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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화 (43/417)

43화

1황자가 집무실에서 나오자마자 그림자가 따라붙었다.

“소식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됐어.”

대충 손을 휘저은 1황자는 곧바로 마차를 불렀다. 블랑슈에 있는 카르텔 길드 본점에 찾아갈 생각이었다.

마차에 올라탄 1황자가 고개를 까딱이며 말했다.

“네가 알고 있는 것들을 말해.”

“예. 우선….”

그림자가 보고를 이어나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 대부분은 이미 황제에게 들은 것들이다.

그나마 처음 듣는 정보는 카르텔 길드가 어쩌다 이번 일에 엮이게 되었는지였다.

“앞에 술주정을 부리며 난동을 부리던 놈들이 알고 보니 쥐새끼였다라…. 어처구니가 없군.”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뭐가 있나. 안일하게 넘겼던 내 잘못이지.”

주정뱅이들의 목적은 처음부터 재생의 물약이었다.

정보는 철저하게 막았으니 재생의 물약이라는 걸 알고 벌인 일은 아닌 듯하고. 은밀하게 상자를 옮기는 것을 보고 귀한 물품이겠거니 일을 벌였던 모양이다.

그리고 뒤늦게 이를 알게 된 카르텔 녀석들이 격분하여 놈들의 본거지를 샅샅이 뒤졌다.

1황자에게 미리 보고하지 않은 것은 그 안에 찾을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 때문이리라.

“어처구니가 없군. 그 과정에서 기사단의 이목을 끌다니. 멍청이도 그런 짓을 하지 않겠어.”

결과적으로 카르텔은 놈들의 보물 창고를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문제는 싸우는 도중 누가 마법을 썼는지 큰 폭발이 있었다는 것이고, 그 소란으로 기사단이 출동했다.

사건의 내막을 알게 된 1황자는 마차 문을 두들겨 목적지를 바꿨다.

“범인은 같은 장소에 나타난다지.”

기사들이 잡아간 놈들은 모두 말단이다. 놈들을 조져봐야 얻을 수 있는 건 없다.

그러니 사건 장소에 돌아올 진짜를 찾아야 한다.

“도착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1황자는 인식 장애 마법이 걸린 커프스를 착용하고 마차에서 내렸다.

폭발의 상흔이 여실한 범행 장소.

그곳엔 이미 기사단이 점령하다시피 하고 있었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어 구경하고 있었다.

“이게 뭔 일이래.”

“제국에서 밀주라니. 간도 커라.”

“것보다 재생의 물약을 사재기한 게 너무 괘씸하지 않아? 세상이 어떻게 되려는 건지….”

1황자와 그림자는 시끄럽게 떠드는 사람들 사이로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다.

존재감이 흐려진 1황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림자의 손이 그의 어깨를 짚고 있는 상태였다.

우뚝.

그때 그림자의 손에 약간 힘이 들어갔다.

고개를 돌리니 티 나지 않게 어딘가를 가리키고 있었다.

“멍청한 건지 아니면 용감한 건지.”

1황자가 헛웃음을 흘리며 그림자에게로 몸을 돌렸다.

감히 주군의 몸을 가볍게 안아 든 그림자가 땅바닥에 훅 꺼지듯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

“하씨. 왜 이런 데서 발이 묶이고 지럴이야. 씨부럴!”

한적한 골목.

기사단이 왔다 갔다 거리는 범행 현장에서 꽤나 떨어진 곳에 몸을 숨긴 남자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리저리. 정신 사납게 같은 자리를 빙빙 도는 남자의 몸엔 식은땀이 흥건했다.

입 험한 남자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하아. 이러면 진짜 나가린디.”

“뭐가 잘 안 되나 봐?”

“긍께 말이여… 허억! 니들 뭐야!”

호다닥. 차가운 벽으로 붙어선 남자가 희게 질린 낯을 띄었다.

