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417)

100화

앨리스의 눈이 울적하게 가라앉았다.

원래 이맘때쯤이면 항상 우울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더 그랬다.

왜냐하면, 지금 주변에 아무도 없으니까.

“요즘 다들 뭐가 그리 바쁜 걸까.”

최근 들어 아주 바빠 보이는 황녀님은 자꾸만 어딘가로 훌쩍 떠나곤 했다.

아침 세안조차 도와드리지 못할 때면 황녀님께서 너무 의젓하셔서 벌써부터 내가 필요 없어진 건 아닌지 회의감이 들기도 했다.

황녀님이 다 큰 어른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면, 베일리는 정말이지 이상하게 굴었다.

그녀는 앨리스를 보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호다닥 도망치기 바빴고, 뒤에서 말을 걸면 화들짝 놀라기 일쑤다.

혹시 나 몰래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슬쩍 떠보려고 해도 자꾸만 도망치니 무어라 말을 걸 수가 없다.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자꾸 그러면 내가 나쁜 오해를 할 수밖에 없잖아.”

베일리는 내가 싫어졌나?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드니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린 것처럼 차가워졌다.

분명 사정이 있을 텐데. 친구를 믿고 내게 말해줄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려줘야 하는데.

계속 드는 나쁜 생각이 마음을 좀먹으며 나 자신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때의 악몽이 자꾸 떠올라서인가? 그래서 자꾸만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우울하게 내리깐 눈을 들어 새하얗게 물든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니, 마치 세상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이러다가는 걷잡을 수 없이 끝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것 같아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도…. 이번엔 황녀님이 함께 있으니까.”

신년 행사는 성인만 참석할 수 있다.

이번 행사에 황녀님께서 참석하실 수 없으니까 아마 벽난로 앞에 함께 앉아 책을 읽어달라고 조르지 않을까?

바로 며칠 전에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 이번 생일은 덜 외로울 거야. 그때의 나랑 지금의 나는 상황이 다르니까.”

요즘엔 이상하게 굴지만, 아직 베일리라는 친한 친구가 있고 언제나 의젓하지만 가끔은 응석을 부리는 귀여운 황녀님이 내겐 있다.

언제나 일에 치여 바쁜 가족만 있는 게 아니라. 나에겐 또 다른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하지만 베일리는 이번에도 가족과 함께 새해를 보내겠지.”

그래도 괜찮았다. 아직 황녀님이 곁에 남아 있으니까.

조금은 울적해진 마음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던 앨리스는 창가에 기대어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새해를 황녀님과 온전히 시간을 함께하기 위해선 일을 해야 했다.

오늘 안에 신년 행사 준비를 완벽하게 끝마쳐야 할 의무가 아직 남아 있는 것이다.

“오늘도 힘내자!”

쓸쓸함을 떨쳐내듯 앨리스는 짝 소리가 나게 자신의 뺨을 때렸다.

붉게 달아오른 뺨이 잠깐이지만 창백한 피부를 혈색 있게 만들어주었다.

***

다음날 앨리스는 여느 때처럼 황녀님을 깨우기 위해 문을 두드렸다.

“황녀님? 일어나셨어요?”

설마 오늘도 벌써 자리를 뜨고 없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마음에 문을 열자 다행히 침대 위에 엘레인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황녀님?”

“헉. 앨리스 온니.”

호다닥. 앨리스를 발견한 엘레인이 무언가를 등 뒤로 감췄다.

뭐지? 종이 같았는데.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엘레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오늘은 일 안 해?”

“새해잖아요. 일은 어제부로 다 끝났답니다.”

“그롬 피곤할 텐데 좀 쉬어야겠다.”

엘레인이 그리 말했다.

배려하는 마음에 나온 고마운 말이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저는 황녀님과 함께 있는 게 더 좋은걸요.”

“나, 나도 할 일이 있어서 그래. 그니깐 내가 부르기 전까지 푹 쉬고 이써.”

“그런가요….”

곤란함이 얼굴 위로 드러나자, 앨리스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지. 황녀님도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야지.’

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황녀님에게는 일이 바빠도 달려와 줄 황제와 황태후 그리고 언제나 아이를 생각해주는 멋진 오빠들이 있다는 사실을.

그런 상황에 내가 들러붙으면 분명 방해가 될 테지.

절대 그런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었기에, 조마조마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엘레인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필요할 때 불러주세요. 알겠죠?”

“응! 편히 쉬고 이써!”

“생각해줘서 감사해요.”

입은 웃고 있지만 속은 그렇지 못했다.

다시금 음울해지는 마음을 황녀님께 들키지 않기 위해 겉으로는 더욱 밝게 웃을 뿐이다.

달칵.

방으로 돌아온 앨리스는 햇빛이 부서져 들어오는 창가에 기대어 고개를 툭 떨구었다.

방안엔 햇살이 이토록이나 가득한데 어째서 내 눈엔 이토록이나 어두워 보이는 걸까.

