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며칠 뒤.
“그나저나 신성제국에서 단풍당을 생산하는 줄은 몰랐네.”
엘레인의 말에 집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커의 말에 따르면 단풍당은 신성제국 황실에서 직접 관리하는 품목이기 때문에 수입을 원하면 제대로 된 무역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엘레인이 읽고 있는 것이 바로 국제 무역을 맡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인 자르크 공작이 보낸 서신이었다.
“약속 시각이 언제입니까?”
“편지를 받은 날을 기준으로 나흘 뒤에 만나재.”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해야겠군요.”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스 영지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면 최소 두 달. 중간에 산맥을 넘는 시간을 빼도 이 정도다.
“이 근방에 자르크 공작가와 연결된 텔레포트가 있어?”
“딱 한 군데가 있긴 한데. 아스터 왕국의 레톤 영지에 가셔야 합니다.”
“아스터 왕국?”
엘레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좋지 않은 감정이 무럭무럭 샘솟고 있는 곳을 경유해서 가야 한다니….
생각 같아서는 그쪽엔 눈길도 주고 싶지 않았지만, 신성제국과 ‘직빵’으로 텔레포트가 연결되어 있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그들에게 딸랑이를 흔드는 아스터 왕국밖에 없다.
또 그쪽이 플로스 영지와 가장 가깝기도 하고 말이다.
시간이 남아돌아서 빙 돌아서 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여러모로 봤을 때 아스터 왕국의 텔레포트 마법진을 이용하는 게 현명했다.
“에휴. 어쩔 수 없지. 레톤 영지 걸 이용하는 수밖에.”
“지금 바로 출발하실 겁니까?”
“당연하지. 시간이 그리 널널한 것도 아니니까.”
“그럼 바로 황실 제2 기사단을 호출하겠습니다.”
“엥?”
엘레인은 두 눈을 끔뻑였다.
갑자기 그 사람들은 왜 불러?
“집사 아저씨. 나 지금 아스터 왕국으로 가는 건데?”
“예. 그러니까 더욱 준비를 단단히 해야지요.”
“아니아니. 그러면 일이 너무 커지지 않을까? 우리가 전쟁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의심할 수도 있잖아.”
“흐음.”
확실히 기사들의 갑옷이 눈에 띄긴 하지.
영주님의 말씀도 틀린 것 하나 없기에 집사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최상급 용병단을 알아보겠습니다.”
“용병단이면 최소 스무 명은 되겠지?”
“물론입니다.”
엘레인은 방긋 웃으며 생각했다.
‘그렇게 우르르 몰려다니면 기사들을 데리고 다니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심지어 최상급이면 기사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실력일 것이다. 분명히 체격도 크고 튼튼하겠지.
그런 사람들 사이에 껴서 돌아다닐 것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주변인들의 시선이 두렵다.
‘신고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조용히 다녀오고 싶은 엘레인으로서는 집사가 내놓은 차선책이 전혀 달갑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것만큼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은데….
“집사 아저씨. 나 목마른데 물 좀 가져다줄래?”
“아, 그렇군요. 오늘 말씀을 많이 하셔서 피곤하셨지요? 내일 목이라도 쉬면 곤란하니 목에 좋은 차를 준비해오겠습니다.”
“아니, 그냥 물이면 되는….”
엘레인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했다.
이미 저만치 걸어간 집사가 빛의 속도로 문을 열고는 쌩하니 가버렸기 때문이다.
“뭐 상관없나.”
머리를 긁적인 엘레인은 주변을 한 차례 살핀 뒤, 품에 있는 편지를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이걸 가지고 다니길 잘했지.”
혹시나 있을 일을 대비해서 미리 써놓은 편지.
‘나 잠시 가출할게’를 길고 장황하게 써 놓은 편지를 테이블 위에 고이 모셔 놓은 엘레인은 재빨리 숨겨 놓았던 로브를 뒤집어쓰고 비밀 통로 문을 활짝 열었다.
“미안해, 집사 아저씨.”
마음만은 참 고마운데 나는 솔로가 좋더라.
* * *
여명이 떠오르는 이른 새벽.
순조롭게 플로스 영지에서 탈출에 성공한 엘레인은 지푸라기가 가득한 소달구지에 몸을 뉘었다.
“네 살 이후 가출은 처음이구나.”
실로 오랜만에 찾은 자유에 엘레인은 방긋 웃었다.
얼굴을 바꿔 주는 반지를 사용해서 그런지 이동하는 내내 엘레인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덕분에 이렇게 소달구지까지 얻어 타게 된 엘레인은 갑작스레 깜박거리는 반지를 보고 깜짝 놀랐다.
