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병가를 내고 하루를 쉬다 온 베일리의 얼굴은 상당히 핼쑥했다.
비척비척 걷다가 멈추고 멍하니 일을 하다가 멈추기를 계속해서 반복.
누가 봐도 정상적이지 않은 그녀의 모습에 앨리스의 얼굴에도 상심이 깃들었다.
‘저런. 단순히 몸살이라고 했는데 아직 덜 나은 걸까?’
아무리 서로 치고받고 싸우더라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친구는 그녀밖에 없다.
앨리스는 (이상하게 오늘따라 눈치를 많이 보는) 엘레인이 깨끗하게 비운 사발을 옆으로 치웠다.
그리고는 흡사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는 베일리의 어깨에 턱 하니 손을 올렸다.
“베일리. 혹시 아직 몸이 아픈 거야?”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아까부터 계속 넋을 놓고 있는데. 캐시와 내가 있으니 하루 정도 더 쉬어도 되니까 정 힘들면 돌아가서 푹 쉬어.”
“나 참. 그런 게 아니라니까…?”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던 베일리가 우울감 가득한 얼굴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당연하지만 누가 봐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그녀의 말에 앨리스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어졌다.
“그런 게 아니면 뭐? 너 지금 입술 완전 새하얘. 밥은 제대로 먹고 다니는 거야?”
“하나밖에 없는 그게 사라졌는데 밥이 넘어갈 리가 있냐아….”
다시금 그때의 일이 생각났는지 와락 인상을 찌푸린 베일리가 비척비척 구석에 가 찌그러졌다.
반면 이해할 수 없는 베일리의 말에 앨리스는 더욱더 걱정스런 얼굴을 하며, 그녀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이상하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평소엔 얄밉지만 그래도 가슴 따뜻한 친구의 손길에 베일리의 몸에도 온기가 들었다.
그 뜨뜻한 손길에 베일리는 울음이 터질 것 같았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누가 옆에서 걱정해주면 감정이 더 벅차올라서 참았던 눈물이 터져 나오는 그런 거.
다행히 아직까지 눈물을 떨구지 않은 베일리는 파르르 떨리는 눈을 들어 걱정 가득한 앨리스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토닥임에서 용기를 얻은 베일리는 슬쩍 시선을 돌려 그 옆쪽을 바라봤다.
하지만 정작 눈이 마주친 최강 귀요미 황녀님께선 어깨를 흠칫 떨며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쿠궁!
울적한 가슴에 균열이 생긴 베일리가 세상 다 잃은 얼굴로 바닥에 엎어졌다.
그리고 친우의 따스한 토닥임에도 멀쩡하던 눈에서 짠물이 펑펑 쏟아지기 시작했다.
“후에엥. 내 사랑스런 컬렉션도 사라지고 황녀님은 아까부터 계속 내 시선 피하고. 인생 헛살았다 헛살았어!”
탕탕! 땅을 치며 울부짖는 베일리의 모습에 잠시 당황했던 앨리스가 바들바들 떨리는 친우의 어깨를 확 잡아챘다.
“잠깐, 뭐라고? 컬렉션이 사라졌다니. 대체 어쩌다가?”
“나도 몰라!”
“세상에, 베일리. 설마 나랑 공유하기로 한 컬렉션이 사라진 건 아니지?”
“야, 이! 넌 이 상황에도 그런 말이 나오냐!”
베일리와 앨리스가 저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로 투닥거리기 시작했다.
소외감을 느낄 법도 하지만, 엘레인은 전혀 슬프지 않았다.
오히려 그날의 사건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에(범인) 죄스러운 마음밖에 안 들었다.
‘도대체 그 컬렉션이라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베일리한테 엄청 소중한 것만은 확실하네.’
…그리고 진짜 엿 됐다는 사실도 확실하지.
베일리가 저렇게까지 상심한 건 처음 봤다.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 그 튼튼한 베일리가 병가를 냈겠는가?
죄책감에 점점 더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끼며 엘레인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벽화도 안 되겠어. 너무 위험해.’
재채기로 놀란 운디네가 순간적으로 수압을 높인 물줄기는 단번에 벽을 뚫고 베일리의 컬렉션이라는 것마저 간단히 부숴버렸다.
천만다행으로 사람이 다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지만, 다음에도 천운이 따라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엘레인은 과감하게 벽화 그리기로 훈련하는 방법을 버리고는 힐끔 베일리의 눈치를 봤다.
‘베일리한테 사과하고 싶은데….’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물의 정령과 계약했다는 사실을 밝혀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을 원하지 않는 엘레인은 다른 방법으로 베일리에게 속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래도 아픈 건 아니라서 다행이다.”
“마음이 아파. 마음이. 마상이라고 들어는 봤나 모르겠네.”