점점 발끝을 좀먹어가는 우울감 속에서 그녀가 할 일이라고는 멍하니 황녀님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뿐.

하지만 황녀님은 해가 질 때까지 앨리스를 부르지 않았다.

“결국, 이번에도 혼자구나….”

바깥은 이미 캄캄하게 어두워진 상태다.

신년 행사를 즐기러 온 사람들로 인해 왁자지껄한 소리가 새어 들어왔지만, 앨리스가 있는 공간과는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었다.

날은 살을 도려내는 추위가 이토록이나 막강한데, 화려한 조명이 가득한 곳은 어째서 저리 따뜻해 보이는 걸까.

창문에서 시선을 뗀 앨리스는 여전히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황녀님과 베일리는 각자 가족들과 함께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캐시도 이맘때쯤 사라지곤 하니 아마 말은 하지 않아도 잠깐 본가에 내려갔을 수도 있다.

다들 따뜻한 벽난로 앞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새로운 하루를 기념하고 있겠지.

“부럽다. 나도 함께하고 싶은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중얼거린 앨리스는 헙 소리를 내며 자신의 입을 틀어막았다.

잠시 그렇게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픽 소리를 내며 자조적인 웃음을 띠었다.

“내 주제에 무슨.”

태어나서 제대로 된 축하를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그녀였다.

심지어 가족들조차 그녀를 금지옥엽으로 키우면서 아이의 속내는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니, 알아보려고 하지도 않았다.

앨리스는 처음 ‘나는 생일 파티 같은 거 안 해?’라고 용기 내어 질문했던 시절을 떠올렸다.

-일이 너무 바빠서 그래. 이것만 끝나면 함께 생일 파티를 해주마.

-너는 저명한 브렌트 가의 귀족이니까 오늘 하루 정도는 혼자 지낼 수 있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어.

-생일 선물? 그런 게 따로 필요한가? 원하는 게 있다면 뭐든지 구할 수 있잖느냐.

-정 원하는 게 있다면 유모에게 말해두렴. 아니면 용돈을 올려줄까?

“…….”

정말이지 무심한 부모님들이다.

뼛속까지 귀족인 그들에게 앨리스의 요청은 그렇게나 어려운 일이었는지, 단 한 번도 아이의 시선에서 맞춰주려 한 적이 없었다.

성인이 된 지금은 그저 그러려니 하지만, 그럼에도 이 시기가 되면 가슴이 미어져 괜히 궁상을 떨게 된다.

이렇게 혼자가 되어버리면 그때의 기억이 되살아나서 자꾸만 가슴을 난도질해버린다.

눈을 감아버리자. 그렇게 잠을 청하고 나면 내일 아침 다시 원래의 나로 돌아올 수 있을 테지.

앨리스는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외부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 애쓰며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그런데 그때.

똑똑.

“온니?”

“…황녀님?”

펄럭! 소리가 나게 이불을 박찬 앨리스가 다급히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내가 필요하신 건가?’

‘그래도 오늘은 혼자가 아니야.’

두근두근. 흥분으로 가득 찬 심장이 두방망이질 쳤지만, 앨리스는 최대한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은 뒤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이… 엇?”

나오자마자 엘레인에게 손을 잡힌 앨리스는 어딘가로 끌려갔다.

짧은 다리로 복도를 오도돗 소리를 내며 가로지르는 동그란 뒤통수.

앨리스는 혹여나 황녀님께서 넘어질까 봐 걱정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잠깐. 그렇게 뛰다간 넘어져요!”

“괜차나. 잘 조절하고 이써.”

“그래도…. 그런데 어디로 가는 건가요?”

“하늘이 가장 잘 보이는 곳!”

“하늘이요?”

명랑한 외침에 앨리스는 조금 당황했다.

하늘이 잘 보이는 곳이라면 필시 높은 곳일 텐데, 지금처럼 사방이 어두운 밤에 올라가면 위험하지 않나?

“혹시 야경을 보고 싶어서 그런 건가요?”

“음…. 비슷해!”

비슷하다는 건 야경은 아니라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금이라도 말려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앞에서 당기는 힘이 사라졌다.

“요기야!”

“여기는 탑….”

과연 황궁의 탑이라면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른 들어가자.”

“황녀님!”

엘레인을 따라 탑 내부에 들어선 앨리스는 긴 계단을 볼 수 있었다.

‘세상에나. 이 길을 따라 쭉 올라가야 한다고?’

탑을 오르려면 당연한 이치지만, 얼굴이 하얗게 질린 앨리스는 위쪽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황녀님!”

“빠아아알리이이이.”

어느새 저 위쪽까지 올라간 엘레인이 외치자 메아리가 되어 탑 내부를 울렸다.

결국, 엘레인을 데려오기 위해서라도 황궁의 탑을 오르게 된 앨리스.

그녀가 마지막 계단을 밟았을 때는 이미 기진맥진한 상태로 힘이 쭉 빠졌다.