“뭐야. 벌써 마나석을 갈 때가 됐나?”
피슉 소리를 내며 까맣게 죽어버린 반지.
동시에 평범하게 바꾸었던 얼굴과 머리색이 원래대로 돌아와 버렸다.
“따로 여유분은 안 챙겼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다. 급한 대로 로브를 푹 뒤집어쓴 엘레인은 그제야 꼬르륵거리는 배를 문지르며 비스킷 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이럴 줄 알고 비상식량을 챙겨왔지!”
-무훙.
고작 그런 걸로 배가 차는 거야?
소달구지 위에서 뒹굴던 운디네가 의아한 눈으로 쳐다본다.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봉지를 노려보던 엘레인은 가차 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당연히 부족하지. 그래도 뭐 어쩌겠어.”
돈은 넘치다 못해 철철 흐를 정도로 챙겨왔으니, 배를 채우는 건 마을에 가서 해도 된다.
“네 것도 줄게.”
원래 정령은 살아가는 데 뭘 먹을 필요가 없어서 먹는 거에 관심이 없다.
하지만 운디네는 최근 자연계 정령들에게 주는 공물을 호기심으로 먹어봤다가 아주 제대로 꽂혔다.
나중에 가서는 엘레인의 케이크를 빼앗아 먹을 정도로 단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맛있어?”
-무후훙!
녀석. 아주 맛나게도 먹어 치운다.
맛있게 먹는 모습을 보니 더욱 배고파진 엘레인은 뽀얀 빛이 매력적인 비스킷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냠!
“우물우물. 완전 꿀맛이야…!”
배가 많이 고팠던 것인지 봉지 안의 비스킷이 빠르게 줄어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를 집어 먹으려던 찰나.
“억! 큭, 켁!”
이런. 입안의 수분을 꾸준히 빼앗아가던 비스킷이 기어코 목에 걸리고 말았다.
당황한 엘레인이 재빨리 가슴을 두들기며 괴상한 소리를 뱉자 갑자기 지푸라기 더미에서 하얀 손이 튀어나왔다.
“여기 물입니다.”
“고, 고마워!”
엘레인은 재빨리 물을 들이켰다.
꿀꺽꿀꺽. 캬~!
사막 한가운데에서 오아시스를 찾은 사람의 심정이 이러할까.
시원한 물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꽉 막혔던 게 뻥 뚫리며 청량한 기운이 맴돌았다.
하마터면 비스킷 먹다가 저세상 구경할 뻔했던 엘레인은 물을 건네준 사람에게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덕분에 살았어요. 감사합니….”
그런데 잠깐만. 소달구지에는 나 혼자만 있는 거 아니었나?
기겁한 엘레인과 운디네가 지푸라기 더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두 존재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캐시 언니?”
“이제 괜찮으십니까?”
“나, 난 이제 괜찮아. 근데 언니가 왜 거기서 나와?”
엘레인은 지푸라기 더미에서 불쑥 튀어나온 캐시를 바라보며 어버버거렸다.
그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던 캐시가 엘레인의 입가에 묻은 비스킷 가루를 털어내며 말했다.
“황녀님께서 오르시기 전에, 저는 이곳에서 달을 보고 있었습니다.”
“지푸라기 더미 속에서 달이 보여?”
아니, 그 전에 황궁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여기서 풍류를 읊고 있는 게 말이 돼?
“예.”
“그, 그렇구나.”
당당한 캐시의 말에 엘레인은 재빨리 수긍했다.
캐시가 그렇다면야 그런 거지 뭐.
워낙 속을 알 수 없는 사람인 데다 저렇게까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이니 더 이상 뭐라고 말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어디로 가시는 길입니까?”
“아스터 왕국의 레톤 영지. 자르크 공작가와 직통으로 연결된 곳은 거기뿐이거든.”
“그럼 제가 모시겠습니다.”
여기서 안 된다고는 말 못 하겠다.
아까 도와준 것도 있고,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라고 할 정도로 엘레인은 매정하지 못했다.
엘레인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러라고 하자, 캐시가 선수를 쳤다는 사실에 뿔이 난 운디네가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무우!
‘그래그래. 캐시가 아니라도 네가 도와줬을 거란 걸 잘 알아.’
-무훙!
‘맞아. 캐시가 나빴네. 우리 운디네가 할 일을 빼앗고.’
주인이 제 편을 들어주자 운디네의 볼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거기다 자신감까지 되찾은 운디네는 괜히 캐시 앞에 얼쩡거리며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래봤자 캐시에겐 운디네가 전혀 보이지 않겠지만….
“어?”
-무, 무웃!?