어둠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 소년은 잘 먹고 잘산 티가 나는 고운 외모의 도련님이었다.

잔뜩 긴장하고 있던 남자는 누가 봐도 샌님처럼 보이는 그를 보며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나 지금 바쁘니께 싸게싸게 꺼지라. 뒤지고 싶지 않으믄.”

“흐음. 역시 다른 곳에서 온 사람이라 그런가? 내 얼굴을 잘 모르는 모양이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게. 네가 글케 대단한 사람이여? 으응?”

남자가 비웃음을 흘렸다.

안 그래도 스트레스받아 죽겠는데 별 같잖은 게 시비를 거니 살심이 치솟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면 뒤지는 목숨인디 튀는 것도 괜찮것지. 꼬맹아. 나 원망하지 마라. 이건 다 돈 많아 보이는 티 팍팍 내믄서 돌아댕기는 네 잘못이여.”

남자가 누런 이를 씨익 드러내며 두툼한 손가락을 쭉 뻗었다.

하지만 놈의 손은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무언가에 막혔다.

뿌드득.

“끄아악!”

“귀가 울리는군.”

“커억!”

손목이 꺾인 남자가 비명을 질러대는 탓에 인상을 찌푸리자, 이번엔 그의 목이 우악스럽게 잡혔다.

남자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어둠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을 구명줄 잡듯 콱 움켜쥐었다.

조금만 힘을 주면 목이 부러질 것 같아 오금이 다 저렸다.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듯 혀를 빼물고 있는 놈을 보며 1황자가 픽 비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떨 것 없다. 얻을 게 많은 놈에겐 최대한 상냥하게 대해주는 편이거든.”

1황자가 그늘진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이 너무나 서늘해서. 남자는 결국 지려버리고 말았다.

***

엘레인은 고민에 잠겼다.

황제의 말을 듣고 나니, 어렴풋이 떠올랐다 사라졌던 것들이 형상을 띄고 수면 위로 올라왔다.

카르텔 길드와 바다를 건너온 사람들이 만들어낸 합작.

당연하지만 엘레인이 기억하는 건 그런 것이 아니었다.

‘회귀 전에도 밀주와 관련된 엄청난 사건이 있긴 했지.’

때는 엘레인의 열 살 무렵.

지금보다 훨씬 늦은 시기에 일이 터졌지만, 어쨌든 그때 아스터 왕국으로 다량의 밀주가 들어오면서 곤혹을 치른 때가 있었다.

어린 엘레인은 당시 밀주라는 게 뭔지. 왜 그게 들어오면 곤란한지 잘 몰랐지만 시종, 시녀들이 하는 이야기들은 빠짐없이 들었다.

열 살 엘레인이 정보를 얻을 만한 곳은 고작 그 정도였으니까.

‘분명히 붉은색이 짙은 럼주라고 했던가.’

보통 럼주라 하면 사탕수수의 즙을 발효시켜 증류한 술로, 색깔에 따라 숙성 기간을 알 수 있다.

해서 화이트럼과 골드럼. 다크럼 순으로 오크통에 장기간 숙성시키기도 하는데, 특이하게 이놈들이 만든 술은 짙은 붉은색을 띤다.

듣기로는 갓 증류시킨 술에다가 놈들의 주거지에서 주로 나는 빨간 열매를 집어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붉은색 럼주는 놈들이 만든 것이 최초였으니 시큼한 냄새가 나는 빨간색 럼주가 맞는다면 확실히 그놈들이 맞다.

‘그런데 무슨 수로 그걸 확인하지?’

엘레인은 1황자를 돕고 싶었다.

그가 이전에 했던 행동들을 반추할 때면 괜히 얼굴이 불퉁해지곤 했지만, 그래도 그 행동에 무언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약해졌다.

엘레인의 감이 말했다.

라네즈와 아르닐과는 많이 다르긴 하지만 1황자 역시 어떠한 사정이 있다는 것을.

