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다음날. 또 그다음 날이 되어서도 엘레인의 한숨은 마를 날이 없었다.
정말 상사병에 걸리기라도 한 건지 블루베리 마카롱에 대한 갈증은 더욱더 심해진 상태!
“이대론 안 대!”
-무루루룩.
엘레인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자, 팔자 좋게 머리 위에서 자고 있던 운디네가 데굴데굴 굴러떨어졌다.
“헉. 웅디네 갠차나?”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챈 엘레인이 깜짝 놀라 손을 뻗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다치면 정령 체면이 안 서지!
-무웅!
운디네가 자신은 건재하다는 것을 알리려는 듯 힘차게 통통 튀어 올랐다.
그러자 손을 뻗은 자세 그대로 굳어버린 엘레인의 입가에서 침이 주륵 흘러내렸다.
-???
음. 왜인지 모르겠지만, 운디네의 모습에서 지난번 쿵쿵 소리를 내며 튀어 오르던 거대한 블루베리가 겹쳐 보인다.
고놈 참 알차고 맛나 보이던데….
그렇다면 우리 운디네는?
“으음. 색깔만 보라색이어씀 딱인데.”
-무우…?
“츄릅. 아, 미안. 잠깐 딴생각해써.”
운디네를 한 입 베어 물고 싶다는 생각에서 간신히 벗어난 엘레인이 급하게 침을 닦아냈다.
현실에서도 이 정도이니, 자신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 것 같다.
‘이거 완전 지난번 마카롱 금단 현상이랑 완전 판박이인 것 같네.’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때는 몰래 마카롱을 먹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하니까 말이다.
애초에 그 마카롱을 누가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은연중에 마커가 만든 건 아닌가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그 주방을 사용하는 사람은 마커뿐만이 아니다.
그러니까 그 마카롱을 다시 한번 맛보기 위해서는….
“역시 직접 가봐야게써!”
운디네를 잘 챙겨 든 엘레인은 비장한 모습으로 문을 열었다.
“황녀님?”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응. 나 잠시 마커 아조씨 만나러 갔다 오께.”
“부주방장한테요? 저희도 같이 따라갈게요!”
“아냐. 온니들은 요기 이써. 나 이제 혼자 갔다 오께.”
미안하지만, 대업을 치르기 위해서는 방해꾼이 없어야 한다.
그런 의미로 나름 매몰차게 그들을 뒤로한 엘레인은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어쩜. 정말 우리 황녀님에게 사춘기가 온 건가 봐.”
“꺄아악! 너무 귀여워!”
…뒤에서 들리는 이상한 대화는 깔끔하게 무시해주도록 하자.
***
진중하게 간을 보고 있던 마커의 등을 누군가가 콕콕 찔렀다.
“주방장님?”
“손님 오셨다.”
주방장이 가리키는 곳을 보자, 황녀님이 주방 앞을 기웃거리는 것이 보였다.
오, 이런! 올 것이 온 건가?
며칠째 황녀님이 디저트를 남겼다는 소문은 황녀의 디저트를 전담하고 있는 마커의 귀에도 들어왔다.
첫 번째 소문이 들려왔을 때 더욱 힘을 주어 맛있는 디저트를 만들었지만, 황녀님의 식욕부진은 여전했다.
가을은 식욕이 폭발하는 계절인데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것인가.
혹시 제 손에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가.
나의 미각이 제 기능을 하지 않게 된 것일까.
온갖 의문들이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하고 있는 와중 결국 황녀님께서 직접 발걸음하신 것이다!
엘레인에게 다가가는 마커의 얼굴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암울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다가가니, 그를 발견한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조씨 어디 아퍼?”
“아, 아닙니다. 그보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찾아오셨나요?”
“으음. 그게에….”
엘레인이 몸을 베베 꼬며 머뭇거렸다.
그 모습에서 또 한 번의 확신을 얻은 마커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황녀님. 솔직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디저트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지요?”
“응? 아니 문제라기보단….”
먹고 싶은 게 따로 있달까. 그리 중얼거리는 말에 마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고 싶은 거요?”
“응. 꼭 한번 먹구 시퍼.”
“하아. 다행이다.”
마커가 갑자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 의문을 표하자 그가 매우 편안해진 얼굴로 머쓱하게 뺨을 긁적였다.
“요즘 황녀님께서 디저트를 남기셔서 저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엄청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으엑! 아조씨가 만든 요리 얼마나 맛있는데! 그때 그 마까룽도…!”
“그때 그 마카롱이요?”
“아, 아니 아조씨가 만든 마까룽이 쵝오라구.”
휴우. 하마터면 블루베리 마카롱을 언급할 뻔했다.
심지어 최근엔 마커가 마카롱을 만들어 바친 적이 없기 때문에 뒷말을 붙이지 않았으면 의심을 샀을 수도 있다.
