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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3화 (113/417)

113화

집무실에서 보고를 받은 황제는 동공을 파르르 떨었다.

평소와 달리 함께 찾아온 외무대신과 정보대신. 그들이 전달한 내용에 황제는 무척 놀라고 말았다.

“지금 그 말이 사실인가…?”

위엄과는 먼, 말꼬리가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절로 튀어나왔다.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 한 황제의 놀란 얼굴에 정보대신이 의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황녀님께서 또 한 건 해내셨습니다…!”

정보대신의 확신에 찬 말에 황제는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언제부터인지 그의 얼굴엔 미소가 번지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선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내 딸이 신성 제국에서 거래를 성사시키고 왔다고.”

황제는 정보대신이 전달한 정보를 곱씹듯이 중얼거리며 입꼬리를 들썩였다.

내 딸이 무역에 대해서 깐깐하게 굴기로 유명한 신성 제국에서 거래를 성사시키고 왔단다.

그런 큰일을 하고 왔다는 것도 놀랍고 대견한데, 심지어 그 일을 한 이유가 범상치가 않다.

“플로스 영지민들이 이 일로 아주 큰 피해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물며 가만히 두었으면 아스터 왕국 측의 횡포가 더 심해졌을 수도 있었겠지요.”

정보대신이 두 눈을 빛내며 말했다.

심지어 거래 내용을 들어보면 딱히 엘레인에게 이득이 되는 것도 아니었단다.

말 그대로 흰 설탕의 대체품을 찾기 위해서 신성 제국으로 향한 것일 뿐. 척 보아도 영지민들을 위해서 직접 나섰다는 게 눈에 보였다.

“내 딸이지만 마음씨가 참으로 곱군.”

“말씀대로이십니다. 황녀님처럼 마음씨 착하신 분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겁니다.”

“어디 마음씨만 착하다 뿐입니까? 황녀님의 행보 덕분에 제국에서도 이번에 큰 이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정보대신과 바통 터치를 하듯 외무대신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웃었다.

영주민을 위해 흰설탕의 대체재를 찾았을 뿐인데, 어째서 제국에 큰 호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그에 대한 답은 외무대신 아놀드의 입에서 바로 들을 수 있었다.

“이번 단풍당 거래를 계기로 신성 제국 측에서 무역 품목을 확대하지 않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거기엔 특별 관리 품목도 포함되어 있겠군.”

“물론입니다.”

황제를 비롯한 두 명의 대신이 입꼬리를 들썩였다.

앞으로 단풍당처럼 계약하기 까다로운 무역품은 물론이고 개중 신성 제국 내에서만 유통되는 물품들도 제국 내에 들여올 수 있게 되었다.

모두 엘레인이 물꼬를 터주지 않았더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주접 대장 정보대신이 가장 먼저 빵! 하고 터져버렸다.

“껄껄껄. 황녀님께선 하늘에서 내려주신 복덩이임이 틀림없습니다.”

“그냥 복덩이가 아니라 행운의 여신이죠. 마음씨도 착한 데다가 머리도 똑똑해, 역시 황녀님이라는 말밖에 안 나옵니다!”

“흐음.”

두 대신의 칭찬 일색에 황제는 기분이 좋았다.

다른 것도 아닌 딸을 향한 칭찬. 어찌 기분이 좋지 않을 수가 있는가?

입꼬리를 들썩이다 못해 결국 짙은 호선을 그린 황제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과 한마음 한뜻인 충성스런 대신들을 향해 말했다.

“그래도 가출은 안 되지.”

“…….”

“…….”

순간 떠들썩함으로 가득하던 장내가 싸늘해졌다.

꿀꺽. 누군가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를 끝으로 입술 끝을 비죽 올린 황제가 정보대신을 향해 서늘한 시선을 두었다.

내 딸이 가출했다는 이야기를 모든 일이 끝나고 나서야 듣게 되었다.

심지어 그 사실을 알게 된 경로가 플로스 영주성의 집사가 병사를 끌고 가는 모습을 이상하게 여겨서라니.

만약 집으로 돌아온 엘레인이 보낸 전서가 조금만 늦었더라면 아스터 왕국과 플로스 영지 둘 사이에 큰 마찰이 생겼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전에 엘레인의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었다면 이쪽에서 바로 전쟁을 걸었겠지만….

어쨌든 이 모든 것들을 이제야 전달받았다는 것은 정보부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다는 방증.

잠시 정보대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황제가 두 눈을 번뜩였다.

“벌로 자네의 여름 휴가를 반려하지.”

“저, 전하? 여름에는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약속했습니다만….”

