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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화 (58/417)

58화

어둠을 틈타 가볍게 몸을 날린 캐시는 자연스럽게 그림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익숙한 밤공기 냄새와 바람을 타고 흐르는 달콤한 디저트 냄새.

콧속으로 모든 정보를 저장하듯 크게 숨을 들이쉰 그녀는 이내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몸짓으로 신전 안으로 침입했다.

“아, 글쎄 적자니 뭐니 하면서 어떻게든 안 주려고 버티더라니까? 내가 블루베리 파이 좋아하는 거 알면서. 진짜 어이가 없어.”

“크큭. 그러게 적당히 좀 조절하면서 빼먹으라니까. 이러다가 노예들이 파업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 봐야 노예들이지. 손재주 좀 좋은 달콤한 노예들.”

태양신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새하얀 옷을 입고 시시덕거리는 사제들.

찌푸린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캐시는 천천히 새까만 물체를 들어 올려 손가락을 내리눌렀다.

틱—

“엥?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냐?”

“글쎄. 아무것도 안 들렸는데.”

“흐음. 잘못 들었나?”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던 사제가 동료 사제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캐시는 그런 그들을 무미건조한 얼굴로 스윽 바라보다가 신전 곳곳을 돌아다니며 검정색 물건을 가져다 대었다.

틱 팅 틱—

티잉——

“앗. 주교님 오셨습니까?”

“!”

저 멀리 들려오는 목소리에 캐시는 재빨리 천장에 달라붙었다.

여러 개의 아치와 화려한 장식 등으로 장식된 천장에 익숙하다는 듯 달라붙어 있던 캐시는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 주교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하아. 오늘따라 많이 피곤하니 말 걸지 말게.”

“예? 앗, 네넵. 그럼 서류는 집무실 안에 가져다 두겠습니다.”

사제가 허둥지둥거리며 서류 더미를 들고 이동하자 주교가 혀를 끌끌 찼다.

“에잉 쯧. 밤낮없이 일하는 노인네 좀 생각하지. 저렇게 눈치가 없어서야.”

짜증 가득한 얼굴로 뒷목을 긁적인 주교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검정색 물건을 들어 그런 그의 모습을 담은 캐시는 저 멀리 서류를 옮기고 있는 사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아직 그녀가 할 일은 한참 남은 듯하다.

* * *

집사와 함께 정원으로 나온 엘레인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집사 아조씨는 징수관 어케 생각해여?”

“징수관… 말입니까.”

말문을 흐린 집사는 의미를 가늠하기 위해 네 살배기 영주님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순수한 얼굴에선 그 어떠한 것도 읽을 수 없었다.

“편하게 말해도 돼여.”

무슨 말을 하든 불이익은 없을 것이다.

그리 말하는 듯한 엘레인의 눈빛에 집사는 기묘한 심정에 사로잡혔다.

이 작은 영주님께선 혹시 무언가를 눈치챈 것일까?

그렇다면 나는 그녀의 신하 된 도리로서 사실을 고해야 하는 게 아닌가?

고민은 짧았고 집사는 말문을 열었다.

“솔직히 저는 꺼림칙합니다.”

“꺼림칙?”

“예. 숨기는 것이 한둘이 아닌 것 같고 무엇보다 속을 알 수 없는 자입니다.”

집사는 자신이 느끼고 있는 감상을 거짓 없이 말했다.

비록 징수관의 수상한 점을 일일이 읊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영주님께 경고는 해줄 수 있다.

“그러니 그를 너무 믿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롬 집사 아조씨는 믿어도 돼여?”

“예?”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날카로운 지적에 동그랗게 뜬 눈으로 어린 영주를 바라보던 집사는 문득 보이는 광경에 숨을 들이켰다.

깊이를 알 수 없는 현현하게 빛나는 눈동자.

네 살배기라고 볼 수 없는 올곧은 눈빛.

