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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화 (105/417)

105화

초여름의 계절. 이제 슬슬 더워지는 이 시기엔 달콤한 딸기를 수확하는 계절이다.

성 밖으로 나온 엘레인은 언제나처럼 달달한 냄새가 가득한 거리를 거닐며 히죽 웃었다.

“냄새 좋다.”

축제 준비가 한창이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달콤한 냄새의 밀도가 높게 느껴졌다.

그 새콤한 딸기 향기가 얼마나 진한지, 달콤한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엘레인이 정신을 못 차리고 헤롱헤롱거렸다.

“으앗.”

“조심하십시오.”

한쪽으로 기울어져 걸어가는 모습에 위태로움을 느낀 카론이 다급히 엘레인의 몸을 잡아주었다.

하마터면 앞의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던 엘레인은 머쓱하게 웃었다.

“고마워.”

“별말씀을.”

원래 해야 할 일을 했다는 듯 미소를 지은 카론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딱딱한 표정만 지을 줄 알았던 옛날과 달리, 지금의 그는 이렇게 멋들어진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괜스레 흐뭇해진 엘레인은 다시금 씩씩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그리고 멈칫.

“응? 저기 사장님 아니야?”

8년 전 플로스 영지를 처음 방문했을 때 들려본 적이 있는 디저트 가게. 그곳의 사장님인 리안이 엘레인을 발견하곤 방긋 웃었다.

“영주님!”

“리안 아저씨. 거기서 뭐 해요? 그리고 그 애는….”

리안의 다리에 찰싹 매달린 아이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왜인지 익숙한 얼굴에 두 눈을 크게 뜨자 아이가 표정을 활짝 폈다.

“예쁘다!”

뭐지. 설마 날 보고 그러는 건가?

당황해서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자니, 리안이 아이의 머리를 살짝쿵 쥐어박았다.

“욘석아. 영주님한테 그렇게 말하면 어떡해? 예의를 차려야지.”

“히잉….”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두 눈에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았다. 그에 괜히 미안해진 엘레인은 손사래를 쳤다.

“괜찮아요. 아직 애잖아요.”

“그렇지만….”

“그나저나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혹시?”

“마커 씨의 아들입니다. 아버지처럼 유명한 파티시에가 되고 싶다며 저를 찾아왔었죠.”

예컨대 스승과 제자 사이라는 것이다. 엘레인은 마커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이는 아이를 보며 빙긋 웃었다.

“이름이 뭐야?”

“제이미에요! 근데 예쁜 누나는 영주님이에요?”

“맞아. 난 지금 네가 살고 있는 영지를 다스리는 영주님이야.”

“우와. 멋지다.”

콧대를 높이며 말하자 제이미가 유난을 떨었다.

반짝반짝. 부담스러우리만치 반짝이는 눈빛을 보낸 제이미는 갑자기 리안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무슨 작당이라도 하려는 건지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

고개를 기울이며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자, 이야기를 끝낸 리안이 빙긋 웃으며 가게 문을 열었다.

“일단 들어오시겠어요? 영주님께 보여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보여주고 싶은 거요?”

새로운 디저트라도 만든 걸까?

달콤한 디저트에 관한 건 언제든지 환영이기에 엘레인은 냉큼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래서 뭘 보여주려는 거예요?”

“잠시만 거기서 기다려주세요.”

엘레인이 가게 내부를 두리번거리며 묻자 리안이 스테인리스로 만들어진 볼을 가지고 가게 깊숙한 곳으로 사라졌다.

그사이 제이미는 발 받침대를 가져와 낑낑대며 올라갔다.

“내가 도와줄게.”

“엇. 고마워요!”

“뭘 이런 걸 가지고.”

감동 받은 제이미의 모습에 엘레인은 어깨를 으쓱였다.

엘레인 또한 그 나이대를 거쳐왔기 때문에 아이들의 고충을 잘 안다.

