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1황자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그는 가만히 서서 엘레인을 바라보기만 할 뿐, 이렇다 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아니, 조금 놀란 것 같기도 하다.
‘황제를 부르기 전에 썩소를 지은 걸 보면 분명 이걸 노린 건 맞는 것 같은데….’
1황자는 엘레인도 모르는 놀이를 황제에게 ‘쟤가 하고 싶대요.’라고 거짓말을 쳤다.
즉, 그는 처음부터 엘레인이 황제에게 커다란 실례를 하게 만들 작정으로 접근한 것이다.
‘대체 얼마나 나를 미워하는 거야?’
배 터져 죽이려는 의도는 아니라는 것에 조금 안심이 되긴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위로가 되는 건 아니다.
1황자의 목적이 무엇인지.
지금이야말로 제대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엘레인은 잠시 며칠 전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분들은 참으로 냉혹한 사람들이지. 단언컨대 너를 총애하는 것도 오래가지 않을 거다.
일말의 기대조차 하지 않는 얼굴로. 마치 내 예상이 틀릴 리가 없다는 듯 확신하는 말투.
그리고.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형형하게 빛나는 눈으로 그리 말하던 1황자가 참석하지 않는다던 파티에 등장했다.
그리고 그는 무슨 변덕이라도 부리는 듯 이유 없이 엘레인에게 친절을 베풀었고. 결과적으로 그것은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키도록 만들었다.
그래. 엘레인이 황제에게 토를 함으로써 황제의 위엄에 상처를 입었다.
1황자는 처음부터 그걸 노리고 엘레인에게 접근하여 달콤한 마카롱을 계속해서 먹였던 것이다.
황제의 이미지에 실금을 가게 만들어 그가 엘레인을 싫어하게 만들기 위해서.
어디서부터 계획된 건지. 도무지 깊이를 알 수 없는 1황자의 치밀함에 엘레인은 속으로 부들거렸다.
하지만 그런 치밀함이 무색하게도 상황은 1황자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황제는 엘레인을 내치기는커녕 발을 동동 구르며 어의와 사제를 찾았고 황태후와 쌍둥이 황자들도 희게 질린 낯으로 엘레인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충격을 먹은 걸까?
엘레인의 시선에 1황자는 엄청난 충격에서 가까스로 헤어나와 파드득 몸을 떨었다.
마치 발등에 도끼를 찍힌 것처럼.
아니, 잠깐 스쳐 지나가는 저것은 일말의 미안함인가?
어째서?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알 수 없는 감정들이 한데 뒤섞인 얼굴로 엘레인을 바라보던 그는 저 멀리 달려오는 의원과 사제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상태는 어떻지?”
“지금 바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엘레인은 급박하게 흘러가는 상황에, 가까이 다가온 황제의 소매를 꽉 쥐었다.
1황자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
동쪽 별궁에 도착한 1황자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아름드리 버드나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창가에서.
한여름의 열기를 실은 바람에 줄줄이 엮인 이파리들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그렇게 한동안 앉아만 있었다.
“주군.”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까.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의 충실한 부하가 나타났다.
1황자는 언제나처럼 한쪽 무릎을 꿇고 부복하고 있는 그림자를 보며 퍼석해진 입을 열었다.
“그 아이는?”
“단순히 위가 놀랐을 뿐이라 오늘 밤 안정을 취하면 평소 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림자의 말에 1황자는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왜인지 위태로워 보이는 주군을 훔쳐보며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왜… 그러신 겁니까?”
오늘의 1황자는 평소답지 않았다.
마치 질투를 하는 어린아이처럼. 황녀에게 맛있는 디저트를 계속해서 건네며 짓던 악동 같은 미소가 눈앞에 그린 듯 선연했다.
“조용히 해.”
1황자가 씹어뱉듯 말했다.
평소보다 날이 선 시선이 그림자의 몸을 난자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크게 타격을 입지도 않는 듯 꿋꿋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걱정 가득한 눈동자에 1황자가 마른세수를 했다.
흔들리는 그의 눈엔 일말의 후회가 가득했다.
“…나도 그렇게 많은 양을 토할 줄은 몰랐어.”
“예?”
“그냥 그렇다고.”
그렇게 말한 1황자는 제 입술을 짓씹었다.
엘레인의 예상대로 1황자는 황녀가 황제의 권위를 실추시키도록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즉, 토를 하게 만들 생각은 맞았지만, 생각보다 엘레인이 너무 잘 먹어서 양과 속도를 조절하지 못했다.
1황자는 주는 대로 맛있게 먹어 치우던 엘레인의 얼굴을 떠올리고는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사사로운 감정은 여기까지.