결정적으로 저 작은 등 뒤로 뿜어져 나오는 청명한 아우라까지!

설마 이분은!?

‘앗, 운디네. 가만히 있어.’

-무우웃!

‘괜찮아. 내 생각에 집사는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금방이라도 가시를 세울 것 같은 모습에 차분히 다독이자, 집사를 경계하던 운디네가 금세 얌전해졌다.

그렇다고 오늘 처음 본 집사를 아주 신뢰하는 건 아니지만…. 엘레인의 감에 따르면 그는 징수관과 한패는 아닐 것이다.

점심 식사 전. 징수관을 바라보는 집사의 눈빛이 그리 곱진 않았으니까 말이다.

‘자. 그래서 집사 당신은 어떤 사람이지?’

엘레인은 집사의 답을 듣기 위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집사가 대뜸 허리를 직각으로 접었다.

“집사 아조씨?”

뜬금없는 상황에 입을 헤 벌리자, 집사가 결연한 의지가 돋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저의 가문은 대대로 플로스 영지에 몸을 바쳐왔었지요. 지금 제가 영주님의 믿음을 충족시킬 부분은 이러한 경력밖에 없습니다.”

“…그 말은 대대로 집사를 해왔단 거야?”

“그렇습니다.”

집사의 말에 엘레인은 턱을 짚었다.

그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자부심이 상당했다. 거기다 그만큼 오랫동안 영주를 보필해왔다고 하니, 확실히 그를 믿어도 될 것 같다.

그동안 플로스 영지는 커다란 굴곡 없이 무난하게 커왔으니까 말이다.

“알아써. 믿을께.”

“최선을 다해 보필하겠습니다.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그럼 바로 묻겠는데. 징수관 아조씨 퇴근해써여?”

“예. 지금쯤이면 퇴근했을 겁니다.”

“그롬 징수관 아조씨 일하는 데에 좀 데려다줘여.”

엘레인의 말에 집사는 잠시 심각한 얼굴을 했다.

“영주님께서는 징수관의 일터를 조사하고 싶으신 겁니까?”

“응. 나도 그 사람이 수상하다고 생각하거든.”

“그렇다면… 이 사실을 먼저 알려드려야겠군요. 징수관 곁에는 그가 데려온 사병이 존재합니다. 모두 하인과 하녀의 모습으로 위장해있지요. 퇴근 후에도 그의 일터 앞에 수시로 지나다니며 경비를 서기 때문에 조용히 드나드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집사가 부끄럽다는 듯 눈썹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위장한 사병을 초반에 걸러내지 못하고 마음대로 영주성 내를 휘젓고 다니게 만든 것에 커다란 모멸감을 느낀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은 얼굴 다 아는 거지?”

“예. 아직 아무런 증거도 찾지 못한 상황에서 함부로 축출할 순 없기에 건드리지는 못했지만….”

“그럼 돼써.”

엘레인은 집사의 다리를 토닥여주며 방긋 웃었다.

함부로 벌집을 들쑤시는 것이 무서워 신중을 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괜히 잘못 들쑤셨다가 꼬리를 말고 더 안쪽으로 숨어버리거나, 피를 보기 위해 미친 듯이 달려들면 이쪽만 난감해지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사병들이 무서워서 조사를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집사 아조씨. 우리 파티 열까?”

“예?”

의미 모를 말에 집사가 입술을 벙긋거렸다.

엘레인은 그런 그를 보며 천사 같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영주님이 사용인들을 생각해서 열어주는 깜짝 파티야. 단 불참은 절대 안 돼.”

경비견들의 눈을 속일 수 없다면 경비견들을 집 밖으로 끌어내면 된다.

천사 같은 미소가 귀여운 소악마의 미소로 바뀌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 * *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영주성 앞마당은 시끌벅적했다.

퇴근하려던 요리사들이 다시 불려와 사용인들을 위한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고 때아닌 야식을 먹게 된 사용인들의 얼굴은 환한 대낮처럼 밝아졌다.