잠시 입조심을 할 것을 명심한 엘레인이 은근슬쩍 그에게 물었다.
“근데 요즘 별일 업써?”
“무슨 일 말씀이십니까?”
“그냥 모. 뭔가가 없어진다든가?”
“아! 최근 그거 때문에 곤란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긴 해요.”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마커가 두 눈을 활활 불태웠다.
사뭇 달라진 기세에 움찔한 엘레인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무, 무슨 일인데?”
“아니, 글쎄 황궁에 쥐라도 있는지 식재료가 몇 개씩 없어지지 뭡니까? 며칠 전 제가 시험작으로 만든 왕 블루베리 마카롱 열 개를 홀라당 다 먹어버렸다구요!”
“그, 그것참 안댔다.”
그 마카롱. 제가 먹었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엘레인은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리고 마커에게 미안하지만 이건 기회다. 자연스럽게 블루베리 마카롱 이야기 꺼내기에 성공했으니 이젠 그것을 적극 활용할 차례다.
“근데 그 마까룽 맛있어?”
“으음. 일단 제 입맛엔 아주 잘 맞았습니다. 갑자기 사라져서 주변인들의 반응을 살펴보진 못했지만…. 어쨌든 황녀님도 아주 좋아하실 거라고 자신합니다!”
“지짜? 그럼 만들어줄 수 이써?”
“지금 당장요?”
“응! 지금 당장!”
엘레인은 세상에서 가장 간절한 눈빛을 보내며 두 눈을 빛내었다.
하지만 그 강력한 무기를 정통으로 맞은 마커는 머쓱하게 웃을 뿐이다.
“엄. 그게 말이죠. 알고 보니 그때 사용했던 왕 블루베리가 마지막이었지 뭡니까? 하하!”
“뭐어!?”
생뚱맞은 그의 말에 엘레인은 표정 관리를 해야 하는 것도 잊고 버럭 성을 내고 말았다.
마커가 살짝 움찔하긴 했지만, 시험작에다가 재료를 다 써버린다는 실수를 저지른 건 자신이기에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아, 안 돼.’
뭐라고 변명조차 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엘레인의 하늘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털썩. 맨바닥에 주저앉은 엘레인이 잔뜩 글썽이는 눈을 하며 물었다.
“그 왕 블루베리라는 거. 엄청 귀해? 다시는 못 구하는 거야?”
“아, 그런 건 아니지만 수확 시기가 끝나버렸거든요.”
그렇구나. 여름이 다 지나갔으니 수확 시기도 끝나버렸구나.
생각 외로 너무나 원론적인 문제에 엘레인의 고개도 푹 꺾여버렸다.
그런데 그때. 마커가 품을 뒤적이며 주머니 하나를 꺼냈다.
“씨앗이 있긴 한데…. 이 상황에 별로 도움은 안 되겠죠?”
“그거 왕 블루베리 씨앗?”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황녀님께 꼭 맛보여드리고 싶었는데 참 아쉽네요. 이 왕 블루베리라는 게 말입니다. 저희 고향에서 나고 자란 놈이라 맛이 아주 기가 막힌데 한 입 먹으면 과즙이 아주 그냥…!”
“그거 나 줘!”
순간 엘레인이 짧은 팔을 쭉 뻗었다.
저도 모르게 씨앗 주머니를 뒤로 물린 마커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예? 이건 왜….”
“왕 블루베리 씨앗이 있음, 그거 만들 수 있는 거지?”
“물론이죠. 혹시 이걸 직접 키우시려는 겁니까?”
“응. 내가 키워 볼게.”
자신만만한 엘레인의 모습에 마커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네 살배기 아이가 잘 키울 수 있을지는 미지수인 데다가, 만약 성공한다 해도 가을이 지나 겨울이 찾아올 때면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플로스 영지에 내려진 축복처럼 추위에 약간의 내성이 생긴다면 또 모르지만….
“꼭 성공하길 빕니다.”
마커는 결국 엘레인의 환상을 깨트리지 않는 쪽을 선택했다.
“고마워!”
생각보다 쉽게 씨앗 주머니를 받은 엘레인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
마커와 헤어지고 난 후 엘레인은 곧바로 밖으로 나섰다.
하지만 고작 네 살배기 힘으로 땅을 새로 파고 개간할 수는 없기 때문에 차선책을 선택해야 했다.
“요기다가 하면 되겠지?”
그런 의미로 엘레인이 선택한 것은 바로 비어 있는 화단이었다.
며칠째 계속 비어 있으니 누가 쓰는 것도 아닌 듯하고, 이 정도 크기의 화단이라면 블루베리 열 개를 심어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천릿길도 한 걸음부터라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땅을 판 엘레인은 단 하나의 씨앗만을 심었다.
절대 농사에 지식이 없어서 자신이 없는 게 아니었다. 일단 하나의 싹을 틔워 보고 결정해도 늦지 않다는 생각에 나온 행동이다.