다시금 마음을 독하게 먹은 1황자가 서릿발과 같은 눈으로 말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지금 두 사람이 진심인 건 확실하더군.”
황제의 걱정하는 눈빛과 다급히 달려오던 황태후를 떠올린 1황자의 기분이 착 가라앉았다.
동시에 엘레인의 접시를 채우면서 묘하게 아기 새에게 먹이를 주는 느낌이 들었던 걸 떠올리며, 1황자의 얼굴이 살짝 찡그려졌다.
“왜 그런지 조금 알 것 같지만…. 나한테는 안 통해.”
혼란스런 감정을 수습하는 데에 성공했는지,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1황자의 모습에 그림자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군의 말과 행동에서 궁금증이 어느 정도 해소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 간의 대화는 잠깐 단절되었다.
익숙하면서도 불편한 침묵 속에서.
입매를 단단히 다문 1황자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물건은 잘 들여오고 있는 건가?”
더 이상 그 이야기는 하기 싫다는 듯 다른 이야기로 돌리는 1황자의 모습에 그림자가 다시 자세를 고쳤다.
“재생의 물약이라면 무사히 들여왔습니다.”
1황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선크림 피해자들의 피부를 원래대로 돌려놓으려면 재생의 물약 한 병으로는 턱없이 모자라다.
완벽한 재생을 위해서는 필요 부위에 물약을 지속적으로 발라줘야 하는데, 이 일로 제국에서 갑자기 수요가 높아지니 돈맛 좀 보려는 쓰레기 같은 놈들 때문에 때아닌 품절 대란이 일어나고 있다.
즉, 밀주로 경악했던 엘레인의 오해와 달리 1황자는 이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평범하게(?) 두 손 걷고 나선 것이다.
동생들이 양지에서 힘을 써줬으니 자신은 음지에서 힘을 쓴다.
딱히 선을 긋고 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만큼 1황자는 동생들을 위해 일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뒷정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칼날이 되어 제 목을 겨눌지 모르기 때문이다.
“거기 녀석들은 하나같이 전부 음흉해서 짜증이 나. 조만간 정리를 좀 해야 할 텐데….”
잠시 제멋대로이고 괴상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놈들을 떠올린 1황자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슬퍼런 눈으로 하는 1황자의 말에 그림자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었다.
음흉하기로는 제 주군을 이길 자가 없지만, 그가 생각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물량을 쌓아놓고 사재기를 했던 놈들이 대부분 뒷세계 녀석들이라는 대목에서 이미 알 수 있듯이 그들 중 상당수가 재사용이 불가능한 쓰레기다.
어차피 한바탕 엎어버릴 생각이지만, 그것은 나중의 일.
그보다, 이제야 원래대로 돌아온 1황자의 말에 그림자는 잠시 뒤로 미뤄두었던 말을 꺼내었다.
“그러고 보니 블랑슈…. 최근 카르텔 길드 주변에서 수상한 잔당들이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림자의 말에 1황자의 눈썹이 들썩였다.
여기서 블랑슈는 뒷세계를 일컫는 말이다.
음침하고 더러운 것들이 몰리는 곳을 깨끗한 백색으로 표현하다니….
말 같지도 않은 일이지만, 나름 저들끼리의 규칙이 있다는 점에서 그래도 어느 정도 사람 사는 냄새는 나는 곳이다.
하지만 그런 곳에서. 그것도 1황자가 직접 관리하고 있는 카르텔 길드의 앞마당에서 하나같이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고 다니는 무리가 나타났다.
암묵적으로, 이유 없이 소란을 피우지 않는 곳에서 규칙을 무시하는 무리가 나타난 것이다.
“뭐 하는 놈들이지?”
“산을 넘어 제국의 북동쪽. 바다를 끼고 있는 자유도시에서 온 사람들입니다. 아직 확실하진 않지만 말하는 것이나 행동으로 봤을 때 뱃사람임은 확실합니다.”
“어이가 없군. 자유도시도 아니고 뱃사람이 굳이 산을 넘어 제국까지 온 이유가 뭐지?”
1황자의 말에 그림자는 망극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 수집한 정보가 적어서 그들의 의중이나 목적 같은 건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간문제일 뿐.
“시간을 조금 더 주시면 놈들에 대해 확실히 알아 오겠습니다.”
“…됐다. 뭐, 바다가 질렸을 수도 있고. 신경 쓰이기는 하지만 큰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이상 일단 감시만 하라고 해. 지금은 음지로 축적된 재생의 물약을 양지로 끌어올리는 게 급선무니까.”
피곤에 절은 그의 말에 그림자는 바로 고개를 숙였다.
“모든 것은 주군의 뜻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