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그래서 어떤데?”
라네즈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산삼을 보자마자 귀한 붓으로 산삼에 묻은 흙을 터는 등 온갖 부산스러운 움직임으로 이리저리 살피던 감정사가 부르르 손을 떨며 말했다.
“저, 적어도 100년산입니다!”
100년산!
깊은숨을 토해내듯 외치는 말에 쌍둥이 형제와 엘레인의 입이 떡 벌어졌다.
“배, 백 년? 이 녀석이 그렇게나 오래 살았단 말이야?”
“예. 확실합니다.”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감정사.
엘레인은 꽤 흥분한 얼굴로 그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그롬 어떤 효과 있어여?”
“으음. 우선 이 정도 산 녀석이라면 자연의 원기와 자연계 마나가 엄청나게 축적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복용하면 기본적으로 몸을 회춘시킬 수 있겠지요.”
“지짜?”
회춘이라니. 말 그대로 놀라운 능력에 엘레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한 마디로 영약이라는 거잖아?’
뜨악한 얼굴로 산삼을 새삼스레 바라보고 있자니, 감정사가 재빨리 사족을 덧붙였다.
“물론 황태후 폐하께선 서클이나 마나홀 같은 건 없는 일반인이시기 때문에 엄청난 효과는 보지 못하겠지만요. 그래도 몸의 여러 장기가 젊어지는 건 확실합니다.”
이렇게 크고 완벽한 상태의 영약은 요즘 세상에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때문인지 산삼을 바라보는 감정사의 눈에 탐욕이 서렸다.
‘그러니까 쌍둥이 황자들이나 내가 먹으면 더 좋다는 거네?’
확실히 감정사의 말대로 마나를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이 영약을 복용한다면 큰 효험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순간이지만, 엘레인이 망설이는 것을 눈치챈 감정사가 눈을 번뜩였다.
“만약 저에게 파신다면 후하게 값을 치러드리겠습니다!”
급작스런 외침에 엘레인과 쌍둥이 형제들의 시선이 그에게로 쏠렸다.
그럴 돈은 있고? 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이 감정사도 나름 돈 좀 있는 귀족이니까.
어느새 엘레인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와중, 쌍둥이 형제들이 아이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이건 네 거니까 네 마음대로 해. 어떤 결정을 내리든 우린 네 선택을 존중할게.”
“그래. 버섯이야 많이 땄으니까 말이야.”
라네즈가 자랑스럽게 자신이 들고 있는 망태기를 가리켰다.
하지만 엘레인은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울 할머니 줄 꺼야.”
애초에 이건 황태후를 위해 가져온 거니까 말이다.
“아아….”
감정사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엘레인과 산삼을 번갈아 보았다.
당연하지만 엘레인이 그의 심정까지 헤아려줄 필요는 없었다.
“좋아. 그럼 얼른 요리사한테 맡기러 가자!”
저녁 식사 시간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
세 아이는 서둘러 주방으로 달려갔다.
***
저녁 식사 시간.
식탁 앞에 앉은 황태후는 꾀죄죄한 몰골의 아이들을 보고 고개를 기울였다.
“무슨 일을 하고 왔기에 그런 모습인 게냐?”
“헤헤. 그냥 이런저런 일을 좀….”
“손은 깨끗하게 씻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밥 먹고 제대로 씻을게요.”
“그래. 그런 거라면 상관없다만….”
잘게 떨리던 황태후의 시선이 아이들에게서 멀어지며 이번엔 상석에 머물렀다.
“그래. 오늘은 일을 제때 끝낸 게냐?”
“왜요. 아들이 일찍 일을 끝내고 오니 반가우십니까?”
“후후.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황태후가 산뜻하게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평소라면 좀 더 시비를 걸었어야 할 황제가 오늘따라 황태후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무거웠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벌써 소문이 거기까지 간 게야?”
“황궁이니까요.”
황제는 황궁에서 일어나는 일의 대부분을 알고 있다.
그 방증으로 황제가 이쪽을 보며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어머니께서 아프다고 하시니 아이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단순한 몸살이니 걱정하지 말라 했거늘.”
“그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니니까요. 어쨌든 그런 의미로 아이들이 어머니를 위해 선물을 준비한 듯싶습니다.”
“선물?”
황태후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이들이 자신을 위해 선물을 준비했다니. 묘한 기대감과 미안함이 뒤섞인 얼굴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자, 오늘따라 늦어지던 요리가 드디어 등장했다.
“황자 저하들께서 따오신 버섯과 육질 좋은 소고기를 듬뿍 넣어 푹 끓여낸 국물 요리입니다.”
설명을 마친 요리사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황태후는 뽀얀 육수가 매력적인 전골을 보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이 버섯들을 너희들이 땄다고?”
“네. 오늘만 해도 몸살에 걸리셨잖아요. 몸보신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해서 우리 셋이 함께 힘을 합쳐 버섯을 땄어요.”
