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엘레인은 자신의 키만 한 도끼를 보며 입을 벌렸다.
처음 파르망이 도낏자루를 언급할 때만 해도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정말 창고로 가서 때깔 좋은 도끼를 라네즈에게 건네주는 걸 보고 두 사람이 진심임을 알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커다란 걸 어떻게 들어?’
솔직히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라네즈는 네 살배기 키만 한 도끼를 별 무리 없이 들더니 그것을 장난감 칼을 다루는 것처럼 손쉽게 휘둘렀다.
“…그거 안 무거워?”
“별로? 평소에 들고 다니는 검이랑 무게가 비슷한데?”
아, 그러고 보니 라네즈에겐 별것 아닐 수도 있겠구나.
오전에 보았던 모래주머니 러닝을 떠올린 엘레인은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하지만 그래도 자주 휘두르던 검과 무게중심이 달라서 그런지 한 번씩 몸을 휘청거렸다.
그런 그의 자세를 잡아주며 몇 가지 요령을 알려준 파르망은 기사단을 너무 오래 비울 수 없다며 한 가지 숙제를 남기고 떠났다.
“정말 할 거야?”
“당연하지. 별로 어려운 것도 아니고 고작 장작 300개를 패는 것뿐이잖아?”
“그치만 마나 사용하지 말랬자나.”
“마나쯤은 사용하지 않고 해낼 수 있어!”
라네즈가 위풍당당하게 말했다.
‘하지만 검술 훈련이랑 장작을 패는 거랑은 완전히 다를 텐데….’
결국, 걱정을 떨치지 못한 엘레인은 라네즈의 옷깃을 꼭 붙잡았다.
“꼬맹이 너도 따라오려고?”
“응. 오빠 훈련하는 거 보고 시퍼.”
“하지만 아까랑 달리 이번 건 좀 지루할 텐데. 장작 패는 것만 계속 봐야 하잖아.”
“괜차나. 오빠가 하는 거면 숨만 쉬어도 잼써!”
“꼬맹아….”
라네즈는 크게 감동했다.
얼마나 감동했는지, 엘레인을 꼭 껴안고 제자리에서 한 바퀴를 빙글 돌기까지 한 그는 내팽개친 도끼를 다시 집어 들며 말했다.
“그럼 출발!”
***
황궁의 뒷산과 맞닿은 곳.
그곳엔 사용인들이 장작을 패기 위한 곳이 마련되어 있다.
가을이 지나면 곧 겨울이기 때문에 슬슬 그때 쓸 장작을 패기 시작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가, 선객이 있네?’
라네즈의 뒤를 졸졸 따라가던 엘레인은 저 멀리, 시원스레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를 들으며 귀를 쫑긋했다.
퍽! 퍽!
일정한 간격으로 쪼개지는 소리가 범상치 않음을 감지했는지 라네즈도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장작 좀 패본 사람인가 본데? 소리가 일정해.”
“잘됐다. 저 사람한테 노하우 좀 알려 달라구 해 바.”
“재야의 고수라면 나도 환영이지.”
완력을 기르는 게 목적이지만, 아무렇게나 휘둘렀다간 손만 망가진다.
기사에게 손은 생명이니, 상대가 누구든 간에 실력만 좋다면 가르침을 청하려고 했으나….
“뭐야. 쟤가 왜 여기에 있어?”
라네즈의 얼굴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무척 당황한 모습에 의아함을 느낀 엘레인은 라네즈에게 이러한 반응을 이끌어낸 당사자를 바라보았다.
떡 벌어진 어깨와 굳게 다문 입술. 짙은 눈썹과 오로지 장작만을 향해 있는 눈동자까지.
모든 것을 살펴본 엘레인이 내린 결론은 한 가지.
‘저 사람 뭔가 낯이 익은데…?’
어디서 본 것 같지만 그게 누군지는 모르겠다.
물론 회귀 전에 본 것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잘 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가까이 보아온 존재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그런 사람과 친분이 있어 보이는 2황자라….
“오빠 저 사람 알…. 응? 어디 갔지?”
갑자기 휑해진 옆을 보며 휙휙 고개를 돌려본 엘레인은 어느새 남자의 곁으로 다가간 라네즈를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제 저기로 갔대?’
엘레인은 도끼를 어깨에 걸치고 껄렁거리는 자세로 선 라네즈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강렬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며 투지를 활활 태우는 모습에, 엘레인은 저 남자가 누구인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이봐, 카론.”
“…2황자 저하?”
놀랍다는 듯 눈을 깜빡이며 라네즈를 바라보는 기사. 카론.
그런 그의 옆에 쌓인 나무 장작을 훑어본 라네즈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승부다…!”