캐시의 눈동자가 운디네가 있는 쪽을 정확히 바라봤다.
당황한 운디네가 오른쪽으로 이동하자 캐시의 눈동자도 함께 따라온다.
“저기 캐시 언니. 혹시 뭐가 보여?”
“아니요. 하지만 뭔가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기운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진다? 운디네가 옆에 붙어 있으면 그런 기운이 느껴지는 걸까?
당황한 운디네가 주춤거리며 엘레인의 뒤통수로 숨어들었다.
동시에 아쉬운 표정을 짓는 캐시를 보니 확실히 뭔가 느껴지기는 하는 모양이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항상 곁에 붙어 있어서 그런지 엘레인은 운디네가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도 별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냥 운디네의 존재감이 느껴질 뿐. 딱히 기분이 더 좋아진다든가 하지는 않았다.
‘그냥 캐시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예민해서 그런 건가?’
엘레인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지푸라기 더미에 몸을 뉘었다.
“어쨌든 푹 쉬자. 아스터 왕국까진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알겠습니다.”
캐시는 어째서 혼자 나왔냐고 묻는 대신 엘레인을 따라 지푸라기 더미에 몸을 맡겼다.
‘이래서 캐시가 좋다니까.’
소달구지의 덜컹거림을 느끼며. 엘레인은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 닫았다.
* * *
이른 아침.
레톤 영지에 도착한 엘레인은 미리 만들어놓은 위조 신분패를 당당하게 내보였다.
영주 신분을 그대로 드러내고 들어오면 여러 가지 일이 복잡해지기 때문에 일부러 만든 것이었다.
“통과.”
다행히 경비원은 의심을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관문을 통과한 엘레인은 캐시와 함께 레톤 영지 안에 발을 들였다.
“사람들이 많네.”
레톤 영지는 아스터 왕국의 최외곽에 위치한 영지다.
이렇게까지 사람이 많을 일은 없을 텐데 이상하게 북적거리는 거리를 보며 엘레인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개중에는 사제복을 입고 있는 사람도 많이 보여서 더 이상했다.
“저기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습니다.”
그때 캐시가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차피 바로 떠날 영지. 크게 신경 쓸 필요도 없기에 엘레인은 재빨리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여기 자르크 공작가로 이어진 마법진이죠?”
“맞습니다. 지금 바로 이용하시려고요?”
“네.”
엘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화 두 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금화를 받은 마법사의 표정이 어색하게 굳어있었다.
“죄송하지만 고객님. 지금 자르크 공작가에서 이쪽으로 넘어오는 손님이 많아서 조금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얼마나요?”
“글쎄요. 그건 저희도 잘….”
자르크 공작가에서 관광객이라도 대거 이동하는 건가?
엘레인의 생각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자, 마법사가 친절히 설명했다.
“지금 만국 디저트 박람회 개최 건으로 신성제국 사람들이 이동해 오고 있어서요. 황태자님도 오신다는 소문이 있어서 그런지 이쪽으로 넘어오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만국 디저트….”
아스터 왕국에서 벌써 수를 쓰고 있는 건가.
신성제국의 황태자까지 초대할 정도면 참 지극정성인 것 같다.
‘그래도 아직 약속 시각까지 많이 남았으니까.’
공작과 약속한 시각은 오후 세 시.
오전 여덟 시인 지금은 아직 여유가 많았다.
“그럼 차례가 되면 알려주세요.”
“알겠습니다.”
엘레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캐시와 함께 근처 벤치로 향했다.
그 뒤로 마법사의 시선이 함께 따라붙었다.
“뭔가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은데….”
마법사는 떠오를 듯 말 듯 애매한 얼굴로 엘레인의 뒤통수를 힐끔대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렇듯 마법사가 딴짓을 하고 있으니 쉴 틈 없이 사람을 토해내던 마법진이 고요해졌다.
텔레포트 마법진이 발동하려면 양측 모두 마나를 주입하여 마법진을 활성화시켜야만 하는데, 공작가 측에서 아무리 마나를 주입하여 활성화를 시켜도 이쪽에서는 묵묵부답이니 마법진이 환하게 빛나기만 할 뿐, 사람들이 넘어오질 않는 것이다.
순식간에 고요해진 상황에 이상함을 느낀 딜런 왕자가 명단을 확인하다 말고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거기, 뭐 하는 거지? 일 안 하나?”
“죄, 죄송합니다!”
“뭐야. 저쪽에 뭐라도 있나?”
딜런은 마법사를 밀쳐내고 그가 바라보고 있던 곳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저 녀석이 왜 여기에…?”
엘레인을 발견한 딜런 아스터의 눈매가 서서히 좁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