“그 약속. 겨울로 미루면 되지 않나.”

“제, 제발 선처를! 저 마누라에게 죽습니다!”

정보대신이 울부짖었다.

퍽 처량해 보이는 모습.

누구라도 한 번쯤 동정심을 가질 법한 모습이었으나 황제는 오히려 빙긋 미소 지었다.

“그것참 잘됐군. 나 말고 자네를 혼내줄 사람이 있으니까 말이야.”

“그런…!?”

정보대신은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언제나 자주 말다툼을 하던 외무대신도 짠한 눈으로 바라볼 정도.

그러나 황제는 마지막까지 매정했다.

“최대한 오래. 많이 혼나길 빌지.”

“끄흑!”

정말이지 끔찍한 형벌이었다.

* * *

정보대신이 끔찍한 앞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실 부정을 하고 있을 무렵.

플로스 영지는 한창 디저트 대축제가 진행되고 있었다.

“우와. 이게 다 디저트에요?”

플로스 영지를 둘러본 베일리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맛있는 걸 싸 들고 빨리 되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한 엘레인은 사과의 의미로 앨리스와 베일리를 축제가 한창인 플로스 영지로 직접 데려온 참이다.

“맞아. 대단하지?”

베일리의 반응에 엘레인은 콧대를 높이 세웠다.

그에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베일리.

디저트에 환장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달콤한 것을 좋아하는 두 사람에게 이곳은 마치 낙원과도 같았다.

“여기도 디저트. 저기도 디저트. 와아! 여기 완전 디저트 천국이에요!”

베일리가 빙글빙글 돌며 감탄사를 터트렸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강아지처럼 방방 뛰는 모습에 엘레인은 빵 터지고 말았다.

‘저렇게까지 좋아해 주니 괜히 뿌듯한걸.’

흐뭇하게 웃으며 코밑에 붙인 보들보들한 콧수염을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앨리스가 베일리의 뒷덜미를 콱 움켜잡았다.

“사람들에게 민폐잖니. 얌전히 뒤에 서 있으렴.”

“앗. 죄송해요, 황녀님.”

베일리가 머쓱하게 웃으며 사과를 해왔다.

그에 괜찮다고 답하자 문득 베일리의 시선이 엘레인의 얼굴에 고정되었다.

“근데 황녀님. 얼굴에 그건 뭔가요?”

“이거? 변장한 건데 잘했지? 나인지 아무도 못 알아보겠지?”

엘레인은 더벅머리 가발을 바로 쓰고 좌우로 탐스럽게 갈라진 콧수염을 만지작거리면서 방긋 웃었다.

당장 아티팩트 반지에 갈아 끼울 마나석이 없어서 임시로 하는 것 치고는 너무 완벽한 변장이었다.

“정말… 너무 귀여우세요!”

“응?”

기대했던 반응과 전혀 다른 반응이 튀어나왔다.

엘레인이 흠칫 놀라자 베일리가 발을 동동 구르며 크게 아쉬워했다.

“추억 보관 장치를 가져왔어야 했는데!”

“쉿. 조용히 해. 황녀님께서 들으시면 어쩌려고?”

“그치만 너무 아쉬운걸….”

“어차피 그 커다란 걸 들고 다니면 눈에 너무 띄어서 안 돼.”

“히잉.”

엘레인은 짜게 식은 눈으로 베일리와 캐시의 대화를 들었다.

이제 열두 살이 된 엘레인은 추억 보관 장치가 무엇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물론 황녀님의 귀여운 사진과 영상을 모으는 것이 그녀의 은밀한 취미인 것까지는 잘 몰랐지만, 엘레인은 못 말린다는 듯 그들을 바라보다 말고 냄새를 킁킁 맡았다.

‘으으. 배고파.’

실은 아까부터 계속 꾹 참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와 디저트의 아찔하리만치 아름다운 저 자태!

두 사람의 수다를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는 날이 저물어버릴지도 모른다.

결국, 엘레인은 특단의 조치.

탈출을 시도했다.

“나 저거 먹으러 갈래.”

“어? 저도 같이 가요…!”

“잠깐. 그렇게 뛰다가는 다쳐요! 조심하세요!”

엘레인을 비롯한 두 여인이 서둘러 뛰어가자 그 뒤를 카론과 캐시가 조용히 따라왔다.

더벅머리에 요상한 수염을 달고 다니는 꼬마와 메이드 복을 입은 세 여인. 거기다 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호위기사까지….

당연하지만 이런 눈에 띄는 조합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동으로 쏠렸다.

“저분이 혹시 신문 1면에 나왔던 그…?”