“됐고. 그래서 창틀 청소는 했니?”
“아, 맞다!”
“어휴. 내 이럴 줄 알았지. 궁상을 떨려면 오늘 할 일은 다 해놓고 떨어주련?”
“넵! 금방 해치우겠슴다!”
바닥에서 꿈틀거리던 베일리가 벌떡 일어나더니 목청껏 소리쳤다.
그리고 베일리가 막 행동을 나서기 전, 엘레인은 운디네를 보며 두 눈을 빛냈다.
‘지금이야 운디네! 베일리가 보기 전에 먼지를 모두 치워버리는 거야!’
-무우웅!
그날의 공범 운디네는 우렁찬 포효와 함께 재빨리 몸을 날렸다.
그리고 잠시 뒤.
청소 도구를 가지고 창문 가까이 다가간 베일리는 오늘따라 먼지 하나 없는 창문틀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하다. 누가 내 구역까지 같이 청소해줬나?”
매일 청소를 하긴 해도 먼지 한 톨 정도는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오늘은 육안으로 봤을 때는 물론이고, 닦아도 걸레에 묻어나는 것이 없었다.
운디네가 옆에서 자랑스럽게 포효하고 있는 줄도 모르는 채. 베일리는 고개를 연신 기울이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응? 벌써 청소 다 끝났니?”
“그게 말이야. 오늘따라 닦아도 닦아도 먼지 한 톨 안 묻어나는 거 있지?”
“정말? 그럴 수가 있나?”
“…….”
“…왜 그렇게 봐?”
“아니. 혹시 네가 다 청소해놓고 다른 말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베일리의 말에 앨리스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굳이 왜 그러겠어? 번거롭게.”
“하긴 그것도 그러네. 네가 번거로운 일을 할 리가 없지.”
“너 뭔가 말하는 뉘앙스가 좀 그렇다?”
그럼 그냥 운이 좋은 건가?
베일리는 뒤에서 소리치는 앨리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창틀 청소 건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러나 오늘은 행운의 여신이 베일리를 지켜보고 있기라도 한 건지, 운수 좋은 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얼레? 이불 누가 빨아놨어?”
잠깐 엘레인의 부름에 다녀온 사이 여름 이불이 깔끔하게 빨려 있지를 않나.
“온니도 같이 먹자.”
“헉! 황녀님이 내게 드디어 말을 걸어주셨어!”
“…빨리 앉어!”
“헤헤. 말씀은 감사하지만, 그 전에 물을 따뜻하게 데워 와야… 오잉? 물이 아직 따뜻하잖아?”
다 식어버렸을 거라 생각했던 찻주전자 속 물이 여전히 후끈하지를 않나.
“베일리! 혹시 시간 되면 나 좀 도와…. 어? 그분이 그렇게 명하셨다고?”
“뭐야. 무슨 일인데?”
“아, 아무것도 아니야. 넌 아무것도 하지 말고 편히 쉬어.”
“뭐? 대체 뭔데? 너희들 지금 나 따시키냐!”
무언갈 부탁하려던 동료들이 헐레벌떡 다른 곳으로 뛰어가지를 않나….
“나 진짜 따돌림당하는 건가?”
베일리는 의기소침해졌다.
오늘따라 할 일이 없는 건 좋았지만, 동료들의 반응이 심상치 않다.
베일리 성격상, 평소라면 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대체 내가 뭘 잘못했는데!’라고 외쳤겠지만.
“그래도 뭐. 지금 내겐 황녀님이 있으니까!”
잃어버린 만큼 새로운 것들로 다시 채울 생각이 가득한 그녀는 그때의 일을 잠시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리고 퇴근할 시간이 되었을 때 베일리는 더 이상 슬퍼하지 않았다.
엘레인의 우렁각시 작전이 제대로(?) 먹혀들었던 것이다!
‘일을 안 하는 것보단 사진 찍을 때 더 행복해 보였던 것 같지만…. 어쨌든 기분이 풀려서 다행이야.’
짧은 팔을 흔들어 베일리를 직접 배웅한 엘레인은 감동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나가 간당간당하네.”
베일리를 쉬게 하기 위해 쉴 틈 없이 운디네를 움직인 덕분에 마나가 거의 바닥났다.
가사 노동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구나.
나름 쓸모 있는 깨달음을 얻으며 엘레인은 연보랏빛 노을을 힐끔 바라보았다.
‘마지막으로 할 수 있겠지?’
베일리의 기분이 완전히 나아진 것 같다고 해도 이 일을 마무리 짓기 전엔 완전히 끝난 게 아니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기 위해선 노을이 완전히 지고 새카만 밤이 찾아와야만 했다.
“그럼 푹 주무셔요.”
“응. 온니도 잘 자!”