유독 1황자에게 조심스럽게 대하는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그런 그들의 시선을 따로 마주하지 않는 1황자는 확실히 이상했다.

심지어 아까 전엔 황제를 바라보는 1황자의 눈동자가 묘하게 일렁이기까지 했잖는가?

엘레인은 이 모든 것들이 서로 연관되어 있다고 확신했다.

아니라면 뭐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명분이 되어 엘레인의 마음을 조여 왔다.

‘포기하더라도 노력은 해보고 해야지.’

황제와 황태후조차 완전히 포기하지 않았는데 굴러들어온 돌이 더 분발해야 하지 않겠어?

마음속으로 결정을 내린 엘레인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 밀주가 그 럼주가 맞는지 확인해야 한다.

엘레인은 쌍둥이 황자들과 논다는 핑계로 앨리스를 떨구어낸 뒤 아르닐을 찾았다.

“오빠. 궁금해서 그런데 그 밀주 있잖아.”

“엘레인!”

아르닐이 성큼성큼 다가와서는 엘레인의 어깨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짚었다.

갑작스런 성량 공격에 당황한 엘레인이 그를 올려다보자, 아르닐이 빙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몹쓸 단어는 그냥 잊어버리자?”

왜 입은 웃고 있는데 눈동자는 왜 저리 살벌한 걸까.

엘레인은 ‘역시 바로 돌려보냈어야 했어.’ 또는 ‘아버지 때문에 엘레인이 이상한 걸 배워버렸잖아!’ 등 무시무시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아르닐을 보며 슬쩍 몸을 빼내었다.

“나 담에 놀러 오께.”

“어? 벌써 가는 거야? 아까 그건 꼭 잊어버려야 한다!”

“응. 벌써 까먹어써.”

일부러 헤헤 웃음을 흘리자 아르닐의 얼굴이 단번에 풀렸다.

엘레인은 최근 들어 과보호가 심각한 아르닐의 행동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는 라네즈를 찾아 나섰다.

“오! 빠!”

“어엉? 꼬맹이 왔냐?”

라네즈는 검술 훈련 중이었다.

아르닐은 아까의 일이 신경 쓰여서 그런지 자료 같은 걸 찾아보고 있는 것 같던데, 라네즈는 그런 쪽으론 영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 우리 라네즈는 몸만 건강하면 되지 뭐.

어차피 그는 나중에 제국의 검이 되기를 자처하니까 저러고 있어도 그러려니 한다.

“오빠. 혹시 아까 아빠가 했던 말 기억나?”

“아, 그거. …솔직히 별로 관심이 없어서. 내가 추리나 법 쪽으로는 좀 약하거든.”

그러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는 말이다.

어쩐지 멍하니 육포만 뜯어 먹더라니.

엘레인은 구슬땀을 닦아내고는 씨익. 미소 짓는 라네즈를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근데 그건 왜?”

“아니. 그냥 그 밀주라는 게 어떤 건지 궁금해서.”

“뭐? 야, 넌 아직 꼬꼬마인데 벌써부터 그런 거에 관심 가지냐?”

라네즈의 기세가 사뭇 달라졌다.

황당하다는 마음을 넘어 기가 차는지 엘레인을 무슨 비행 청소년 보듯이 하고 있다.

“아니이. 딱히 그런 건 아니고오. 대체 얼마나 맛이 있길래 창고에다가 그렇게 숨겨놓았는지 궁금해서어.”

“너도 참 별나다. 대체 그런 걸 왜 궁금해하는 거지?”

라네즈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나마 다행인 건 불순한 눈으로 바라보던 게 싹 사라졌다는 것 정도?

엘레인은 괜히 뚱해져서 말했다.

“원래 꼬맹이는 궁금한 것도 많은 법이야.”

“그런 건가?”

“에레이는 더 성장하기 위해서 이것저것 궁금해하는 거야.”