‘숏다리라서 힘들지? 내가 그 마음 잘 알지.’

엘레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도 여전히 어리지만 그래도 예전보다는 훨씬 사정이 나았다.

특히 네 살배기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

‘그때는 진짜 뭘 제대로 할 수가 없었지.’

의자를 밟고 일어서도 테이블 중앙에 손이 닿지 않던 그 서러움을. 겪어보지 않은 자들은 절대 모른다…!

엘레인이 속으로 눈물을 훔치고 있던 그때. 리안이 다시 나타났다.

“많이 기다렸죠? 여기 재료 가져왔습니다.”

리안은 한여름에 냉기가 가득 느껴지는 스테인리스 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그 안을 본 엘레인과 카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이건?”

“얼음이로군요.”

리안이 들고 온 것은 다름 아닌 네모반듯한 얼음들이었다. 마법사들이나 만들 수 있는 그런 얼음 말이다.

그리고 엘레인은 왜인지 뿌듯하고 으쓱한 표정으로 이쪽을 빤히 바라보는 리안을 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왜 저러지?’

그는 자신감에 가득 차 있었고 마치 무언가를 바라는 듯했다.

잠시 얼음과 리안의 얼굴을 번갈아 보던 엘레인은 엄청난 것을 깨달았다.

“우와! 이 얼음들 어디서 났어요? 마법사가 만든 거 아니면 겨울에나 볼 수 있는 건데.”

겨울이 아니면 평범한 사람들은 구경조차 하지 못하는 게 얼음이다.

물론 엘레인은 운디네로 얼음을 왕창 만들어낼 수 있지만, 리안은 평범한 사람이지 않은가?

과연 엘레인의 예상이 맞았는지 살짝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에 리안이 방긋 웃었다.

“그렇죠? 대단하죠? 새로운 디저트를 만들기 위해서 힘 좀 써 봤습니다.”

“마법사를 고용한 거예요? 대단하다. 새로운 디저트를 개발하기 위해 그렇게까지 하다니…. 그런 결단력이라면 뭘 하든 성공할 거예요!”

“하핫. 감사합니다.”

엄지손가락까지 올리며 그를 추켜세워주자, 리안이 쑥스럽게 웃었다.

그리고 그 혼자 칭찬을 받는 것에 조바심이 났는지, 제이미가 엘레인의 옷깃을 잡아 흔들었다.

“영주님. 제가 재밌는 거 보여줄게요. 얼른 이것 좀 봐요.”

“뭔데 그래?”

엘레인의 시선을 가져오는 데에 성공한 제이미가 포대를 열고 소금을 한 움큼 크게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음 위로 뿌려버리는 모습에 엘레인과 카론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떠올랐다.

“귀한 얼음에 소금은 왜 뿌리는 겁니까?”

“그러게.”

심지어 조금도 아니라 왕창 때려 넣었다.

당혹스런 얼굴로 아이를 쳐다보자 리안이 빙긋 웃었다.

“밑에 있는 얼음은 디저트로 만드는 용도가 아닙니다.”

“그럼 무슨 용도에요?”

“아이스크림이라는 걸 만들어주는 도구죠. 일단 보시겠어요?”

그렇게 말한 리안은 제이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새로운 스테인리스 볼을 그 위로 올리고는 우유와 설탕을 듬뿍 넣기 시작했다.

혹시 얼음을 이용해 우유를 차갑게 만들려는 걸까?

고개를 기울이니 이번엔 제이미가 주걱으로 내용물을 잉차잉차 젓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사뭇 진지해서 더 이상 질문도 던지지 못하고 빤히 바라보기를 몇 분.

드디어 설탕이 듬뿍 들어간 우유에 눈에 띄는 변화가 시작됐다.

“우와! 이게 아이스크림?”

그냥 액체였던 우유가 점점 형태가 변화하더니, 서걱서걱 소리가 나는 새하얀 눈처럼 바뀌었다.