“자. 웅디네 네 차례야!”
-무웅!
운디네가 잔뜩 힘을 주더니 정령력을 듬뿍 뿌려댔다.
뜬금없이 웬 정령력? 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리 농사에 지식이 없는 엘레인이라도 나름 자신이 있는 이유는 바로 이 정령력에 있다.
‘회귀 전, 농사를 주로 하던 정령사가 가르쳐준 방법이지.’
실제로 5개월이나 걸리는 성장이 3개월로 확 줄었다고 했던가?
정령력을 듬뿍 받은 작물은 다른 작물과 달리 튼튼하고 추위에도 강하며 맛까지 뛰어나다고 하니, 플로스 영지에 내려진 축복 = 정령력 듬뿍! 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직 운디네는 하급 정령이니 정령 여왕급의 축복 효과는 보이지 못하겠지만, 그래도 올해 안에 수확할 수 있겠지!’
씨앗을 덮은 흙을 톡톡 토닥인 엘레인은 군침을 흘리며 씨익 웃었다.
“쑥쑥 잘 커야 댄다!”
식탐 가득한 주문과 함께.
***
그날 이후 엘레인의 일상에 변화가 생겼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화단에 가서 그동안 회복된 정령력을 최대한 많이 쏟아붓는다.
간단하지만 이건 나름 고되고 힘든 일이다.
오죽하면 마나통이 찔끔찔끔 커가는 것이 느껴질 정도.
그리고 그 때문인지 ‘며칠 동안 화단 앞에서 서성거리는 황녀님’에 대한 소문이 황궁 내에 쫙 퍼졌다.
덕분에 화단으로 출근할 때면 지나가는 사람마다 각각 꽃다발 사탕과 꽃 모양 초콜릿 등. 이상하게 꽃과 관련된 간식거리들을 가득 선물해주었다.
정작 엘레인은 꽃이 아니라 작물을 기르려는 건데 말이다.
어쨌든 황녀 바라기 사용인들은 오늘도 화단 앞에 쭈그려 앉아 있는 엘레인의 뒷모습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오늘의 엘레인은 평소와 달리 매우 우울했다.
“이상하다.”
며칠째 싹이 전혀 트질 않는다.
설마 그때 그 농사꾼 정령사가 거짓말을 했을 리는 없고….
도대체 뭐가 문제지?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누군가가 엘레인의 어깨를 턱하고 만졌다.
“여기서 뭐해?”
익숙한 목소리에 엘레인의 고개가 번쩍하고 들렸다.
뒤를 돌아보니 햇살이 가득 쏟아지는 곳에서 아르닐이 싱그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아르 오빠? 요기 웬일이야?”
“아, 오늘은 야외 수업이래서.”
뭐가 그렇게 짜증이 나는지 선하디선한 아르닐이 얼굴이 팍 찌푸려졌다.
구김이 있어도 빛이 나는 아르닐의 외모를 보며. 엘레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야외 수업? 여기서?”
“그 망할 영감탱이. 나를 가르치고 싶어서 아주 안달이라니까.”
“어? 그거 좋은 거 아냐?”
“아니야. 너랑 놀 시간이 줄어들잖아.”
아르닐이 매우 단호한 얼굴로 강조했다.
“게다가 친구로서 도움이 되고 싶다고 하니 거절할 수도 없고. 아주 난감하다니까.”
푸념 섞인 말을 뱉는 얼굴이 꽤 피곤해 보인다.
‘그래도 실력이 늘어나는 거면 좋은 거 아닌가?’
아, 맞다. 황궁 마법사들이랑 대화하는 쪽이 더 재밌다고 했었지.
마탑주 할아버지 불쌍해서 어쩌나. 지금까지 꽤 열심히 들이대고 있던 모양인데, 저 아름답게 썩은 표정을 보라.
그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아르닐 본인은 정작 마탑주를 상당히 귀찮아하는 듯했다.
“그냥 도망가는 건 안 대?”
“어딜 도망가신다고요?”
그때 들려오는 목소리에 뒤를 휙 돌아보자, 등 뒤로 나타난 마탑주가 빙긋 웃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눈꼬리를 바로 늘어트리며 눈물 자국을 찍어내는 것이 아닌가?
“흑흑. 이 늙은 친구를 두고 도망갈 생각을 하시다니, 정말 너무합니다.”
물론 끝까지 쫓아갈 테지만 말입니다. 라고 뒷말을 붙이는 마탑주의 모습에, 아르닐이 아주 지긋지긋해 죽겠다는 얼굴로 눈짓했다.
‘봤지. 내가 도망가는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야.’
‘응. 도망가면 아주 큰 일 나겠다.’
나이 지긋한 노인이 훌쩍이며 지옥 끝까지 쫓아올 걸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는군.
아르닐의 고생길이 훤히 눈에 보이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