집사는 벌써부터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에게서 시선을 떼며 말했다.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불러 모았습니다. 영주님의 이름으로 불러 모으니 전혀 의심하는 기색이 없더군요.”

“잘됐네여. 그럼 이제 안내해줄래여?”

“물론입니다.”

징수관 밑에서 일하는 사병들은 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라고는 꿈에도 모른 채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엘레인은 신나게 웃고 떠드는 그들을 보며 말했다.

“명단 따로 만들어줄 거죠?”

“이미 만들어놨습니다.”

힘이 없어서 섣불리 건드리지 못했을 뿐.

엘레인은 깔끔한 글씨로 잘 정리된 명단을 품에 넣고 집사를 따라 쫑쫑 걸음을 옮겼다.

“이곳입니다.”

집사가 안내한 징수관의 방은 다른 방과 달리 꽤 화려했다.

영주의 방문만큼이나 화려한 그 모습에 눈살을 찌푸리자 집사가 조용히 문을 열었다.

엘레인은 한숨이 나오려는 것을 애써 참으며 집사의 도움을 받아 징수관이 집무를 보는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 죄송하지만 영주님. 글을 읽으실 수 있습니까?”

그때 집사가 당황한 얼굴로 그리 말했다.

생각해 보니 네 살배기 아이라면 대충 글을 읽을 줄은 알더라도 어려운 단어들은 모를 시기가 아니던가?

“에레이는 천재야.”

“…….”

“글은 좀 못 써도 읽을 줄은 알어.”

“역시… 그러하시군요!”

“?”

뭔가 반응이 요상하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묘하게 엘레인을 높게 봐주는 그를 보며 엘레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집사는 내가 이러는 게 이상하지 않어?”

“무엇이 말씀이십니까?”

“아니…. 나는 아직 네 살이기도 하구. 집사가 보기엔 내가 좀 요상해 보일 만두 한데.”

엘레인은 우물쭈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집사의 표정을 살폈다.

지금껏 알맹이가 어른이라는 것을 숨기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던가.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쩔 수 없이 영주로서 일을 해결하려 하고 있다.

집사의 눈엔 충분히 비상해 보이고 또 이질감을 느낄 법한 모습.

하지만 그의 눈동자에 떠오른 것은 의심스러움이나 괴상한 무언가를 보는 것이 아닌, 굳건한 믿음과 기이할 정도로 타오르는 선망과 동경이었다.

그러한 그가 다 아는 듯한 얼굴로 흐뭇하게 웃으며 말했다.

“영주님의 한계를 한낱 인간인 제가 결정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으래여?”

한낱 인간이라니.

설마 날 무슨 드래곤으로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묘하게 의미심장한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어쨌든 집사의 눈에 이 정도는 괜찮다는 말이겠지?’

그렇다면 더 이상 거리낄 게 없다.

힐끔힐끔. 집사의 눈치를 보던 것을 그만둔 엘레인은 책상 위의 서류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엄청난 속독!

‘음. 이건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앗, 이건?’

빠르게 서류를 읽어 내리던 엘레인은 이상한 서류 하나를 발견했다.

“왜 그러십니까?”

“찾아써.”

엘레인은 자신이 찾은 서류를 그에게 보여주었다.

하지만 집사는 그것을 읽어도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다.

결국, 엘레인은 숫자 장난을 친 부분을 하나하나 집어주며 징수관의 민낯을 까발렸다.

“허어.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많은 금액을 횡령하고 있는 줄은 몰랐군요.”

“그치? 이 아조씨 진짜 강심장이야.”

“제 생각엔 절대 들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한 것 같습니다.”

“사병들 말하는 거지?”

“예. 결정적으로 그들은 문맹들입니다. 혹여나 뒤통수를 칠 걱정도 하지 않아도 되겠지요.”

그렇게까지 치밀하게 굴다니.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도 못 믿겠다는 건가?

