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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화 (72/417)

72화

평화롭기만 하던 플로스 영지 내에 활기가 가득 들어찼다.

황녀님과 함께 등장한 은빛 갑옷의 기사들.

그들이 영주성 곳곳에 자리를 잡고 있으니 활력이 넘쳐나는 것이다.

영주성 사람들도 오래 지나지 않아 플로스 영지를 다시 찾아 준 영주님이 기꺼워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러한 와중에도 유난히 시끌벅적한 곳이 있었으니….

“실망이군. 겨우 그 정도 자세로 황녀님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

“무슨 말씀을. 어디로 보나 우리 기사단이 한 수 위라고 생각하는데요.”

“뭐라고?”

파직. 파지직.

평소에도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던 파르망과 메르토 사이로 불꽃이 튀겼다.

원래 라이벌 사이기도 했고 또 평소 자주 보던 풍경이라서 그런지, 부단장들은 또 시작이라는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메르토 경의 카운터 공격에 잠시 할 말을 잃은 파르망이 훌훌 고개를 털며 말했다.

“아니. 자네 기사단은 우리 기사단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졌어. 대체 어느 기사들이 왼쪽 오른쪽 상관없이 아무렇게나 검집을 맨단 말인가?”

좋게 말하면 자유분방하고 나쁘게 말하면 용병들이나 다름없다.

그 점을 꼬집어주자 메르토가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우리 기사단은 대부분 양손잡이라서 그런 것이니 신경 쓸 것 없습니다. 오히려 제1 기사단과 달리 양손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고 생각하는데요?”

“역시 자넨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그렇게 중구난방으로 검을 뽑았다가는 위급한 상황에 역으로 아군들이 다칠 수 있을 텐데?”

“그렇게 걱정이면 지금 당장 시험해 보시렵니까?”

아르르르….

캬아악, 캭!

왠지 개와 고양이가 떠오르는 유치찬란한 신경전에, 부단장들의 시선이 한심한 그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말하기를.

“죄송합니다. 우리 단장님이 조금 쪼잔해서 검집 위치 가지고도 시비를 거네요.”

“아뇨.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지난번에 황녀님과 함께하지 못한 게 아쉬워서 더 저러시는 것 같네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쪼잔하고 열등감 넘치는 단장들과 달리 부단장들은 참으로 예의가 발랐다.

덕분에 한쪽은 싸우고 있고 다른 한쪽은 고개 숙여 사과를 하고 있는 참으로 기묘한 광경이 연출됐다.

“……?”

웬만하면 동요하지 않는 캐시조차도 잠시 걸음을 멈출 정도니 말 다 한 셈.

“앗. 안녕하십니까. 그 간식들은… 황녀님께 드리는 거로군요?”

때마침 그녀를 발견한 파르망이 언제 이를 드러내고 싸웠냐는 듯 방긋 웃었다.

캐시가 그런 그를 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토 나온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메르토가 자연스럽게 파르망 앞을 막아섰다.

“마침 만나 뵙고 싶었는데 잘됐네요. 아직 황녀님의 호위역이 정해지지 않았던데, 그 역할. 제가 맡아도 될까요?”

“아니, 잠깐! 그 일은 누가 봐도 경험자인 내가 하는 게 맞지 않나?”

“그런 거라면 제가 더 알맞지요. 황녀님을 지키기 위해 매일 아침 호수에서 단련을 했던 게 바로 우리 기사단이니까요.”

“그거랑 이거랑 다르지 않나?”

“아니요. 완전 똑같은데요. 캐시 양도 그렇게 생각하시지요?”

“…….”

두 기사단장의 뜨거운 눈빛에 캐시는 침묵했다.

그리고 한참 뒤 고개를 끄덕이고는 당혹스러움 하나 묻어나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황녀님께서 허락하신다면 두 분 바로 배치해드리겠습니다.”

“당연히 허락을 맡아야죠!”

“지금 황녀님을 찾아봬도 됩니까?”

“…제가 먼저 말씀을 묻도록 할 테니 두 분은 밖에서 대기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두 사내가 우렁차게 답하자 캐시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파르망과 메르토는 신경전을 벌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렇게 도착한 영주 방.

엘레인의 방 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던 제1 기사단원들은 눈앞에 드러난 이상한 조합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단장님께서 여긴 웬일이십니까?”

“잠시 황녀님께 볼일이 있어서 왔다.”

“아 그러시구나. 그런데 2 기사단장님은 왜 같이…?”

“왜요. 제가 함께 있어서 불만이신가요?”