앨리스의 굿나잇 키스를 받으며 침대 속에 들어간 엘레인은 한동안 숨을 죽이고 시간이 지나길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경비가 가장 적을 때가 되어서야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온 엘레인은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다.
‘엉망이 된 숙소를 아직 청소하지 못했다고 했던가.’
무엇 때문에 엉망이 된 건지는 엘레인에게 말해주지 않았지만, 당시 사건을 일으킨 장본인으로서 대충 예상은 갔다.
아마 그 소중한 컬렉션이 박살 난 상태로 방이 어지럽혀져 있겠지.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니 내가 청소해줘야 맞지.’
엘레인은 다시 한번 베일리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며 속으로 사과했다.
그리고 이틀 전보다 조금 더 강화된 경비망을 피해 숙소에 도착한 엘레인은 난리가 난 내부를 보고 헛숨을 들이켰다.
“컬렉숀이란 게 유리 재질이여써?”
조각 난 모양을 보면 뭔가 둥근 수정구 같은데 베일리 성격상 이 위를 구르지 않았으면 참 다행이다.
‘파편이 안 튀어서 진짜 다행이다.’
종일 베일리를 살펴본 결과 어디 다치진 않은 것 같았다.
혹시 몰라 운디네로 미약하게나마 치료의 힘을 발휘하기도 했으니 상처가 났다면 지금쯤 다 나았을 것이다.
엘레인은 다시 한번 벽화로 훈련하는 짓은 절대 하지 않겠다 다짐하며 운디네를 이용해 유리 조각이 가득한 바닥을 깨끗하게 청소했다.
“후우. 다행히 딱 탈진 직전이야.”
-무휴우….
그래도 조금 익숙해졌다고 몸에 힘이 빠져나가긴 했지만, 전처럼 기절하지는 않았다.
훨씬 깔끔해진 내부를 보며. 엘레인은 왠지 모를 뿌듯함에 방긋 미소를 지었다.
“베일리 온니가 보며는 깜짝 놀라겠지?”
-무우!
크게 동조하는 운디네를 매만진 엘레인은 힐끔 바깥을 바라보았다.
달은 아직 밝았고 슬슬 이쪽으로 순찰을 올 때가 됐으니 얼른 자리를 피해줘야 한다.
“얼렁 돌아가자.”
스윽. 문을 열어 시커먼 복도를 살핀 엘레인은 잽싸게 방문을 닫고 튀어 나갔다.
운디네가 앞에 있으니 기사들이 보이면 바로 신호를 줄 것이다.
그렇게 엘레인이 정찰왕 운디네만 믿고 막 모퉁이를 돌려던 순간.
“으앗!”
“뭐야. 역시 꼬맹이였잖아?”
“오, 오빠?”
엘레인은 모퉁이에서 쑥 튀어나온 라네즈의 얼굴을 보고 입을 떡 벌렸다.
얘가 왜 여기에 있어?
아니, 그보다 운디네! 왜 라네즈가 앞에 있는데 아무 말도 안 해줬어!?
엘레인이 두 눈을 부릅뜨며 위를 바라보자 운디네가 덩실덩실 몸을 흔들며 답했다.
-무우? 무뭇무?
(크고 무서운 인간 오면 알려 달라며? 난 제대로 일했다?)
‘…….’
알고 보니 운디네는 잘못한 게 없다.
차라리 앞에 사족을 붙이지 말았어야 했는데.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신기하다는 듯이 이쪽을 바라보는 라네즈를 난감하게 쳐다보았다.
“근데 너 왜 여기에 있냐? 이 밤에 산책 나가려던 건 아닐 테고.”
올 것이 왔다.
엘레인은 의심 가득한 라네즈의 시선을 스리슬쩍 피하고는 무슨 변명을 해야 하나 맹렬하게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그때 대뜸 손뼉을 치는 라네즈.
“아! 그거구나? 너도 그거 때문에 나온 거 맞지?”
“엥?”
“그래. 그거라면 이해가 가지. 사실 나도 그거 때문에 나온 거거든.”
그게 대체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저쪽에서 알아서 착각을 해주니 고맙다.
라네즈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는 여동생의 모습에 역시라고 중얼거리며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근데 아직 한 건 아니지?”
“응? 아, 응.”
“다행이다. 나도 아직 안 했는데. 그럼 우리 같이 털러 가면 되겠다. 그치?”
예? 뭘 털어요?
엘레인의 황당한 얼굴이 보이지도 않는지 라네즈는 안 그래도 혼자 가기엔 심심했는데 잘 됐다며 엘레인의 손을 덥석 잡아 왔다.
엘레인은 놓치지 않겠다는 듯 제 손을 약하지만 단단하게 잡는 그의 손길을 느끼며 입을 헤 벌렸다.
저기요? 나 지금 범죄자로 취직한 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