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1화 (71/417)

71화

마커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내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한 곳에 묶여 있으니 가슴이 답답했다.

“경비병들은 성 밖에 못 나가게 하지. 주변에는 병자들이 넘치지…. 에휴.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람?”

무엇 때문에 이렇게 문을 봉쇄하는 것인지 수십 번은 물어봤으나 경비병들은 묵묵부답이었다.

한시가 급한 그로선 강압적인 기세를 내뿜는 경비병들을 뚫고서 바로 코앞의 플로스 영지로 달려가고 싶었다.

물론 그럴 깡과 능력이 있었다면 그랬을 거란 뜻이다.

“에효. 도대체 언제까지 가둬 둘 요량인지.”

마음이 급해서인지 답을 주지 않을 거란 걸 알면서도 괜히 문 주변을 서성거리게 된다.

그렇게 목적지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출입문 주변을 맴돌기를 한창.

앞쪽에서 웬 소란이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유행병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쩌렁쩌렁. 흰색 가운을 입은 초라한 행색의 노인이 목청껏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자, 여태 대충 손을 휘젓고 있던 경비병들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에잇. 자꾸 재수 없는 말 지껄이면 감옥에 가둘 거요!”

“재수 없는 말로 넘겨들을 게 아니네. 이건 지독한 현실이라고! 그러니 내 말을 믿고….”

“지독한 현실이고 자시고. 사제님들만 오시면 다 해결될 일이니까 그때까지 소란 피우지 말고 잠자코 기다리시오.”

“내 말은 그때까지 어떻게 기다리느냐 이 말이지!”

의원처럼 보이는 노인의 외침에 경비병들은 골치가 아프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멀리서 이 모든 것들을 지켜본 마커는 고개를 기울였다.

“단순한 유행병이 아니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마커는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때보다 현저히 줄어든 거리의 사람들을 보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지었다.

어째서인지 저 노인의 말을 그냥 넘겨들을 수가 없다.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 * *

방으로 돌아온 엘레인은 편지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분명 깃털만큼 가벼운 무게이건만, 편지를 들고 있던 팔이 저려왔다.

그만큼 편지 안에 담긴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마커 아조씨….”

마커가 갇혔다.

플로스 영지로 가던 도중, 페른 영지에 딸린 베스 마을에 갇혀 오도 가도 못하고 있다.

편지 안에는 그런 마커가 베스 마을에서 보았던 것들을 담고 있었다.

경비병들이 사람들을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있고 이상하게 마을 사람들이 똑같은 이상 증세를 보이며 쓰러지는 일이 늘어났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엘레인은 마커가 말한 ‘이상 증세’에 주목했다.

‘가려움증을 동반한 급격한 열 상승. 그리고 온몸에 수포가 잡히는 현상이라니….’

편지의 내용을 읽자마자 얼굴이 창백해진 엘레인은 이 병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역시 이 병. 회귀 전 아스터 왕국을 휩쓸었던 그 전염병이잖아?’

손끝이 덜덜 떨려왔다.

이 병은 수두의 변종으로 아주 위험한 전염병이다.

보통 수두와 달리 체내에도 염증이 발발하기 때문에, 일주일간 큰 열병이 발생할 때 목구멍에 수포가 올라오게 되면 호흡 곤란으로 숨질 수도 있다.

만약 잘 이겨내더라도 온몸에 수포가 퍼진 뒤의 상처 부위에서 염증 및 궤양이 발생하게 되며, 이로 인해 괴사 또는 쇼크로 사망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회귀 전. 이 전염병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아스터 왕국은 40퍼센트에 달하는 국민들을 잃었다.

그 일로 왕국은 크게 휘청거렸고 도적떼와 굶주린 사람들의 난동으로 무법지대가 되었으며, 아스터 왕과 그의 자식들이 몰매를 맞을 동안 엘레인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런데 아스터 왕국을 파괴시키고 엘레인을 해방시켜주었던 그 재앙이. 지금 베네딕트 제국에 모습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아직 이 병을 몰라.’

그러니까 단순히 격리하는 것으로 끝난 것이다.

전염되는 병이라고 해서 전부 치명적인 병일 리는 없으니까.

감기처럼 잠시 유행하는 신종 병일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잠시 지켜보기로 한 것이리라.

‘그런데 이상해. 베네딕트 제국에서 이러한 전염병이 창궐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지?’

엘레인이 알기론 지금으로부터 20년 후. 아스터 왕국에서 처음으로 위의 전염병이 창궐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이른 지금 시기에 이 끔찍한 병이 퍼지다니….

‘아니야. 내가 세상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생각은 버려야 해.’

현자도 아니고 어떻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모두 알고 있겠는가?

심지어 당시 엘레인은 ‘진짜 네 살배기’였다.