“아, 아닙니다!”

눈에 띄게 침울해진 메르토의 얼굴에 당황한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이후 메르토가 장난이라는 듯 웃으며 어깨를 두드렸지만, 그럼에도 기사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은 풀어질 줄을 몰랐다.

그도 그럴 게, 이게 진짜 장난이라면 어깨를 두들기는 이 강렬한 타격음은 무어라 설명한단 말인가?

간절한 눈으로 살려 달라는 신호를 쉼 없이 보내는 부하 녀석에, 파르망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봐, 메르토 경. 우리 애들 그만 좀 괴롭히지?”

“아, 괴롭히는 걸로 보였습니까? 그냥 친근하게 대하려 했던 건데 말입니다.”

“나 참. 어디서 이렇게 속이 베베 꼬인 놈이 와서는…. 캐시 양? 왜 그러십니까?”

제2 기사단에 소속된 사람들은 참 피곤하겠구나.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던 파르망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까부터 계속 조용한 캐시가 문손잡이를 잡으려던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한참이 지나도 문을 열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의문을 표하던 두 기사단장은 이내 무언가를 깨닫곤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황녀님께서 외출하셨나?”

“아니요. 황녀님께선 계속 안에 계시는데요.”

“그런데 왜 아무런 인기척도 안 느껴지지…?”

“!?”

파르망의 말에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들의 몸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런 그들을 무시하고 캐시가 문을 벌컥 열자, 아니나 다를까 그곳엔 아무도 없었다.

“이게 어떻게 된….”

“너희들! 제대로 안 지키고 뭐 하고 있었어!”

파르망이 부하의 멱살을 잡고 버럭 성을 냈다.

코앞에서 경비를 서고 있는데 감쪽같이 사라질 때까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란 말인가?

“오, 오가는 사람도 없었고 수상한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정말입니다! 기감에 그 어떠한 것도 잡히지 않았다고요!”

기사들이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외쳤다. 몇 번 잡음이 들리긴 했으나, 옷장 문을 여는 소리와 웅얼거리는 소리 등. 방에서 충분히 들릴 수 있는 생활 속 소리가 다였다.

그리고 그런 그들의 말을 증명하듯 창문은 모두 안쪽에서 잠겨 있었으며, 침입자의 흔적 또한 보이지 않았다.

“마법사의 소행인가? 아니, 그렇다기엔 마나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데….”

“여길 보십시오.”

그때 메르토가 바닥 쪽을 가리켰다.

그리고 그곳엔 오른쪽으로 치우친 러그와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아채기 힘든 나무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건 설마 비밀 문…?”

“여기 편지가 있습니다.”

이번엔 비밀 문 바로 옆. 테이블 앞에 선 캐시가 편지 봉투를 가리켰다.

누가 봐도 수상한 그것을 들어 올리니, 네 명의 기사들이 우르르 다가왔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설마 납치범이 적은 편지…?”

캐시를 비롯한 세 남자가 노려보자, 쓸데없는 말을 꺼낸 기사가 헙! 소리를 내며 입을 막았다.

눈치 없는 놈에게 주의를 준 그들은 다시 편지에 집중했다.

그런데.

[혼자 조용히 생각할 게 있어요. 당분간 나를 찾지 말아 주세요.]

“……?”

“이, 이, 이게 무슨 소립니까?”

“황녀님께서 지금 자진해서 사라진 거란 말입니까?”

삐뚤삐뚤. 하지만 그래서 황녀님이 썼을 게 분명한 글자에 기사들은 충격을 먹었다.

그리고 캐시는….

“응? 여기 있던 하녀 어디로 갔지?”

“어? 분명 내 옆에 있었는데….”

조금 전까지만 해도 바로 옆에 있던 캐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고개를 기울이며 바닥을 보니, 꽉 닫혀 있던 비밀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지금 얼빠져 있을 때야? 얼른 기사들을 소집해!”

“아, 알겠습니다!”

기사에게 명령을 내리고 단둘이 남은 파르망과 메르토는 너나 할 것 없이 비밀 통로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뒤.

“젠장! 어디 몸집 작은 애들 없어?”

“크윽. 좁… 아!”

아무래도 비밀 통로를 통한 황녀님 찾기는 조금 시간이 걸릴 듯하다.

***

영주성이 발칵 뒤집히고 있을 무렵.

기나긴 통로를 빠져나와 한적한 곳에 도착한 엘레인은 저 멀리, 영주성이 있을 방향을 바라봤다.