“?”
“이번엔 절대 안 지니까 그렇게 알라고!”
그렇게 시작된 라네즈와 카론의 피 튀기는 살벌한 장작 패기 결투!
…는 라네즈만 진심인 것 같지만. 누가 더 많은 장작을 패나 겨루는 두 사람을 보며 엘레인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구나. 저 사람이 라네즈를 무시했다던 그 기사로구나.’
대충 정황만 봐도 알 수 있다.
저 기사가 정말 라네즈를 업신여길 생각으로 그리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겉으로 봤을 땐 눈치 한번 더럽게 없는 사람인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라네즈가 저렇게까지 티 나게 그의 동태를 살피며 승부욕을 불태우면 대충 그것에 응대하는 척이라도 해야 할 텐데, 카론이라는 기사는 아까와 같은 속도와 페이스로 묵묵히 제 할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시선 한번 안 주고 있어….’
이쯤 되니 홀로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라네즈가 참으로 불쌍하게 느껴진다.
그렇게 짠한 시선으로 라네즈와 카론을 번갈아 보고 있기를 한참.
마침내 준비된 통나무가 동이 나고, 거친 숨을 몰아쉰 라네즈가 번쩍 만세를 하며 외쳤다.
“내가 이겼다!”
그랬다. 이번 대결에서 라네즈는 놀랍게도 카론을 이겼다.
장작 패는 것이 처음인 라네즈와 꽤 숙련된 솜씨를 보였던 카론을 생각하면 믿기 힘든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육안으로 봐도 알아챌 정도로 꽤 차이가 나는 쌓인 장작더미들.
라네즈는 자신의 뒤쪽에 쌓인 장작더미들을 뿌듯하게 바라보다가, 카론의 뒤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런데….
“어?”
뭔가 이상했다.
미간을 좁힌 라네즈는 다시 한번 제가 팬 장작과 카론이 팬 장작을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숫자는 명백히 라네즈 쪽이 우세했다.
그러나 여기엔 치명적인 결점이 하나 있었다.
“이건….”
그것을 깨달은 라네즈는 헛숨을 들이켰다.
들쭉날쭉. 아주 제멋대로 생긴 라네즈의 장작과 얼마나 균일하게 팼는지 쌓아 놓은 장작이 깔끔하다 못해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일 지경인 카론의 장작.
두 장작더미가 보여주는 크나큰 차이에 라네즈의 동공이 사정없이 떨렸다.
“…….”
“오, 오빠?”
“아, 응. 나 불렀어?”
“…괜찮은 거 맞어?”
넋이 나간 듯한 그를 붙잡고 물어보니, 여전히 영혼이 가출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물론이지. 나 완전 괜찮아.”
‘아닌데. 안 괜찮은 것 같은데….’
엘레인은 심란한 얼굴로 그의 손을 바라봤다.
부들부들. 분한 듯 떨리고 있는 주먹이 현재 그의 심정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날아오는 목소리.
“축하드립니다. 이번엔 2황자 저하께서 이기셨군요.”
“…….”
‘저기요? 하필이면 왜 지금 여기서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이지요…?’
엘레인은 저세상 눈치를 가진 카론을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을 보듯 쳐다보았다.
누구 염장 지르는 것도 아니고. 하물며 진심으로 축하해주는 듯해서 더욱 기가 찼다.
‘내가 이 정도인데 라네즈는….’
엘레인은 마른침을 꿀꺽 삼키며 라네즈를 올려다봤다.
그리고 엘레인은 보고야 말았다.
“그, 그래. 이번엔 내가 이겼어. 하하핫…! 봤냐? 이게 바로 너와 나의 눈높이다!”
최대한 입꼬리를 삐죽 올리며 네가지 없는 표정을 짓는 라네즈.
하지만 엘레인은 그의 진짜 표정을 알고 있다.
‘라네즈. 너 지금 웃고 있지만 울고 있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울고 있는 라네즈를 보며 엘레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
그날 밤.
풀벌레 우는 소리만 가득한 공터에 작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림자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라네즈.
도낏자루를 꽉 쥔 라네즈는 오후에 처절한 결투가 벌어졌던 곳을 노려보며 비장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새 나무 조달자가 왔다 갔는지 장작더미가 가득한 한쪽엔 새로운 통나무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루터기 앞에 자리를 잡은 라네즈는 눈을 감고 오늘 있었던 결투를 다시금 반추했다.
난생처음으로 만난 대적자.
그가 장작을 팰 때 보였던 자세와 일정하게 내쉬던 호흡. 그리고 팔을 휘두를 때마다 꿈틀거리던 근육의 상세한 움직임까지…!