“세상에나. 어쩜 이렇게 큰 선물을….”
황태후는 크게 감격했다.
아이들이 자신의 건강을 이렇게나 신경 써주다니. 너무 미안하고 또 고마워서 한참이나 말을 잇지 못했다.
“얼른 드시지 않고 뭐하십니까? 그러다 다 식겠습니다.”
황제가 뚱하니 재촉했다.
평소라면 그런 그에게 몇 마디 붙여줬겠으나, 그럴 정신도 없었던 황태후는 만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으마.”
드디어 스푼을 든 그녀가 뽀얀 국물을 듬뿍 떴다.
후우. 후우우. 바람을 불어 식히는 동안 아이들의 반짝거리는 시선이 꽂혀왔다.
모두의 기대를 받으며 잘 식힌 국물을 한입 가득 머금은 황태후가 사르르 두 눈을 곱게 접었다.
“정말 맛있구나. 피곤이 싹 가시는 기분이야.”
“후우. 다행이다.”
“내가 뭐랬어. 국물 요리가 딱이라고 했지?”
엘레인과 아르닐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라네즈가 기세등등하게 가슴을 활짝 폈다.
황태후는 그런 아이들을 대견함과 따뜻함이 가득 담긴 시선으로 바라봐주며 세상에서 가장 값진 음식을 먹었다.
“그럼 우리도 식사를 시작하지.”
그사이 다른 이들의 앞에도 오늘의 저녁 요리가 도착했다.
엘레인은 식사를 하는 내내 웃음꽃을 피우는 황태후와 쌍둥이 황자들. 그리고 그런 그들을 은은한 미소로 관망하는 황제를 보며 기분 좋게 고기 한 점을 찍었다.
‘어후. 고기가 아주 입에서 살살 녹네.’
든든한 고기와 함께 나온 수프에는 오늘 황자들이 딴 버섯이 듬뿍 들어가서 향기롭다.
버섯 파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식사를 마치며.
냅킨으로 입가를 닦는 황태후의 앞에 새로운 접시가 도착했다.
“이건?”
황태후는 식후 디저트를 먹지 않는다.
뜬금없이 등장한 접시를 의아하게 바라보고 있자, 요리사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황녀 저하께서 직접 찾으신 산삼입니다.”
“산삼…?”
은색 돔이 열리자 그 안에 100년 묵은 산삼이 드러났다.
요리를 하면 좋은 기운이 빠져나갈 수도 있기에 깨끗이 씻어내기만 한 산삼은 보기만 해도 입꼬리가 들썩일 만큼 아주 오동통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황태후가 그런 산삼을 바라보며 얼떨떨 표정으로 말했다.
“이, 이게 대체 무어냐? 산삼이라니? 이걸 우리 아가가 직접 찾아냈다고?”
“네!”
엘레인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자 황태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엘레인이 이 귀한 것을 구한 것도 매우 놀랍지만, 이것을 찾기 위해 저 어린아이가 산속을 헤매고 있었을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찡하게 울렸다.
“우리 꼬맹이 대단하죠? 심지어 그거 백년삼이래요!”
동생이 아주 자랑스러워진 라네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믿을 수 없는 연식에 화들짝 놀란 황태후가 주저하자, 황제가 괜히 투덜거렸다.
“안 먹을 겁니까? 쓴 게 싫으시다면 제게 주셔도 됩니다만.”
“무, 무슨! 우리 아가가 나를 위해 준 것인데 어찌 너에게 넘길 수 있겠느냐? 그건 선물한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황태후가 오동통하게 살이 오른 산삼을 포크로 쿡 찍었다.
그리고 품격 있게 나이프로 썬 그녀는 먹기 좋게 조각난 산삼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한입에 꿀꺽.
“어때요?”
“으음. 우리 아가가 날 위해 가져온 것이라 그런지 맛이 아주 달구나.”
“에이. 산삼이 어떻게 달달할 수가 있어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형도 은근히 눈치 없는 것 같아.”
“갑자기 시비냐?”
황태후는 매우 기뻤다.
버섯전골만 해도 날아갈 것처럼 기뻤는데, 귀한 산삼까지 받으니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 되었다.
버섯과 산삼의 효능이 워낙 뛰어난 탓일까? 아니면 아이들에게 잊을 수 없는 선물을 받은 탓일까?
느낌상 10년은 젊어진 것 같은 황태후는 흐드러지듯 환한 웃음꽃을 피워냈다.
“후우. 이거야 원 질투가 나는군.”
어머니의 기뻐하는 모습에 덩달아 기분은 좋아졌지만, 그것과 별개로 황제는 가슴이 저릿했다.
딸아이가 처음 주는 선물이 하필이면 자신이 아닌, 황태후에게로 넘어가다니.
솔직히 아버지라는 직함을 단 사람으로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에 있을까?