난생처음 보는 형태에 감탄사를 터트리자 제이미가 코끝을 슥 쓸었다.

“헤헤. 제가 발견한 거예요.”

“엥? 정말?”

얘 이제 일곱 살 아니었나? 그런데 회귀 전의 그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걸 발견해낸다고?

믿기 힘든 어려운 얼굴로 리안을 쳐다보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입니다. 아이스크림을 개발한 것도 제이미고, 소금을 뿌린 얼음이 녹으면서 주변 온도가 더 내려가는 걸 알아챈 것도 제이미입니다.”

거짓 하나 섞이지 않는 리안의 얼굴에 엘레인의 고개가 천천히 제이미에게로 돌아갔다.

“제이미…. 너 혹시 천재니?”

“천재까지는 아니고 저도 작년 겨울에 우연히 알게 된 거예요.”

쑥스럽게 웃으며 부끄러워하는 제이미. 겸손함까지 겸비한 모습에 엘레인은 일종의 감동을 느꼈다.

‘마커가 이 모습을 봤어야 했는데.’

아쉽게도 주방장으로 승격된 마커는 아주 바쁘다.

그에 입맛을 쩝쩝 다시고 있는데 새하얀 아이스크림을 듬뿍 푼 스푼이 코앞에 다가왔다.

“얼른 드셔보세요. 맛이 가장 중요하잖아요?”

“고마워.”

엘레인은 사양하지 않고 아이스크림이 올라간 스푼을 덥석 쥐었다.

그리고 한입에 털어 넣은 엘레인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황녀님?”

이상함을 느낀 카론의 기세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설마 독을 탄 건가?

만약 그런 거라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다.

살벌한 기세를 내뿜으며 당장이라도 칼을 뽑으려는 가운데. 석상처럼 굳어있던 엘레인이 다시 움직였다.

그리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제이미에게 다가가 잔뜩 움츠러든 어깨를 토닥였다.

“퍼팩트. 넌 이미 훌륭한 파티시에야, 제이미.”

“영주님….”

이보다 더 가슴에 와닿는 칭찬이 있을까.

아이스크림의 찬 기운이 영주님의 심장을 얼려버린 것은 아닐까 노심초사하던 제이미는 후들거리는 몸을 애써 다잡으며 감동의 물살에 몸을 맡겼다.

“저…. 칼은 지, 집어넣으시는 게.”

“아, 실례했습니다.”

황녀님께 위해를 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카론은 순순히 반쯤 튀어나온 검을 집어넣었다.

차가운 검신이 사라지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리안은 활기찬 웃음으로 분위기를 환기시켰다.

“그럼 진짜 완성품을 맛보실까요?”

“응? 이게 완성품 아니었어?”

새로운 디저트를 맛보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리던 엘레인은 깜짝 놀랐다.

당장 이것만으로도 기절초풍할 지경인데 아직 미완성이었다니?

“아이스크림이 이 신메뉴의 대미를 장식해줄 거예요.”

리안이 속이 훤히 비치는 유리 글라스와 손질을 마친 딸기를 가져왔다.

글라스 안에는 하얀색과 빨간색으로 된 아름다운 층이 쌓여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생크림과 딸기였다.

“우와. 이게 뭐예요?”

“파르페입니다. 그리고 여기다 아이스크림과 딸기를 올리면…. 짠! 딸기 파르페 완성입니다.”

차가운 아이스크림과 초코시럽에 빠진 딸기가 마지막을 장식하자 신메뉴 딸기 파르페가 완성됐다.

역시나 처음 보는 디저트에 엘레인은 군침을 삼켰다.

“이거 먹어봐도 돼요?”

“물론이죠. 영주님께 드리고 싶어서 부른 거니까요.”

“맛 평가해주세요!”

리안과 제이미가 두 눈을 반짝였다.

