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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화 (115/417)

115화

영주성 일을 끝마치고 황궁에서 휴식을 즐기고 있을 때였다.

“아가야. 안에 있느냐?”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반가운 목소리. 그에 엘레인은 입가에 머금은 찻물을 급히 삼키고 외쳤다.

“할머니? 잠시만요. 지금 바로 열어드릴게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엘레인은 바람처럼 달려가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자 황태후가 약간 놀란 얼굴로 귀여운 손녀를 바라보았다.

엘레인은 그런 그녀를 향해 반가움을 가득 담아 활짝 웃었다.

“할머니! 무슨 일이에요?”

“후후. 다름이 아니라 함께 갈 곳이 생겨서 말이다.”

“함께 갈 곳이요?”

“그래. 혹시 바쁘지는 않느냐?”

엘레인은 잠시 눈알을 굴렸다.

황궁으로 돌아와서 휴식을 취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할머니가 손녀와 함께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있다고 하는데 그게 뭐 대수랴.

엘레인은 힘차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저 안 바빠요.”

“후후. 다행이구나. 그럼 이 할미와 함께 발론드 공작가에 좀 가자꾸나.”

“발론드 공작가요?”

이건 또 예상치 못한 일이다.

오랫동안 들은 적이 없는 황태후 측의 가문 이름이 불쑥 튀어나오다니.

엘레인은 멍하니 그녀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손녀로서는 아주 당연한 반응에 황태후는 조금 뜨끔한 얼굴로 설명했다.

“별 건 아니고 그 집안도 우리 식구가 아니냐. 인사차 한 번쯤은 얼굴을 비춰줘야지.”

“아.”

엘레인이 큰 깨달음을 얻은 듯 감탄사를 터트렸지만, 사실 황태후가 한 말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심술궂고 고집만 센 호적상 오빠인 녀석에게, 귀엽고 사랑스럽고 소중한 엘레인을 자랑할 수 있을지언정 보여주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으니까 말이다.

괜히 엘레인의 매력을 보여줬다가는 그놈이 손녀에게 푹 빠져 버리면 황궁 문턱이 닳도록 오갈 게 뻔했다.

어디 그러기만 하면 다행이게? 필시 온갖 감언이설로 꼬드겨서 공작가로 데려가려고 할 것이다.

그래. 그것만큼은 절대적으로 막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다.

그 망할 오라버니 녀석이 우리 엘레인을 욕하네?(사실 욕까지 하진 않았다.)

그놈에게 엘레인의 매력을 알려주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입에 담지 못할 말들을(?) 다시 주워 먹게 만들어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제대로 된 인사를 한 적이 없네요.”

반면 황태후의 이런 속을 모르는 엘레인은 심각한 얼굴을 했다.

발론드 공작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만난 게 네 살배기 때다.

그것도 과식으로 토를 하게 되면서 제대로 된 인사 한번 하지 못하고 병상에 눕게 되었지.

그때로부터 무려 8년 후.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그를 찾아가는 건 찬성이다.

황태후의 말대로 남남으로 살 게 아니라 앞으로 계속 볼 친척 사이니까 말이다.

“좋아요. 갈게요.”

결국, 엘레인은 별로 고민할 것도 없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잘 생각했다. 지금 바로 가자꾸나!”

어째서인지 기분 좋아 보이는 황태후가 엘레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할머니를 기쁘게 해드렸다는 사실에 가슴이 몽글해진 엘레인은 그녀의 손을 맞잡고 헤헤 웃었다.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황태후의 오빠 되는 사람이니 마음씨가 곱겠지?’

묘하게 부풀어 오르는 어떤 기대감과 함께 엘레인과 황태후는 발론드 공작가로 향했다.

그리고 그 기대는 발론드 공작을 직접 만나는 순간 산산이 부서졌다.

***

“바르칸 발론드 공작이라 합니다.”

“에, 엘레인 베네딕트라고 해요.”

발론드 공작가에 도착한 엘레인은 눈매가 아주 사나운 남자를 만날 수 있었다.

황태후와 닮은 것 같기도 하면서 날카롭게 벼려 놓은 칼날 같은 남자.

그의 눈은 마치 처음 만났을 때의 라네즈처럼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왜 저렇게 쳐다보는 거지?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나?’

순간 그런 생각이 드는 눈빛이었다.

그와 악수를 나누고 재빨리 황태후의 옷자락을 잡자, 그녀가 후후 웃는 낯으로 제 오라버니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엘레인은 몰랐지만, 사회적 권위가 또다시 오빠의 권위를 찍어 누르는 순간이었다.

“흠. 커험. 이거 실례했군요. 시원한 냉차를 준비했으니 한번 들이켜 보시지요.”

동생의 등쌀에 밀린 그는 살얼음이 낀 차가운 차를 엘레인에게 손수 따라주었다.