하지만 그가 그런 생각을 끝마치기도 전에 네 명의 하인들이 우르르 들어왔다.
그리고 황제와 쌍둥이 형제 그리고 엘레인의 앞에 접시를 놓고 돌아가는 그들.
“딸아…?
“꼬맹아. 이거 설마?”
얼떨떨하게 이쪽을 돌아보는 세 남자.
엘레인은 그들을 보며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잔뿌리가 워낙 많아서요.”
산삼이 워낙 커서 그런지 잔뿌리도 일반 산삼만큼 굵기가 상당했다.
눈앞에 놓인 제 몫의 산삼에 크게 감동한 세 남자는 양볼을 옅게 물들이며 말했다.
“고맙다.”
“이 귀한 걸….”
“잘 먹을게!”
각자 감사를 표현한 그들이 산삼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입속으로 직행!
으적으적—
얼마나 맛있게 먹는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군침이 돈다.
훌륭한 먹기 실력에 감탄한 엘레인은 뒤처지지 않겠다는 듯 접시 위의 산삼에 시선을 고정했다.
“잘 먹겠습니다!”
덥석. 산삼을 집어 든 엘레인이 열심히 산삼을 씹어 먹었다.
‘윽 써.’
아르닐의 말대로 달콤하다는 말은 황태후의 기분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
생각보다 쓴맛에 혓바닥의 감각이 점차 사라졌지만, 엘레인은 꾸역꾸역 그것을 씹어 삼켰다.
그리고 영약의 효능은 바로 나타났다.
우우우웅—
기묘한 소리와 함께 세 사람의 마나서클과 마나홀이 맹렬히 회전했다.
그리고 그것은 이쪽도 마찬가지.
쩍쩍 소리가 나며 순식간에 마나통을 한 단계 더 성장시킨 엘레인은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개고생을 하면서 키웠던 것보다 더 커졌잖아?’
좁쌀만 했던 마나통이 아기 주먹만큼 커진 게 바로 며칠 전.
하지만 이번에 먹은 영약의 효과로 단번에 성인 주먹만큼 커졌다.
심지어 마나통 자체가 더욱 튼튼해진 것을 깨달은 엘레인은 역시 이래서 영약을 먹는구나 싶었다.
아직 미숙한 엘레인이 이 정도인데,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은 어떨까?
급격히 몰려오는 궁금증에 고개를 들자 황태후가 놀란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지?’
대기 중의 마나가 잘게 떨리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다.
하물며 그런 분위기를 풍기는 것은 비단 황제뿐만이 아니었다.
쌍둥이 형제들도 두 눈을 감고 무언가 집중을 하는 모습을 보아, 어떤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했다.
“후후. 성장의 기회가 주어진 모양이야. 조용히 기다려 보자꾸나.”
“네!”
황태후가 매우 기뻐하며 그리 말했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인 엘레인은 황태후와 함께 차를 마시며 그들을 기다렸다.
그리고 한참 뒤.
라네즈와 아르닐, 황제 순으로 정신을 차렸다.
모두 흡족한 표정인 것이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던 모양.
입꼬리를 슥 말아 올린 황제가 엘레인을 향해 말했다.
“자꾸 축하 파티를 열 일이 생기는 것 같군.”
“응? 아버지 설마 다음 단계로 넘어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지만, 벽 하나는 허물었다. 실마리를 잡은 기분이야.”
“어쩐지 기세가 달라졌더라니.”
한 마디씩 던진 쌍둥이 형제들이 씩 웃었다.
그러는 그들이야말로 풍기는 기도가 완전히 달라졌다.
엘레인은 각자 성장을 이룩한 그들을 향해 축하를 해주었다.
“다들 축하해여!”
“모두 네 덕분이다. 아주 귀한 선물을 받았어.”
간만에 보이는 황제의 진중한 표정에 엘레인은 괜히 쑥스러워졌다.
그 말에 동조하는 쌍둥이 형제들을 진정시키며 황제가 말을 이었다.
“그런 너에게 보답을 해주고 싶은데….”
골똘히 생각에 잠긴 황제는 보답을 주기에 앞서 우선시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먼저 오늘을 제국 기념일로 정해야겠군.”
“네?”
엘레인은 깜짝 놀랐다.
물론 축하할 일이긴 하지만….
이런 걸 가족 기념일도 아니고 제국 기념일로 정한다고?
황당함에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아직 안 끝났다.
“그거 좋네요. 그래서 뭐라고 명명할 건데요?”
“흐음. 그것도 그렇군.”
황제가 미간을 좁히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기껏해야 ‘승급의 날’이라거나 ‘성장의 날’ 같은 걸 생각하고 있던 엘레인은 곧이어 나오는 말에 펄쩍 뛰었다.
“정했다. 이름은 ‘산삼의 신. 황녀의 날’ 어때. 마음에 드나?”
…그럴 리가 있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