“으으. 추워라. 이러다 감기 걸리겠어요. 얼른 내려가요.”

한 차례 몸을 떤 앨리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탑의 꼭대기. 까만 밤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곳에 선 엘레인이 앨리스를 향해 손짓했다.

“온니, 빨리 일루 와 바!”

“황녀님! 위험하니까 너무 가까이 가지 마세요!”

앨리스가 소리쳤지만, 엘레인은 앞으로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그에 기겁한 앨리스는 재빨리 달려와 황녀님을 꼭 끌어안았다.

“위험하다고 했잖아요. 감기 걸릴 수도 있으니까 얼른 내려가요.”

“아이참. 그러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 바.”

“대체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

그때였다.

피융—!

고막을 자극하는 기묘한 소리에 앨리스의 눈이 크게 뜨였다.

설마 습격인가!?

하필이면 나 혼자 있을 때 습격이라니.

눈앞이 암담해졌지만, 앨리스는 굳은 의지를 불태웠다.

‘황녀 저하를 지켜야 해!’

작은 몸을 꼭 껴안은 앨리스가 재빨리 주위를 둘러보았다.

엘레인은 그런 앨리스를 의아하게 바라보다 그녀의 뺨을 잡아 하늘로 고정시켰다.

“으븝. 황녀님?”

앨리스의 시선이 반강제적으로 까만 밤하늘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환하게 밝아지는 하늘.

퍼버버벙!

엄청난 굉음을 내며 터져나간 불꽃이 환한 불빛과 함께 아름다운 튤립 모양을 그려냈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앨리스의 입이 떡 벌어지자, 환하게 밝아진 공간에서 생일 케이크를 든 베일리가 등장했다.

“베일리? 그리고… 캐시까지?”

뒤에서 조용히 손뼉을 치고 있던 캐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태연한 모습에 앨리스는 더욱 황당해했다.

“이게 대체 무슨…?”

“앨리스 언니! 생일 축하해!”

엘레인이 환하게 웃으며 꼭 껴안자, 앨리스의 동공이 정처 없이 흔들렸다.

그 와중에도 퍼버버벙! 계속해서 터지는 여러 가지 색깔의 튤립 모양 불꽃들.

밤하늘을 수놓는 장관을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린 앨리스가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 생일이요…?”

“그래. 황녀님께서 널 위해 이런 이벤트를 준비한 거야. 그러니까 얼굴 활짝 펴.”

“그, 그런….”

베일리의 장난스런 미소에 앨리스의 몸이 미세하게 떨려왔다.

그 진동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던 엘레인이 다급히 몸을 떨어트렸다.

“앨리스 온니. 울어?”

다정하게 묻는 목소리에 흐으윽. 소리를 내고 만 앨리스가 겨우겨우 목소리를 내었다.

“아니에요. 저 지금 웃는 거예요.”

눈물을 후두둑 떨어트리면서 입은 웃고 있는 앨리스.

가녀리게 떨리는 몸을 꼭 안아주니 가슴이 벅차오른 앨리스가 마주 안아왔다.

그때 그 광경을 눈에 담고 있던 캐시가 앨리스의 등 뒤로 보내는 엘레인의 지시에 따라 휘파람 소리를 내었다.

푸드덕—

탑 꼭대기에서 대기를 타고 있던 매가 힘차게 날아올라 적색 마탑주가 있는 곳까지 날아왔다.

머리 위를 빙빙 도는 매를 발견한 벤서는 마법사들에게 손짓으로 명령했다.

“준비!”

“발사!”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신호가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마법사들은 일제히 둥근 원통형에 끝이 뾰족한 아티팩트에 달라붙어, 그 끝에 달린 심지에 불꽃을 붙였다.

피유웅—!

이윽고 하늘을 수놓는 수백의 튤립꽃.

그 장면을 보며 벤서는 생각했다.

‘역시 황녀 저하. 나를 지지하고 있음을 확실하게 알려주기 위해 이런 위대한 아티팩트 제작을 나에게 맡겼구나.’

보면 볼수록 정말 놀라운 아이디어다.

상인이 아닌 자가 보아도, 엄청난 돈이 되어 굴러들어온다는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보아라. 이 화려한 소리에 연회를 즐기던 귀족들이 어느새 밖으로 뛰쳐나와 감탄사를 터트리고 있지 않은가?

뿐만 아니었다.

이미 엘레인에게 언질을 받은 황제와 황태후도 흐뭇하게 하늘을 구경하는 중이다.

엘레인을 찾으러 돌아다니던 세 황자들 역시 펑펑! 터지는 하늘을 보고 입을 헤 벌렸다.

그렇게 모두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엄청난 장관에 넋을 놓고 있을 때. 이 엄청난 이벤트를 기획한 장본인은….

-무우!?

‘응? 운디네 갑자기 왜 그래?’

-무우! 무웃!

갑자기 운디네의 몸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 당혹스러운 상황에 엘레인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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