징수관의 숨 막히는 행태에 엘레인은 짜게 식은 얼굴을 했다.

반면 이런 부분을 단번에 찾아낸 엘레인을 바라보는 집사의 시선이 동경을 넘어 세기의 천재를 바라보는 그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 나이에 이렇게까지 놀라운 산수 실력과 통찰력을 보여주시다니. 미래의 제국이 참 밝습니다. 허허.”

“으, 으응.”

부담스럽다.

심히 부담스러운 시선이다!

엘레인은 떨리는 동공을 진정시키며 문제의 서류를 집사에게 넘겼다.

“나를 따라온 기사님들 중에 이런 거 잘하는 분이 한둘은 있을 거에여.”

“알겠습니다. 지금 데리고 오겠습니다.”

“부탁해여.”

징수관의 부정부패는 확실하게 알아냈다.

하지만 여기서 이상한 점은 횡령한 자금의 대부분이 태양신교로 흘러갔다는 것.

‘역시 수상하단 말이지.’

이 정도면 단순한 끄나풀 수준이 아니다.

적어도 오른팔 이상은 될 법한 자의 물놀이인데….

턱을 매만지며 이에 대해 고민하던 엘레인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 보니 아르닐이 징수관을 보고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것 같다고 했었지?’

어쩌면 그는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을 끝낸 엘레인은 지체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똑똑.

문을 두들기는 소리에 왁왁! 비명 소리가 일순 멈추더니, 붉게 상기된 아르닐의 얼굴이 불쑥 튀어나왔다.

“어, 엘레인?”

“안뇽.”

대체 뭘 하고 있었기에 얼굴이 저렇게 붉지?

의아하게 생각하며 인사를 하자 아르닐의 얼굴이 터질 듯 더 붉어졌다.

“안 자고 있었어?”

“응. 근데 모 하고 있었어?”

“어, 그게….”

“뭐야, 꼬맹이야? 너 역시 우리랑 놀고 싶었던 거지!”

퍽! 소리를 내며 아르닐의 머리를 무언가로 쳐서 날려 보낸 라네즈가 똑같이 상기된 얼굴로 방긋 웃었다.

엘레인은 엄청난 소음과 함께 나뒹구는 아르닐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오빠! 아르 오빠 죽은 거 아냐!?”

“에이 뭘 그런 걸로 죽겠어. 저거 지금 아픈 척하는 거야.”

라네즈가 옆구리 터진 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애초에 실드를 하고 있어서 물리 법칙으로 멀리 날아간 것 외에 아무런 상처가 없는 아르닐을 보며 라네즈가 어깨를 으쓱였다.

“봤지?”

허어. 이 인간들. 무슨 베개 싸움을 이렇게 살벌하게 하냐.

쿵쾅거리던 심장이 제 속도를 찾는 것을 느끼며 엘레인은 질린 낯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나저나 여기로 왔다는 건 잠이 안 온다는 얘기야?”

“뭔 소리야. 당연히 우리랑 놀려고 온 거겠지.”

툴툴. 옷에 묻은 깃털을 털어낸 아르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놀러 온 것치곤 표정이 심상치 않아 보이는데.”

“뭐? 꼬맹이 너 혹시 악몽이라도 꿨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엘레인은 스리슬쩍 방 안으로 몸을 들이민 뒤 문을 닫았다.

베개에서 삐져나온 깃털로 엉망이 된 방을 훑어보던 엘레인은 적당한 자리에 앉아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아르 오빠 괜찮아?”

“물론이지. 뭐든 물어봐.”

엘레인에게 간택 당했다는 생각에 아르닐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반면 라네즈는 심술이 가득 묻은 얼굴을 하더니 엘레인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나도 아는 거 많은데.”

“오빠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그럼 뭐가 궁금한데?”

