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황당한 말에 라넬이 급하게 말렸지만, 엘레인은 고집불통이었다.
하지만 라넬 또한 만만치 않은 자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어린아이를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 때문에, 결국 엘레인은 새로운 카드를 꺼내 들 수밖에 없었다.
“그게 정말입니까? 지금 옷가게 앞에서 호위 기사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응! 지금 나 엄청 찾고 있을 걸여?”
“이럴 수가. 그럼 난 호위 기사도 있는 귀족 자제를 납치해온 건가…?”
아아. 털썩 무릎을 꿇은 라넬이 흰머리 가득한 머리를 부여잡으며 절망했다.
진심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그 모습에 조금 미안하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대륙 끝까지라도 엘레인을 쫓아다닐 기세라서 어쩔 수 없었다.
“그니까 할부지는 따라오지 마요. 기사 아조씨들한테 혼날 수도 이써.”
“아무리 그래도 호위 기사들이 있는 곳까지는 제가 데려다줘야….”
“안대! 기사 아조씨들 화가 많아서 할부지 보면 지짜 큰일 나!”
“그런….”
어쩌다가 충성심 깊은 기사들이 다혈질 난폭한 기사로 둔갑됐지만, 다행히 추상적인 협박이 잘 먹혀들었는지 라넬의 기세가 확 수그러들었다.
“너무 걱정 마여. 기사 아조씨들한테 잘 전달하께.”
“후우.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지만…. 그런데 정말 호위 기사들이 꽃을 가져다줄까요?”
“지도!”
“…여기 있습니다.”
어휴 이러다 날 새겠네!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걱정을 한 단어로 일축시킨 엘레인은 여전히 무언가 못 미더운 눈치인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할부지. 나 갔다오께!”
“조심히 다녀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아무렴. 겨우 뒷산에 오르는 것뿐인데, 설마 그렇게나 위험하려고.
* * *
점심시간을 조금 넘긴 시각.
출입문 앞을 지키고 있던 병사들은 여느 때와 같이 지루함을 못 이기고 노가리를 까고 있었다.
“오오. 그래서 어떻게 했다고?”
“뭘 어떡하긴 어떡해. 발로 확 까줬지.”
“푸하핫! 그 의원 놈도 참 징글징글하다. 여기가 만약 수도였다면 목이 뎅겅 잘렸을걸?”
“그래. 고작 엉덩이를 걷어차이고 끝난 걸 행운으로 알아야지. …응?”
다그닥. 다그닥.
시시덕거리며 오늘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늙은 노새를 끄는 노인이 다가왔다.
뒷돈은 주지 않지만, 영주성에 신선한 채소를 공급하는 자이기 때문에 지난번에도 눈을 감아줬던 노인이다.
“오늘도 밭에 가는 거요?”
“예에. 바깥에 있는 밭도 돌봐야 우리 식구들이 먹고살 수 있으니까요.”
“흐음. 하긴 그쪽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안 되지. 통과!”
입구 문을 열어젖히자, 잠시 걸음을 멈췄던 노새가 느릿하게 걸어갔다.
라넬 의원과 달리 너무나도 쉽게 마을 밖으로 빠져나온 노인은 경비병이 보이지 않을 때가 돼서야 수레를 멈춰 세웠다.
그리고 짚더미를 향해 말해기를.
“이제 나와도 뎌.”
노인의 말에 짚더미가 잠시 움찔거리더니, 그 안에서 허름한 옷을 입은 네 살배기 아이가 불쑥 튀어나왔다.
“후아! 들키는 줄 알아써여.”
“껄껄. 나만 믿으라고 했제? 것보다 어여 와봐라. 머리 위에 지푸라기가 묻었어.”
노인의 손짓에 네 살배기 아이, 엘레인이 지푸라기 숲을 헤쳐나갔다.
한참의 씨름 끝에 꾸물꾸물 마차 아래로 내려온 엘레인은 친절한 그의 손길 덕분에 한결 말끔해졌다.
“감사함니다!”
“허허.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목적지까지 데려다주지 못해 미안혀.”
“아니에여. 할부지 아니어씀 여기까지 못 와써요. 지짜 감사함니다.”
“그랴. 어여 가서 엄니한테 가. 북쪽 숲은 이쪽 길 따라 쭉 가믄 돼.”
친절하게 위치까지 알려준 노인은 홀홀 웃으며 다른 길로 방향을 틀었다.
노인이 베푼 친절 덕분에 아무런 피해 없이 베스 마을 밖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엘레인은 종종걸음으로 북쪽 숲을 향해 걸어갔다.
“중간에 할부지 만나서 다행이다. 그치?”
-무우!
어느새 기분이 풀린 운디네가 동조했다.
이제부터 진짜 자신이 활약할 생각에 들뜬 것이다.
“역시 옷을 갈아입길 잘한 것 같아.”
반면 엘레인은 자신의 선택에 찬사를 보냈다.