대결 도중 아주 잠깐씩 엿보았던 것이지만,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진다.
그만큼 지금의 나는 그를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일까?
…아니. 이제 그런 것 따위는 상관이 없지.
“후우.”
침착하게 호흡을 내뱉었다.
그리고 카론이 그랬던 것처럼. 천천히 도낏자루를 쥐고 위에서 아래로 내리찍는다!
콰직—!
신중하게 하나하나. 시선을 집중하고 공을 들여서 균열하게 장작을 패기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생각처럼 잘 되지 않았다. 몸의 균형이 자꾸만 흐트러지고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어색하기만 하다.
결국, 기본적인 틀만 가져와서 일곱 살 아이의 몸에 맞게 바꾼 라네즈는 아까보단 훨씬 편하게 도끼를 내리찍었다.
“헉헉. 제기랄!”
풀썩 흙바닥 위에 널브러진 라네즈는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장작을 팼는지 팔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지만, 아직은 모자랐다.
축축해진 도낏자루에서 시선을 떼고 물집이 가득 잡힌 손바닥을 올려다본 라네즈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 녀석을 이기려면 이 정도 노력으론 부족해.”
자로 잰 듯한 움직임은 한두 번 장작을 패본 것으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나이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배는 더 열심히 훈련해야 하는 라네즈로서는 한숨만 나오는 상황이었다.
“이제 다시 시작해 볼까.”
잠깐의 휴식을 끝낸 라네즈는 다시 도낏자루를 잡고 일어섰다.
그런데 그 순간 들려오는 말소리.
‘…순찰 중인가?’
잠깐 그리 생각했지만, 곧 아님을 깨달았다.
순찰 중이라면 발소리와 갑옷 부딪히는 소리가 나야 하는데 그런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야간조 외에 아직 잠을 자지 않은 존재가 있다는 건가?
두 눈을 게슴츠레하게 뜬 라네즈는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모퉁이 너머로 두 기사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저 녀석들은 제5 기사단 녀석들?’
보아하니 창고에서 오늘 훈련에 사용했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는 모양이다.
‘밤늦게까지 훈련을 했던 모양이네.’
저쪽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그때. 한 기사가 입을 열었다.
“근데 그 자식 진짜 뭐냐?”
“누구?”
“누구긴 누구야. 세상에서 자기가 최고인 줄 아는 재수 없는 놈이지.”
그런 사람이 기사단에 있었나? 눈치 없어서 사람 열불나게 하는 사람은 봤어도….
라네즈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기사들 입에서 툭 튀어나왔다.
“아, 카론 그 자식? 걔가 재수 없는 게 어디 한두 번도 아니고 뭘 그렇게 짜증을 내냐.”
“그래도 오늘은 선을 넘어도 한참 넘었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2황자님과의 대련에서 이겨버리다니. 아무리 눈치가 없어도 그렇지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니야?”
동료 기사들이 카론을 욕했다.
원래라면 그들 사이에서 뭔가 서운한 일이 있었나 보네, 하고 그냥 넘겼겠지만, 절대 무시하지 못할 존재가 그들 사이에 껴 있었다.
‘갑자기 나를 걸고넘어진다고? …근데 나와의 대결에서 이긴 게 왜 눈치 없는 행동인 거지?’
오히려 그와의 대결에서 졌기 때문에 이렇게 자극을 받아 열심히 훈련하고 있는데…. 대체 왜?
“근데 걔 어차피 그것 때문에 벌 받고 있잖아.”
“무슨 벌?”
“단장님이 말하길 내일까지 장작 1,000개 못 패면 기사단에서 퇴출시킨다던데.”
그들의 대화에 라네즈는 흠칫했다.
지금 저 녀석들이 뭐라고 말한 거지?
그 녀석이 퇴출당할 위험에 처했다고?
나에게 일부러 져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오, 단장님도 드디어 결정하신 모양이네.”
“워낙 거슬렸던 놈이니까.”
“하긴. 나도 그 자식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말을 걸어도 무시하기 일쑤고 어차피 기사단 내에 잘 섞이지도 못했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런 눈치 없고 자기밖에 모르는 놈은 꺼져주는 게 도와주는 거야.”
그렇게 말한 두 기사는 낄낄낄 웃으며 물건을 마저 정리했다.
그리고 뒤쪽에서 들려오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
“뭐야. 들짐승인가?”
“내버려 둬. 설마 황궁에 침입하는 간 큰 도둑이 있으려고.”
“그것도 그런가.”
마지막까지 긍지 높은 기사라면 할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인 놈들은 새로운 주제의 이야기로 넘어가서 계속해서 수다를 떨었다.
모퉁이 너머. 깊게 가라앉은 두 눈동자가 그들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