“어, 그, 그렇구나. 내 동생이 성장한다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지. 그렇다고 내가 잘 알고 있는 건 아니고. 그 밀주라는 게 그냥 엄청 맛있어서 그런 거 아니겠어?”

“오빠!”

엘레인이 라네즈의 옷을 잡아당겼다.

“글케 말하니까 직접 보고 싶다아.”

“…….”

“오빠?”

“쓰읍.”

라네즈가 마른세수를 하며 얼굴을 쓸었다.

조금 자란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붉은 귀를 가려주었다.

우리 동생. 너무 귀여워서 어떡하지?

이 녀석이 부탁하는 거라면 뭐든 들어줘야 할 것 같다.

그게 설령 범죄라 할지라도!

라네즈는 두 눈 땡그랗게 뜨고 설렘 가득한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엘레인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증거품으로 황실 창고에 갖다 놓는 걸 봤어.”

“그 말은…!”

“후우. 꼬맹이 호기심 채우는 것도 참 힘드네.”

라네즈가 씨익 웃었다.

***

황궁 내부는 언제나 경비가 삼엄하다.

하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이쪽 부근을 담당하는 기사들이 차출되어 대량 밀주 사건 담당으로 대거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황실 창고를 지키는 기사들은 고작 한 명.

라네즈가 크흠! 헛기침을 하며 그의 앞에 섰다.

“2황자님?”

“흠흠. 혼자 경비 서느라 수고가 많아.”

“아앗!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가 감복한 얼굴로 당장 무릎을 꿇을 기세를 내비쳤다.

라네즈는 엉거주춤 진짜로 무릎을 꿇을 것 같은 그에게 손을 휘저으며 은근슬쩍 그에게 다가갔다.

“있잖아. 라닐 경. 내가 말이야 그쪽에 대해서 재밌는 소문을 하나 들었는데 말이야.”

“무, 무슨 소문을…?”

기사는 갑작스런 라네즈의 말에 동공지진을 일으켰다.

기숙사에서 포커로 동료들 돈 따먹은 거 걸린 건가? 아, 아니면 며칠 전 근무 시간이 조금 늦은 것 때문에? 하지만 그건 급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건데!

이제 그는 멀리서 봐도 안쓰러울 정도로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라네즈는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며 제 할 말을 했다.

“다름이 아니라 라닐 경 검술 실력 꽤 괜찮다며?”

“예? 아, 그런 거였군요….”

매우 긴장했던 것이 무색하게 라네즈의 입에서 나온 것은 별거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검술 실력이 그렇게 괜찮았던가? 2황자님 귀에 들어갈 정도로?

“어때? 괜찮으면 한 수 좀 보여주지 않겠어?”

“지, 지금 말씀이십니까?”

“안 돼? 어차피 별것도 안 든 창고를 털려는 사람은 없을 거 아니야. 혼나는 게 걱정이라면 내 이름을 대면 돼.”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신다면야….”

기사는 머쓱한 얼굴로 라네즈와 함께 자리를 떴다.

그 모습을 빤히 지켜보고 있던 다람쥐가 몸단장을 하고 있을 때.

부스럭. 소리와 함께 수풀이 흔들리며 엘레인이 나타났다.

“작전 성공!”

와다다닷. 다람쥐가 도망치는 것을 힐끔 바라본 엘레인이 창고 문을 열었다.

황실에서 아주 귀하고 중요한 보물들을 관리하는 창고는 따로 있다.

뭐로 만들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출처 불분명한 술을 그런 곳에 보관할 수 없다는 반대 덕분에, 몇 개의 왕국을 휘청거리게 만든 희대의 밀주를 이런 누추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됐다.

살금살금.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엘레인은 바로 보이는 수십 개의 오크통에 기가 질렸다.

“그럼 어디.”

엘레인은 지체 없이 오크통에 달린 수도꼭지를 돌려보았다.

찰랑 소리를 내며 가득 차오르는 술은 누가 봐도 짙은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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