라넬의 집에서 나온 엘레인은 우선, 사람들의 눈길을 덜기 위해 옷가게로 향했다.
그리고 너무나도 손쉽게 현재 입고 있는 옷과 거친 직물로 만든 옷을 교환하는 데에 성공했다.
장사가 잘 안되는 와중 상인의 딸이 찾아와준 덕분에, 옷가게 아주머니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활짝 피었더랬다.
돈 많은 상인의 딸에서, 어머니를 걱정하는 효녀 역할까지.
모두 훌륭하게 연기를 마친 엘레인은 룰루랄라 생사꽃이 있을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어, 어떡하지.”
-무우우….
얼마 가지도 않아 엘레인은 심각한 문제에 봉착하고 말았다.
도대체 얼마나 심각한 문제냐면….
콸콸콸콸콸—!
끝이 보이지 않는 기다란 물길!
발끝을 담갔다간 곧바로 인생을 하직할 것 같은 물살!
심지어 있는 힘껏 점프해도 닿지 않을 기나긴 거리까지…!
혹시나 싶어 지도를 보니, 눈앞의 거대한 장애물이 북쪽 산을 빙빙 둘러싸고 있는 게 보였다.
뒤늦게 중대한 사실을 알아차린 엘레인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았다.
“저… 웅디네. 네 힘으로 잠깐 멈출 순 없을까?”
-무우! 무우웃!
“역시 그렇지…?”
연신 ‘무리!’를 외치는 운디네의 모습에 엘레인의 어깨가 축 처졌다.
운디네 역시 낙담하며 자신의 힘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물살을 원망스레 쳐다보았다.
이 길만 지나면 생사꽃이 있다는 북쪽 산인데.
정녕 이대로 포기해야만 하는 것인가…?
“꼬마야. 거기서 뭐 하고 있니?”
그런데 그때. 구원의 손길이 뻗어왔다.
“거기서 그렇게 앉아 있으면 감기 걸려. 요즘 날씨도 추운데 옷은 또 왜 그렇게 얇은 걸 입고 있니? 부모님은 어디에 있고?”
“저어기.”
“왜 그러니?”
걱정스레 말을 걸어온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엘레인은 그런 남자의 흔들리지 않는 상체와 하체를 번갈아 보고는 울컥.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저 아저씨는 왜 멀쩡하게 건너는 건데!’
네 살배기 아이에겐 엄청난 장애물인 강물이, 남자에게는 물장구를 치며 하루 종일 놀 수 있는 깜찍한 놀이터 수준에 불과한 모양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렇게 멀쩡히 강물 위에 서 있을 순 없거든!
달라도 너무 다른 상황에 짧은 제 다리를 노려보던 엘레인은 억울함을 가득 담아 건너편을 가리켰다.
“아조씨. 저 이 길 건너고 싶어요!”
“으응? 북쪽 산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는 거니?”
“엄마가 저기서 버섯 따요!”
“아하. 어머니를 뵈러 가는 길이었나 보구나? 자, 이리로 오렴. 내가 건너편으로 보내 줄게.”
약초꾼으로 보이는 남자가 선하게 웃으며 팔을 벌렸다.
엘레인은 그런 그의 품에 코알라처럼 찰싹 달라붙으며 물살을 가르는 남자의 다리를 구경했다.
첨벙첨벙. 몇 번 걸음을 옮기고 나니 순식간에 반대편 쪽에 도달했다.
그 모습에 다시 한번 자괴감이 들려는데, 남자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자, 다 왔다. 어머니가 계시는 위치는 잘 알고 있니?”
“네. 자주 따라다녀 봐써요.”
“그래그래. 그거 다행이구나. 하지만 산은 해가 빨리 지니까 빨리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한테 산꼭대기엔 곰이 사니까 거기까지 가진 말라고 하고. 알겠지?”
“네에!”
“하하. 애가 참 씩씩해.”
약초꾼은 씩씩한 엘레인이 귀여웠는지, 동그란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어줬다.
그리고는 팔랑팔랑. 손을 흔들어주는 그에게 마주 인사를 한 엘레인은 드디어 북쪽 산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었다.
“이제 여기만 올라가면 생사꽃 찾을 수 이써.”
-무우….
“응? 왜 그래? 아까 도움 못 돼서 그래?”
-무뭇무….
“괜차나. 좀만 더 성장하면 다 할 수 있는 일이야.”
그리고 지금의 운디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잖아?
엘레인이 그리 말하자 의기소침해 있던 운디네가 다시금 눈을 빛냈다.
-무우웃!
(그래.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물주먹을 만들어내 파이팅을 외친 운디네는 얼마 안 가 자신이 할 일을 찾았다.
“헥헥. 웅디네. 나 물 점….”
-무훙!
(나 없으면 어쩔 뻔했나, 주인아!)
시원한 물을 만들어 주인의 목을 축인 운디네는 다시 기고만장해졌다.