앞서 알았던 건 모두 하녀들의 입에서 듣거나 이후 알게 된 사실들이지 그때의 엘레인이 무척 뛰어나서 모두 알고 있던 게 아니었다.

‘게다가 미래는 충분히 바뀔 수 있어.’

회귀 후 엘레인이 베네딕트 제국으로 오면서 바꿔놓은 것은 무척 많다.

그러니 미래 또한 충분히 바뀔 수 있다.

고작 나비의 날갯짓 한 번으로 태풍이 일어난다는 말도 있으니 전혀 과장된 생각은 아니다.

그리고 지금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이게 아니다.

‘페른 영지…. 플로스 영지와 매우 근접해 있어.’

심지어 페른 영지의 외곽 지역에 위치한 베스 마을은 엎어지면 코가 닿을 정도로 플로스 영지와 인접해 있다.

자칫하면 플로스 영지민들도 휘말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제국민들도 고통 속에 죽을지 모른다.

엘레인은 작은 주먹을 꽉 쥐었다.

내 사람을. 더 나아가 제국민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어떻게?’

이 병이 단순한 유행병이 아닌 치명적인 전염병이라는 사실을 귀족들에게 알려야 한다.

하지만 언제나 같은 벽에 부딪히듯, 고작 네 살배기가 하는 말은 신뢰성이 매우 떨어진다.

엘레인을 좋게 보는 지금의 관료들이라면 ‘어린아이 치고는 생각이 깊다’며 칭찬하거나 ‘너무 걱정하지 말라’며 안심시키려 하지 않을까?

‘가족이라면 조금 믿어 줄지도 모르지만, 역시 적극적으로 행동하진 못할 거야.’

유행병에서 전염병으로 넘어가면 제국의 대응도 달라져서 반경 1km 내의 접근을 철저하게 통제한다.

제국의 유통망이 일부 끊기므로 경제적 타격이 발생하고, 전염병 이슈가 퍼져 사회 불안을 야기할 수 있다.

그뿐인가? 통제 구역에 남겨진 주민들은 치료법을 찾을 때까지 걱정과 불안을 안은 채 실체 없는 악마와 싸워야 했다.

때문에 아무리 황족이라고 해도 심사숙고할 수밖에 없다.

아직 확실하지도 않은 네 살배기 아이의 말만 믿고 덜컥 결정하기엔 일이 너무나도 커지니까.

만약 사실이 아니라면 사람들에게 큰 피해를 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이 그들의 발목을 붙잡을 것이다.

‘그러니까 내 말을 증명할 증거가 필요해.’

이 병이 매우 위험하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 엘레인은 결정했다.

‘역시 직접 가 봐야겠어.’

이번 일에 대해서 아는 일이 전혀 없으니 직접 가서 조사할 수밖에 없다.

운디네의 정령력으로 몸을 감싸면 되니 옮을 걱정도 없다.

거기서 전염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까지 찾으면 금상첨화가 따로 없을 터.

“근데 허락해 줄까?”

으음. 아무리 생각해도 경계령을 내리고 격리 조치를 취한 그 위험한 곳에 황녀를 보내 줄 리가 없다.

“끄으응. 그렇담 하는 수 없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엘레인은 허리를 바로 폈다.

솔직히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필살기를 써먹겠나?

* * *

“이이잉 아빠아. 제발요오!”

“하아….”

황제는 미간 사이를 주물렀다.

너무나도 사랑스러운 딸이 애교를 부린다.

오로지 자신만을 향해. 주변엔 방해하는 인간도 없다.

물론 요구할 것이 있어 보이지만, 딸아이의 부탁이라면 그게 설령 드래곤의 목을 따오라는 것이라고 해도 기꺼이 들어줄 의향이 있다.

하지만….

하필 그 부탁이라는 게 플로스 영지에 가는 거라니?

“엘레인. 지금은 시국이 좋지 않다. 그러니 다음에 가는 건….”

“그래서 가고 싶었는데.”

“…….”

“영지민들 힘내라고 하고 시펐능데…. 훌쩍.”

“아.”

황제는 짧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딸아이의 귀하디귀한 보석 같은 눈물을 빠르게 훔치며. 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영지민들의 불안감을 잠재우고 싶었던 모양이군.’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플로스 영지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페른 영지에 기묘한 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딸아이가 들은 듯했다.

황제는 아이에게 쓸데없는 말을 한 놈을 찾아 사지를 찢어버리겠노라 다짐하고는 한쪽 무릎을 꿇어, 훌쩍훌쩍 울고 있는 엘레인을 따뜻하게 안아주었다.

“알겠으니 뚝 그치거라.”

“정… 말?”