라네즈의 궁금증 가득한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마찬가지로 고개를 기울이고 있는 아르닐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까 낮에 오빠가 했던 말 있잖아. 징수관 아조씨 뭐 숨기고 있는 것 같단 말.”

“아, 그거? 그게 궁금해서 온 거야?”

“응. 나도 그 아조씨 좀 수상해서 말야. 오빠가 느낀 수상함이 뭔지 알려줄 수 이써?”

“당연하지. 그게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아르닐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하며 엘레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엘레인이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그 인간 수상한 마력의 파장을 두르고 있더라고.”

“마력의 파장?”

“엥? 나는 그런 거 못 느꼈는데?”

라네즈가 그게 뭔 소리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아르닐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라네즈가 알아채지 못한 이유를 집어주었다.

“그야 마력에 아주 민감한 사람 정도나 느낄 수 있는 미약한 흐름이었으니까. 보니까 일부러 그렇게 한 것 같던데?”

“흐음. 이거 냄새가 나는데….”

라네즈의 말대로 아주 수상한 냄새가 났다.

작정하고 숨기는 모양새로 마력의 파장을 몸에 두르고 있었다니.

도대체 그걸로 뭘 숨기는 거지?

“황녀님.”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며 캐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볼일 보러 갔다 온다더니 여기에 내가 있는 건 또 어떻게 안 거지?’

엘레인은 의아해하면서도 들어오라고 했다.

“부탁하신 것 알아 왔습니다.”

“부탁한 것?”

내가 캐시에게 뭘 부탁했던가?

혼란스런 얼굴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자 캐시가 주머니를 뒤져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사진?”

추억 보관 장치로 찍은 사진들의 향연에 쌍둥이 형제와 엘레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황녀님께서 태양신교에 대해 궁금해하셔서 그곳에 있는 주요 공간과 인물들을 담아왔습니다.”

“허얼. 이 늦은 밤에 잠입해서 이걸 다 찍어왔다고? 꼬맹이. 네 하녀는 무슨 첩보원이라도 되는 거야?”

“나도 온니한테 이런 힘이 있는 줄 몰랐는데….”

“보잘것없는 능력 중 하나입니다.”

엘레인이 크게 감탄한 얼굴로 그녀를 보자, 캐시가 부끄럽다는 듯 양 볼을 붉혔다.

그 모습이 꽤 귀여워서 엘레인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 언니 대체 정체가 뭐람? 알고 보니 베일리처럼 까도 까도 양파 같은 사람, 뭐 그런 건가?’

“그래서 안 들켜써? 어디 다친 덴 없지?”

“업그레이드 버전으로 무음 모드를 사용했습니다. 누를 때 기계가 맞물리는 소리까지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지만, 충분히 바람 소리와 함께 흘려보낼 수 있는 수준이어서 절대 들키지 않았음을 확신합니다.”

아, 아니. 난 그런 걸 물어본 게 아닌데….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얼굴로 캐시를 바라보던 엘레인은 갑작스런 라네즈의 감탄사에 고개를 휙 돌렸다.

“이것 봐, 꼬맹이. 네 하녀가 서류들도 찍어왔어.”

“호오. 징수관과 내통을 하고 있었네. 아주 재미있는 짓거리를 하고 있었어.”

중요 서류들을 찍은 사진을 훑어보던 아르닐이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징수관의 서류를 탐색하면서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엘레인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캐시가 찍어온 사진들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엘레인의 시야에 들어온 하나의 사진.

“캐시 온니. 이 사람이 주교야?”

“예. 맞습니다.”

목까지 오는, 한여름에는 조금 더워 보이는 사제복을 입고 있는 노인.

뒷목을 긁적이고 있는 모습 그대로 찍힌 사진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던 엘레인은 노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예의주시하며 두 눈을 빛냈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엘레인이 씨익 웃으며 이곳에 모인 자들을 돌아보았다.

“오빠들.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눈동자는 쌍둥이 형제들이 사고를 치기 전의 그것과 퍽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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