적당한 자신감은 힘을 내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에 엘레인은 그런 운디네를 칭찬을 해줬다.
“웅디네 고마워. 역시 아직 어려서 그런지 등산은 힘들다.”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고 하늘은 주황빛으로 물든 지 오래다.
다행히 운디네 덕분에 방향 감각은 잃지 않고 있지만, 지금 속도로 계속 간다면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도착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산꼭대기엔 곰이 산다고 했는데. 설마 진짜 곰이 튀어나오지는 않겠지?’
공교롭게도 생사꽃이 있는 위치도 산꼭대기다.
처음 약초꾼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벽을 뚫었던 운디네의 힘으로 곰을 쫓아내면 되겠네.’라고 쉽게 생각했지만….
그것도 안전을 확보한 상태에서나 가능한 작전이 아닌가?
‘으음. 지금처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만나면 위험한데….’
이 상태라면 운디네가 미리 알려준다 해도 나무 위로 미리 올라가 있을 수가 없다.
아마 중간쯤 올라가다 지쳐서 주르륵 미끄러져 버리지 않을까?
부스럭.
“어?”
바로 뒤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엘레인은 흠칫. 몸을 굳혔다.
소리소문없이 찾아온 위기에 엘레인의 시선이 운디네에게로 향했다.
‘운디네…. 망 안 보고 있었니?’
-무, 무우.
이럴 수가. 물근육을 만들어 자랑하다 말고 안절부절못하는 운디네의 모습에 엘레인은 낭패감을 느꼈다.
끼이익. 기름칠 덜 된 고철 덩어리처럼 천천히 고개를 돌린 엘레인은 금방이라도 무언가 튀어나올 것 같은 수풀을 보며 온몸을 긴장시켰다.
그리고 그 순간!
-뀨우?
“…뭐야. 사슴이였자나.”
-쿠와아앙—!
콰직!
순하디순한 사슴의 모습에 안심하기도 잠시.
뒤이어 튀어나온 곰이 거대한 손으로 사슴을 저 멀리 날려 보내는 모습에 엘레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저기요 채집꾼 아저씨…. 곰은 꼭대기에 산다면서요?’
근데 얘는 왜 지금 내 눈앞에 있죠?
엘레인은 파들파들 몸을 떨며 거대한 곰을 올려다보았다.
머리로는 운디네를 이용해 놈의 시선을 끌고 재빨리 나무 위로 올라가야 한다고 외치고 있었지만, 난생처음으로 등산을 맛본 어린아이의 근육은 쉬이 움직여 주질 않았다.
운디네 또한 당황했는지, 물줄기를 뿜어내 견제하려 했으나 힘없는 쏘아진 물은 곰의 뺨을 촉촉하게 적셔줄 뿐이다.
-쿠엉?
심지어 그게 곰의 심기를 건드린 모양이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살벌한 기운을 내뿜던 곰이 한쪽 팔을 들었다.
그리고 육중한 팔이 엘레인에게 닿으려던 순간!
-쿠와아앙!
퍽! 소리와 함께 움찔한 곰이 뒷걸음치며 발악하기 시작했다.
급작스런 발작에 화들짝 놀란 엘레인은 그제야 움직이는 발을 바삐 놀려 운디네와 함께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몇 초 뒤.
“죽어써…?”
-무우?
운디네가 물로 찰싹찰싹 곰의 뺨을 때렸지만, 녀석은 몇 번의 경련 후 축 늘어져 버렸다.
“대체 뭐지?”
지나가던 사냥꾼이 잡은 건가?
하지만 화살이나 도끼 등. 사냥꾼들이 주로 사용하는 원거리 투척용 무기는 보이지 않았다.
단지 곰의 이마에 흐르는 피만이, 무언가가 녀석의 이마를 꿰뚫었을 거라는 가설만을 안겨줄 뿐.
사용된 무기가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을 정도로 너무 깊이 박혀 있어서 알 도리가 없었다.
“휴으. 십 년 감수했네.”
어쨌든 덕분에 목숨을 구했다.
그리고 이번 일로 뼈저리게 느낀 것이 있었으니, 그중 하나가 바로 자기 자신을 너무 믿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린아이의 몸은 이렇게 쉽게 지치는데, 한동안 그걸 간과하고 있었어.’
요즘 너무 편하게 살아서 자각심이 많이 흐려진 모양이다.
용병 엘레인이라면 있을 수 없는 일에 다시 한번 경각심을 가진 엘레인은 긴장감을 가득 끌어올려 주위를 둘러보았다.
“누군지 몰겠지만 감사함니다.”
먼저 허공을 향해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한 후.
“얼른 여기서 벗어나자.”
-무우…!
피 냄새를 맡고 다른 짐승들이 찾아올지도 모른다.
곰을 사냥한 이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이 몇 가지 있었지만, 어쨌든 엘레인은 운디네와 함께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리고 잠시 뒤.
부스럭—
나무 뒤에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던 누군가가 아이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