‘설마 벌써 따라오진 않았겠지?’

지금쯤이면 황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뒤가 조용한 걸 보면 비밀 문을 통과할 몸집이 되는 사람들을 찾는 데에 시간이 걸리는 모양이다.

거기다가 비밀 통로가 총 세 개이니 단번에 엘레인이 지나온 길을 찾는 것은 더욱 어려울 터.

태양신전 잠입에도 성공했던 캐시가 조금 걸리긴 하지만….

“그래도 여기까지 왔으니까 안심이야.”

엘레인은 무성한 나무 위로 치솟은 벽을 바라보았다.

페른 영지의 최외곽에 위치한 베스 마을.

저기만 넘으면 그곳에 도달할 수 있다!

‘동쪽에는 없고. 이쪽으로 가면 있으려나?’

엘레인은 조악하기 짝이 없는 나무벽을 짚으며 천천히 빙 둘러갔다.

아무래도 지금 상황에 외부인을 들일 이유도 없고. 애초에 어린아이 혼자 찾아오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 이런 식으로 허점을 찾는 게 나았다.

“찾았다!”

역시 격리 건으로 급하게 세운 나무벽답게, 이런 빈틈이 하나쯤은 있었다.

‘없으면 운디네한테 사정사정을 해서 수압 공격으로 문을 뚫으려고 했는데 참 다행이네.’

물론 이 방법은 소음이 크기 때문에 위험도가 높다.

그러니 몰래 들어가는 입장으론 천만다행인 셈.

“잠시 지나갑니당.”

딱 네 살배기 정도 아이가 지나다닐 수 있는 크기에 만세를 한 엘레인은 지체 없이 허리를 숙여 그곳을 통과했다.

그런데.

“어? 방금 뭐가 지나가지 않았냐?”

“글쎄. 난 못 봤는데. 고양이라도 지나간 거 아니야?”

“그런가…?”

개구멍 바로 근처에 진을 치고 있던 병사 하나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덤불 너머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미, 미야옹….

“내 말이 맞지?”

“진짜네.”

의문점이 풀리자 속이 시원했는지 병사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반면 수풀 뒤에 숨어 고양이 울음소리를 낸 엘레인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니, 하필이면 왜 바로 앞에 있냐고오.’

다리까지 밀어 넣은 뒤에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려서 다시 후진할 수도 없었다.

‘운디네만 토라지지 않았다면 미리 정찰을 보내는 건데….’

머리 위에서 자는 척하고 있는 운디네를 톡 하고 건드린 엘레인은 다시 수풀 너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사라졌다가 나무판자를 추가로 가지고 온 병사들은 개구멍 옆. 자재들이 쌓인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다 가져왔지? 자, 빨리빨리 끝내자고.”

‘어?’

이후 이어지는 행동에 엘레인은 경악했다.

병사들이 못질로 개구멍을 막아버렸기 때문이다.

‘그걸 그렇게 막아 버리면 안 되는데…!’

유일한 탈출구가 허무하게 막히고 있다.

그 사실에 패닉에 빠져 있는데, 반복 작업을 하고 있던 병사 1이 투덜거렸다.

“근데 이건 왜 막으라는 거야? 좀도둑 하나 못 드나들겠구만.”

“왜, 요즘 자꾸 난동부리는 의원 하나 있잖아. 그놈 눈이 영 살벌해서 위쪽에서도 혹시나 하는 거지.”

“하긴 땅 좀 파면 드나들 수 있겠네.”

병사 1이 납득하자 병사 2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그래. 만약 그놈이 병에 걸렸으면 어떡해? 바깥에 퍼지면 우리만 욕먹는다고.”

“어휴. 그놈의 유행병이 빨리 사라지든가 해야지 원.”

수다를 떠는 동안 개구멍 막는 작업이 다 끝났는지, 병사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근데 그 의원 말로는 단순한 유행병이 아닐 수도 있다는데….”

“에이, 재수 없는 소리 하기는. 다 끝났으면 얼른 돌아가자고.”

“잠깐만. 이것만 막고.”

구멍을 막는 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병사 1이 낑낑거리며 커다란 오크통 하나를 못질한 곳 앞에다 갖다 놓았다.

성인 남성도 옮기기 쉽지 않은 오크통을 원망스레 바라보고 있던 엘레인은 저 멀리 사라지는 병사들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이 시점에 전염병임을 알아챈 사람이 있다고?’

심지어 의원이라니….

어쩌면 증거가 될 만한 걸 한두 개쯤 가지고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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