“세상에 어쩜 좋아. 진짜 깨물어주고 싶게 생겼다.”

“어허, 어디 큰일 날 소리를.”

사람들은 한껏 풀어진 표정을 지으며 영주님이 디저트를 맛있게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른 모습.

이미 영주임을 들켰다는 사실을 모르는 엘레인은 아주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응?”

그렇게 한참 달콤한 디저트들을 탐닉하고 있을 때. 엘레인은 문득 줄이 가장 긴 가판대를 발견했다.

“저기엔 뭘 팔기에 저렇게 사람이 많지?”

“어디 보자…. 딸기 파르페라고 하는데요?”

“아! 제이미구나?”

엘레인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이어서 반가운 얼굴로 달려 나가던 엘레인은 번쩍 들었던 손을 천천히 내렸다.

인사를 하려고 해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보고 싶었는데….’

입맛을 쩝 하고 다시자 베일리가 곁에 와서 물었다.

“왜 그러세요?”

“그게 줄이 너무 길어서.”

“아하. 그렇구나.”

베일리는 와플을 베어 먹으며 이쪽을 힐끗거리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

“그런 거라면 그냥 가도 되지 않을까요? 사람들에게 영주님인 걸 알리면 되잖아요.”

“어…?”

“그렇군요. 만약 거절하는 자가 있다면 제가 치워드리겠습니다.”

“으엑!?”

베일리에 이어 카론의 살벌한 말에 엘레인은 벙찌고 말았다.

‘그러니까 그 말은 새치기를 하자는 말?’

그녀의 말을 제대로 해석한 엘레인은 경악했다.

동시에 신문 1면에 ‘당당하게 새치기를 하는 영주님’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찍히는 상상을 한 엘레인은 대차게 고개를 내저었다.

“절대 안 돼! 사람들 다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나 혼자 새치기를 해?”

“앗!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가장 먼저 대안을 제시했던 베일리와 최근 들어 의욕이 앞서나가는 카론이 고개를 푹 숙였다.

정말이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사람들.

절레절레 고개를 젓고 있는데, 그때 이변이 일어났다.

“어머나. 바로 저분이 플로스 영주님?”

“세상에 어쩜 저리 마음씨가 고울까. 천사가 따로 없네.”

“저런 사람이 영주님이라니. 플로스 영지 사람들은 복 받았어. 허허!”

누가 봐도 영주님인 엘레인의 등장에 딱딱하게 얼어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새치기를 할 수 있어?’라고 외치는 아이를 사랑스럽게 바라보았다.

부하를 갈구며 도덕성을 논하는 영주님을 각각 엄마 아빠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던 사람들.

그들은 이내 놀라운 행동을 보였다.

“어이쿠. 갑자기 배가 아프네. 이렇게 된 거 꼬마 친구가 앞으로 가야겠는걸?”

“네?”

엘레인은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멍하니 멀어지는 남성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건 시작이었다.

“어머, 이 줄이 아니었나? 다른 데로 가야지.”

“나는 홀수가 좋더라. 꼬마야 네가 앞으로 가줄래?”

“아 맞다. 집에 불 안 끄고 왔지 참?”

사람들은 서로 보이지 않는 손을 맞잡으며 의기투합이라도 했는지, 다들 바쁜 일이 있다며 우르르 뒤로 빠졌다.

덕분에 순식간에 텅 비어버린 앞줄.

“뭐지…?”

멍하니 그곳을 보며 당황하고 있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엘레인의 어깨를 톡톡 두들겼다.

“저기 죄송한데 앞으로 줄 좀 당겨줄래요?”

그 말에 뒤를 돌아보니, 엘레인의 뒤로 새로운 줄이 생겼다.

후후. 작금의 상황이 재밌어진 앨리스가 웃으며 재촉했다.

“뒤에 계신 분들 기다리시니까 얼른 앞으로 가요.”

“아, 으응.”

엘레인은 허둥지둥 가판대 앞으로 갔다.

그 모습을 또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반면 어리둥절한 얼굴로 가판대 앞으로 다가간 엘레인은 리안과 제이미 그리고 마커의 환영 인사를 받으며 딸기 파르페를 손에 쥘 수 있었다.

‘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잘된 거겠지…?’

스푼을 꼭 쥔 엘레인은 에라 모르겠다 식으로 딸기 파르페를 듬뿍 퍼먹었다.

“으흠~ 역시 맛있어!”

행복한 얼굴로 딸기 파르페를 먹는 엘레인과 그런 아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

마지막까지 자신의 변장이 들켰을 리는 없다고 생각하는 엘레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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