한여름의 열기가 한창일 때라 그가 준 차는 엘레인의 몸에 활력을 북돋아 주었다.

‘크~ 시원하다!’

꽁꽁 얼린 얼음덩어리나 차가운 아이스크림과는 또 다른 시원함이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할 말을 애써 삼키며 시원함에 취해 있자, 하나의 시선이 따라온다.

잠시 냉기가 남아 있는 찻잔을 내려놓은 엘레인은 아까부터 계속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년과 눈을 마주쳤다.

“그런데 그쪽은…?”

“이 녀석은 내 손주입니다. 인석아. 얼른 인사해야지?”

“저, 그, 반갑습니다. 로엔 발론드라고 합니다.”

날카로운 인상의 할아버지와 달리 선이 고운 미소년이 허둥지둥 고개를 숙였다.

순한 눈동자와 얇은 손목 등.

뚜렷한 이목구비를 지닌 공작과 전혀 닮지 않은 모습이 신기해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자니, 발론드 공작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떻습니까? 이 녀석이 맹해 보여도 사실은 아주 똑똑하답니다. 완벽한 검술에 완벽한 두뇌까지. 하하하! 이런 아이를 보고 천재라고 한다지요?”

“와… 정말 대단하네요.”

황궁의 누군가가 떠오르는 팔불출의 모습에 잠시 멈칫한 엘레인은 순수하게 놀란 얼굴로 로엔을 바라보았다.

검보다는 펜이나 붓이 더 어울리는 외향의 아이였지만, 원래 사람은 겉모습으로 판단하면 안 되니까.

크흠. 왜인지 황태후가 불편한 헛기침을 했지만, 발론드 공작은 그런 그녀는 신경 쓰지 않고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요? 이렇게 대단한 녀석이 아직 열한 살입니다.”

“저보다 한 살 어리네요?”

“하하하! 말씀대로 황녀 저하보다 무려 한 살이나 어리지… 큽!”

말을 하다가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린 공작이 두 눈을 부릅뜨고 황태후를 노려보았다.

반면 황태후는 처음과 같은 얼굴로 우아하게 찻물을 들이킬 뿐이다.

“무슨 일 있으세요?”

발아래에서 또 다른 전쟁이 터지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엘레인은 고개를 기울였다.

차마 사랑스런 여동생이 자신의 잘생긴 발을 인정사정없이 찍어 누르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었기에 발론드 공작은 찡그린 인상을 억지로 활짝 펴냈다.

“어, 어쨌든 아직 어리고 미숙한 녀석이니 잘 부탁드립니다.”

“네? 아, 네….”

실컷 손주 자랑을 하다가 갑자기 겸손을 떠는 모습이 조금 의아했지만, 엘레인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멍하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로엔에게 손을 내밀었다.

“말 편하게 해. 앞으로 잘 지내보자.”

“예. 엘레인 누님.”

“그래 누님. …어?”

로엔의 말투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끼기도 전.

하하! 호탕하게 웃은 발론드 공작이 황태후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참 곱게 성장하셨습니다. 어렸을 때도 예쁘장했는데 커서도 그 미모를 잃지 않았군요.”

“공작의 손주 또한 아주 잘생겼습니다. 나중에 커서도 아주 훤칠하겠어요.”

“허허허. 별말씀을.”

“후후후. 이쪽이야말로.”

갑자기 시작된 칭찬 릴레이에 엘레인은 멍하니 황태후와 발론드 공작을 번갈아 보았다.

아니, 이건 주접 릴레이라고 해야 하나?

그냥 인사를 하러 왔는데 수치사를 당할 것 같은 기분에 엘레인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그것은 로엔 또한 다르지 않았다.

‘야, 너두?’

‘야, 나두!’

주접킹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에 낀 두 손녀 손자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얼른 이 두 사람의 주접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원한 냉차를 리필해서 마시고 있는데, 공작가에서 일하는 시녀가 빙긋 웃으며 디저트를 세팅해줬다.

‘헉, 이 냄새는 벌꿀? 벌꿀로 만든 케이크는 내가 또 처음 보네!’

엘레인은 처음 보는 디저트에 군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 이야기는 꽤 오래 걸릴 것 같으니 어디 한번 벌꿀 케이크 맛 좀 볼까?’

얼굴이 비치는 포크를 덥석 집어 든 엘레인은 곧바로 벌꿀 케이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리고 막 포크가 벌꿀 케이크의 겉면과 맞닿은 순간!

“자, 그럼 슬슬 시작할까요?”

“어?”

“아가야. 그건 나중에 먹고 일단 밖으로 나가자꾸나.”

“네엑!?”

황태후가 웃으며 엘레인의 손을 잡아끌었다.