모두가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다시금 스푼을 쥔 엘레인은 딸기와 생크림. 그리고 아이스크림을 가득 퍼서 한입에 삼켰다.

“흐어….”

이곳은 정녕 천국인가.

눈물이 날 것 같은 황홀함에 엘레인은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며 달콤한 맛을 음미했다.

“어쩜 이렇게 완벽한 디저트가 존재할 수 있지? 입에서 사르르 녹아!”

“정말 맛있군요. 역시 리안 사장님이십니다.”

이어서 맛본 카론 또한 두 눈을 크게 떴다.

맛에 대한 심사라면 믿을 만한 두 사람이었기에 잔뜩 긴장하고 있던 리안과 제이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휴우. 다행이다.”

“두 분이 맛있다고 하시니 정말 안심이네요. 사실 이 메뉴는 축제 때 선보일 디저트였거든요.”

“축제? 그러고 보니 곧 축제가 열리는 시기구나.”

플로스 영지는 매년 디저트 대축제가 열린다.

플로스 하면 디저트였기 때문에 생겨난 축제로, 이 시기가 되면 각지에서 디저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

엘레인은 작년 축제를 떠올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작년에는 숙박할 곳이 없어서 많이 고생했었는데.”

“그래도 주민들이 방을 내어주어서 잘 해결됐잖습니까. 누구도 그렇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그치만 준비가 부족했던 건 사실이잖아요. 함부로 광고를 해선 안 됐던 건데….”

엘레인이 우울하게 푸념하자 리안의 고개가 절로 기울어졌다.

‘근데 그거 광고 문제가 아니라 황녀님이 너무 귀여웠던 게 문제였지 않을까?’

그는 아직도 기억한다.

디저트를 사가면서 이 귀여운 영주님은 어디로 가야 만날 수 있냐고 묻던 방문객들을.

물론 영주가 그리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건 그들 또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었겠지. …그게 한두 명 정도가 아니어서 영업에 살짝 지장이 생겼었긴 하지만.

“이번에도 자유도시의 언론사에 광고 의뢰를 하실 생각인가요?”

“당연하죠! 이번엔 준비도 철저하게 했잖아요?”

생각지도 못한 문제에 봉착한 이후 엘레인은 곧바로 대비책을 세웠다.

바로 왕 블루베리 농장에서 벌어들인 돈과 장난감 수공업장에서 벌어들인 돈을 투자해 관광 쪽으로 발전을 꾀한 것.

이제는 사람들이 왕창 들이닥쳐도 그들을 수용하는 데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축제하니까 생각난 건데, 작년에 우승했던 게 에그 타르트였지?”

“맞습니다. 그때 황녀님께선 그 에그 타르트를 보육원에 돌렸었습니다.”

카론의 말에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맛있는 건 여럿이서 나눠 먹어야 하는 법.

올해도 우승작을 아이들에게 돌릴 생각이다.

“근데 파르페는 못 돌릴 것 같은데. 비싸잖아.”

“여, 영주님. 그 말씀은 제 딸기 파르페가 우승하실 거라는…?”

“응! 내 생각엔 이 딸기 파르페가 우승할 것 같아.”

“크흡!”

리안이 제이미와 손을 맞잡으며 감동의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비싸다는 그녀의 말에 리안도 동의하는 바이다.

그도 그럴 게 재료부터가 범상치 않은가?

“특히 얼음. 얼음은 돈이 있다고 해도 마음대로 구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애초에 이거 평민들이 사 먹을 수 있는 가격은 안 될 것 같은데….”

“얼음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응?”

제이미가 자신만만하게 가슴을 땅땅 쳤다.

그에 고개를 갸웃거리자, 예상치 못한 말이 튀어나왔다.

“울 엄마가 얼음 마법사거든요. 엄마한테 부탁하면 돼요!”

새하얀 이를 씨익 드러내며 호언장담하는 제이미.

그 모습에 엘레인은 생각했다.

‘혈연 찬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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