“그래. 오늘 내로 플로스 영지에 갈 수 있도록 준비하겠다. 대신 이틀 안에는 꼭 돌아와야 한다.”

“응!”

생각 외로 쉽게 허락해 준 황제를 꼭 껴안은 엘레인은 그를 향해 방긋 웃어주었다.

그런 아이를 향해 마주 보는 황제의 미소가 어쩐지 조금 서늘해 보였지만, 엘레인은 그저 그러려니 했다.

* * *

“황녀님.”

“어?”

간단한 채비를 마친 후 마법진 위에 올라선 엘레인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흠칫. 몸을 떨었다.

“캐, 캐시 온니?”

“예.”

“저 사람들은 모야?”

“황녀님을 보필하기 위해 선발된 자들입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캐시 뒤로 철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미 엘레인의 등 뒤로 황녀를 지키기 위해 출동한 제1 기사단이 도열해 있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모자란다는 듯이 또 다른 기사단이 늠름한 얼굴로 가슴을 쭉 폈다.

“황실 제2 기사단장 메르토입니다! 다시 뵙게 돼서 영광입니다!”

아아. 지난번 파르망 경 바로 옆에서 자기소개를 했던 그 기사다.

얼굴을 알아본 엘레인이 입을 헤 벌리며 인사를 하자, 옆에 있던 파르망 경이 메르토 경의 어깨를 툭 쳤다.

“경거망동하지 말고 잘 보필해야 할 거다.”

“그야 당연하죠. 목숨을 걸고 지킬 겁니다.”

두 사람 사이에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파직하고 튀었다.

서로 웃고 있지만 묘하게 흉흉한 분위기 속에서 엘레인의 얼굴은 퍼렇게 죽었다.

‘캐시와 제1 기사단만 해도 벅찬데 여기서 제2 기사단까지 함께 가다니….’

이러다가 탈출 못하고 중간에 잡히는 거 아니야?

“그럼 이동하겠습니다!”

황궁 마법사의 외침과 함께 주변 풍경이 삽시간에 바뀌었다.

그리고 엘레인은 이전과 달리 매우 깔끔해진 영주성을 볼 수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멍하니 영주성을 올려다보고 있는데, 옆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 아조씨!”

급작스런 방문에도 불구하고 집사는 전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맞이한 그는 말끔하게 탈바꿈한 영주성 안으로 엘레인을 안내했다.

“잘 지내써?”

“영주님 덕택에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답니다.”

집사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자 안에 있던 사용인들이 화들짝 놀라 인사를 했다.

엘레인은 확실히 예전보다 표정이 많이 좋아진 그들을 보며 손을 흔들어줬다.

“그럼 편히 쉬십시오.”

집사가 떠나고 캐시가 옆에 딱 붙어 섰다.

적막감만이 가득한 방 안.

캐시와 단둘이 남은 엘레인은 주변을 둘러보는 척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자 그럼 어찌할까.’

캐시는 존재감은 옅지만 절대 얕볼 수 없는 존재다.

지난번 태양신전에 홀로 쳐들어가, 정보를 수집했던 것만 봐도 그렇다.

그만큼 능력도 있고 엘레인을 위해서라면 온몸을 불사를 준비마저도 되어 있다는 뜻이겠지.

그런 그녀에게 몰래 베른 영지에 들어가자고 해 봤자 퇴짜만 맞을 게 뻔했다.

‘하필이면 왜 캐시를 붙여줘서는….’

캐시를 데리고 가는 건 엄연히 황제의 선택이었다.

거기다가 또 다른 기사단까지 함께 붙어오는 바람에 탈출 난이도가 급상승해버렸다.

하지만.

“온니. 나 간식 먹을래.”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캐시가 문을 열자, 밖에서 기사 두 명이 경비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역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엘레인은 캐시가 나갈 때까지 가만히 있다가 문이 닫히자마자 바로 행동 개시했다.

“아무리 캐시 온니라도 이건 몰랐겠지?”

-무우?

운디네가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엘레인의 손끝을 바라봤다.

저 작은 몸으로 카펫을 낑낑대며 끌어내고 고사리 같은 손으로 바닥의 이음새를 잡아 올리니, 조금 왜소한 성인 남성이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 드러났다.

엘레인은 편지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으며 비밀 공간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안 들어오고 뭐 해?”

-무, 무!

“아, 이거? 전에 너 자고 있을 때 집사 아조씨가 알아 두면 좋다고 가르쳐줬어.”

-무휴우.

이럴 수가. 간만에 내가 활약할 줄 알았는데….

크게 실망한 운디네는 아무것도 모르고 실실 웃고 있는 주인을 원망스럽게 쳐다보며, 쌩하니 지나쳤다.

“엥? 왜 갑자기 삐졌지?”

운디네의 심정을 모르는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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