얼떨결에 따라 일어선 엘레인은 멀어지는 벌꿀 케이크를 보며 속으로 눈물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근데 우리 어디로 가요?”

“후후. 곧 도착하니 조금만 참으려무나.”

그녀의 말은 엘레인을 더욱 궁금하게 만들었다.

대체 어디로 가기에 두 사람의 분위기가 이토록 심상치 않은 것일까.

-무우….

운디네도 황태후와 공작 사이에서 오가는 살벌한 기운을 읽었는지 엘레인의 정수리에 착 달라붙었다.

‘분명 어디서 많이 본 표정들인데… 바로 떠오르질 않는단 말이지.’

엘레인은 어디서 많이 익숙한 사람의 표정을 보며 종종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끝내 이 요상한 분위기에 대해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 엘레인은 놀라운 장면을 목도할 수 있었다.

“우와. 이게 뭐예요?”

“하하하. 마음에 드십니까?”

발론드 공작이 잔뜩 우쭐거리며 웃었다.

왜인지 모르게 얄미운 표정이었지만, 엘레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그럴 게 마치 인형의 집을 크게 키운 듯 상당히 메르헨 풍의 건물이 공작가 한쪽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건 처음 봐요!”

엘레인은 양쪽 볼이 상기된 채 외쳤다.

마치 달콤한 아이스크림과 마카롱. 그리고 각종 디저트들을 안에서 잔뜩 만들고 있을 것처럼 생겼다.

옆에 있던 로엔도 눈앞의 건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가까이 다가가 외벽을 천천히 만지며 연신 감탄사를 터트렸다.

“대단해. 무슨 물감을 사용한 거지…?”

“?”

어째서 그런 부분에서 놀라는 거죠?

엘레인은 어딘가 특이한 로엔을 바라보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뭐, 특이한 거라면 황가 쪽 아이들도 뒤지지 않지만 말이다.

“그런데 여긴 뭐 하는 곳이에요?”

“궁금하십니까?”

“네? 아, 네.”

불쑥 고개를 내밀며 묻는 모습에 뭔가 불길했지만, 엘레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질문을 던진 발론드 공작이 씨익 웃으며 엘레인과 로엔을 파스텔 톤의 집안에 밀어 넣었다.

“자자. 일단 들어가시고.”

“어어?”

기사 가문의 공작다운 힘에 속절없이 집안에 들어서게 된 엘레인은 멍하니 황태후와 발론드 공작을 바라보았다.

왜인지 조금 미안한 얼굴의 황태후와 자신만만한 얼굴의 발론드 공작이 차례대로 말했다.

“얘야. 이건 방 탈출 게임을 위해 만든 곳이란다.”

“맞습니다. 힌트를 찾은 뒤 여기서 탈출하면 되는 거지요. 어떻습니까. 참 쉽죠?”

여기가 방 탈출 게임을 위해 만든 공간이라고?

고작 게임을 하기 위해 만든 것치고는 상당히 고퀄리티에 미친 듯한 스케일이었다.

하지만 엘레인이 누군가.

그 이름도 유명한 베네딕트 황제의 딸이 아닌가?

워낙 잘나신 아버지 덕분에 이미 이와 비슷한 일들을 여럿 겪어본 엘레인은 나름 침착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와아. 방 탈출이라니 처음 들어보는 게임이네요. 근데 왜 우릴 여기에다가…?”

엘레인의 물음에 황태후와 발론드 공작이 말없이 웃었다.

그리고 보란 듯이 문을 쾅 닫아버리는 두 사람.

“할머니…?”

“하, 할아버지…?”

급작스런 상황에 엘레인과 로엔의 동공은 물론이고 목소리마저 사정없이 흔들렸다.

다행히 바로 자리를 떠난 것은 아닌지, 철컥 소리와 함께 문을 잠근 발론드 공작이 껄껄 웃었다.

“그럼 로엔. 잘해 보거라! 너라면 먼저 탈출할 수 있어!”

“무슨 소릴! 아가야. 할미는 너를 믿고 있다. 분명히 먼저 탈출하는 사람은 너일 것이야!”

“아…?”

엘레인은 벙찌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 상황을 철저히 부정하고 싶었지만, 옆에서 히끅 소리를 내며 딸꾹질을 하는 로엔이 이것이 생생한 현실임을 대신 일깨워주고 있다.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그리고 엘레인은 문득 깨달았다.

점차 멀어지는 말싸움 소리와 처음부터 은밀하게 교환하던 살벌한 눈빛들.

“이건 라네즈랑 아르닐이 서로 싸울 때랑 똑같아.”

그제야 엘레인은 알아채고 말았다.

이것은 황태후와 발론드 공작의 자존심을 건 싸움임을.

어른 싸움이 애들 싸움으로 번진 경우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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